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차별주의자의 고해

김지혜, <선량한 차별주의자> 리뷰

by 한남동

“내가 차별하지 않을 가능성은, 사실 거의 없다”는 김지혜 교수의 말에 흠칫 놀란다. 차별이라는 폭력과는 멀찍이 거리를 두어왔다고 생각했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한다며 여의도공원에 모여든 시민들을 보면서 혀를 찼다. 퀴어영화도 평범한 로맨스로 봐달라는 김조광수 감독의 당부에, 영화 <두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을 로맨틱코미디로 감상해보려 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안전모 색깔로 구분한다는 한 자동차회사 노동자의 이야기에 황당해하기도 했다. 여성혐오를 미러링 하여 남성혐오로 되받아치는 일이 갈등을 더 심화시킨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저항의 한 형태로서 이해해보려 하기도 했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역시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하며 비난하지 않았다.

차별과는 거리가 멀다, 소수자와 약자의 편에 언제나 기꺼이 응원과 지지를 보낸다는 생각은 자만이다. 오히려 선량함이라는 포장이 나 역시 차별주의자로 비칠 수 있음을 은폐한다. 무심결에 ‘결정장애’라는 표현을 썼다가 지적을 받았다는 김지혜 교수의 고백에, 나 역시 조심성 없는 말을 뱉었던 여러 기억들이 스쳐 지나간다. 답답한 상황을 보면서 말했던 ‘암 걸릴 것 같다’, 고된 기억을 회상하는 일에 ‘PTSD 온다’고 표현했던 일, 무언가를 좋아함을 장난스럽게 과장하는 것이라 여겼던 ‘○○성애자’, 어떤 일에 서툰 사람을 지칭하는 ‘○린이’. 일상적이지 않고, 보편적이지 않고, 정상이라 여기는 상태와는 다름을 전제하는 말이기에 듣는 누군가에게는 충분히 상처가 됐을 수 있을 것 같다.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표현이다.

곰곰 생각해 보면, 주류의 끄트머리를 간신히 붙잡고 있을지언정 소수자의 위치에 놓인 적이 별로 없었다. 우연히 수도권인 경기도 안양에서 남성으로, 장애를 갖지 않고 태어났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소재 대학교에서 상경계열 학사 학위를 받았다. 운 좋게 간신히 딱 한 곳의 선택을 받아, 대기업에 공채로 입사했다. 지금은 거처를 서울로 옮겨 뿌리를 내리고, 딱히 아픈 데 없이 살고 있다. 그러기에 특히 내게는 자연스러운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결핍을 부각시키거나 상처가 되지는 않을는지 더 세심하게 살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차별적인 언사와 행위가 꼭 과격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은 않다. 전라도 출신과는 친해질 수 없다는 어느 치의 말은 거칠었지만, “무슨 구에 살아?”라며 물어온 이의 서울말씨는 얼마나 부드러웠던가. 나는 “만안구”라고 답했고, 그는 정말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었었다.

말 하나하나를 신경 쓴다는 건 수고로운 일이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표현인지 검토하는 일은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자기 검열이라는 지적도 있다. 그럼에도 기꺼이 수고로움을 감수하여, 김지혜 교수의 말마따나 올바름에 대한 “심리적 압박을 나의 책임으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정치적 올바름을 고려하는 일은 자기 검열이 아니라, 일종의 퇴고 과정이다. 어떻게 표현할지 선택하는 것은 말에 어떤 가치를 담아낼지 고르는 일이다. 잘못된 표현을 선택함으로써, 나의 양심에 반하는 모습으로 비치고 싶지 않다. 다만 동시에 ‘프로불편러’가 되어서도 안 되겠다고도 생각한다. 정치적 올바름은 자기의 책임과 계산으로 선택하는 것일 뿐, 다른 이에게 마땅히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 올바름과 표현의 자유는 양립할 수 있다.

이 글에도 바르지 않거나, 누군가를 불편하게 할 수 있는 서술이 있다면 부담 없이 지적해 주시기를 바란다. 올바름에 대한 압박은 오롯이 글쓴이가 책임져야 할 몫이다.




※ 2025년 2월 창비 <선량한 차별주의자> 리뷰대회에서 변화씨앗상(참가상)에 선정된 글입니다.


(글 내용을 바탕으로, Gemini-NanoBanana에서 생성한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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