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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인순 Sep 04. 2018

'혐오사회', 배제된 사람들

책속의 사람들

혐오 사회


니체 복음(?)에 의하면 "누구든지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이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이란 책을 썼던 월터 윙크 역시도,  


"우리 시대에는 원수 사랑이 참다운 기독교 신앙의 기준이 되어버렸다. 그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다. 우리가 증오를 놓아버리고 하나님의 사랑 속에 편히 쉬게 된 순간들보다 더욱더 거룩한 은혜가 밀려들어옴을 그토록 즉시 그리고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는 때는 없다. 어떤 기적도 그토록 놀랍고, 그토록 필요하고, 그토록 자주 발생하지는 못한다."


라고 이야기하며, 세상의 가장 큰 기적은 용서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우리가 용서를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혐오와 증오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으로부터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다른사람을 대신하여 그의 고통과 원인을 용서할 수는 없다.


이 책 '혐오 사회'를 쓴 카롤린 엠케는 그녀 스스로가 성소수자다. 성소수자라는 것은 그녀가 이 책을 쓰게 된 존재론적 배경일 수 있다. 줄리안 바지니는 '에고 트릭'이라는 도전적인 책을 통해 인간의 정체성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고 원천적인 정체성이 성 정체성이라고 말했는데. 매우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둘 중 하나의 성 정체성을 물려받아 살기 때문에 의식하지 못한다. 반면, 그 두 가지로 정의될 수 없는 정체성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에게는 성 정체성이란 매우 절실하고 중요한 존재론적 토대임에 틀림없다. 자신의 성 정체성을 당당히 이야기 하는 이 책의 저자도 분명 사회적 혐오와 증오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들리는 이야기(?)에 의하면 성별 혐오감, 성적 증오는 당해 본 사람이 아니면 상상하기 힘든 고통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줄리안 바지니는 매우 적절하게 표현했다.      


"성전환을 하는 과정에서는 정말 헌신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절대다수까지는 아니더라도 많은 이들이 이런 힘든 과정을 견디면서까지 성전환을 고집하는 이유를 감히 상상하지 못한다. 대다수 사람들이 잘못된 성별을 가진 육체에 갇혀 있다는 느낌, 즉 '성별 혐오감(gender dysphoria)'이 얼마나 강하고 견디기 힘든가를 경험한 적이 없으니 상상 못 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상상은 커녕 설명조차 거의 불가능하지 않나 싶다." 


존재론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카롤린 엠케는 혐오와 증오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성소수자에 국한하지 않는다. 그는(그녀가 아닌) 오히려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 매우 담담하고 객관적인 자세를 유지하며 이 책을 썼다. 이러한 자세는 그가 이 책을 통해서 던진 "혐오와 증오에 어떻게 맞설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되기도 한다. 


그는 증오는 오직 확신이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이야기 했는데, 바꾸어 말하자면 지나친 확신이 곧 증오를 낳는다는 것이다. 어떤 문제에서든 지나친 확신은 객관성을 잃어버리게 만든다. 진정한 객관성은 고유성과 유일무이성을 인정할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적대감을 과시적으로 표출하는 행위에 이른바 공적인 의미, 심지어 정치적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에 편승해 내면의 모든 천박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결코 문명인이라고 할 수 없다."라는 그의 말은 한국 사회에서 논란이 되었던 '워마드'를 떠오르게 한다. 다시 말하건데 지나친 확신은 증오를 낳는다. 혐오를 증오로 맞서는 것은 결코 문명적 행동이 아니다. 엠케의 말처럼 혐오와 증오는 느닷없이 폭발하는 것이 아니라 훈련되고 양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위험하다. 때문에 작가, 법조인, 정치인, 종교인, 학자나 교수등 사회적인 존경의 대상이거나 언어와 행동의 사회적 영향이 큰 사람들은 증오를 일으키는 행동이나 말을 조심해야 한다. "


증오에는 증오하는 자에게 부족한 것, 그러니까 정확한 관찰과 엄밀한 구별과 자기회의로써 대용해야 한다는 것이 엠케의 주장이다. 


카롤린 엠케


카롤린 엠케는 이 책에서 사랑과 희망과 걱정, 그리고 혐오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끌어가는데, 이것들의 공통점은 “어떻게 보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고 말한다. 우리의 생각과 느낌은 결국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는가’라는 질문은 한편으로 ‘무엇을 보지 않는가’라는 질문과 같은 대답을 공유할 수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사랑이다. 그는 사랑은 현실을 넘어서는 것이기에 위대하다고 한다. 우리 눈에 콩깍지가 끼지 않고야 어떻게 타자를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사랑은 사랑의 대상 외의 모든 것에 눈을 감는 것이자 현실의 제약을 지워버리는 것이다. 희망도 마찬가지다. 판도라의 상자에서 온갖 부정적인 것들이 빠져나갔을 때 그 바닥에서 비로소 보이는 것이 바로 희망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반도에도 콩깍지가 필요하다. 완전한 현실은 완전한 분열만을 남기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총부리에서 눈을 돌릴 때야 상대방의 얼굴이 제대로 보인다. 그 얼굴의 연민과 머뭇거림을 확인할 수 있을 때야 우리는 비로서 공감을 하게 된다. 물론 반문할 수 있다. 그 총부리에서 나오는 엄연한 위험은 어찌할 것인가? 


