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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인순 Sep 12. 2018

'너무 시끄러운 고독', 미래로 후퇴하는 사람들

책 속의 사람들

너무 시끄러운 고독


“영혼은 육체를 필요로 하는가?”. “예술이 물질을 통해서 전달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 생의 문제를 다룬 가장 철학적인 질문은 무엇이고, 왜 오늘날 노동은 도구 없이 불가능해졌을까?”. 등등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머릿속에는 수많은 질문이 떠 올랐다. 


밧줄처럼 이어지는 소설 속 이야기들이 연이어 던져주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 꼼꼼하게 대답해 줄 수 있는 최상의 교보재를 담고 있는 단어의 상자는 바로 노동이었다. 그래서 이 존재론적 명상으로 가득 찬 소설을 처음 만났을 때는 “정신과 육체가 만나는 완벽한 순간으로서의 노동”이라는 프리즘을 가지고 볼 수 밖에 없었다. 


스스로 노동자였던 보후밀 흐라발의 소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정신과 육체, 영혼과 물질, 시간과 노동 등, 인간 실존에 대한 질문을 던져주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던져진 질문은 책 속에 살고 있는 이상한 주인공의 노동, 즉 폐지를 압축하는 일을 도구로 하여 진행된다.

     

소설 속 주인공은 35년간 지하실에서 폐지 압축공으로 일해온 남자, '한탸'다.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 스토리다"라는 독백을 통해 한탸는 독자를 자신의 세계로 유인한다. 


폐지로 버려진 책들과 사랑에 빠져있는 한탸는 한 달에 2톤이나 되는 책을 압축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뜻하지 않게 인류가 쌓아 올린 지식과 교양을 온몸과 온 정신으로 흡수하게 된다. 그리고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자신의 삶을 축복받은 삶으로 여긴다. 매일 수 리터의 맥주를 마시고 하수구에 기거하는 생쥐, 바퀴벌레와 공존하면서 극한의 노동을 감당하며 살아가는 한탸는 책을 압축하는 노동 속에 그의 영혼을 담아간다.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를 압축하고 있다"라는 반복적인 말로 한탸는 자신에게 있어 삶과 노동은 떨어뜨리려야 떨어뜨릴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는 폐지와 책으로 둘러싸인 어두운 공간 속에서 인생의 아름다웠던 순간들을 회상한다. 바로 춤추는 '만차'와 옥색의 집시 여인에 대한 기억이다. 그녀들은 한탸에게 있어서 가장 인간적인 기억들이었다. 


35년 동안 자신의 조그만 압축기에 종이를 넣어 짓누르는 것을 유일한 폐지 제거 방법이라고 믿어왔던 그는 어느 날, 엄청난 크기의 수압 압축기를 목격하게 된다. 그 압축기는 자신이 가진 압축기의 스무 대 분량 일을 해낼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 압축기 앞에는 우유와 콜라를 마시며 장갑을 끼고 여유 있게 일을 하는 젊은 노동자들이 있었고, 그들을 통해 한탸는 영혼이 사라져 버린 노동의 현실을 보게된다.      


한탸에게 술은 영혼을 위한 것이지만 우유는 육체를 위한 것이었다. 젊은 노동자들이 마시는 우유를 본 하탸는 그의 영혼이 곧 사라질 거라는 두려움에 휩싸이고, 결국 자신의 폐지 압축기에 책과 함께 몸을 던진다. 작가 흐라발은 한탸의 죽음을 시시포스 신화, 그리고 예수의 삶에 반추한다. 


날개는 결코 중력을 이길 수 없고, 인간의 영혼은 태양에 녹아내리는 밀랍과 같은 것일 수 있지만, 예수는 결국 중력을 이기고 이 땅의 역사 위에 섰다고 작가는 말한다. 정신과 육체, 영혼과 물질에 대해, 그리고 노동을 둘러싼 인간의 실존에 대해 작가 흐라발은 우리에게 무거운 질문과 함께 희망을 던져 준다.     


진정한 생각은 바깥에서 오고, 깨달음은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처럼, 결국 우리의 생각과 영혼은 타자와의 공감 없이 탄생할 수 없기에 고독은 너무나 시끄러운 가운데 있어야만 했다. 이 소설 속 ‘책’은 이런 공감의 가교 구실을 한다. 진정한 책이란 자신을 넘어서 다른 무언가를 가리킬 것이고, 따라서 폐지 압축기 속에서 사라지는 책은 죽는 것이 아니었다.    


