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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인순 Sep 08. 2018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無用한 사람들

책 속의 사람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박태원)


無用한 자는 거리를 배회하고 

‘소설가 구보의 일일’이라는 동일한 제목의 두 소설은 1930년대 박태원과 1970년대 최인훈에 의해 쓰여졌다. 박태원과 최인훈 두 작가의 이름만으로도 한국사의 기이한 운명의 교차점을 느끼게 해준다. 한 사람(박태원)은 남한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살다가 북으로 갔고, 또 한 사람(최인훈)은 북에서 태어났으나 전쟁으로 인해 남으로 왔다. 


박태원의 구보가 일제 강점기 조선반도, 지적 지형에 적응하지 못하는 無用한 소설가라면, 최인훈의 구보는 전후의 사회적 혼란과 중동과 베트남에서의 지속하고 있는 전쟁, 즉 보는 전쟁과 듣는 전쟁의 사이에서 살아가는 無力한 문인이다. 두 사람의 구보는 광화문과 서소문과 정동길을 걸으며 간간이 지인을 만나고, 커피와 술을 마시며, 모임에 참석한다. 


걷고 만나고 이야기하는 사이, 구보의 머릿속에는 과거와 상상과 철학과 문학과 세상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들이 명멸해간다. 이 책 속에는 예나 지금이나 문학인이란 이름 뒤에 감춰진 일종의 오만함과 지식인 특유의 감성적 자기 연민도 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던져주는 세계 인식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화두도 숨길 수 없다.         

소설가 박태원

박태원 씨의 구보는 직업과 아내를 갖지 않은 스물여섯 살짜리 프리랜서 작가다. 그는 외출할 때 단장과 노트를 가지고 나간다. 구보는 스스로 신경쇠약에 눈도 나쁘고 귀도 잘 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집을 나와 무작정 동대문으로 가는 전차에 올라탄 구보는 언젠가 선을 본 여자를 외면하고, 조선은행 앞 다방에서 행복과 돈에 대해 생각하며, 경성역 삼등 대합실에서는 병자를 외면하는 군상들을 바라본다. 


그는 길거리에서 만난 초라한 행색의 친구를 모르는 채 지나치려 하고, 금시계를 가진 친구의 이쁜 여자 친구에 대해서는 돈을 사랑하는 속물로 깎아내리기도 한다. 다방에서 만난 시인이자 기자인 친구가 돈 때문에 일에 매달리는 것을 알고 씁쓸해하는 구보는 다방 구석에 있는 연인들에 대해서는 일종의 질투를 느낀다. 


여자를 임신시키고 버린 적이 있는 유부남 친구와 술을 마시며 세상 모든 사람은 하나 이상의 정신병을 앓고 있다고 상상하기도 한다. 그리고는 막 남편의 상을 치른듯한 40대 여인네가 벌이를 위해 女給大募集(여급대모집)이란 글자에 관해서 물어봤던 일을 회상한다. 


구보는 성냥을 가져다준 술집의 어린 여종업원에게 다음날 만남을 제안하지만 거절당한다. 그의 생각은 비 오는 새벽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어머니에게 가서 멈춘다. 그리 구보는 하릴없이 거리를 배회하기보다는 방에 틀어박혀 글을 쓰겠다고 결심한다.     


오얏 꽃그늘을 거닐며 

유진과 구동매 그리고 변요한이 오얏 꽃잎 날리는 길을 걷는다. 이때, 모던 보이 변요한은 날리는 오얏꽃 입을 바라보며 “나는 저 無用한 것을 좋아하오!”라고 말한다. ‘미스터 선샤인’이라는 드라마에서 나온 이 대사는 모더니즘적 표현이다. 


드라마 속에서 서양의 침탈 앞에 무기력했던 조선의 지식인은 그렇게 무용한 것을 찬양했다. 이는 마치 메이지 시대, 일본의 도련님들이 걸었던 길과 흡사하다. 함께 유럽 유학을 다녀온 이쥬인이 메이지 시대 권력자로 거듭나며 성공 가도를 달릴 때, 나쓰메 소세키는 "無用한 사람은 무용의 길을 가야지"라며 메이지 인에게 부여된 역사적 사명이라는 껍질을 벗어 던진다. 


