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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자까야 Nov 21. 2021

비수구미의 추억

비수구미, 평화의 댐 , 비목 시비

강원도 화천에 비수구미 라는 숨겨진 비경 秘景이 있다.

한자로는 秘水九美 뭐 굳이 풀이하자면 비밀스럽고 물이 아름다운 아홉 계곡? 정도일 텐데 

우리의 고유한 말이라는 설도 있다.

6.25 육니오 때 남하한 화전민들이 촌락을 이루어 살던 곳이었는데 평화의 댐이 만들어지고 나서 

수몰된 작은 부락이 되었다.

한창 잘 나갈 때는 100가구 정도였다는데 지금은 노부부와 아들내외가 하는 작은 식당 과 

부근 민박 몇 집뿐이다.

수몰 이후에 그쪽으로 가려면 산위에서 걸어서 내려가거나 부근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는 

방법밖에 없다.

차로 화천군 『해산령 쉼터』라는 곳까지 가서 거기서 산 아래 비수구미 마을로 내려가는 트레킹 코스를

택했다.

-     외길이라 내려간다는 코스는 점심 먹고 다시 허걱 대며 올라와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시간 반정도 내려가니 보트가 정박할 수 있는 선착장이 나오고 오지에서 등산객 상대로 밥을 해주는

식당이 있다. 식당 운영하는 이집 늙은 부부는 나름 유명인사가 되어 텔레비전에 곧잘 나오기도 했고, 

이제는 도시의 아들 부부와 같이 식당을 한다. 

성수기때는 관광버스 로 수백명이 찾는 유명한 곳이 되었다. 지금은 늦가을이라 비수기인 관계로 

밥 먹는 사람은 별로 없다.

부근 산에서 나는 나물로만 밥을 차리는 화전민 식탁이다.

일행들은 평생 이렇게 맛있는 나물 밥은 처음이라면서 엄청 맛있게 먹었다. 

나물로만 배 터지게 먹기는 처음이었다. 

지방 여행의 즐거움 중의 하나는 그 지방 특산 막걸리를 맛보는 거다. 

화천군에서 생산된 화천 막걸리를 마신다.

서울에서 마시는 온갖 막걸리는 대부분 달다. 젊은 층을 공략하느라 인공 감미료를 넣어서 그런지 달다.

화천의 화천막걸리는 단 맛없이 아주 담백한 맛이다.

오랜만에 담백한 막걸리 맛을 봤다.

식사 후 주위를 산책하고 다시 내려온 길을 올라간다.

내려올 때 걸린 시간은 한시간 반이지만 올라갈 때는 2시간 반 이상이 걸리는 코스다.

원점 회귀 후 차를 타고 화천 읍내의 숙소로 간다.

보기 드물게 최근에 지은 전통 한옥 펜션이다. 일전에 남쪽지방 여행 갔을 때 고택 古宅 체험 숙박을 한 적이 있었는데 옛날 집을 펜션손님에게 개방하다 보니 방은 작고 우풍이 심하고 욕실이 불편했던 기억이었는데 

이번 한옥은 현대식으로 지어서 불편없이 지낼 수 있었다. 

물론 값은 일반 펜션에 비해 비싸다 만 비수기라 그리 크게 차이 나는 것은 아니었다.


화천이라는 곳은 군인이 먹여 살리는 도시다. 겨울 한 철에는 산천어 축제로 관광객이 일시에 몰리지만 그 외에는 군인의 소비가 주 인 도시다.

펜션주인이 추천해준 식당에 가니 주위의 손님들은 모두 머리가 짧은 군인들이다. 평일 저녁을 외부 식당에서 고기 구워 먹을 수 있는 건 아마 부사관 정도 레벨을 되지 않을까 싶다. 

나름 계급의 차이는 보이나 내 눈에는 고놈이 고놈이다. 이제는 상병이나 상사나, 

원 스타 ★나 쓰리 스타 ★★★나 다 고놈이 고놈처럼 보인다. 

지들끼리 야 엄청난 계급과 위계질서가 있겠다 만 우리 눈에는 그저 군인이다. 

귀밑털 송송한 여군 하사도 동료들과 저녁을 먹는다. 나이 20대 초반의 젊은이다. 

서울에 있었으면 강남의 어느 카페에서 친구들과 수다 떨 나이인데 나라를 위하여 전방에서 고생하며

 동료들과 저녁 먹는 중이려니 생각이 들었다.

갈매기 살 고기 값은 서울 강남의 반값정도다. 그나마 군인은 30% 깎아 준 단다. 

예비역은 안 깍아 주나? 실없는 농담도 해본다. 

전방 시골의 작은 읍내는 조용하다. 저녁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게 멈추어 선다. 산천어 축제라도 하면야 

밤이 뜨겁겠다 만 지금은 아무것도 없다. 

