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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펭귄 Dec 08. 2020

슬기로운 간병생활 1탄: 의사소통 편

눈빛만 봐도 나는 알 수가 있어

 

  안녕하세요!

  루게릭병, 혹은 누워서 지내시거나 의사소통이 어려운 환자를 간병하고 계신 분들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으로 적어보는 슬기로운 간병생활 1탄, '루게릭 환자와의 의사소통' 편입니다 :-)





  엄마가 말을 하지 못하게 되리라고는 정말 상상하지 못했어요. 인공호흡기를 착용하더라도 말은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워낙에 말을 하지 못할 정도로 기운이 없을 때도 있고, 무엇보다 인공호흡기에서 나는 소음 때문에 가뜩이나 작은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 일이 많았죠.

  얼추 예상은 했었지만, 말을 하지 못한다는 건 정말 예상을 뛰어넘는 어려움이었어요. 말을 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가족 외에 다른 사람과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해졌고, 그에 따라 보호자인 가족들의 역할이 더 중요해졌습니다.  루게릭 환자의 경우에는 특이하게도 몸을 전혀 쓰지 못하는 대신 의식은 매우 또렷하기 때문에 오직 '눈'을 깜박이는 행위, 그리고 간단하게 '응, 으응'하는 소리 정도로만 의사 표현을 할 수 있습니다.

  혹은 '밥', '기저귀' 등 자주 쓰고 간단한 단어의 경우는 직접 말하기도 합니다.


1. 눈: 한 번 깜박이면 긍정, 두 번 깜박이면 부정을 의미합니다. 혹은 눈짓을 통해 이곳저곳을 가리킴으로써 의사를 표시하기도 합니다. 아래쪽을 쳐다보면 엉덩이 쪽에 있는 방석을 교체해달라던지 하는 식으로요! 이외에 눈과 관련해 환자와 약속한 다른 의사표현을 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와 엄마의 약속은, 눈을 질끈 감으면 저에게 잠을 자라고 말하는 것이에요.


  그러나 저런 간단한 말과 소리들, 그리고 눈짓만으로는 루게릭 환자와 대화를 나누기에는 당연히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보통의 루게릭 환우와 간병인들은 '글자판'이라는 것을 사용하고 있어요. 처음에 엄마가 인공호흡기를 착용하고 단체 멘붕에 빠지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알아보던 중에 글자판의 존재를 알게 되었죠.



기존의 글자판
한글입력기 전문가 서영환님이 개발하신 글자판




  그런데, 이 글자판을 직접 사용해 보려고 하니 처음에는 약간 어렵게 느껴졌어요. 익숙해지면 더 편할 수도 있겠지만 당장 소통이 되지 않다 보니 급한 마음에 제가 직접 간단하게 글자판을 만들었답니다.


필요하신 분들은 가져가셔서 사용하세요 :D


  이 글자판은 굉장히 직관적인 구조예요. 먼저, 원하는 자음부터 이야기합니다. 왼쪽에 보이는 숫자에 해당하는 수만큼 눈을 깜박이면 그 행을 읽습니다.


  '텔레비전'이라는 단어를 말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해 볼게요.


- 환자: ('ㅌ'은 두 번째 줄에 있는 자음이므로, 눈을 두 번 깜박임)

- 간병인: (두 번째 줄의 자음을 읽습니다) ㅇ, ㅈ, ㅊ, ㅋ, ㅌ...

- 환자: (원하는 자음이 나오면 눈을 깜박이거나 소리를 냅니다.)

- 간병인: 해당하는 자음을 메모합니다.


  그렇게 하고 나면 초성 퀴즈처럼 자음의 나열이 완성됩니다.

  예를 들어 '텔레비전'을 말하고 싶다면 'ㅌㄹㅂㅈ'이라고 하면 되겠죠?