보후밀 흐라발


작가 흐라발은 소설 속에서 주인공 한탸의 어머니와 삼촌의 죽음과 시체를 등장시켜 영혼이 사라진 물질로서의 인간을 그려내고 있다. “사람에게 남는 건 성냥 한 갑을 만들 만큼의 인과 사형수 한 명을 목매달 못 정도 되는 철이 전부라는. 한 달 뒤에 나는 막 넘겨받은 엄마의 유골함을 들고 외삼촌의 집 정원에 들어섰다.”라고 어머니의 죽음을 표현하는가 하면, “삼촌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시신에 파리와 구더기가 들끓었고 몸이 과하게 숙성한 카망베르 치즈처럼 리놀륨 바닥에 녹아내려 있었다.”라고 삼촌의 주검을 묘사한다. 


마침내 한탸는 거대한 종이 압축기와 거기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아닌 젊은 일꾼들을 보면서 자신에게 곧 다가올 현대 사회의 정신과 물질의 분리, 즉 노동의 종말을 감지하고는 쓸쓸히 이야기한다.      


“종이의 감촉을 더 잘 느끼고 두 손 가득 음미하기 위해 나는 절대로 장갑을 끼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이곳에서는 그런 기쁨에, 폐지가 지닌 비길 데 없이 감각적인 매력에 아무도 마음을 두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의 고독은 왜 시끄러울까? 인간의 정신이 늘 변증법적이기 때문이다. 논리의 전쟁에서 승리한 자는 반드시 다시 두 진영으로 갈리어진다. 압착기 앞에 선 한탸에게는 예수와 노자, 쇼펜하우어와 헤겔같이 늘 두 사람의 현자가 나타나 각자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현자들뿐만 아니라 한탸에게는 모든 세상이 시끄럽다. 


“머리 위로는 뻥 뚫린 배기 갱 너머로 별이 총총한 하늘이 보였고, 발밑에서는 프라하의 하수구와 시궁창마다 두 쥐 종족 간에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스무 개의 꾸러미가 해바라기의 환한 빛을 발하며 스무 량의 화차로 연결된 열차처럼 화물용 승강기를 향해 나아갔다. 꽉 찬 내 압축통 안에서는 수평 나사 밑에서 생쥐들이 잔인한 수고양이의 노리개가 되었을 때처럼 외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풀죽이 되어갔다.”      


인간의 고독이 시끄럽듯이 인간 정신의 고매함은 더럽혀진 육체와 분리될 수 없다. 춤을 추는 만차의 화려하고 고운 리본에는 똥이 묻어있고, 훗날 아우슈비츠로 끌려간 터키 옥색의 집시 여인, 한쪽 다리를 뒤로 뺀 채 기다리던 젊은 여인, 내 젊은 시절을 매혹했던 조용한 여인은 땀과 기름기로 번들대는 피부를 가졌다. 그래서 고귀한 내 안의 삶과 누추한 내 밖의 삶이 서로 싸울 때, 아! 하나님은 인간적이지 않다.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 그래도 저 하늘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연민과 사랑이 분명 존재한다. 오랫동안 내가 잊고 있었고, 내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삭제된 그것.”. 한탸는 정신과 육체가 분리되지 않은 연민과 사랑을 찾고 있었다. 그는 죽음의 순간 삭제된 기억, 즉 인간적인 연민과 사랑을 찾아낸다.     


보후밀 흐라발은 한탸라는 한 늙은 남자의 생애를 통해 끊임없이 노동해야 하는 인간, 그리고 노동자를 대신하는 기계의 등장 이후 인간 삶의 방식 변화, 인간성과 실존에 대한 고뇌 등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철학적 담론을 넘어 살아 있는 인간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그는 또한 물질과 정신, 근대와 현대, 가치와 효율 간의 충돌 현장에 서 있음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이 소설은 노동과 지성의 진정한 초월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아픈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한탸는 끝내 자신의 압축기 안으로 걸어 들어갔고, 옆구리를 파고 들어오는 책의 느낌을 감지하며 자신의 세계에 종말을 고했다. 이것은 단순히 노동의 종말을 상징적으로 것이 아니다. 방향 없이 진행되어가는 광기 어린 발전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그래서 인공지능의 시대에 사는 우리는 흐라발의 이 소설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인공지능은 땀 냄새가 나지 않는다. 똥도 묻어있지 않다. 그 거대한 기계는 인간의 노동을 앗아간다. 그것이 인간의 직업을 빼앗을지 아니면 직업을 더 많이 만들어 낼지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다시 말해 시끄럽다. 너무 시끄럽다. 


