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새로운 시작을 꿈꾸며 떠난 여행
힘들고 답답할 때마다 떠나는 곳이 있다. 바로 태백산이다. 백두대간 중심에 있는 태백산은 지친 나에게 기운을 주는 특별한 힐링 충전소다.
오래 전 신라시대부터 태백산을 신성한 산(神山)으로 여겨져서 국가의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왔고, 나 또한 그런 신비함과 겨울 눈꽃의 아름다움에 반해서 거의 매년 이곳을 찾고 있다.
올해 2월에도 몸과 마음이 지쳐있는 나를 달래기 위해 다시 태백을 찾았다.
아침 일찍 태백산 유일사 탐방로 입구에 도착했다. 시계를 보니 오전 6시 30분. 사람들이 몰리는 토요일이기에 빨리 움직여야 했다. 그렇지 못하면 눈꽃을 즐기기 위해 이곳을 찾은 많은 탐방객들로 인해서 줄을 서서 올라가야 하는 최악(?)의 사태가 맞을 수도 있었다. 몇 년 전 경험했던 1월의 악몽이었다. 사람들에 밀려서 오르고 밀려서 내려왔던 좋지 못한 산행의 기억이었다. 그래서 도착하자마자 등산 준비를 서둘렀다. 미끄러지지 않도록 아이젠을 등산화에 단단히 묶고 등산 스틱을 챙긴 후에 정확히 6시 50분에 등산을 시작했다.
유일사 코스는 태백산 정상에 오르는 가장 빠른 길이다. 등산 거리는 정확히 4km. 빨리 오르면 천제단까지 2시간 정도. 천천히 풍경을 즐기며 올라도 2시간 30분이면 오를 수 있는 코스였기에 내가 가장 즐기는 길이기도 했다.
오랜만에 산에 올라서 그럴까? 몸이 조금은 무거웠다. 최근 늘어난 몸무게가 원인이었다. 다이어트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욕심부리지 않고 그냥 천천히, 천천히 한 걸음씩 발길을 옮겼다. 처음에는 발걸음이 무거워서 하얀 설원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30분 정도 산행 속도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니 태백의 하얀 눈이 보이기 시작했다. 조용히 음악을 들으면서 소복소복 눈길을 헤쳐나갔다. 아이젠 아래로 밟히는 푹신한 눈길의 느낌이 상상 그 이상으로 좋았다. 마치 어린아이가 되어 눈길을 즐기는 그런 기분이었다. 이른 시간이라서 그런지 1시간 정도 걸으니 산길에는 오롯이 나 혼자뿐이었다.
오랜만에 혼자만의 시간이었다. 직장 상사도 없고 가족들도 없었다. 거대한 눈꽃 세상이 오직 나만 존재했다. 하얀 겨울왕국 속에서 즐기는 생각여행. 바로 지금이었다. 조용히 흘러나오는 오래된 발라드 음악을 들으면서 앞으로 앞으로 나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저 멀리 뭔가 보이기 시작했다. 중간 목표지인 유일사 입구였다. 시계를 보니 8시 20분 정도. 시나브로 1시간 반 정도를 걸어왔다. 사실 예전에는 1시간 정도면 가능했는데, 이제 예전만큼 빠르지는 못한 듯했다. 정말 쳬력이 예전같지 않았다.
유일사 입구를 지나니 그때부터 본격적인 산행길이 펼쳐졌다. 큰길이 사라지고 좁은 산길이 이어지는 것이었다. 조금 더 오르다 보니 저 멀리 함백산이 보였다. 태백산 건너편에 있는 또 하나의 멋진 백두대간의 산이었다. 이때부터 조금씩 탁 트인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유일사 입구에서 15분 정도를 더 오르니 이정표가 보였는데 천제단까지 1.4km 남았다는 것. 그렇지만 고개를 들어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가파른 계단길이 나왔다. 이제 마지막 고비가 남아있었다.
그냥 바닥만 보고 걷고 또 걸었다. 거친 숨이 이어졌다. 오르고 쉬고, 오르고 쉬고 반복했다.
그냥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아무생각없이 걸었다. 무념무상 고난의 시간이었다.
