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인순 Sep 04. 2018

'세컨드핸드 타임', 과거에 갇힌 사람들

책 속의 사람들 

세컨드핸드 타임


역사에 인생을 담을 수 있을까? 또는 인생에 역사를 담아낼 수 있을까? 우리의 지나온 역사 속에 발견한 내 인생은 또 어떤 모습일까? 역사학자 E.H Carr 는 ‘시저의 루비콘강’이 역사적 인과의 발생학적 근거가 명확하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이라고 명명될 수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루비콘강을 건넜던 수많은 병사를의 숨겨진 인생 이야기는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 것일까? 


‘목소리 소설’이라는 독특한 장르를 개척하면서 노벨 문학상을 받은 벨라루스 출신의 소설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Svetlana Alexievich)는 이 책을 통해 명멸해 간 소비에트의 역사 속에서 살아간 의미 없는(E.H Carr의 기준에서 보자면) 인생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책 속에 기록된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하나의 기록 매체로서의 인생과 역사에 대해서 진행형으로 생각해 보게 된다. 알렉시예비치는 스스로를 ‘사람의 마음을 살피는 역사가’라고 명명한 바 있다. 그녀의 주장에 근거하면 ‘시저의 루비콘강’은 불완전한 기록이다. 그것은 루비콘강을 건넜던 수많은 병사들의 마음을 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있어 진정한 역사는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하고, 폼페이우스의 병사들과 싸웠던 수많은 병사의 삶과 기억 속에 들어 있다. 그들의 개별적이고 세세한 이야기는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오늘날 다양한 기록 매체와 채널에 대한 접근이 쉬운 환경 덕분에 역사의 기억과 기록에 대한 논쟁과 역사 전쟁은 상설 격투장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몇가지 최신 예를 들 수 있다. 최근 기무사의 계엄령 검토 및 기도, 대법원 행정처의 재판 거래에 대한 수사 전개 상황이다. 한쪽에서는 기록들에 대한 삭제 및 은폐의 시도들이, 또 한쪽에서는 복구 및 압수의 노력들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이 긴장감 넘치는 전투는 짧게 보면 법과 정의에 대한 싸움이지만 크고 길게 보면 기억과 기록의 싸움이기도 하다. 


미투 운동의 경우도 마찬가다. 성폭력으로 고발된 대부분의 사건에 대해, 피해자는 기억의 증언으로, 가해자는 기록(증거)의 부재로 싸움을 이어간다. 조비오 신부에 대한 인격 모독으로 고발된 전두환의 경우가 바로 이런 기록과 기억의 싸움이다. 


문제의 발단이 된 전두환의 회고록을 대필한 변호사는 책 속의 모든 표현은 자신에게 그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회고록의 주인공인 전두환씨가 치매에 걸렸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결국, 치매라는 ‘기록에 대한 기억의 부정’이 논점이 되었다. 그의 변호사는 자신이 대필했다는 주장으로 ‘기억의 주체’와 ‘기록의 주체’를 분리시키려 한 것이다.


알레시예비치의 ‘세컨드핸드 타임’은 소련의 해체와 자본주의의 도입과정에서 울고 웃던 수많은 호모 소비에티쿠스들의 목소리를 담아내고 있다. 그녀가 담아낸 목소리는 바로 기억의 기록, 즉 진정한 역사적 기록이다. 사학자 임지현 교수는 한 칼럼에서 


“기억 연구는 스베틀라나처럼 타인의 아픔에 대해 ‘공감’ 능력을 갖춘 역사가들만 할 수 있는 일이다. 트라우마의 증인들을 문서 자료에 비추어 날카롭게 신문할 때 역사적 진실이 드러난다고 생각하는 역사가는 하수일 뿐이다. 역사, 특히 실증주의적 역사에 비추어 기억 연구가 갖는 윤리적 감수성은 다른 누구보다 스베틀라나의 목소리 소설들에서 잘 표현되는 게 아닌가 싶다.”


라고 이야기했다.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삭제된 기록, 송곳으로 찔러서 사라진 기록, 종량제 봉투에 담겨 버려진 기억에도 불구하고 실증할 수 없는 기억을 파헤치는 기억 탐험가가 바로 진정한 역사가라는 뜻이다. 같은 칼럼에서 임지현 교수는 루마니아 출신의 유대계 심리학자인 도리 라우브(Dori Laub)가 한 말을 인용한다. 


“‘지적 기억’ 대 ‘깊은 기억’이라는 대조법을 통해 진실과 사실에 대한 아주 흥미로운 통찰을 제시한다. 문서 적 사실보다 부정확한 증언이 더 진정한 과거를 말해줄 때가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아우슈비츠 수감자들의 폭동 당시 ‘굴뚝 네 개가 폭파됐다’라는 어느 생존자의 증언은 역사가들에게 거짓이라고 무시되어 왔다. 이는 폭파 현장에 굴뚝이 하나뿐이었던 역사적 사실과 분명 어긋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라우브는 오히려 그러한 증언이 사실과 어긋나기 때문에 더 진정성이 있다는 신선한 해석을 제시한다. 라우브에 따르면 도저히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을 때, 목격자들은 과장되게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과 부합하는 굴뚝 하나가 ‘지적 기억’의 영역이라면, 사실과 모순되는 굴뚝 네 개는 ‘깊은 기억’의 영역인데 아우슈비츠 같은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의 기억은 대개 ‘깊은 기억’에 속한다. 아우슈비츠 폭동을 목격한 생존자의 증언은 사실과 부합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어긋나기 때문에 더 진정성이 있다는 것이다.”


