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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인순 Sep 29. 2018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늙어가는 사람들

책 속의 사람들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 서서

“최선의 삶이란 어떤 주어진 여건에서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하는 것임을 알았다.” (헬렌 니어링. ‘사랑 그리고 마무리’ 중에서)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에서 파커.J.파머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은 민주주의의 첫 번째 집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은 그의 또 다른 저서인 이 책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에서도 잘 조명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민주주의’는 바깥을 향해 내민 손, 즉 일과 소명, 삶과 관계를 나타내는 하나의 지향점이며, ‘모든 사람의 마음’은 자신의 안쪽으로 향하는 종교와 영혼에 대한 상징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파커 파머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마침내 죽음의 바로 앞(Brink)까지 다가 선  것이다.

    

이 책의 영문 제목은 ‘On the Brink of Everything’이다. 번역자는 ‘Brink’라는 단어를 ‘가장자리’로 번역했다. 그러나 책의 전체 내용을 보면 ‘Brink’는 ‘자장 자리’가 아닌 ‘직전(直前)’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 'Brink of Everything’은 모든 것의 종말이 아니라 시작을 위한 준비가 완료된 상태를 의미한다. 윷놀이 판을 다 돌고 나오기 직전의 참먹이 자리, 또는 새로운 세상을 여는 열쇠, 그것이 바로 ‘Brink’다. 참먹이 자리에 서서, 새로운 세상을 여는 열쇠를 쥐고 있는 작가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나는 종종 세계의 위대한 지혜의 전통이 자리한 유서 깊은 길에서 훌륭한 길잡이를 발견했다. 하지만 일흔아홉 살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바운더리 워터스를 지나 내가 트레킹한 길들만큼 도움이 되는 것은 없다.”      


이 책의 내용은 일곱 가지 주제로 설계되어 있다. 1장에서 인생의 가장자리에 선 시선을 정의 한 작가는 2장에서 세대 간 교감을 이야기하고, 이어서 3장에서는 실재와 현실에 대한 시각을 강조한다. 4장에서 직업과 소명의 구분을 제안하고, 5, 6장에서 자기 바깥을 향한 삶과 자신의 안으로 들어가는 성찰을 넘어, 마지막 장에서 마침내 삶의 가장자리에 선 인간의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작가는 첫 번째 장 ‘가장자리에서의 시선’에서 코트니의 첫 문장을 인용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왜 이 책의 제목이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이며, 이 제목을 통해서 진정으로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천천히, 그러면서도 열정적으로 그려나간다.      


“‘내 딸은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 있다.’ 그것은 정확하게 내가 오늘 일흔아홉 살의 나이로 서 있는 곳이다. 나는 내 여생의 가장자리에 서서 종종 경외감을 느낀다. 그 여생에는 죽음이라 불리는 부분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곳에서는 때로 그것이 거의 다 보인다.“      


”내 딸은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 있다.’“라는 이 말은 사실 ”내 딸은 모든 것의 시작 직전에 있다.”라는 뜻이다. 어린 생명을 바라보며 작가는 죽음 직전에 진정으로 서 있고 싶은 자리와 그 자리에서 말하고 싶은 이야기를 명확히 한다. 작가는 ”온전함이란 완전함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말로서 허점투성이고 파편화된 우리 인생을 경의의 눈으로 바라볼 기회를 선사하는 한편,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죽음의 강을 건너기 전, 강가에 서서  자신이 걸어온 길에 대해 ”의미가 있는가“라고 묻지 말라고 조언한다.     


이 책에서 가장 공감할 수 없는 부분은 2장, ‘젊은이와 늙은이’에 대한 내용이다. 작가는 노인은 젊은이에게 해 줄 이야기가 있고, 젊은이는 노인의 이야기를 경청함으로써 노인에게 힘과 기쁨을 줄 수 있다는 말로 젊은이와 노인 세대 간의 일방적인 공감과 어색한 교류를 제안한다.     