그러나 사랑은 본래 위험한 것이다. 위험을 알고도 위험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사랑이다. 엠케는 이에 대해서 괴테의 파우스트에 등장하는 네 명의 회색 여인을 호명하여 설명한다. 네 명의 여인 중, 우리의 단단한 의식을 통과하여 마음에 굳건한 자리를 차지하는 자가 바로 ‘근심’의 여인이다. 


괴테의 말처럼 근심과 걱정은 어느새 사람의 내면에 파고 들어와 꽈리를 튼다. 엠케는 이 근심이라는 회색 여인에게는 대상과 원인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이야기 하는데,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남북문제를 보는 시각에서도 이런 대상과 원인의 불일치를 발견하게 된다. 


“사랑이나 희망이 그런 것처럼 걱정에 대해서도 무엇에 관련된 것인지, 무엇 때문에 촉발되었는지, 원인과 대상이 일치하는지 물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물어서는 안 된다고 생떼를 쓰는 것이다.”


위의 엠케의 말처럼 우리 사회에는 북한이란 대상과 북한이라는 위험의 원인에 대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묻는 사람들을 모두 ‘종북주의자’로 몰아세워 왔다. 이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북한은 일종의 ‘투사적 혐오’의 대상이다. 즉,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는 핑계로 다른 사람을 혐오하는 것이다. 엠케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들은 모두 ‘공포의 부당이득자’들이다.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상당수의 사람, 조용한 묵인과 은밀한 승인자들은 증오의 공모자들이 된다.              


한편, 정치적 문제를 떠나서 우리의 시야를 미투의 희생자들에게로 돌려보자. 엠케는 이들의 ‘이중 희생 (성폭력과 이로 인한 보이지 않는 혐오)’ 메카니즘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있다. 그는 어떤 공격이나 폭력에 대해 저항하거나 반박할 때에는 자신의 상처를 먼저 언급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상처를 공개적으로 말해야 하는 이런 ‘상처 드러내기’는 사회적 환경이나 분위기에 따라 보다 심각해질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인 일본 사회다. 


수년 전, 일본의 한 프리랜서 기자가 일본 방송사 TBS의 고위 간부이자 아베 총리의 측근인 야마구치 노리유키(山口敬之)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했고, 이후 한 유명 블로거도 일본 최대 규모의 광고 회사인 ‘덴츠’에 재직할 당시, 남자 상사로부터 성 접대를 요구받았다고 고백한 사건이 있었다. 


피해자는 어렵사리 용기를 내어 성폭력 피해 사실을 밝혔지만, 가해자는 응당한 처벌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피해자들은 “유명해지고 싶어서 하는 거짓말”, “가해자와 한 자리에 있었던 피해자에게도 어느 정도는 책임이 있다”, ”다수의 선량한 사람들까지 성범죄자로 오해받게 만든다”, “증거도 없으면서” “뭐만 하면 성추행”이라는 등의 악성 댓글에 시달리면서 2차 피해를 보았다. 


전문가들은 이것이 일본 특유의 일본 와(和) 정신이 사회적 연대감과 잘못된 조리법으로 혼합되면서 피해자와 가해자가 전도되는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라 분석하기도 했다.      


일본의 성범죄율은 전 세계적으로도 극히 낮은 편에 속한다고 한다. 2013년 유엔 마약범죄연구소(UNODC)가 발표한 통계 자료에 따르면 2006~2011년 일본의 인구 10만 명 당 성폭력 발생 건수는 약 6~8명 수준인데, 한국은 약 29~40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를 수치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일수록 피해 사실을 신고하기 어려워서 낮은 성범죄율을 보이는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2010년 기준 인도와 터키의 성범죄율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약 6명인데 반해 인권 수준이 높다고 알려진 북유럽의 스웨덴은 약 187명을 기록했다. 성범죄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회일수록 역설적으로 범죄가 양지에 잘 드러나며 성범죄율 역시 높게 나타난다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2015년 일본 정부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성폭력 피해자 중 4분의 3은 자신의 피해 사실을 타인에게 알리지 않았으며 경찰에 신고한 경우는 겨우 4%에 불과했다고 한다. 참고로 한국의 신고율은 이보다 약 두 배 정도 높은 7~10% 정도로 여겨진다.     