군인들 도시라 뚜레쥬르도 있고 파리바게트도 있고 각종 치킨 체인점들도 있다.


아랫목 따스한 한옥에서 자고 난 후에 평화의 댐으로 향한다.

세계 최대의 매직 트릭 아트다. 댐이 뚫여 있는것 처럼 보인다.


과거 북한에서 금강산 유역에 댐을 만들었다. 발전과 수리 조절을 위한 다목적 댐을 건설했다.

전두환 시절에 이를 공격용 댐이라고 대국민 홍보를 한다. 전쟁 시 금강산 댐을 터뜨리면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도 물에 잠긴다.

이른바 수공 水攻論이다. 국민학교 애들의 코 묻은 돈과 대기업 등쳐서 뺏은 돈으로 평화의 댐을 짓는다. 평화의 댐 성금 안내면 평화를 원치 않는 놈으로 처단될 때다. 힘없는 자의 팔목을 비틀어 나라가 운영될 때 다. 요즘은 반대로 나라가 약자에게 돈 풀기 바쁘다. 물론 나중에 다시 뺏아간다 만…



그러던 그 평화의 댐은 

1986년 전두환 대통령 시절이 였던 5공화국 시절에 북한이 북한강 끝에 금강산 댐을 세운다고 발표를 하자 북한의 수공(水攻)이 있게 되면 서울이 물바다가 된다고 국민성금을 모아 시작한 평화의 댐은 1987년에 착공해서 15개월만인 1989년 5월에 준공을 하게 됩니다. 높이 80m, 길이 450m, 저수용량 5억9천만톤이였었죠.그런데 북한에서

금강산 댐 공사를 중단하자 졸지에 우스운 꼴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거기에 정권을 잡은 김영삼 대통령이 감사원에 감사를 지시해서 감사를 벌인 결과 '정권 후반기에 시국 안정과 국면 전환을 위해 조작한 것'으로 결론이 나고 졸지에 어린아이들의 돈까지 농락한 희대의 정권사기극으로 결론이 난다. 필요 없으니 철거하자는 주장까지 제기가 됐었으나 1996년 홍수와 1999년 여름 7~800mm의 엄청난 폭우가 쏟아져 화천댐이 붕괴 위기에 몰렸었는데 평화의 댐 이 막아줘 위기를 모면하게 된다. 거기에 2002년 재개된 북한의 금강산 댐에서 쏟아낸 물이 19일만에 무려 3억5천만톤에 달해 평화의 댐이 막기는 했지만 붕괴위험에까지 이르자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댐을 보강하고 더 높이기로 한다. 

높이를 125m로 높이고 폭을 601m로 확장한 댐은 저수용량도 26억3천만톤에 달하는데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 시절인 2005년에 완공된다.


평화의 댐은 발전시설도 수리조절 기능도 없는 『만약의 하나』를 가정하고 만든 건데 대홍수때 제대로 써먹었으니 적어도 실패는 아니다. 한강 수역의 댐은 하나가 터지면 하부의 댐들은 연쇄적으로 터지는 구조를 생각하면 더욱 더 그렇다.

댐 하나를 만들려면 최소 10년이 걸린다고 한다. 입지선정, 환경평가, 설계, 시공 등등에 10년이 걸리는데 최근에는 환경론자의 반대에 부딪혀 만든 댐이 없다. 이 결과에 대한 손해는 후대의 문제가 된다.


평화의 댐 부근에 비목 시비 詩碑가 있다.

초연 硝煙은 화약 연기를 말한다.

초동 樵童은 나무하는 아이 라는 뜻이다. 礁=樵 와 같이 쓰기도 한다.




젊은 시절 군대 때 주위에 있던 나무십자가에 철모가 얹혀진 木碑를 보고 지은 시라고 한다. 애틋하다.


인근의 파로호에 가면 파로호 안보전시관이 있다. 6.25 전쟁때의 이야기를 해 놓은 곳이다.

그런 곳에 가면 빠지지 않고 있는 게 1.4후퇴 장면 사진이다. 애를 들쳐 업고 물에 빠져 가며 

후퇴하는 장면이다.

나라면 저 때 어떻게 했을까? 과연 애들 들쳐 업고 이불 보따리 짊어지고 겨울 물속을 걸으며 올 수 있을까?

생각만 해도 오스라 들고 춥다.


오는 길에 젊은 부부가 귀농해서 한다는 『화천 현장 영농학교』에 들러 TV에 출연했다는 주인공도 보고, 주인공이 추천해준 유촌식당이라는 곳에서 정통 막국수도 먹고….


서울 오는 길은 오후에 늘 막히는 걸 아는지라 일찌감치 출발해서 

트래픽을 피하고 귀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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