”우리 노인네들은 젊은이들에게 줄 선물을 갖고 있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자기들이 우리에게 무슨 선물을 줄 수 있는지 모를 때가 많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 있다. 나이 많은 사람들은 멘토링을 요청받으면, 우리가 한물갔고 게임에서 퇴장당했다는, 그래서 젊은이들이 우리를 하찮게 여긴다는 두려움이 누그러지는 것을 느낀다. 젊은이들은 이것을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 이십 대의 젊은이들은 나처럼 자기들보다 거의 네 배의 세월을 살아온 사람에게 ‘당신에게 배우고 싶다’라고 말해주는 게 얼마나 힘이 되는지를 거의 알지 못한다.“     


언젠가 유시민 작가는 한 TV 프로그램에서 자신은 누구의 ‘멘티’가 되거나 누구를 ‘멘토’로 삼지 않는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세상을 먼저 살면서 내가 하지 못한 경험을 선행한 사람들은 그저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이다. 한편 어느 철학자는 120살까지 산 후, 타임머신을 타고 20대의 자신에게로 돌아가서 자신이 살아오면서 깨달은 지혜를 전수해 준들 20대의 자신이 그것을 신중하게 받아들이지 못할뿐더러 그렇게 전해 준 지혜가 인생을 개척해 나가는 데 있어서 딱히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노인네들이 젊은이들에게 줄 선물이 있다는 생각은 대부분의 경우 노인네들만의 성급하고 일방적인 착각일 경우가 많다. 사실 노인네들이 젊은이들의 가치관을 이해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대표적인 것이 “아프면 환자이지 무슨 청춘이냐”란 말로 대변되는 ‘열정’에 대한 논란이다. 이 말은 한 젊은 방송인이 김난도 교수의 책 제목에 빗대어 말하면서 유행된 말이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노인네들이 인생의 노정을 통해 체득한 경험이나 지식의 프레임 안에서 자기 삶의 지침을 찾지 않는다. “그런 가르침은 됐다.”라는 거부하기도 하고, “열정 같은 소리 하고 있네”라고 딱 잘라 말하기도 한다.      


세대 간의 교류에 관한 이야기를 마친 작가는 독자들을 향하여 소박한 현실과 명료한 실제로 돌아오라고 강변한다. 그리고 이어서 일과 소명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직업에서 소명을 구분해 내라는 조언이다. 어린 시절부터 여러 가지 직업을 경험했던 작가는 이러한 직업들이 자신의 소명과는 무관하다고 단언한다. 그의 소명은 예나 지금이나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었으며, 그것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행동이 바로 ‘글쓰기’였다고 고백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오랫동안 일했던 직장에서 퇴직한 후, 특별히 할 일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이유는 자신의 직업과 소명을 구분해 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파커J.파머

‘일과 소명’이라는 주제에 대한 글에서, 20년간의 글쓰기를 거쳐서 비로소 자신의 책을 출간할 수 있었다고 고백한 작가는 독자들을 위해 세 가지 글쓰기의 진실을 공개한다. 첫째,  먼저 자신이 쓰는 글의 목적이 집필인지, 출간인지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 자신이 쓴 글에 대해서는 아낌없이 공유하며, 마지막으로 실수를 두려워하지 말고 거침없이 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오히려 조지 오웰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조지 오웰은 자신이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 네 가지로 압축해서 설명한 바 있다. 첫째는 순전한 이기심, 즉 똑똑해 보이고 싶고,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싶으며, 사후에 기억되고 싶은 마음에 기인한 허영심. 둘째는 미학적 열정으로 낱말의 적절한 배열, 글의 리듬감, 단어의 수려함 등등 자신이 체감한 바를 나누고자 하는 욕심. 셋째는 역사적 충동으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을 알아내고, 그것을 후세를 위해 보존해 두려는 욕구. 마지막은 그가 글쓰기의 가장 중요한 것으로 꼽은 것으로서, 바로 정치적 목적이다. 이 동기는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어떤 사회를 지향하며 분투해야 하는지에 대한 남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욕구를 말한다.     


글쓰기의 진실에 대해서는 조지 오웰의 의견이 좀 더 타당한 편이다. 파머 파커가 말한 글쓰기의 첫 번째 진실, 즉 ‘글의 목적이 집필인지, 출간인지를 파악하라’라는 이야기는 오늘날의 환경에 비추어 본다는 그리 설득력이 없다. 오늘날과 같이 자기 생각이 SNS를 통해서 즉각적으로 전파되는 사회에서 글쓰기의 목적으로 집필이나 출간으로 구분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작가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SNS 시대에 맞는 글쓰기의 자의적 강령과 윤리관, 방어적 글쓰기 능력만 갖추면 집필과 출간을 동시에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솔직한 표현을 사용하자면 집필과 출간을 구분하는 자체가 고리타분한 사고이다.     


