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도시락에 대한 추억
초등학교 시절 나와 동생들의 끼니 대부분을 챙겨주신 것은 할머니였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야근이 잦았기에 대부분의 저녁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동생들과 함께 먹을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도 낮에는 이웃집의 밭농사를 돕느라고 바빴지만 저녁에 되면 일찍 집으로 돌아오셔서 우리 3남매의 저녁을 챙겨주셨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좋아하시는 구수한 된장 찌개나 동태 찌개, 김치와 나물 밑반찬들로 저녁을 준비해 주셨다. 할머니가 반찬 투정을 하는 손자손녀들을 위해서 자주 밥상에 올려주셨던 것이 바로 계란 음식이었다. 계란찜이나 계란 프라이가 자주 저녁 밥상에 올랐다. 동네에 양계장이 있었기 때문에 계란을 구하기 쉬워서라고 생각했다. 하루는 할머니의 심부름으로 양계장에 직접 방문하여 계란을 사 온 기억이 있었다. 그날 할머니는 내 손에 돈을 쥐어주면서 한 마디를 더 해주셨다. 깨진 계란을 사 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뜻을 정확히 이해 못 했다. 그리고 양계장으로 가서 그 말을 그대로 아주머니에게 전했다. 양계장 아주머니는 구석에 있는 검은 봉지 하나를 내게 건네주셨다. 그곳에는 깨진 계란이 가득히 채워져 있었다. 가격이 저렴했기에 우리 가족은 항상 깨진 계란을 사서 음식을 해 먹었던 것이었다. 오래 두면 상하기 때문에 매일 저녁상에 할머니는 계란 음식을 올려주셨다. 아직까지 우리 가족 모두가 별 문제없는 것으로 보아서 깨진 계란은 위생상으로 문제가 없었던 듯하다.
할머니는 대부분 끼니를 챙겨주셨지만, 아침 식사와 도시락은 어머니가 항상 챙겨주셨다. 어머니는 출근하기 전에 일찍 일어나셔서 아침밥과 도시락을 챙겨주신 후에 공장으로 아침 일찍 출근을 하셨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며칠 동안 어머니가 집을 비웠던 기억이 있었다. 어머니가 몸이 좋지 않아서 입원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버지와 큰 다툼이 있어서 잠시 친구집에 머무른 듯도 하다. 어찌 되었건 그 한 주 동안 어머니는 집에 없었다. 도시락을 싸지 못하면 보통은 아버지나 어머니가 용돈을 주셔서 학교 앞 가게에서 컵라면으로 점심을 때웠다. 그러나 그날은 특별한 날이었다. 봄 소풍을 가는 날이었기 때문에 김밥을 준비해야 하는 날이었다. 어머니가 집에 없었기에 나는 할머니에게 김밥을 싸달라고 부탁했다. 할머니는 퉁명한 표정으로 알았다고 답했다. 그리고 아침에 김밥을 준비해 준다고 했다.
이윽고 소풍을 가는 날 아침.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서 할머니를 찾았다. 할머니는 내게 도시락통을 건네주셨다. 아침 일찍 준비하신 듯했다. 나는 기대 가득한 표정으로 도시락 뚜껑을 열어보았다. 그 순간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김밥 속이 전혀 없는 김밥이었다. 김과 흰밥으로만 만들어진 김밥이었다. 그 위에 소금이 뿌려져 있는 그런 김밥이었다. 어머니가 싸주시던 형형색색의 김밥과는 너무나 달랐다. 소시지도 없었고, 계란도 없었고, 시금치도 단무지도 없었다. 그냥 하얗고 검은색이 전부였다.
나는 이게 뭐냐고 짜증을 냈다. 창피해서 도저히 가져갈 수 없다고 하며 도시락을 할머니 쪽으로 툭 밀쳤다. 할머니는 씁끌한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천 원짜리 한 장을 주셨다. 그리고 그것으로 뭐라고 사 먹으라고 했다. 나는 도시락을 집에 두고 툴툴 짜증을 내면서 집을 나왔다. 그것이 할머니가 해주신 처음이자 마지막 김밥이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할머니는 그날 처음으로 김밥을 만드신 것이었다. 어머니에게는 쉬운 일이었지만 할머니에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었다. 노력했지만 어린 손자가 실망하는 것을 보고 얼마나 마음을 아프셨을까. 나에게는 작은 에피소드였지만, 할머니에게는 큰 아픔이었을 수도 있었다.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신 나의 할머니. 손주를 위해 아침 일찍 어렵게 준비하신 것도 모른 채, 그냥 짜증만 내고 집을 나선 것이 아직까지 마음에 남는다. 지금에서야 깨닫게 된 고맙고 미안한 기억이다.
'할머니, 사랑합니다. 어린 시절 저에게 정말 큰 힘이 되었습니다. '
이제서야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