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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인순 Sep 25. 2018

‘살해당한 베토벤을 위하여’. 희망을 찾는 사람들

책 속의 사람들

살해당한 베토벤을 위하여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의 서평에는 공통적으로 나치와 아우슈비츠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독자들이 이 책을 대할 때, 베토벤의 음악을 유대인 학살이라는 인간의 야만성에 대비하여 감상의 구조를 잡아가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독일인에게 있어서 아우슈비츠는 여전히 강렬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마치 세월호가 사고에서 사건으로 그리고 역사에서 이야기로 진보하는 것과 같다. 아우슈비츠와 세월호는 너무나 강렬해서 오히려 역사를 떠났다. 역사를 떠났다는 것은 그것이 이야기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작가 엠마뉴엘 슈미츠는 베토벤을 인간의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꿈과 희망의 상징으로, 그리고 아우슈비츠를 이런 꿈과 희망의 몰락과 좌절의 서사로 재해석했다.


작가는 자신의 인생을 관통하여 만나고 헤어졌던 베토벤을 통해 인간의 정신적 고통과 인내, 꿈과 희망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아우슈비츠의 역사를 기억으로 환생시켜 삶의 좌절과 낙관주의의 장애물로 해석하기도 한다. 여기서 아우슈비츠는 역사를 떠나 실존으로 구술된다. 작가의 실존의 시간, 즉 베토벤과 아우슈비츠가 잠깐 역사를 떠나 있는 동안, 그는 인간의 꿈과 좌절과 극복에 관해 이야기를 마름하고 다시 역사로 돌아온다.


“아우슈비츠는 그저 한 장소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대학살만을 지칭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개개의 인간을 분쇄하는 권력, 전체주의를 상징하고, 인간의 본질을 비워낸 세상을 상징한다. 아우슈비츠가 증명하는 것은, 과학과 기술에는 혹 진보가 있을지 몰라도, 인류 안에는 결코 진보가 없다는 사실이다. 철저한 실패. 시간이 흐르면서 인간은 더 선해지지 않았고, 더 똑똑해지지도 않았으며, 더 도덕적인 존재가 되지도 않았다.”      


엠마뉴엘 슈미트는 이성과 과학의 발달이 도덕의 궤적을 정의의 방향으로 이끈다는 마이클 셔머의 주장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이성과 과학이 사회적 제도의 강화와 법적 체제의 끊임없는 정비를 통해 사회질서를 유지할 수는 있어도, 인간 도덕성의 본질적 진보를 담보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도덕이 진보한다면 굳이 우리에게 음악을 떠난 베토벤이 필요한 이유도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여전히 베토벤의 실존이 필요하다. 인류의 도덕이 진보하는가 아닌가에 대한 논쟁은 책의 범위를 넘어선다. 작가는 개인의 문제만을 집요하게 파고 있다. 개인으로서의 우리 인생의 궤적에 대하여, 분명 우리 인생에도 아우슈비츠가 존재했고, 그리고 그때 우리 역시도 베토벤을 죽였다는 것이다.            


열다섯 살 되던 해, 짧지만 강렬한 인상으로 베토벤을 만난 슈미트는 스무 살에 베토벤을 떠났다. 첫사랑과의 연애가 그렇듯 베토벤과의 잦은 만남은 그와의 사랑의 불을 사그라지게 했다. 베토벤 없는 삶에 아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다. 작가는 “연인들은 언제나 두 사람이 하나 되게 만들었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헤어지는 법’이라는 말로 그 헤어짐의 이유를 설명했다. 


시간이 지났고, 덴마크의 한 미술관을 방문한 작가는 미술관을 가득 채운 베토벤의 초상과 데스마스크를 본 순간, 설명할 수 없는 충격에 빠졌다. 그리고 그는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키키 판 베토벤’이라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에게 다시 베토벤이 돌아온 것이다. 아니, 베토벤에게 그가 돌아간 것이다.      


슈미트는 바흐의 음악이 신이 작곡한 음악이라면 모차르트의 음악은 신이 듣는 음악이라고 했다. 그러나 베토벤의 음악에 대해서는 신에게 결별을 고하는 음악이라고 평했다. 그에 따르면 신에게 이별을 고한 베토벤의 음악은 순전한 인간의 음악으로 세상에 홀로 섰다. 


베토벤은 신이 부여한 가혹한 운명을 거부하고 자기의 운명을 조종하는 자의 신의 자리에 자신을 앉혀놓았다. 작곡가로부터 소리를 빼앗아 간 신은 이를 극복하고 작곡을 지속해 간 베토벤을 바라보며 머쓱해졌을 것이다. 베토벤은 작가의 영웅이 되었고, 작가는 독자들에게도 베토벤을 만날 것을 권유하고 있다. 영웅이란 “절대로 기권하지 않고, 기권하지 않고, 장애물을 뛰어넘으며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 용기, 고집스러움, 낙천주의를 무기로 사용하는 사람”이라는 부연 설명과 함께.    


