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 리오니, <프레드릭> 리뷰
나는 시방 피곤한 들쥐다. 저녁 시간을 보낼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추운 겨우내 먹을 양식을 저장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인다. 지금 사는 이곳 쥐구멍에는 저녁이 없다. 볕도 들지 않는다. 어두컴컴한 새벽과 밤만이 존재하는 공간이다. 그래도 그러려니 한다. 겨울을 배곯지 않고 따뜻하게 나려면, 봄부터 가을까지 부지런해야만 하니까. 해가 떠 있는 동안은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이며, 채집을 하고 어떨 때는 사냥도 한다. 근면은 들쥐의 DNA에 각인된 기억이자 습성이다. 근면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나의 부모 세대와 그 부모 세대 역시도 그렇게 살아왔듯이.
나는 또 한 마리의 하늘거리는 프레드릭이기도 하다. 곡기를 이어가는 게 삶의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부모 세대의 근면함을 오롯이 물려받지 못했다. 부지런히 움직여 곡식을 차곡차곡 모아야 할 텐데 자꾸만 한눈을 판다. 노동의 보람보다 차라리 백수의 권태로움을 동경한다. 갤러리에서 두 눈에 빛깔을 모으고, 콘서트홀에서 아름다운 선율을 귀에 담을 때면 어느새 들쥐임을 잊기도 한다. 서울쥐로 살다가도 때때로 탁 트인 자연을 찾아, 바람을 맞고 오기도 한다.
당신 역시 한 마리의 들쥐고, 또 프레드릭이라고 감히 단언한다. 우리는 빵만으로는 살 수 없듯이, 예술을 음미하면서만도 살 수 없다. 세상에는 평범하게 근면한 들쥐도, 음유하는 프레드릭도 모두 필요하다. 들쥐로만 가득한 세상은 흑백이다. 건조하게 그저 기능하기만 할 뿐이다. 모두가 프레드릭이라면, 그 세상 역시 공허하다. 휘황찬란할지언정 그 빛이 오래가지 못한다. 빛과 그림자가 늘 함께 하듯이, 들쥐와 프레드릭은 서로에게 기대고 있다. 어느 한쪽이 공동체의 생존과 번영에 더 기여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기에 들쥐도, 프레드릭도 서로를 환대해야 한다. 어느 한쪽을 밀어내면, 그 공동체는 기능을 멈추거나 빛을 잃는다. 이야기를 수집하는 프레드릭은 분명 개미와 베짱이에 대해 들어봤을 것이다. 베짱이는 개미의 노동을 미련하다며 깔봤다. 찬 바람 부는 겨울이 찾아오자, 개미는 손 벌리는 베짱이를 외면했다. 개미의 정서에는 따뜻함이 깃들지 못했을 테고, 베짱이는 결국 죽음을 맞이했으리라. 들쥐 공동체는 개미 그리고 베짱이와 다른 길을 걸었다.
식량을 나누고, 세상의 빛깔과 이야기를 공유하는 것은 들쥐와 프레드릭이 서로를 환대하는 것이다. 서로를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인정한다는 의미다. 들쥐들이 "넌 시인이야"라고 이름을 불렀을 때, 프레드릭은 "나도 알아"라고 멋쩍게 대답하며 꽃이 되었다. 프레드릭의 대답은 베짱이와 달리, 비로소 다른 들쥐들과 같이 하나의 공동체에 안착했다는 안도감이 아니었을까.
서로 가진 것을 나누면서 우리가 된다. 나와 너는 분명 다르다. 하지만 그러기에 서로를 필요로 한다. 나는 너와 같을 수 있고, 너 역시 나와 다르지 않다. 다름을 이유로 반목하지 말자. 환대하고 나누며 어우러지는 공동체를 만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