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미콘 공장과 46제
소작농의 의미를 알게 된 날
어린 시절 우리 집은 벼농사를 지었다. 고향인 역말에서도 그랬고, 새롭게 이사 온 말우물에서도 그랬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봄이 되면 마른 논바닥에 물을 채웠고 어린 모를 논에 옮겨 심는 모내기를 동네 어르신들과 함께 마무리하면 그 해 농사가 시작되었다. 모내기를 하는 날이면 할머니와 어머니는 일꾼들 아침 새참과 점심을 준비하시느라고 하루 종일 바빴다. 나 또한 그날은 하루종일 집안일을 도왔다. 아버지를 따라 논으로 가서 막걸리나 농기구들을 나르는 잔심부름을 했고, 점심 때는 집으로 와서 새참 나르는 것을 도왔다.
봄이 지나서 폭우가 쏟아지는 장마철이 되면 아버지는 물이 넘쳐서 눈뚝이 무너질까 봐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논으로 향하셨다. 그렇게 고달픈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면 황금 들녘에 벼 이삭이 무르익으면서 수확을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비 오는 날을 피해서 벼를 베고 탈곡을 하고. 그날 역시 하루 종일 집안일을 도울 수밖에 없었다. 벼를 나르고 볏단 정리를 하고, 가끔씩은 쌀가마니를 정미소로 나르는 것을 돕기도 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분명 진정한 농사꾼이셨다. 그 드넓은 논에서 1년 내내 땀을 흘리며 농사를 지으시는 모습이 너무나 존경스러웠다. 하지만 그 땀 뒤에 숨어있는 아픔도 내 나이 10살 즈음에 알게 되었다.
초등학교 4학년 어느 일요일. 나는 부모님과 함께 새로운 우리 논으로 향했다. 새술막이라는 국도 1호선 옆에 자리 잡은 마을. 그 옆에 위치한 레미콘 공장 뒤에 숨겨진 일곱 마지기 정도의 아담한 땅이었다. 우리 가족이 농사지기에 만만치 않은 규모의 땅이었다. 레미콘 공장이 있어서 모래 놀이하기가 좋았고, 마치 새둥지처럼 포근하게 자리 잡은 곳이어서 동생들과 함께 놀기 좋은 곳이었다. 이런 곳이 우리 땅이라는 것이 너무나 기뻤다. 아버지는 잠시 공장의 구매 식당으로 들어가자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어떤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연히 나는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46 제로 하시죠."
"네 알았어요. 그렇게 하죠"
아버지는 작은 종이에 도장을 찍었다. 처음 듣는 사육제(46제)라는 얘기. 그것이 무엇이냐고 옆의 어머니에게 물으니 100 가마를 수확하면 60 가마를 우리가 갖고, 40 가마를 주인에게 준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이해가 안 되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뭔가 이해가 되는 느낌이랄까.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가족은 우리 땅에서 농사를 짓는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 착각이었다. 어머니에게 물으니 내가 어린 시절부터 농사를 짓던 모든 곳이 땅주인에게 빌려서 농사를 지어온 것이라고 했다. 우리 집은 남의 땅을 빌려서 농사를 짓는 말 그대로 소작농이었다.
어린 나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지주와 소작농. 태어나서 내가 처음으로 경험한 바로 돈으로 만든 계급이었다.
순수한 어린이의 마음에 '가난'이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느껴졌다. 그러면서 지금껏 내게 있었던 모든 일들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뭔가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때부터 팍팍한 부모님의 삶이 어린 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고된 농사와 함께 공장 근로자로 일하시는 이유를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공장에서, 공사장에서 주말도 없이 일을 해야지만 자식들 교육을 시킬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 팍팍한 삶이 상당기간 이어졌다. 어찌 보면 부모님들은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는 듯하다.
레미콘 공장에서 빌린 땅은 나와 내 동생들이 학교를 다니는데 큰 역할을 했다. 아버지는 날씨가 좋은 날에는 공사장에서 일하시고 비 오는 날에 그곳으로 가셔서 농사를 지으셨다. 그렇게 밤낮없이 일을 하셨다. 가을이면 수확한 쌀 중에서 정확히 40%는 레미콘 공장의 구매 식당에 보냈다. 공장 근로자들의 든든한 한 끼 식사가 되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공장 아저씨들은 가끔씩 우리 농사를 도와주시기도 했다. 우리 가족은 그곳에 원두막을 지어서 여름을 즐기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또 하나의 행복한 추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