그러나 가장 인간다운 노동은 점차 줄어들 것이 분명하다. 우리의 노동은 ‘땀과 기름기로 번들대던 그녀의 몸과 같은 것’이어야 하지만 정신과 육체로 이루어진 노동에서 인공지능은 정신을 대신하고, 기계는 육체를 대신하고 있다. 노동자는 더는 영혼을 위해 술을 마시지 않는다. 육체를 위해 우유를 마실 뿐이다.      


대학 시절 독일군에 의해 학교가 폐쇄되자 보후밀 흐라발 자신도 학교를 떠나 철도원, 보험사 직원, 제철소 잡역부 등 다양한 노동을 경험을 했다. 시를 쓰고자 했던 젊은 흐라발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했던 노동과 사상, 물질과 지식의 경계에 대해, 경계를 포함한 세상에 대해 몸으로 체험했다. 그의 정신과 육체의 체험이 책이 되었다. 


보후밀 흐라발이 오늘날까지 살아있어서 인공지능 사회를 볼 수 있었다면 어떤 생각과 감각으로 받아들였을까?. 이 소설에서 가장 희망적인 부분은 한탸가 끝내 인간의 냄새를 가진 사랑과 연민을 놓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소설 내에서 끊임없이 변주되는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라는 경구는 인공지능의 시대에도 우리가 따스함과 평화와 인간미를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을까에 대한 강한 의문이자 희망이다.


로봇 개 아이보의 장례식

얼마 전 내셔널지오그래픽은 일본에서 있었던 로봇 개 ‘아이보’(AIBO)의 장례식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아이보는 일본 소니사가 1999년 처음 출시한 애완 로봇 견이다. 이 개(?)는 2006년까지 15만 대 이상이 팔렸다. 하지만 소니사는 2006년 수익성 악화를 이유로 이 로봇 개의 생산을 중단했고 이후 AS센터만 운영했다. 그리고 이마저 2014년에 문을 닫으면서 사실상 아이보는 회생 불가의 길에 들어서게 됐다.      


구입한 지 10년 이상 지난 아이보들에게서 하나둘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고, 아이보를 ‘키우던’ 사람들은 더 이상 고칠 수도 없게 되자 장례식을 선택했다.

 내셔널지오그래픽이 소개한 사진들은 이렇게 ‘사망’한 아이보들을 한데 모아놓고 장례식을 치르거나 기도를 올리는 모습을 담고 있었다. 아이보와 함께 지냈던 사람들은 제단에 올려놓은 아이보 곁에 이들의 일평생을 담은 글을 적어두기도 한다. 주인 곁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추억이 있었는지를 고스란히 추억할 수 있는 글은 평범한 반려견을 떠나보내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 보유자는 “내 아이보를 위해 기도해주는 절이 있다는 사실에 매우 안도감을 느낀다”라고 말했고, 또 다른 보유자는 “다른 아이보들에게도 도움의 손길이 필요하다. 내 아이보와 작별 인사를 결정했을 때 나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일부 보유자는 장례식을 마친 뒤 고장 나지 않은 부품을 다른 아이보 보유자에게 기증하기도 했다. 이러한 절차는 아이보를 위한 장례식 및 기도의 시간을 마련한 해당 절에서 할 수 있었다. 절 관계자는 “모든 것에는 영혼이 있다”라면서 “로봇 개에도 영혼이 있기 때문에 장례식을 치러주는 것”이라고 전했다. 아이보는 세상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지만, 또 다른 로봇 반려동물이 그 빈자리를 속속 채우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 교류 즉, 공감은 인간이 로봇 개에게 투사한 감정에 불과하다. 사실상 로봇 개가 인간의 감정에 공감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로봇과의 감정 교류가 강제되는 사회에 살게 될지도 모른다. 이 책의 주인공 한탸에게 있어서 책은 바로 이런 로봇 개와 같은 것일까? 물질 안에 담겨 있는 영혼을 찾아내고 압축기 앞에서 제사를 치러주는 것일까?     


하이패스를 장착한 차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고, 최근에는 작은 부스에 앉은 중년의 여인에게 돈을 내고, 말을 걸고, 인사를 하고 지나가는 요금소가 하이패스로 지불되는  요금소에 비해 더 적어졌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요금소의 자동 영수 기능 역시 로봇의 기능과 별반 다르지 않다. 