인간은 누구나 “스무 살이 되면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와 약혼을 하고, 대학에 들어가면서 그 시대와 결혼을 하게 된다.”라는 말로 작가는 우리가 베토벤과 결별할 수밖에 없는 인과 관계를 설명한다. 그리고 자신도 서른이 되기 전에 자신을 둘러싼 시대의 가치관과 규칙, 편견을 수용하게 되고, 그래서 베토벤과 결별하게 되었다는 고백을 한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로 대변되는 오늘날 젊은이들의 초상이 그려진다. 자본주의의 젖과 꿀, 신자유주의의 물과 음식을 먹고 자란 우리는 차별이야말로 진정한 정의라는 마녀와 이미 약혼했다. 특히 남성으로 자란 우리는 이미 남성우월주의라는 시대의 악마와 결혼을 했다.     


‘키키 판 베토벤’이라는 소설 속 할망구를 통해 월광 소나타를 들어도 감동하지 않고, 비창을 들어도 울지 않으며, 영웅 교향곡이 더 이상 자신을 흥분시키지도, 전원 교향곡이 자신을 춤추지 못하게 되었다는 그의 완곡한 고백과 함께 어느 날 비통을 이겨 낸 베토벤을 통해서 스스로 낙천주의의 호루라기를 얻었노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자신의 몸속으로 들어온 베토벤이 이끄는 낙천주의는 휴머니즘과 비극에 대한 의미이자, 미래에 대한 희망이라고 고백한다. 여기서 휴머니즘이란 타자의 불완전성에 대한 이해이자 자신의 결핍에 대한 수용이다. 결국, 불완전성과 결핍을 받아들일 때에서야 미래에 대한 희망이 그 서광을 발휘할 수 있다고 작가는 힘주어 이야기하고 있다.      


모든 예술은 연금술과 같다. 베토벤의 유일한 오페라, 피델리오의 막이 올라갈 때, 그 음악은 소소하고 지루하며, 심지어 이상하기까지 했지만, 막이 내려올 때는 감사의 마음에 숨이 멎으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정한 예술은 인생의 1막과 2막 사이에 있는 자신을 변화시키는 비밀의 돌이다. 철이 금으로 바뀌는 신비롭고도 갑작스러운 변화는 베토벤의 삶, 그 자체이자 그가 오늘날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연금술사의 돌이기 때문이다. 연금술사의 돌. 그것은 바로 낙천주의이다.      


페미니즘

2018년 대한민국에서 가장 절망하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페미니스트’들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2018년 그들은 우울하다. 특히 안희정 전 지사의 재판은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쟁터였다. 그들은 패배했다. 무죄 판결이 난 후, 그들은 좌절하고 “세상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라고 탄식했다. 곳곳에서 일어나는 국지전에서도 그들의 승률은 그리 높지 않다. 그들은 공개된 논쟁에서도 그리 성공적이지 못하다. 그래서 좌절하고 있다.      

채식주의와 마찬가지로 페미니즘은 그 행동과 이론의 일관성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그들은 공격받지 않기 위해 한마디 한마디 방어적인 화법을 사용해야 하고 각종 통계나 사회적 효율성, 심지어 진화론의 도전까지 받아내야 한다. 도전 속에서 살아 존재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지만 다행히도 그들은 “더 이상 숨을 쉴 수가 없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2018년 2월 13일 대세 아이돌 그룹 에이핑크의 멤버 손나은. 그녀는 인스타그램에 'Girls can do anything'이라고 적힌 스마트폰 케이스를 들고 찍은 사진을 올렸다가 페미니즘 논란에 휩싸였다. 이 문구는 당시 손나은과 화보 촬영을 함께 한 프랑스 패션 브랜드의 슬로건으로 밝혀졌다. 논란이 불거지자 그녀는 해당 사진을 즉시 삭제했다. 페미니즘은 패배했다.      


레드벨벳 멤버 아이린은 SKT 옥수수와 tvN에서 방영 중인 예능프로그램 '레벨업 프로젝트 2'의 천만 조회 달성 기념 팬 미팅 자리서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고 밝힌 후 페미니스트 논란에 휩싸였다. 이 자리에서 아이린은 "최근 읽은 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82년생 김지영'을 읽었고. '별일 아닌 것들로 별일이 됐던 어느 밤'도 읽었다"라고 답을 했다. 


남성 팬들은 아이린이 페미니즘 책을 읽었다는 비난을 퍼부었고, 인터넷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 중 아이린 갤러리와 레드벨벳 갤러리에 아이린의 발언에 분노하는 내용이 담긴 글과 아이린 사진을 불태우는 인증샷을 올렸다.     


