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의 특별한 여름휴가
부모님은 휴일이 없었다.
중학교 시절 아버지는 투잡족이셨다. 날씨가 맑은 날에는 아침 일찍 공사장으로 향하셨고, 비가 와서 공사장에 못 나가실 때에는 소작하는 빌린 논으로 향하셨다. 봄부터 가을까지 농번기에는 정말 쉬는 날이 하루도 없는 나의 아버지였다. 그 시절 어머니도 공장 근로자였다. 매일매일 아침 7시 30분에 벽지 공장으로 출근하여 보통은 밤 10시 야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셨다. 주말에는 밀린 빨래와 음식을 하시고, 오후에는 아버지와 함께 논으로 향하셔서 일을 도우셨다. 끝없이 이어지는 노동의 연속. 그래서 우리 가족들에게는 주말이 없었다. 바쁜 농번기에는 부모님을 따라서 논으로 향하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친구들이 즐기는 달콤한 휴식의 주말과는 달랐다. 그래서일까 나는 '농사'라는 것이 지극지극하게 싫었다. 흘린 땀에 비해서 노동의 대가가 너무나 작았기 때문이었다. 힘들게 일해도 지주에게 30~40%를 주고 나면 정말 남는 것이 없었다.
아버지가 농사를 지어야 했기에 여름에는 휴가를 떠날 수가 없었다. 친구들은 여름 방학이면 부모님들과 함께 물 맑은 계곡이나 푸른 바다로 떠났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정말 사치였다. 수돗가에서 등목을 하거나 큰 고무통에 물을 받아서 물장난을 하는 것이 피서의 전부였다. 하지만 나와 동생들이 10대 청소년기에 들어서면서 그런 불만은 더욱 커져갔다. "다른 친구들 피서 가는데 우리도 가고 싶어", "우리도 가족여행 가자", "시원한 계곡 한 번 가보는 게 소원이에요" 나와 동생들은 매일매일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애처로운 표정으로 부탁을 했다. 부모님도 더 이상 버티기가 어려웠는지 결국 당일치기로 인근의 계곡으로 여행을 가기로 약속을 해주셨다.
중학교 3학년 여름 방학. 드디어 내 생애 처음으로 가족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부모님과 나, 여동생들이 함께 떠나는 첫 여행이었다. 우리의 목적지는 북면 계곡이었다. 아침 일찍 40분 정도 버스를 타고 천안 시내의 버스 정류장으로 나온 후에 다시 북면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탔다. 가족 한 사람이 하나씩 짐을 들고 시내버스를 옮겨 탔다. 다시 1시간이 더 걸렸다. 오전 11시 정도가 되어서 북면 계곡에 도착했다. 정확한 도착지를 정하지 않았기에 버스를 타고 가다가 아버지 마음에 드는 장소에서 벨을 누르고 우르르 짐을 들고 내렸다.
버스 정류장에 내려서 계곡 방향으로 걸어갔다. 계곡 앞에 다다랐을 때, 나는 실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상상했던 피서지가 아니었다. 상류 쪽의 맑은 계곡이 아닌 민가가 있는 중간의 하천. 주변에는 밭이 있었고 하천 주위에는 나무가 없었다. 저 멀리에는 축사도 있었다. 주변에 물놀이를 즐기는 사람은 우리 가족뿐이었다.
아버지는 괜찮다며 집에서 챙겨운 돗자리 몇 개를 연결해서 하천 변에 천막을 만들어주셨다. 햇빛을 막는 그늘막으로 충분해 보였다. 텐트는 없었지만 아버지는 주변에 있는 나무와 돌을 이용하게 멋진 우리 가족만의 캠핑존을 만들어주셨다. 아버지의 손재주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어진 삼겹살 파티. 물가에서 처음으로 즐기는 고기파티.
내가 먹어본 삼겹살 중에 가장 맛있는 고기였다. 점심을 먹고 우리 가족은 개울로 나갔다. 아버지는 그물로 작은 물고기를 잡으셨고 어머니는 다리 밑으로 들어가서 개울에 발을 담그고 시원한 수박을 즐기셨다. 나와 동생들도 계곡 여기저기를 돌면서 소박한 물놀이를 즐겼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우리 가족 모두는 환한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정말 행복했다.
오후 4시가 넘은 시각에 다시 짐을 챙겨서 천안 시내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 우리 가족은 천안 시내에서 특별한 저녁을 즐겼다. 삼도상가 건너편 2층에 있는 중국집. 자장면과 가락국수, 짬뽕으로 즐기는 화려한 저녁 외식이었다. 하루 종일 물놀이를 해서 그럴까? 어떤 음식보다 맛있는 최고의 자장면이었다. 아직까지도 그 맛이 잊히지 않는다.
우리 가족의 첫 여행. 중학교 시절 내가 기억하는 최고의 추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