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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인순 Aug 03. 2019

메이지유신과 일본식 미학

극우 친일파의 뿌리를 찾아서 (1)

한국 사람 만들기 (2) 친일 개화파

시모노세키는 우리의 귀에 익은 항구도시이다. 청일전쟁 직후, 청과 일본이 시모노세키에서 조약을 체결한 것도 잘 알려진 바지만 무엇보다도 한국에서 일본으로 가는 대부분 배가 시모노세키를 기착지로 운항한다. 한-일간을 오가는 보따리 장사꾼들이나 배로 일본 여행을 떠나는 사람도 소위 ‘부관페리’라는,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운행하는 배를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만큼 시모노세키는 일본의 다른 도시에 비해 우리에게 친숙하다. 그 시모노세키가 속한 일본의 현이 바로 혼슈[本州]의 야마구치현[山口縣]이다. 야마구치현의 근대식 이름은 조슈이다. 조슈 한(藩)은 에도 막부 시대 4, 5위에 안에 드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춘 큰 한이었다. 조슈는 서양세력을 배척하는 존왕양이의 기치를 들고 바쿠후(幕府)와 갈등을 빚었고, 결국 사쓰마 한과 비밀협약을 통해 1868년 왕정복고를 이루어낸다.     


조슈 한, 즉 야마구치현은 아베 신조의 지역구다. 아베 총리의 조부 오시마 요시미사는 조슈 한의 사무라이 집안 출신으로 보신전쟁(왕정복고로 수립된 메이지 정부와 바쿠후 세력이 벌인 내전)에서 공을 세우고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일본 제국 육군 장교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참여하였으며 일본의 관동군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한편 아소 다로 부총리 겸 외무상은 요시다 시게루 총리의 외손자다. 요시다 시게루는 메이지 ‘유신삼걸’의 하나인 오쿠보 도시미치의 외손자다. 오쿠보는 사쓰마 한(藩) 출신이다. 사쓰마 한과 조슈 한은 바쿠후 말기와 메이지 유신의 과정에서 때로는 적으로, 때로는 협력자였지만 결국은 삿초 동맹, 즉 사쓰마-조슈 동맹을 통해 도쿠가와막부 시대를 종결시켰다.      


이런 배경에서 보자면 현재 총리-아베 신조, 부총리-아소 다로의 연합 구조는 제2의 삿초 동맹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 같다. 사쓰마와 조슈 한(藩)은 본래 제2대 쇼군,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충성하던 한(藩)이었다. 이 두 한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제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강력한 바쿠후 체제를 구축한 이후, 거의 삼백 년 가까이 바쿠후와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잠재적 저항 세력으로 남아 있었다.      


삼백 년 가까이 바쿠후와 대립하며 살았던 그들의 집요함에 집중해 볼 필요가 있다. 조슈를 중심으로 하는 메이지의 전통과 세력이 군국주의를 넘어 현재까지 이어지는 데에는 이런 집요함과 끈질김의 근성이 작동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지배하는 국제관계 학적 목표에는 늘 정한론(征韓論)이 자리 잡고 있다.      


일본 근대사에 8명의 총리를 배출했던 조슈 출신의 초대 총리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하여 1894년 경복궁을 점령했던 오시마 요시사마(아베의 외고조부), 조선 국모 살해를 주도했던 미우라 공사 역시 조슈 출신이다.     


메이지 유신 초기, 혁명을 주도했던 ‘유신삼걸’, 사이고 다카모리, 기도 다카요시, 오쿠보 도시미치 간의 갈등이 정점에 달하게 만든 것도 정한론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1609년 광해군과 도쿠가와막부 간에 체결한 ‘기유약조’에 의해 규정되었고, 이 조약에 따르면 조선과 일본 간의 모든 교류는 반드시 쓰시마 섬을 통해야만 했다.      


1867년 메이지 유신에 성공한 일본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왕정복고를 이유로 이 약조를 폐기하고 새로운 약조 체결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미 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를 겪으면서 극도의 불안감에 싸여있었던 조선은 쇄국정책을 시행하면서 일본의 요구를 한마디로 거부했다. 이에 조선이 일본의 천황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정한론이 일본 사무라이 사이에서 다시 일어났다.     