82년생 김지영의 영화화를 반대하는 청원이 등장하는가 하면 극단적 페미니즘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것에 반감을 품는 일부 여론은 페미니스트의 교과서로 언급된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현실과 동떨어지게 과장되고 일방적인 차별을 그려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반응은 심지어 영화 캐스팅에까지 이어졌다. 페미니즘에 반대하는 이들은 여주인공으로 발탁된 정유미를 향해 “페미 선언한 건가?”, “논란될 것을 왜 해?”라는 등의 비난까지 퍼붓는 상황이다     


오늘날 한국의 페미니즘에도 연금술사의 돌이 필요하다. 마치 오페라 피델리오의 막이 올랐을 때와 막이 내려졌을 때의 감정의 변화와 같은 극적인 상황의 전환 말이다. 작가 엠마뉴엘 슈미트는 우리에게 베토벤을 자주 만나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술주정뱅이 아버지와 하녀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탐욕스러운 아버지로부터 구타를 당하면서 음악을 배웠고, 사랑에 실패했다. 그리고 음악가로서의 인생의 황금기에 그는 청각장애인이 되었다. 우리가 그를 만나야 하는 이유는 그가 어려움을 극복한 천재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베토벤을 몸속에 담은 작가 엠마뉴엘 슈미트가 전해주는 꿈과 희망의 역설, 즉 낙천주의자 선언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페미니스트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응원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1. 나는 낙천주의자다. 왜냐하면, 세상이 가혹하고, 불공평하고, 냉담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 나는 낙천주의자다. 왜냐하면, 삶이 너무 짧고, 제한적이고, 고통스럽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3. 나는 낙천주의자다. 왜냐하면, 죽음에 대한 지식의 애도를 끝냈기 때문이고, 그 후에 대해서는 내가 결코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4. 나는 낙천주의자다. 왜냐하면, 모든 균형이 연약하고, 일시적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5. 나는 낙천주의자다. 왜냐하면, 진보를 믿지 않고, 더 정확히 말해 자동적이고, 필연적이고, 피할 수 없는 진보가 있음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없고, 우리가 없고, 우리의 의지가 없고, 우리의 땀이 없는 진보가 존재할 수 있음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6. 나는 낙천주의자다. 왜냐하면, 최악이 다가올까 봐 두렵고, 그래서 그것을 피하기 위해 할 수 있는 한 무슨 일이든 다 할 것이기 때문이다.


7. 나는 낙천주의자다. 왜냐하면, 부조리가 내게 불어넣어 준 것이 유일하게 지적인 명제이기 때문이다.


8. 나는 낙천주의자다. 왜냐하면, 절망이 내게 속삭인 것이 유일하게 논리적인 행동이기 때문이다.


9. 그렇다. 나는 낙천주의자다. 왜냐하면, 그것은 유리한 게임이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신뢰한 것이 옳았다고 운명이 증명한다면 나는 승리한 삶을 산 것이다. 그러나 운명이 내가 실패했음을 증명한다 해도 난 아무것도 잃은 게 없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유용하고, 고귀하고 나은 삶을 산 것이 된다.           


피델리아는 베토벤의 유일한 오페라이다. 베토벤이 오페라에 아예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누구보다도 뛰어난 오페라 작곡가가 되고 싶었던 그는 수없이 많은 고전문학 작품을 오페라 소재로 고려해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베토벤이 원했던 휴머니즘을 담은 소재는 드물었다. 


모차르트 시대에는 농도 짙은 남녀관계를 다룬 에로틱한 오페라, 마법이나 주술이 등장하는 환상적인 오페라가 인기를 누렸고,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직후에는 예술성도 없는 아류 희극 오페라들이 들끓어 베토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것이다. 베토벤이 고르고 골라서 자신의 유일한 오페라로 만든 것이 바로 영웅적 여성을 그린 ‘피델리오’이다.      


피델리오는 정치적 이유로 감옥에 갇힌 자신의 남편을 구조하기 위해 스스로 남장을 하고 감옥의 간수로 위장 잠입한 여성을 그린 오페라이다. 작가는 피델리오 공연을 본 소감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베토벤의 독특한 서정극은 기념비적인 최초의 근대적 오페라인 오르페오를 뒤집어엎으면서, 동시에 그 작품을 계승한다. 


베토벤의 극에서, 영웅은 아내인 에우리디케를 찾으러 지옥으로 내려가는 남편 오르페우스가 아니라 감방에 갇힌 남편 플로레스틴을 찾으러 가는 아내 레오노레이다.” 베토벤이 그린 영웅은 나폴레옹이 아니라 남편을 구원하는 여성이었다.      


베토벤을 자주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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