서양의 흑선(페리호)에 의해 반강제로 개항해야 했던 일본의 비자발적 근대화, 사무라이들이 날뛰는 세상, 그 근대화의 주체 되기를 거부한 것이다. 나쓰메 소세끼는 가르치는 일을 그만두고 글쓰기에 전념한다. 거대한 시대의 큰 파도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으로써 '무용'을 선택한 것이다. 박태원의 구보 역시 결국 글쓰기라는 無用의 길을 선택한다. 그런 무용의 길을 통해 근대화의 과정에서 누추하지만 나름대로 역할을 하는, 시대의 사람들 속으로 들어간다.      


“어느 틈엔가 밖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가만한 비다. 은근한 비다. 그렇게 밤늦어, 그렇게 은근히 비가 내리면, 구보는 때로 애달픔을 갖는다. 계집들도 역시 애달픔을 가졌다. 그들은 우산의 준비가 없이 그들의 단벌옷과 양말과 구두가 비에 젖을 것을 염려하였다.”           


격변기의 사람들은 나름의 애달픔을 가지고 있다. 어느 날 밤 느닷없는 내리는 비는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애달픔, 단벌옷과 양말과 구두에 대한 애달픔이 도로 위 자박하게 고인 빗물처럼 불어난다. 생각해 보면 사는 것이 다 격변이라. 들고 나가지 않은 우산의 아쉬움 만큼 인생의 애달픔이 일상이다. 


‘소설가 구보 씨 일일”에서 모던 보이 구보의 애달픔은 지금의 눈으로 보면 낭만이다. 마치 오얏 꽃그늘을 거닐며, 무용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여유로움이기도 하다. 그 여유로움을 보면서 한 사람의 시인이 떠올랐다.      


시인, 돌아갈 집을 걱정한다.

2017년 최영미 시인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어제 집주인에게서 월세 계약 만기에 집을 비워달라는 문자를 받았다"라는 글을 올렸다. 시인은 “이제 또 어디로 가야 하나”라는 문장으로 애달픔을 표현했다. 1930년대 박태원의 구보는 거리를 배회하지만 돌아갈 집이 있었고, 기다리는 어머니가 있었다. 1970년대 최인훈의 구보는 비록 셋집에 홀로 살았지만 먹고살 것을 걱정하지 않아 차라리 낭만적이었다. 


그러나 2017년 한 유명 시인에게는 거리를 배회하다 돌아갈 집에 대해 걱정을 하게 된다. 비를 맞지 않은 자는 시인의 애달픔이 낭만이 아니라 생활이라는 것을 모른다. 장차 시인은 인생과 사회에 대한 애달픔이 아닌 느닷없는 비에 단벌옷과 양말과 구두가 젖을 것을 염려하는 애달픔을 가져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최영미 시인이 실제 유명 호텔에 "호텔 방 하나를 1년간 사용하게 해주신다면 평생 홍보대사가 되겠다"라는 이메일을 보냈다고 한다. 시인은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와 한국에서 작가는 더 이상 경쟁력이 없는 것 같아 뭔가 다른 길을 가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10년 전부터 계속했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영화에는 100만 명이 몰려간다. 영화의 시대가 되고 나서 더 심해졌는데 최근 10년간은 거의 원고청탁이 없다. 작년에 청탁이 와서 쓴 글이 단 두 꼭지고 올해는 지금까지 단 한 꼭지를 썼다. 이런 한국의 현실에 대해 사람들이 좀 알고 있을까?"     


시인은 무용한 길을 가야 한다. 무용한 길을 가는 애달픔이 낭만이 되어야 한다. 비를 맞는 시인에게는 우산을 내밀어야 한다. 최소한 돌아갈 집에 대한 걱정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지 시인이 우리를 대신하여 시대의 비를 맞고 거리에 설 수 있다. 무엇보다 문단의 무시무시한 어른의 성희롱 습관과 행태를 고발할 수도 있고, 세태를 향해 도로시 파커의 시를 아무 걱정 없이 소개할 수도 있다.      


(베테랑)

내가 젊고 대담하고 강했을 때, 

옳은 것은 옳고,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나는 깃털 장식을 세우고 깃발 날리며 

세상을 바로잡으러 달려나갔다. 

“나와라, 개새끼들아, 싸우자!”라고 소리치고, 

나는 울었다. 한 번 죽지 두 번 죽나.  

    

그러나 이제 나는 늙었다: 선과 악이 

미친 격자무늬처럼 얽혀 있어. 

앉아서 나는 말한다. “세상이란 원래 그런 거야.

그냥 흘러가는 대로 두는 사람이 현명해. 

질 때도 있고, 이길 때도 있지- 

이기든 지든 별 차이가 없단다, 얘야. 