성폭력을 당한 여성에게 이 말을 적용할 수 있다. 법정에서 피해자 기억의 오류를 파고드는 변호사들이나 사건을 외설적 호기심 발동에 활용하는 매체들은 피해자의 ‘지적 기억’보다 심층에 자리 잡은 ‘깊은 기억’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세컨드핸드 타임’의 부제는 ‘호모 소비에티쿠스의 최후’이다. 이 책에는 수많은 소비에티쿠스가 등장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의 기억이 등장한다. 물론 그들의 마음은 문서나 정황의 증거물로 남지 않았다. 오직 그들의 인생의 흔적, 즉 기억으로만 남았다. 


알렉시예비치는 이 책을 통해 소비에트 교육을 받고 소비에트 적 인간으로 살아온 사람들, 즉 ‘호모 소비에티쿠스’의 ‘깊은 기억’을 들추어내고 있다. 왜?. 그들은 아직도 그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기억 속에 갇힌 사람들, 그것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자신이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에는 ‘참된 역사’라는 관점에서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생생한 역사의 현장이 있다. 바로 북한 인민들이다. 오랜 시간 공고히 굳어져 있던 공산주의 체제가 수정되고 삶의 현장이 바뀌고, 고정된 가치가 조금씩 해체되어 가는 역사적 과정 위에 있는 그들의 경험과 마음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있게 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 기록되고 수정되고 역사적으로 남을 것인가? 


현재 진행되고 있는 평화 정착의 프로그램이 잘 진행되어 남북 간 관계가 개선되고, 영구 평화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면 변화의 충격은 북한 쪽에 압도적으로 강하게 작용할 것이다. 북한식 공산주의와 주체사상으로 교육되고 북한식 인간으로 살아온 사람들, 즉 ‘북한식 호모 소비에티쿠스’들의 ‘깊은 기억’은 역사적 충격이이라는 붓으로 그려질 것이다. 그렇지만 그 충격이 기억의 역사가 될 것이고, 그것이 이 책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작지 않은 역사와 삶의 주제에 대한 경각심이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Svetlana Alexievich)


알렉시예비치는 역사 속에 개인의 감정을 이입시키는 것을 경계하면서도 역사학자가 아닌 인문학자로서의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강조한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경이로운 감정에 대해 고백한다. 같은 인간이 보는 인간, 도대체 그 인간에게서는 어떤 평범한 경이로움이 느껴질 수 있을까? 특히 자신의 신념이 무너져 내리는 역사의 현장을 움추린 어깨로 지켜내며, 온갖 투정으로 얼룩져진 삶에 대해서 말이다. 


자유가 허무해져 버린 인생. 작가는 이에 대해서, “자유를 받아라! 과연 우리는 이런 자유를 기다려왔던 것일까? 우리는 우리의 이상을 위해서 죽음을 불사할 수 있었다. 전장에 나가 싸울 수 있었다. 그런데 막상 시작된 건 체호프의 소설 같은 인생, 아무 역사가 없는 인생이었다. (...) 자유란 알고 보니 러시아에서는 줄곧 모욕을 당해왔던 속물근성이 회생한 것이었다.”라고 고백한다.


자유를 지배하는 것은 권력만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이란 것을 호모 소비에트쿠스들은 몰랐던 것일까? 소비에트는 권력이 욕망을 지배하였지만 자본주의는 욕망이 권력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욕망에 맞설 수 있는 것은 권력이 아니라 바로 민주주의란 것을.      


2016년 겨울. 우리는 촛불을 들면서 비로소 경험했다. 자유란 정의와 민주주의를 향한 것이었기에 허무하지 않았다. 그리고 더욱 가치 있는 것은 그 촛불의 경험이 아버지와 딸, 어머니와 아들 사이, 세대를 아울러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한국 사회에서의 자유에 대한 세대 가치의 차이는 그 간격이 크지 않고 그래서 위험하지도 않다. 


반면, 남과 북, 북과 남의 자유에 대한 관념은 너무나 다를 수밖에 없다. 이 책에서 언급한 자유에 대한 소론은 이를 잘 반영해 주고 있다.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자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아버지와 자녀들이 서로 다른 답을 내놓았다. 소련에서 태어난 사람과 소련에서 태어나지 않은 사람 간에는 공유할 수 있는 경험이 전혀 없었다. 아버지들은 자유란 공포가 부재할 때를 말하며, 쿠데타 세력을 제압했던 8월 중의 3일이 그 자유에 해당한다고 대답했다. 또 식료품 가게에서 백 가지 종류의 햄 중 하나를 고르는 사람이 열 가지 햄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사람보다 자유로운 인간이라고 했다. (...) 자녀들은 자유란 사랑이며 내적 자유는 절대적 가치라고 했다. 자유란 스스로가 자신의 소원을 두려워하지 않는 상태라고도 했다. 또한, 자유란 돈을 많이 갖는 것이며,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을 쟁취할 수 있다고도 했다. 자유란 자유가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고 살아갈 때를 말하는 것이고, 자유란 정상적인 것이라고 했다.”     


남과 북, 북과 남 간에 동질성 회복을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자유에 대한 기억의 간격은 엄연히 존재할 것이다. 그것을 메꾸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기록하고 역사의 천 위에 바느질을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한 땀 한 땀 민중의 기억과 전문가의 손길로 말이다.


책 속에서 사람들의 자취를 찾는 여행을 떠나면서 제일 먼저 이 책이 손에 잡혔던 것은 이 책만큼 온전히 인간의 목소리에 집중한 책을 찾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억을 기억한데로 수용하므로써 그 기억이 기록된 과거로 부터 탈출을 시도하는 것, 즉 현재 우리 사회로 옮겨 놓는 것이 이 번 여행의 목적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