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태어난 지 60일이 되었다. 뱃속에 아이가 생긴 것이 뜻밖이었던 것처럼 지난 60일도 차마 짐작하지 못한 폭풍 같은 시간이었다. 나는 자주 웃고 자주 울었다. 더러 천국에 있기도 하고, 가끔은 절대 빠져나가지 못할 악몽의 구렁텅이에 갇힌 것 같았다.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건 나만이 아니었다.
조리원에서 퇴소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남편은 한껏 들떠 있었다.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기러기 부부로 지내느라 오랜만에 만난 아내에, 초면이지만 거푸집처럼 닮은 분신 같은 아이까지- 그러나 남편도 나도 단 몇 시간 뒤의 미래는 짐작도 못할 일이었다. 우리 둘은 3일 동안 말을 잃었고 웃음을 잃었다. 병원 신생아실에서, 조리원 모자동실에서 보았던 천사 같던 아기는 없었다. 우왕좌왕하며 첫날밤을 보내고 낮, 밤을 교대해가며 아이를 돌봤다. 자주 서로의 등을 쓸어내리며 격려했다. 일주일 뒤 다시 일터로 돌아가는 남편은 더욱 최선을 다했다. 나보다 멘탈 형편이 좀 더 나았던 남편은 살림을 쓸고 닦고 내가 손 가는 곳이 없도록 애써주었다.
부모가 처음인 우리는 3시간마다 분유를 줘도 괜찮을지, 발은 왜 이렇게 차가운지 모든 것이 걱정스럽다. 밤새 너의 소리에 잠에서 깼고, 새벽 3시부터는 아예 잠을 자지 못했다. 계속 일을 하다 온 남편은 더 피곤했을 거다. 모든 것에 예민해진 나 때문에 내 기분까지 신경 쓰게 해서 미안해진다. - D+22 일기 중
남편이 일터로 돌아가고, 나는 아이와 친정에 남았다. 가만히 있어도 눈물이 줄줄 흘러 강을 이루고, 콧물은 바다를 이뤘다. 아이를 보고 있으면 두려움이 밀려오고, 나의 모자람에 한없이 작아졌다. 새벽녘에 아이를 겨우 잠재우고 옆에 누우면 만감이 교차했다. 빗지도 못한 머리와 후줄한 잠옷을 입고 얼굴이 퉁퉁 부은 채로 아이를 안고 있으면 잠에서 깬 친정 식구들이 거실로 나와 나를 다독여주고 아이를 받아 쉴 수 있게 해 주었다. 번번이 찾아오던 산후우울증은 친정 식구들 덕분에 극복이 가능했다. 아이 한 명을 길러내는데 다섯 식구가 힘을 보탰다. 그 덕에 나는 밥도 먹고 잠도 자고 샤워도 할 수 있었다.
먹는 양이 들쑥날쑥해서 버리는 분유가 만만찮다. 옹알이도 하고 가끔은 웃기도 한다. 어떨 때는 무한 예쁘고, 어떨 때는 무한 밉다. 먹이고, 놀다가, 다시 한참을 우는 아이를 달래서 재우는 무한 루틴이 지친다. 엄마랑 동생이 있어서 잠도 자고 제정신으로 버티고 있는 것 같다. 이 아이가 나중에 커서 가족의 고마움을 알았으면 좋겠다. - D+53 일기 중
나는 아기를 몰랐다. 하루 종일 잠만 자는 날도, 정해진 양보다 훨씬 먹지 않는 날도 있었다. 30일이 되기 전 아기는 자주 토했고 용쓰기를 했다. 그럴 수도 있는 일이고, 많은 아기들도 그렇다고 해서 마음은 불안해도 지켜보기만 했다. 33일째 되던 날 아침, 나는 축 늘어진 채 토하는 아기를 품에 안고 119 구급차에 몸을 실었다. 아기의 상태도 모르는 형편없는 엄마라는 생각에 자꾸만 눈물이 났다. 막상 구급차에 올랐을 때 아기는 품에 안겨 꿀잠을 잤다.
119 대원들은 친절했고, 대응이 빨랐다.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119에 전화를 걸어 아이 상태를 말하니 상담이 가능한 곳으로 연결을 해주었다. 아기 상태를 설명하자 바로 구급차를 보내주겠다고 했다. 갓 30일 된 아기에게 섣부른 자가진단은 금물이었다. 주말 아침이었고, 소아청소년과가 없는 응급실이 많기 때문에 혼자 해결하려고 했다면 여러 번 헛걸음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코로나19와 관련한 몇 가지 문진 후, 응급실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구급대원들이 함께 해줬다. 아기띠를 하고 집 밖을 나선, 첫 외출이었다.