“나는 여전히 이 지역 사회의 구성원이야”라는 선언으로 자신의 바깥으로의 손 뻗기를 외치는 작가는 세상과 단절한 채, 골방에 앉아 글을 쓰는 것이 나이 들어가는 태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는 여전히 정치적이고 따라서 현재의 백인우월주의에 굴복한 미국의 정치를 비판한다. 그리고 여전히 사랑-평화-정의에 대한 정치적 신념을 감추지 않는다. 사회에 대한 정당한 분노를 바깥으로 뻗는 손에 비유한 작가는 자신의 소명이기도 한 배움과 열림과 부서져 열리는 마음을 통해 끊임없이 나머지 한 손을 안쪽으로 뻗으라고 한다. 그리고 이 안쪽을 뻗은 손이 닿는 곳이 바로 우리 인생의 가장자리이다. 작가는 이를 ‘역설의 계절’, 즉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지점으로 묘사했다.      


‘부서짐의 수용’ 젊은 세대와 거침없이 접촉하고, 두려워하는 모든 것을 회피하지 않으며, 그리고 가능한 많은 시간을 자연에서 보내라고 말하면서 그는 삶의 가장자리까지 달려온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교훈으로 남기기를 원한다.      


파커 파머의 인생이야기를 듣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그림이 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에레보스의 다섯 개의 강물이다. 비록 신화로 그려졌지만, 이 강물들은 결국 우리 인생의 마지막 자리에 남은 도전을 말한다. 다섯 개의 강물은 죽은 후에 건널 강물이 아니라 삶의 가장자리에서 해결하여야 할 과제이다.     


비통의 강 또는 슬픔의 강이라는 뜻의 아케론강을 건너기 위한 최소한의 동전을 준비하고, 통곡의 강, 코퀴토스에서 검은 시름을 넘어가며, 불의 강, 플레게톤에서 모든 비통과 시름을 불로 정화해 깨끗한 영혼을 얻은 후, 우리는 살면서 해결하지 못하고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증오의 강, 스틱스에 이른다. 저승을 일곱 바퀴 돌아 흐르는 강을 지나 마지막으로 망각의 강, 레테에 이르면, 우리는 강물을 마시고 이승에서 해결하지 못한 모든 기억을 잊어야 한다. 레테의 강 앞에서 우리는 문득 깨닫는다. 레테의 강은 언제나 우리의 곁에 있었고, 그러니 지금 이 죽음의 강을 건너가서 펼쳐질 세상도 이제까지 내가 걸어왔던 길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늙음에 대하여

우리는 도처에서 그들을 만났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버스가 도착하면 일련의 노인들이 구부정한 허리를 힘겹게 움직이며 차에서 내렸고, 느리고 부주의하게 행동했다.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던 그들은 대개 안쓰러움만을 남기고 다시 버스에 올라탔다.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서 이들은 이제 공항에도 나타나고, 유럽의 어느 유명한 관광지에서도 볼 수 있다. 몸빼 바지를 입고, 회색빛 잠바(?)를 입고 있던 그들은 이제는 화려한 등산복으로 갈아입었다. 공원과 양로원과 복지시설을 채웠던 이들이 이제는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각종 교양 프로그램에서, 한낮의 카페나 조조 활인 되는 영화관에도 나타난다. 그리고 주말이면 관악산 바위에서도 그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그렇게 곳곳에서 우리는 그들을 만나왔다. 그리고 어느새 우리는 그들이 되었다.      


‘망명 일기’에서 트로츠키가 이야기한 것처럼 “노년은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 가운데 가장 예상치 못 하는 일 가운데 하나다.” 정신적인 측면에서 이 말은 맞다. 우리 인식 속의 노년은 느닷없이 찾아온다. 그러나 육체적으로 늙음이란 매우 천천히 다가온다. 의사이자 철학자인 아툴 가완디는 특별한 노화 과정의 유무에 관해서 한 노인병 전문가에게 물었다. 그가 들은 대답은 “아뇨, 우리는 나이가 들면서 그저 허물어져 갈 뿐입니다.”였다. 허물어져 가는 인생에 있어서 ‘늙음의 미학’이라는 것이 과연 있기나 한 것일까?          


