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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인순 Sep 17. 2018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소확행을 찾는 사람

책 속의 사람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여기는 말이다, 법도가 있다면 밀림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완전한 삶을 가지는 인간들은 있다. 라게리에서 신세를 망치는 놈은, 식기 그릇이나 핥는 자식, 의무실이나 드나드는 자식, 그리고, 동료를 밀고하는 자식뿐이다.”     


“여기서도 완전한 삶을 가지는 인간들이 있다”라는 이 말,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여기서도’라는 말,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도’라는 단어는 평생을 두고 가슴을 찌르는 말이 되었다. 먹고살기 위해서, 가족을 보살피기 위해서, 미래를 위해서, 완전한 삶을 포기해 왔다. 그리고 늘 ‘여기서는’ 그럴 수밖에 없어,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다고 변명을 했다. 덕분에 독재 정권 밑에서도 행복했고, 부정한 기업의 직원으로 살면서도 한편으로 편할 수 있었다. 자유가 거의 무제한으로 확장된 수용소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행동과 생각은 사실 수용소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한국에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이 있었다면 러시아에는 이반 데니소비치의 일일이 있었다. 1930년대 박태원 구보 씨의 '일일'이 거리를 걷는 사건과 사색의 하루였고, 1970년대 최인훈의 '일일'이 국가 밖의 혼란과 국가 안의 암울함에 대한 작가의 회의였다면 1950년대 이반 데니소비치의 '일일'은 마치 수용소와 같은 소비에트 공산 체제에서의 3653일 반복되는 대표적 하루였다. 1951년 초, 라게리 수용소에서 8년째를 맞이하는 이반 데니소비치 슈 호프는, 여느 때처럼, 오전 5시 기상의 신호가 되는 쇳조각을 두들겨 대는 망치 소리로 눈을 떴다. 그리고 그의 일상이 시작된다.      


북적이는 수용소 식당에서, 생선 뼈다귀와 절반은 썩은 양배추 잎을 넣어 끓인 죽의 아침 식사를 하고, 550그램짜리 빵을 두 조각으로 나누어 침상에 감추기도 한다. 엄동설한 속에서 블록을 쌓아 발전소의 벽과 지붕을 만들기도 하고, 작업장의 취사 담당 죄수를 속여서, 2인분의 죽을 얻어 내는 데 성공하기도 한다. 중노동과 자질구레한 일들이 반복되는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누웠을 때, 슈 호프는 병도 걸리지 않고, 중영 창(重營倉)에도 들어가지 않고, 배급량보다 1인분 더 얻어먹게 된 죽에 대하여 만족감을 느낀다. 그리고 ‘거의 행복이라고도 할 수 있는 하루’가 지나간다. “이와 같은 날이, 슈 호프가 수용소에 들어와서 나가는 날까지 3653일간이나 계속되었다. 윤년(閏年) 때문에, 3일이라는 일수가 더 붙여져서.”라는 표현으로 작가는 하루하루의 변함없는 반복되는 수용소의 일일을 재치 있게 폭로하고 있다.     


작가는 억압적 상황에 대한 일방적인 폭로나 자유에 대한 추상적인 명상이 아니라, 인간 본연의 감각과 본능적인 욕구들을 표현함으로써 인간의 진정성 있는 삶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 소설은 수용소라는 한계적인 상황 속에서 나타나는 인간적인 삶의 면모들을 지루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서술한다. 그리고 석방을 기약할 수 없는 수용소 생활의 실상을 단 하루의 시간에 압축함으로써 그 하루하루가 절망적임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한편, 이러한 절망과 희망을 수용소 바깥으로 확장한다. 절망스러운 수용소의 하루를 작가는 운수 좋은 날로 결론 내리고 있다. 그리고 간간이 내부의 적과 반대자를 끊임없이 억압해야만 유지되는 스탈린 체제의 희생양을 이반 데니소비치에게 투사한다. 작가는 실제로 겪은 수용소 생활의 하루를 사실적인 필치로 묘사하여 사회주의 사회의 근본적인 모순을 생생히 드러낸다.     