사람과 사람의 접촉이 필수적이던 노동이 기계로 대체되면서 우리는 점점 공감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공항에서, 호텔에서, 백화점이나 정부 기관에서 이제는 사람 대신 로봇들이 방문자를 안내하고 관리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이 책의 주인공 한탸가 압축기의 빨간 스위치와 녹색 단추를 교대로 누르는 창고와 같은 매우 시끄러운 고독의 공간에 갇혀 버렸는지 모른다.     


동물 복지와 도살 

채식주의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채식주의가 결코 논리적 일관성을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남방 돌고래를 살리기 위해 고등어를 공급해 주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남방 돌고래와 고등의 생명 간에 어떤 차이가 있냐고 물으면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다. 식물에는 생명이 없느냐는 질문에도 적확한 대답을 내놓기 힘들다. 생명의 무한 반복이 가능하다는 이유만으로 끊임없이 식물의 생명을 절단 낸다는 것 또한 도덕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채식의 기준이며, 어느 생명까지가 절단 내어서는 안 되는 대상인가? 이에 대해 어느 채식주의자는 매우 타당한 절충안(?)을 제안한 바 있다. "모두가 다 채식주의자가 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단지 자신이 허락할 수 있는 부분까지 최선의 채식주의자가 되면 된다. 단지,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다른 무언가의 생명을 절단내야 한다면, 이에 대한 예의는 충분히 갖추자"는 주장이다.      


최근에 ‘인도적으로 동물을 사육하고, 스트레스ㆍ질병의 위험 없이 건강하게 자란 축산물을 소비해야 한다’라는 소위 ‘동물 복지’ 사회적 논쟁거리로 주목받고 있다. 쾌적한 사육 환경을 제공하여 살아 있는 동안 스트레스를 최소한으로 하자는 윤리적 운동이다. 


언젠가 TV에서는 도살장으로 가는 돼지를 강제로 트럭에 태우지 않고 돼지가 스스로 타도록 장시간 기다리던 돼지 사육자 부부의 모습이 방송된 적이 있었다. 그들은 돼지를 도살장으로 출하(?)시키고 나면 온종일 우울해하고, 심지어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도살되는 돼지에게 고통은 주는 것을 피할 수는 없으나, 그의 생이 고난이 되지는 않겠다고 하는 마음으로 돼지를 키우는 이들에게서 큰 감명을 받았다. 


물론  동물 복지에 소위 논리적 일관성이라는 잣대를 들이 된다면 딱히 답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이 책의 주인공 한탸가 이야기하는 ‘인간적인’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사실 이 소설을 읽기가 만만치 않다. 작가가 일생을 두고 한 회의와 명상이 매우 복잡한 그림으로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progressus ad originem(프레그레수스 아드 오리기넴, ‘근원으로의 전진’)과 regressus ad futurum (레그레수스 아드 푸투룸, ‘미래로의 후퇴’)가 같은 말이고 “너의 뇌는 압축기에 짓이겨진 한 꾸러미의 사고에 불과하지”라는 말에는 가늠할 수 없는 인생의 고뇌가 느껴지지만, 그 속뜻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근원으로 전진하고자 했으나 결국 미래로 후퇴하고 말았다는 뜻인가? 아니면 살아온 인생이 알고 보니 후퇴였지만 그것이 곧 근원에 대한 접근임을 깨달았다는 의미일까? 영혼의 승천을 통해 육체를 벗어나고자 했던 자는 마치 육체의 구분 선을 목까지 끌어 오렸던 가톨릭 신부들처럼 근원에 접근하고자 하였으나 결국 목 위에 남아있던 뇌는 한 꾸러미의 사고에 지나지 않았다는 한탄일까?. 


이 소설은 차라리 시에 가깝다.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려다가 5층 건물에서 떨어져 죽은 보후밀 흐라발은 소설 속 주인공 한탸를 통해 vanitas vanitatum (바니타스 바니타툼, ‘헛되고 헛되도다.)라는 고백을 한다. 마지막 순간 작은 압축기 안으로 들어간 한탸의 눈앞에 살 냄새나던 너무나 인간적인 집시의 이름이 떠오른다. 그녀의 이름은 일론카였다.            


무엇이 그를 절망케 했을까? 술은 영혼을 위해 마시지만, 우유는 몸을 위해 마신다. 그는 우유를 먹는 인간, 아니 노동자에 절망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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