  이 단계에서 한번 소리 내어 읽어보면 간단한 단어는 맞출 수도 있고, 초성만 봐서 모르겠다면 모음과 받침을 진행합니다. 순서는 자음-> 모음-> 받침 순입니다.   

  

  텔레비전의 '텔'이라는 글자를 말하고 싶은 경우 이미 ㅌ이라는 자음은 알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자음과 같은 방법으로 모음을 수집합니다.


- 환자: ('ㅔ'는 두 번째 줄에 있는 모음이므로, 눈을 두 번 깜박임)

- 간병인: ㅡ, ㅣ, ㅐ, ㅔ...

- 환자: (원하는 'ㅔ'를 읽을 때 눈을 깜박임)

- 간병인: '테'?


   환자가 맞다고 하면 받침이 있는지 물어보고, 있다고 할 경우 받침까지 마저 진행합니다.


- 환자: ('ㄹ'은 첫 번째 줄에 있는 자음이므로, 눈을 한 번 깜박임)

- 간병인: ㄱ, ㄴ, ㄷ, ㄹ...

- 환자: (원하는 'ㄹ'을 읽을 때 눈을 깜박임)

- 간병인: 텔!


  이런 방식으로 하다 보면 어느새 '텔레비전'이 완성되겠죠?

  이렇게만 보면 다소 어려워 보일 수도 있지만, 익숙해지면 이 방식보다 편한 게 없더라고요. 더불어, 우리가 흔히 아는 '가, 나, 다...' 순으로 배열했기 때문에 환자와 보호자가 이 순서만 외우게 된다면 자음판 없이도 빠르게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저와 엄마는 오랜 반복으로 인해 이 글자판을 다 외우고 있어서 이제는 어디서든 글자판 없이도 이 방식을 통해서 소통하고 있답니다.


  그래도 실물이 있으면 편리하기 때문에, 환자의 시선이 닿는 곳에 이렇게 붙여두면 좋아요!


¹붙이는 칠판은 다이소(1,000원)

  덕분에 핸드폰 메모장에는 늘 초성 퀴즈가 가득해요.





3. 관용구 단어장


  글자판을 사용하고 있긴 하지만 이 글자판을 익숙하고 빠르게 사용하지 못하는 가족들을 위해, 그리고 자주 쓰는 단어의 경우 간편하게 소통하기 위해 자주 쓰는 단어들을 모아둔 단어장을 사용합니다. 방법은 아주 간단해요. 단어장을 보여주고 원하는 단어가 어떤 카테고리에 있는지 물어봅니다.


  "기타? 몸? 자세? 온도?"


  '기타' 카테고리에 있다고 한다면 윗줄인지 중간인지 아랫줄에 있는지 다시 물어본 뒤 그 줄을 읽으며 원하는 단어를 알아내면 됩니다.


  각자의 상황에 맞춰 단어장을 만들어두면 편리해요.


  



  여기까지 슬기로운 간병생활 1탄, '의사소통' 편을 마치려고 해요 :)


  인공호흡기를 착용하고 엄마가 말을 못 하게 되었을 때는 정말 멘붕이고 막막하기도 했었는데요. 글을 쓰다 보니 그래도 이렇게 여러 가지 수단을 통해서 엄마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게 참 다행이라고 생각되네요. 예전처럼 수다를 떨 순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필요한 것을 이야기하고 가끔은 수다 떠는 기분이 나기도 해서(?) 큰 어려움 없이 의사소통을 하고 있어요.

 처음에는 다소 어려울 수 있지만 익숙해진다면 긴 문장도 말할 수 있어 어느 정도의 대화도 가능해요. 간병생활 자체가 연습의 반복이기 때문에, 잘 활용하셔서 금방 익숙해지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다음에는 석션, 위루관 관리, 도뇨하는 방법 등 또 어떤 것이 필요할지 생각해 보고 필요한 글로 찾아올게요.


  우리 모두의

  슬기로운 간병생활을 응원합니다 :D


엄마는 늘 이런 얘기를 하곤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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