전 세계 인구에서 60세 이상 노인의 수가 가장 빨리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세계 인구는 1950년에서 2025년에 이르는 75년 동안 3배로 증가할  것이 예상되는데, 같은 기간에 60세 이상은 5배, 80세 이상은 7배가 될 것으로 국제연합은 내다보고 있다. 그리고 건강, 여성, 도시화, 고용, 연금, 부양 등이 노인 세대의 문제가 되고 있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오늘날 세계 인구에서 점점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노인은 과연 누구인가?” 한 사람이 ‘늙었다’라거나 ‘나이가 들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은퇴는 오늘날 무엇을 뜻하며 어떻게 개인의 삶을 바꾸어 놓는가? 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다.     


프랑스 유네스코 협회 연맹에서는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노화와 노인 문제"에 관해 설문 조사를 했다. 미국, 방글라데시, 일본, 영국, 프랑스, 이란, 캐나다, 대한민국에서 노인들이 처한 일반적인 상황에 대한 조사 결과 중, “언제부터 늙는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45%가 50~80세 사이의 특정한 나이나 나이 범위를 들었고, 이 가운데 대부분이 60~70세 사이를 들었으며 더러는 20, 35, 42, 45세라고 답했다.     


"몇 살이라고 단언하고 싶지는 않지만 80세를 넘고부터는 20대와 같을 수는 없다고 본다"라든가 "‘40세면 늙게 된다. 이 나이가 되면 더 이상 일자리를 구할 수 없기 때문에’라는 응답도 있었다. 55%는 늙는 것이 근본적으로 ‘정신이 젊은가’에 달렸다는 점에서 나이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었다. 50세에 퇴물이 될 수도 있고 나이 70에 당당할 수도 있다. 80세라 할지라도 혈기왕성할 수도 있는 일이다. 스스로 늙었다고 느낄 때, 더 이상 인생에 애착이 없을 때, 소외감을 느낄 때, 남들이 늙었다고 할 때, 스스로 늙기를 바랄 때, 젊은이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홀로 남을 때, 더 이상 일할 수 없을 때, 성생활을 계속할 수 없을 때, 더 이상 꿈도 희망도 없을 때, 이 모든 경우에 늙게 되는 것이다. 이미 태어난 날부터 늙기 시작했으며 무덤에 묻히는 날에는 이미 늙어 있다. 그러나 스스로 젊다고만 느낀다면 결코 늙은 것이 아니다. “라는 것들이 대체적인 답이었다.     


한편 ”그러면 당신은 언제부터 늙게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10%가 ‘모르겠다“, ”생각지도 않는다“든지 ”때가 되면 생각하리라“는 대답이 있었다. 그 중, 25%는 "생각할 수도 없다"라거나 "생각되지도 않는다"고 답했으며,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젊다는 것이 너무나 좋기 때문에", "난 늙더라도 다른 노인들 같지는 않을 테니까", "이 사회에서는 워낙 먹고살기에 바쁘니까."라고 답한 한편 65%는 ”늙는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라거나 "늙는다는 건 자연의 섭리로서 불가피하므로 그대로 받아들이는 편이 좋다."라고 답하기도 했다.     


설문을 통해 증명된 노인에 대한 인식은 대체로 육체적 노쇠, 상실, 의존, 질병, 무력, 고통과 괴로움 등인 것으로 나타나 결국 어떤 변명이나 이론, 그리고 각성에도 불구하고 늙음이라는 것은 결코 좋은 이미지일 수 없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스콧 니어링의 말은 위안이 된다.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당신이 갖고 있는 소유물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나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 사람이냐, 어떤 행위를 하느냐가 인생의 본질을 다루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단지 생활하고 소유하는 것은 걸림돌이 될 수도 있고 짐일 수도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느냐가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결정짓는 것이다.”   

  

소유물을 떠나서 시간과 늙음에도 위의 말은 유효하다. 결국, 최선의 삶이란 어떤 주어진 여건에서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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