결국, 엠케가 이야기 한 조용한 묵인, 은밀한 승인자들이 증오의 공모자라는 말은 맞는 말이 된다. 자신의 상처는 자신이 안고 가야 한다는 개인적 의지는 결국 사회적 의지를 약화 시키기 때문이다. 


혐오나 증오와 관련된 또하나의 대상이 있다. 난민이다. 우리 나라에서 이것이 관심 사안으로 떠오르게 된 계기는 제주 난민 문제였다. 민족성과 보편성의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다. 어떻게 칼질을 할 것인가? 보편성이란 공통성과 유일무의성의 합이다. 엠케는 이에 대해 장뤼크 낭시의 말을 인용한다. “처음부터 모든 개별 존재는 유일무이하며, 따라서 다른 모두와 함께, 다른 모두의 안에서 모두가 유일무이하다.” 


유일무이를 인정한다는 것은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다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같다는 인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우리가 예멘 난민의 고유성을 인정할 수 있을까? 나와 달라 보이는 사람을 인류 보편의 가치 위에서 동일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여전히 남아있는 우리의 과제다. 


엠케는 “독단에 빠진 광신주의자들이 의존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확실한 명확성이다.”라고 말하면서 ‘동일한 민족’, ‘참된 종교’, ‘본원적 전통과 가족’이 가지고 있는 근본주의를 경계한다. 그러나 이러한 광신주의적 근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그 대상이 아니라 그 대상의 근간에 있는 원인 즉, 구조와 조건을 살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악마적 행동을 비판할 것이 아니라 그 언어와 구조를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그래서 개선해야 할 악마적 행동은 무엇인가? 난민들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에서 그것을 찾아낼 수 있다. 2003년 17세였던 유망한 대학생이었던 아담은 다르푸르 학살을 목격한 뒤 반정부 활동에 뛰어들었고, 이러 저러한 삶의 궤적을 따라 한국에 정착했다. 그는 외상후 스트레스로(PTSD) 인해 자신의 경험과 자신이 당한 상황을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바람에 난민 심사에서 탈락하기도 했었다. 자신을 한 단어로 정의해달라는 한 신문사 기자의 부탁에 아담은 “보통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한국 사람은 외국인과 난민을 다른 시선으로 본다. 하지만 나는 평범한 보통 사람이 되고 싶다. 낮에는 일하고, 세금 내고, 휴일엔 쉬고, 친구와 가끔 소주를 마시고, 화나면 화낼 수도 있는 사람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 우리를 봐주면 금세 친한 친구가 될 수 있다.”  '사람들'이란 의미를 가진 이름, 아담이 한 말이였다.      


예멘 남서쪽 도시 이브에서 후티 반군의 징병을 피해 한국에 온 히샴은 2018년 6월 14일 제주 출입국·외국인청의 주선으로 한림읍 인근 어촌에 취업했다. 그는 예멘 난민 1명, 한국인 노동자 3명 총 5명이 숙소를 함께 썼는데 한국인 노동자들이 밤마다 술에 취해 예멘 난민을 괴롭혔다고 한다. 자다가 조금만 뒤척여도 욕하며 화를 냈고, 어떤 날엔 잠이 든 예멘 난민을 발로 차기도 했다는 것이다. 


2015년 예멘 이브에서 후티 반군에 끌려가 사형당한 사촌의 복수를 하기 위해 총을 들었던 아흐마디는 총상을 입은 채 제주에 왔다. 그는 어선을 타고 바다로 나갔다가 손이 붓고 통증이 극심해 돌아가고 싶다고 하자, 선원들이 생선 상자를 던지고 수차례 머리를 때린 뒤 구명조끼를 입혀 그를 망망대해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그는 100m를 헤엄쳐 다른 배를 타고 섬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모두 한국을 떠나겠다고 했다. 


“나는 돌아가려 한다. 한국을 떠나겠다. 아무런 미련이 없다. 한국 사회는 인종차별적인 태도로 나에게 모멸감을 줬다. 더 이상 있고 싶지 않다.”. 한 예멘 난민이 SNS에 남긴 말이다.     


모두다 배제된 사람들이다. 배제된 사람들이 공동체 안에 들어오려고 할 때 혐오와 증오의 대상이 된다. 배제된 사람에 대해서는 아직도 할 말이 많이 남았다. 여성들, 그리고 성 소수자들의 성과 관련된 혐오의 이야길 해야 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책에서 좀 더 다루기로 하고, 카롤린 엠케가 이 책에서 인용한 사샤마리아나 잘츠만의 말로서 계속되어야 할 이야기의 이음새를 만들어 놓기로 한다. 


“아무도 네게, 네가 너인 것이 문제라고 말하지 않아.” (사샤마리아나 잘츠만의 ‘운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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