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선택의 시간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중학교 3학년. 나는 생애 처음으로 학원이라는 곳을 등록했다. 학교 친구들이 중학교에 들어오면서 과외를 하거나 학원을 다녔지만 나는 부모님께 부담이 될까 봐 학원을 다니지 못했다. 하지만 중학교 3학년이 되면서 친구들 모두가 입시 학원으로 향했고 나 또한 그 친구들의 권유로 어쩔 수 없이 단과 학원을 등록하게 되었다. 여러 과목을 듣고 싶었지만 여유가 없었기에 오직 수학 한 과목만을 수강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독서실을 한두 달 정도 등록하여 부족한 공부를 시작하기로 했다.
나는 학교 일과가 끝나면 독서실에서 한 시간 공부를 하고 바로 옆의 학원에서 수학 강의를 들었다. 학원을 마치면 늦은 8시 정도가 되었고 다시 자전거를 타고 어두운 시골길을 달려서 집으로 돌아왔다. 천안 시내를 벗어나면 어두운 비포장길이 나왔고 논과 밭이 이어지는 신작로를 자전거 타고 달려야 했다. 가끔 자동차가 지나가면 뿌연 먼지가 날리며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동네 입구에는 장고개라는 언덕이 있었는데 산 전체가 무덤으로 덮인 곳이었다. 이곳을 지날 때면 그냥 앞만 보고 달렸다. 고갯길이라서 숨이 거칠어졌지만 바로 옆의 수많은 무덤이 무서워서 자전거에서 내릴 수는 없었다. 집에 돌아오면 온몸이 땀범벅이 되었다. 이렇게 처음으로 열심히 공부를 하면서 중학교 3학년 1학기를 보냈다. 수학 덕분인지 다행히 성적은 시나브로 향상되었다. 학급의 53명 중에 1등과 2등은 아니었지만 3~4등 정도는 유지하는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다.
2학기가 시작되면서 학교 선택을 위한 담임 선생님과의 면담이 시작되었다. 국사를 담당하는 3학년 담임선생님은 작년 선생님과는 다르게 완벽한 현실주의자였다. 원칙보다는 세상 변화에 익숙하신, 사욕을 챙기시고 기회를 중시여기는 그런 분이셨다. 면담에 시작된 지 며칠 후에 나의 차례가 되었다. 담임선생님은 조심스럽게 내게 물었다. "공업고등학교 지원해 보면 어떨까?" 선생님은 우리 집 사정이 녹록지 않으니 일찍 취업할 수 있는 공업고등학교를 고민해 보라는 것이었다. 3년 장학금을 준다는 조건이었다. 내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제안. 사실 큰 충격이었다. 나와 비슷한 성적의 친구들에게는 전혀 제안하지 않는 학교였다. 나는 바로 싫다고 말했다. "저는 과학자가 꿈이라서 인문계를 가고 싶습니다"라고 언급했다. 선생님은 내 시선을 피하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시 후에 또 다른 제안을 했다. "천안이 아닌 온양이나 목천에 있는 학교는 어때? 여기도 3년 장학금과 기숙사가 제공되는데"라고 제안했다. 두 학교 모두 지난해 지원자가 적어서 미달이 된 학교였다. 역시 내가 가고 싶은 곳이 아니었다. 특수 목적고도 아니고, 사립고도 아니고 천안시내의 일반 고등학교도 아니고. 상상하지 않았던 엉뚱한 고등학교만을 제안해 주셨다.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솔직히 마음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나는 부모님과 고민해 보겠다며 면담을 마쳤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서 나는 어머니에게 선생님과의 면담 이야기를 건넸다. 그날밤은 참으로 길게 느껴졌다.
며칠 후에 결론이 정해졌다. 선생님은 어머니 면담을 요청하셨고, 어머니는 벽지 공장에 휴가를 내고 학교를 찾으셨다. 어머니는 천안에 있는 고등학교 지원한다는 의지를 강하게 피력하셨고 결국 선생님도 그 뜻을 따르셨다.
인문계와 실업계 사이에서 결국 천안의 일반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그 때 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내 길은 내가 결정하고 내가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