솔제니친

오늘날 지루한 러시아 사실주의 소설을 누가 읽는단 말인가? 영화나 소설, 만화나 드라마 속에서 수없이 보아온 수용소 생활에 대한 세세한 묘사를 새삼스럽게 문자로 읽어 낸다는 것은 고문에 가깝다. 인간의 지능이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경사가 없는 스토리 전개이다. 오르막도 보이지 않고 내리막도 기대되지 않는 지루한 묘사를 읽어나가는 데에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특히 내 경험이 아닌 것에 대해 집중력을 유지하고 공감을 가진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 수 있다. 그런데도 러시아 사실주의나 폭로 주의 소설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지루한 문장 사이에 잠깐씩 비취는 주옥같은 경구 때문인가? 아니면 누군가와 대화할 때 필요한 독서 리스트를 채우기 위해서인가?      


우리는 어쩌면 표현과 내용의 평범함 때문에 사실주의 문학에 끌리는지 모른다. 예술적 단순성을 추구하고 가능한 평범한 문체를 사용하여 감정적으로 두드러지지 않게 만들려는 일관된 노력. 아름다운 글쓰기를 피하고, 동시대 혹은 거의 동시대의 현실에서 주제를 선택하고 서술하는 산문적 요소로 대표되는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은 언제 어디서 읽더라도 자신이 처한 환경과 심리에 투사시킬 수 있다. 이 소설 속에서도 1950년대라는 시간, 소비에트화 된 러시아의 수용소라는 공간을 넘어서 인류에게 전해주는 보편적 메시지가 있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문장과 문장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스토리의 늪 속에서 꿈틀대는 동물처럼, 봄날 연두색으로 펄럭이며 움찔 되는 숲처럼, 그렇게 다가온다.     


중국의 농민공과 소확행

언젠가 중국의 농민공을 본 적이 있다. 대도시의 한 복판에서 일하고 있던 그들 너머로 화려한 오리고깃집이 보였다. 그들과 오리고깃집 사이에는 아무런 장벽이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보이지 않는 철조망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하루에 2개의 빵과 한 그릇의 수프를 공급받으면서 일하는 그들에게는 연봉 170만 원이라는 수용소 울타리가 존재했다. 연봉 170만 원은 그들의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의 가족들의 생존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수용소는 더욱 안전하고 철조망은 더욱 견고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유일한 행복은 속없는 찐빵 두 개와 걸쭉하고 밋밋한 수프 한 그릇일 것이다.


반면 또 다른 행복이 있다.     


“나는 팬티를 모으는 게 일종의 취미다. 서랍 안에 바듯하게 접어 돌돌 말은 깨끗한 팬티가 쌓여 있다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작기는 하지만 확고한 행복(소확행)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하는데, 이건 어쩌면 나의 특수한 사고 체계 인지도 모르겠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랑켈한스 섬의 오후’라는 수필에서 ‘소확행’이란 단어를 등장시키면서 이는 오늘날 문화 현상을 대변하는 언어가 되었다. 이와는 다른 결에서 내가 기억하는 소확행이 있다. 그녀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한 때,  TV에 가끔 나오던 여인이었다. 일명 ‘살림의 달인’이라는 타이틀이 붙어있는 그 여인은 보자기를 쌀 때도 꽃과 같은 마름질로 아름다움을 추구했고, 건조를 위해 빨랫감을 줄에 널 때도 크기와 각, 색과 모양을 맞추어 조화의 아름다움을 관조한다고 했다. 음식을 할 때도 창의적 발상과 자기만의 세계를 담는다는 그 여인은 모든 자질구레한 살림을 행복으로 바꾸어 놓는 기술이 있었다. 그것이 그녀에게 있어서는 작고 확실한 행복이었다.