어느 순간 경사도가 완만해지면서 눈앞에 멋진 나무 한 그루가 나타났다.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을 산다는 고목들이었다. 태백산의 최고의 풍경 '고목 지대'에 도착한 것이었다. 1년여 만에 만난 고목 친구들을 보니 반갑다는 인삿말과 함께 "태백산에 역시 잘 왔어"라는 혼잣말이 절로 나왔다. 그제서야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볼 수 있었다. 태백의 겨울에만 볼 수 있는 진귀한, 대한민국 명품 풍광이었다. 핸드폰을 꺼내서 하얀 입김을 내며 열심히 사진을 담았다. 올해 얻은 최고의 명장면들이었다.
고목 지대를 지나니 서서히 경사가 완만해지면서 다시 기운이 나기 시작했다.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룰루랄라 즐겨부르던 노래가 나왔다.
잠시 후 9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장군봉에 오를 수 있었다. 눈 내린 풍경은 역시 한폭의 동양화와 같았다. 내가 그림 속 주인공이 된 듯한 느낌. 이제 조금만 걸어가면 천제단이 나온다. 남은 힘을 다해서 다시 움직였다. 장군봉에서 천제단까지는 걸어서 10분이다. 끝이 보인다.
장군봉을 지나니 저 멀리 천제단이 보였다. 장군봉과 천제단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태백산 산행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치를 지닌 곳이다. 백두대간을 한 눈에 품을 수 있기에 나는 태백에 오른다. 그 능선의 달콤한 경치를 즐기며 천천히 천천히 천제단으로 향했다.
저 멀리 오늘의 종착점 천제단이 보였다. 환한 웃음이 나왔다. '다 왔구나' 또 한 번의 힘든 산행이 끝나는 과정. 진심으로행복했다. 2시간 30분간의 긴 산행을 마치고 정상에 오른 기분. 최고였다. 그동안의 모든 근심이 사라졌다. 천제단 앞에 서서 공손한 마음가짐으로 기도를 했다. 나와 가족들, 그리고 내 주위 모든 이들의 행복을 기원했다. 그리고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려서 태백의 기를 받았다. 뭔가 원기를 충전한 듯한 기분이었다.
바로 앞에 있는 태백산 기념비 앞에서 기념 셀카를 한 장 찍고 멍하니 산 아래 풍경을 즐겼다. 아름다웠다. 그리고 눈을 감고 지금 이 순간을 즐겼다. 내가 처음 태백산을 올랐던 것은 군대 휴가 때였다. 태백의 일출을 보기 위해서 새벽 4시에 산행을 시작해서 정상에 올랐지만 날씨가 흐려서 일출을 볼 수 없었다. 그리고 다시 일출을 보기 위해서 제대 후에 다시 이곳을 찾았다. 그때 바라본 일출 풍경이 너무 좋아서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태백산을 찾는다.
산행하며 에너지를 다 쏟아서 그런지 살짝 배가 고팠다. 바람이 덜 부는 곳에 찾아서 따뜻한 물에 믹스 커피를 풀어서 마셨다. 한 마디로 끝내줬다. 그리고 준비한 김밥 한 줄을 먹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김밥이었다. 배가 부르니 세상 근심이 모두 사라졌다. 태백에서 기를 받고 배도 채웠으니 이제 다시 내려가야 할 시간. 아쉬움 때문인지 천제단을 바로 보며 뒤로 걸었다. 뒤로 뒤로.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하산길을 시작했다.
내려가는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다. 다시 장군봉과 고목지대를 건너서 유일사 쪽으로 하산을 시작했다. 올라올 때는 그렇게 어렵게 느껴지더니 내려가는 길은 너무나 수월했다. 우리 삶도 그런 것이 아닐지. 기분 때문인지 때로는 달려서 내려갈 정도로 몸은 가벼웠다. 다시 에너지 충전이 된 기분이었다.
올라보면서 즐기지 못한 풍경들을 다시 카메라에 담았다. 태백이 내게 선물해준 인생 최고의 사진을 건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산 아래 반대편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단체관광이 시작된 듯했다. 역시 예상대로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천천히 산을 오르고 있었다. 지친 그들에게 하산하는 나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오전 11시 정도가 되어서 나는 유일사 입구에 다시 돌아왔다. 오르는 데는 약 2시간 40분 걸렸는데, 내려오는 데는 겨우 1시간 20분. 정확히 절반이었다. 왕복 4시간 만에 즐긴 태백산 산행. 행복했다. 그리고 지친 내 삶에 따뜻한 위로가 되었고 새로운 도약의 기운을 받을 수 있었다.
답답한 일상을 떠나서 신성한 백두대간의 정기를 받고 싶다면 태백산 여행을 추천한다. 깊은 여운이 남을 수 있는 특별한 추억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