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마을이 풍요로워지는 계절이었다. 과수원에는 사과와 포도향이 가득했고 마을 앞의 벌판은 황금색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마을을 감싸고 있는 아담한 산들도 초록의 옷을 벗고 황갈색으로 서서히 변하는 시간. 시골 아이들에게는 산과 들의 모든 곳이 최고의 놀이터였다. 어딜 가도 할 일이 많고 웃음꽃이 넘치는 그런 계절이 바로 가을이었다.
가을이 되면 나와 친구들은 나무들이 가득한 동네 인근의 산으로 향했다. 상수리를 비롯한 다양한 참나무 열매를 얻기 위해서였다. 보통은 나무 열매가 무르익고 바람이 불면서 우르르 바닥으로 상수리가 떨어져 있었고 편하게 수풀이 헤쳐가면서 열매를 주우면 되었다. 하지만 열매가 떨어지지 않은 나무들은 강한 충격을 주어서 나무를 흔들어야만 열매를 얻을 수 있었다. 근처의 큰 돌을 가지고 머리 위로 들어 올려서 강하게 나무를 내리치는 방법이 있었고, 때로는 멀리에서 달려와서 강하게 참나무를 발로 차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면 후두두둑하고 하늘에서 상수리 비가 내리곤 했다. 떨어지는 열매의 충격을 피하기 위해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지고 열매가 떨어지는 바닥을 살피며 후다닥 열매를 주웠다. 이렇게 가을이 되면 우리 동네 아이들은 어김없이 상수리나무들을 습격(?)했다. 다양한 참나무 열매들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은 바로 상수리 열매. 모양이 다른 열매들에 비해서 동글동글하기에 구슬치기에 딱인 열매였기 때문이었다. 앞산과 뒷산을 돌면서 오후 내내 열매를 주으면 두 주머니 가득하게 상수리나 굴참나무 열매를 얻을 수 있었다. (지금에서야 아래와 같은 다양한 참나무 열매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양한 참나무 열매들 (자료:종로마을N)
가끔씩 늦은 오후에 참나무 숲으로 가면 나무에 앉아서 액즙을 먹는 사슴벌레를 만나기도 했다. 친구들은 사슴벌레를 잡아서 작은 통에 넣고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자랑하기도 했다. 하지만 운이 좋지 않은 날에는 갑작스럽게 풀 숲에서 나타나는 뱀을 만나기도 했다. 징그러운 뱀을 만나면 모두가 큰 소리를 치면서 상수리 열매를 팽개치고 '걸음아 나 살려라'하면서 숲 속을 빠져나오기도 했다.
그렇게 열심히 모은 상수리 열매로 동네 아이들은 구슬치기를 했다.
우선 마당이 넓은 집 앞에 모두가 모였다. 담벼락에 상수리가 구르기 편하도록 판자를 대고 상수리를 굴렸다. 가장 많이 굴러간 상수리가 선공. 뒤에 있는 상수리를 강하게 맞추면 된다. 제대로 맞춰서 멀리 벌이진 거리만큼 상대편에게 상수리를 받았다. 맞추지 못하면 다시 상수리를 굴렸다. 멀리 가는 상수리가 공격권을 가지고 있기에 잘 굴러가는, 둥근 모양의 상수리를 모두가 갖고 싶어 했다. 동네에서 상수리 치기를 제일 잘하는 형이 하나 있었는데 운이 좋은 날에는 검은 봉지로 한가득 상수리를 따가기도 했다. 상수리를 가지고 홀짝 게임을 할 때도 있고 동그라미 안에 상수리를 가득넣고 멀리에서 열매를 던져서 밖으로 내보내는 것을 가져가는 게임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상수리는 구슬을 보기 힘든 시골마을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 놀이기구였다.
가을 내내 즐기던 상수리 구슬치기가 식상해질 무렵이 되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한 사람이 있었다.상수리 열매를 구매하기 위해서 마을을 방문하는 상인이었다. 그분은 시골 동네를 돌면서 참나무 열매를 구매하셨고, 그것으로 묵을 만들어서 시장에서 판매한다고 했다. 최소 한 말 단위 기준으로 상수리를 구매하셨고, 한 되 단위로는 엿같은 간식으로 교환을 해주셨다. 보통은 가을이 끝날 즈음에는 우리 집에는 보통 1말 정도의 상수리가 보관되어 있었다. 몇 천 원의 가격으로 상수리를 팔아서 용돈으로 쓰기도 했다.
어린 시절, 상수리 열매는 나에게 '마당 쓸고 돈 줍고', 구슬치기도 하고 돈도 벌 수 있는 특별한 가을의 선물이었다. 요즘도 산에 올라서 참나무를 만나면 그날의 추억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