아침 9시 즈음, 119에 신고해서 응급실행. 울면서 신고하고, 울면서 다녀옴. 막상 아기는 구급차 안에서 꿀잠. 엑스레이, 초음파 모두 검사했지만 이상 없음. 초음파를 보는 15분 동안 자지러지게 울었다. 나도 같이 움. 집으로 돌아와서는 조금씩 호전. - D+33 일기 중
태어나 처음으로 부모님께 효도를 하는 기분이었다. 보통은 주로 둘이었다가 이따금 셋이었다가, 넷이되기도 하고 정말 운이 좋아야 다섯이 다 같이 모여 앉을 수 있었던 가족 식탁이 자주 채워졌다. 웃을 일이 많지 않았던 가족에게 작은 인간은 큰 행복이고 기쁨이었다. 여동생은 출퇴근 길이 즐겁기까지 하다고 고백했다. 가장 큰 변화는 표정 없던 아빠. 강력계 형사로까지 오해받던 엄근진 그 자체인 아빠가 온갖 알 수 없는 구호와 의성어 의태어를 총동원해 아이에게 달려갈 때면 문득 내가 정말 큰 일을 한 것 같은 착각까지 든다. 그리고 아기는 기대에 부응하듯이 소리 내어 웃고, 옹알이로 모두를 기쁘게 한다.
오늘은 똥 싼 날. 며칠을 고생하더니 드디어 똥방귀 한 번에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고생했다 호똥이! 기특하다 호똥이 :) - D+34 여동생의 일기 중 아침에 똥을 싸서 가족 모두가 기뻐함 - D+36 일기 중
오늘은 역대급 울음소리를 들려줘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놀라버렸다. 혹시나 해서 찾아보니 원더 윅스라는데 크려고 그러려나보다 하고 생각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이모들까지.. 한 집에서 사랑을 넘치게 받는 중이니 건강하게 크되, 너무 고생스럽지 않게 시간이 잘 지나가 주었으면 좋겠다. - D+40 일기 중
업고 있으면 목을 쭉 빼서 뭐든지 보려고 함. 옹알이가 다양해져서 처음 듣는 소리도 내고, 모빌을 보면 특히 신나게 옹알이. 분유를 먹으면서도 가족들이 지나다니면 고개를 돌려 일일이 다 보고, 참견하려고 함 - D+57 일기 중
이 즈음 아기는 나를 벌주러 온 작은 신 같았다. 낮이고, 밤이고 잠들 줄 모르는 아기는 자꾸만 아이가 없던, 남편과 나의 둘만의 시간을 떠올리게 했다. 출산 후 30일쯤 지나자 괜찮은 줄 알았던 몸이 부서지도록 아팠다. 무릎, 손목 관절, 손가락, 발가락, 발바닥까지 구석구석도 아팠다. 어떤 날 밤은 너무 아파서 아이는 잘 자는데도 나는 잠을 자지 못했다. 변한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았다. 동생들은 시간을 내어 말동무가 되어줬다. 때론 간식을 사다 날라주기도 했는데 그게 위안이 됐다.
밤새 무릎, 손목, 손가락 관절이 너무 아파서 새벽 내내 뒤척이다가 한참을 못 잤다. 내 몸이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할까 봐 무섭다. 한의원에 갔더니 유난히 산후풍이 심한 편이고 1년은 지나야 할 거라고 했다. 몸이 만신창이 됐다. 서글프다. - D+62 일기 중
출산과 육아 커뮤니티가 아니면 아무도 나에게 앞으로 벌어질 이 모든 일들을 자세하게 알려주지 않은 것이 원망스러웠다. 생물시간이나 실과시간에, 하다못해 언뜻 들었던 성교육 시간에도 출산과 육아가 이렇게 어렵고 힘들다는 걸 가르쳐 주지 않았다. 대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기가 너무 사랑스럽고 모성애가 넘치게 생긴다는 것 말고 현실 출산과 현실 육아는 몰랐다.
지난 60일간 아기가 한없이 예쁘기도 했지만, 돌아눕고 싶을 만큼 미울 때도 있었다. 말 못 하는 아기에게 도대체 왜 우느냐고, 말 좀 해보라며 어이없는 말을 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 다 괜찮아진다는, 되지도 않는다고 생각했던 위로가 들어맞는 날이 왔다. 70일을 보내고 있는 요즘. 나는 아기와 함께 잠도 자고, 아기와 함께 웃기도 한다. 어제의 아기와 오늘의 아기가 다르고, 일주일 전 아기와 한 달 전 아기가 다르다. 이후의 60일은 또 얼마나 새로울지 기다린다. 그리고 미래의 나를 미리 응원하다. 힘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