무력증이 진행되어 나를 갉아먹는다     


이 시를 소개하면서 시인은 “혹 내가 오해를 받지 않을까? 흑백논리에 물든 네티즌들이 나를 비난하는 댓글을 달지도 모르는데. 귀찮은 일 만들지 말고 차라리 안전한 다른 시를 골라야지.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파커의 시에는 안전한 작품이 드물다.”라고 토로했다. 


다시  말하지만 시인은 무용한 것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2018년은 시인에게도, 여성에게도 여전히 격변하는 세계이고 억압의 시대이며, 그리고 궁핍한 삶이다. “어느 사람이 한 줄의 시에 목이 메고, 한 줄의 시에 발이 걸리겠는가. 삶-그것만이 사람을 그렇게 하는 것이다.”라고 한 구보(최인훈의 구보)의 말처럼 시란 삶의 난외 주석이 되어 버린 것인가? 


그리고 자신이 쓴 원고를 읽는다.

1930년대 구보에게서 일제 강점기의 감성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최인훈은 1930년대의 구보를 자신의 세상, 즉 1970년대의 거리에 끌어다 놓았다. 이는 1930년대의 종로와 광화문 거리를 걷던 구보에게서 어떤 이데올로기를 찾아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최인훈은 구보와 함께 걷던 박태원에게 가해지던 정치적 억압과 이데올로기적 갈등을 그대로 복사해 온 것이다. 


이로써 열여섯 소녀에 대한 로망과 남편 잃는 여성의 애달픔과 비 오는 날 어머니의 기다림은 사회적 인식과 실천의 문제가 되었다. 박태원 ‘구보 씨의 一日(하루)’은 최인훈 ‘구보 씨의 일상(日日)’이 되었고, 개인적 누추함은 민족 분단이라는 역사적 누추함이 되었다. 


625전쟁이 끝난 지도 15년이 지났지만, 이데올로기적 갈등은 더욱 깊어만 갔다. 중동전쟁과 베트남 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고, 한국전쟁의 침략자 중공(중국)은 유엔의 당당한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자리를 꿰찼다. 1971년 단테를 그리워하던 구보는 귀뚜라미 소리에 잠에서 깼다. 잠에서 깬 구보는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새벽까지 일했다. 다음 날 아침 구보는 자리에 누운 채로 간밤에 쓴 원고를 읽었다.      


“나라가 절반으로 갈라져서 불편하다는 말은 밤낮 듣는다. 사실이다. ‘통일’이란 말은 하도 들어서 인제는 그 말이 가진 싱싱한 맛이 거의 없어졌다. 사실 보통 사람에게서 나라가 갈라져 있어서 불편하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뜻을 가지는 일일까. (...) 내 생각으로는 통일이 가져올 구체적인 변화의 하나로 ‘통행금지의 폐지’란 것이 제일 큰일이다. 한밤중의 시간을 거리에 나오지 못하게 되어 있는 이 제도야말로 해방 후, 우리 생활의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문명의 근본 터부이다. (...) ‘야간통행제한’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밤의 시간, 삶의 절반을 몰수당한 우리의 시간이 우리를 한없이 슬프게 한다.”

소설가 최인훈

2018년 금강산에서는 남북 이산가족들이 만남이 있었다. 방송과 신문에서는 다른 방향의 시각을 드러냈다. 만나는 사람 보다,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보도의 양이 늘어난 것이다. 남한에만 아직도 북쪽의 가족을 만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사람의 수가 5만 명이라는 기사, 1998년부터 현재까지 상봉을 신청한 삶의 반이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보도 등이 방송에서 많이 나오고 있다. 1971년 천만 이산가족을 만나기 위한 제1차 남북적십자 예비회담이 진행됐다. 그 천만의 대다수는 그로부터 50년이 지나도록 결국 가족을 만나지 못했다.      


남과 북은 여전히 갈라져 있다. 남북 대화가 진행되고 있는 2018년, 삶의 1/3을 통제했던 ‘통행금지’는 없어졌지만, 한국 사회에 보이지 않는 ‘통행금지’는 여전히 존재한다. 새벽 12시부터 4시까지의 시간은 ‘종북의 시간’이다. 이 시간에 접근할수록 언성은 높아지고, 비난은 거세지며, 사회적 논쟁의 언어는 점점 거칠어진다. 동계올림픽 준비를 위해 남쪽으로 내려온 북쪽의 인사를 간첩 혐의로 체포하라는 주장들, 북한 지도자에게 아부하지 말라는 비방들, 정상회담은 정치적 쇼라고 소리치는 고함들, 그것들이 결국 우리의 ‘통행금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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