그러나 최근 ‘동아일보’ 인터넷판에 실린 글은 이러한 작고 확실한 행복이 한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일정 부분 왜곡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 주인공처럼 매일 계절의 흐름을 느끼고 싶어 제철 과일로 담근 줄 만듭니다. 달콤한 딸기주 한 잔 마시며 오늘치 봄을 먹는 기분이랄까요? 취업 걱정은 잠시 뒤로하고 현재를 즐기는 저만의 방법이에요”(26살 남. 대학생)      


“박사과정을 밟지 않을 예정입니다. 불명확한 일에 나를 갈아 넣기 두려워요. 결혼 생각도 없습니다. 배우자가 생기면 살의 함수가 복잡해지니까요. 당장 살아가도 벅찬데, 미래는 웬 말이에요. 저녁에 백주 한잔하며 드라마를 보면, 그게 행복이죠.” (20살 여. 대학원생)        


작은 행복이라고 해서 다 확고한 행복은 아닐 것이다. 여기서 ‘확고’란 단어는 어떤 의미로 쓰였을까? 실패하지 않는다는 뜻일까? 가능성이 100%라는 의미일까? 그것은 마치 이반 데니소비치가 쌓고 있는 벽돌과 같은 것일까? 누구나 한 번쯤은 자신의 삶이 수용소와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유란 자신의 환경에 따라 새롭게 해석되며, 관점에 따라 그 해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자유를 구속하고 있는 수용소의 존재를 인식하는 순간만이 살아있는 순간이고, 그것이 진정한 자유이다. 대부분 그 구속을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자유를 확장할 수 없다. 지금의 작고 확고한 행복이 자유의 확장을 억제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열정 없는 행복

소확행과 함께 최근 유행하는 말 중에 ‘워라밸’이라는 말이 있다. ‘워크 앤 라이프 밸런스’의 줄임 말이다. 일에 점유된 시간을 되찾고자 하는 목적으로 하는 작은 움직임이자, 절대적으로 많은 한국의 노동 시간에 대한 반성적 운동이기도 하다.


또한, 최근 젊은이들이 찾는 좋은 직장에 대한 기준이 되기도 한다. 이는 직장이나 일에 매인 시간이 한국인의 행복을 저해하는 절대적 문제임에 대한 각성에서 시작되었다. 일을 줄여야 행복하고, 일을 떠난 일상의 시간을 늘려야 삶의 진정한 가치를 찾을 수 있다는 가치관의 이정표이다.


점점 더 사람들은 일하는 것보다는 여행을 즐기고, 가족과 시간을 보내며, 가슴으로 원하는 취미 생활을 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에 솔직해지고 있다. 그리고 고통스러운 경쟁에서의 해방에 더욱 적극적이다. 더는 ‘일’이라는 것은 우리의 열정을 쏟아부을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는 선언과도 같다.


우리 세대의 관점에서 보는 ‘워라밸’을 둘러싼 주제는 좀 더 복잡하다. 한편에서는 열정을 쏟을 일자리가 없어 청년 실업이 심각하다고 아우성이고, 또 한편에서는 삶의 질을 우선시하는 ‘워라밸’을 추구한다고 하니 시대의 모순이 주는 어리둥절함이 없지 않다.


현대 사회는 ‘일(Work)’ 이 있어야 ‘삶(Life)’도 있고,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그 둘 사이에 ‘균형(Balance)’도 존재할 수 있다는 선입관이 여전히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좀 더 보수적인 관점에서 이야기하자면 힘들게 찾은 일에 자신의 열정을 집중하지 않고, 삶이라는 이름의 모호한 가치에 시간과 열정을 낭비한다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린 포스트 코리아’라는 신문에서 최근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워라밸’이란 단어 외에도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는 신조어들이 많이 있다.


그중에 몇 가지 예를 들 자면 ‘가심비’ 즉, 가격이 주는 만족감을 뜻한다. Night와 Sport의 합성어인 ‘나 포트족’, 1인과 이코노미를 합성한 ‘1 코노미’는 혼술, 혼밥 등으로 대변되는 홀로 즐기는 인생을 뜻한다. ‘포미(Foreme)’는 건강(for health), 싱글(one), 여가(recreation), 편의 (more convenience), 고가(expensive)의 합성어인데, 이렇게 유행되는 신조어 어디에도 우리 세대의 열정의 개념은 찾아보기 힘들다.


열정이란 사실 선택이고, 선택이란 선택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일과 삶에 대한 균형은 사실상 두 가지를 다 가지고 싶은 욕망에의 다른 표현이라고 의심받을 수 있다.     


반복되는 수용소에서 느끼는 작은 행복은 벽돌 하나 쌓는 데, 투자한 열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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