결국 ‘유신삼걸’ 중 한 명인 오쿠보 도시미치의 반대로 조선 정벌은 유보되고, 이를 계기로 유신삼걸은 결별했지만, 당시 일본의 사무라이들이 조선에 대해 격분한 사상적 배경은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바로 ‘고쿠가쿠’, 즉 국학(國學)에 기초를 둔 ‘일본식 미학’이다.      


新 메이지 세력이라고 불리는 현재의 아베에 이르기까지 일본 극우의 공통된 역사의식의 기저에는 한때 일본이 조선을 통치했다는 국수주의 사상이 깔려 있으며, 따라서 일본에 있어서 조선과 한국은 기회만 되면 다시 통치해야 할 나라이다.     


물론 국제관계의 변화에 따라 현재는 무력으로 한국을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일본의 ‘고쿠가쿠’는 여전히 경제, 문화, 기술, 산업을 통한 한국을 압도하고 가능하다면 지배하고자 하는 의식으로 생생하게 살아있다.     


이런 ‘일본식 미학’은 일본 예외주의의 뿌리이기도 하다. 일본 예외주의란 일본은 자신들의 식민지조차도 아름답게 가꾸었다는 이념이자 사상이다. 식민지 근대화론 역시 이러한 예외주의의 논점이 확대된 것이고, 한국의 친일파들이 경도되어 있는 역사의식이기도 하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아베 신조의 정치적 배경, 일본회의는 헌법 개정을 위한 천만 명 서명 운동의 제목을 '아름다운 일본 헌법을 만드는 국민 모임'으로 명명했다. 이러한 이름의 배경에도 역시 ’ 일본식 미학‘이 자리 잡고 있다.     


언젠가 중국 출장 중에 나이 든 대만 사업가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아마도 메이지 일본이 러시아에 사할린을 양보하는 대신 홋카이도 영유권을 확보하고, 청에 조공을 바치던 류큐를 일본 영토에 포함한 후, 대만 정벌을 시행했던 때, 어린 시절을 보냈던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의 아비지가 전해준 어린 시절 대만을 정벌하러 들어온 일본군 이야기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로 부터 물려받은 기억속의 일본인은 하얀 얼굴에 깔끔한 갈색 군복, 번쩍이는 가죽 장화를 신고 줄 맞추어 행진하던 군인이었다. 이런 이미지 때문인지 나이 든 대만 사람 중에는 여전히 일본을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당시 일본은 선진 문명이요, 새 세계를 밝히는 빛이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한국의 극우 친일파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어린 시절 한국의 할머니들은 국민학교 시절, 일본인 선생들에 대한 부분적인 기억과 의문을 품고 있었다. 늘 깨끗하고 정갈하며, 정돈된 생활을 강조하고 실천하던 일본인 선생님들의 집이 기대한 것과 다르게 지저분했고, 정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이해는 간다. 식민지에 파견되어 열악한 환경 속에서 교육자로 지낸다는 것의 애로는 있었을 것이고, 그것이 생활공간에 반영되었을 것이다.     


일본인 지인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방문했던 일본 지인의 집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 일본 가택이 평수와 비교하면 공간이 작고 비효율적인 측면이 있기도 했지만, 그것을 고려하더라도 그 정도가 심할 정도로 정리가 안 되어 있었다.


대만의 거리를 말끔한 행색으로 행진하던 일본군, 자신의 집을 도무지 정리하지 않는 습관을 지닌 일본인 선생, 어수선했던 일본 지인의 집. 그러한 기억 속에서 떠오르는 한 가지 단어가 있었는데, 바로 ‘일본식 미학’이다.


일본식 미학의 뿌리, 즉 ’ 국학‘은 중국 사상과 문명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비판의 핵심 내용은 ’ 허례허식‘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일본이 구축하고, 일본인이 체득한 일본식 미학에는 허례허식이 가득하다.     


바로 한국의 친일 보수주의자들은 이러한 일본식 미학에 경도된 자들이다. 사실상 메이지 유신의 정신적 밑거름이 된 것은 세 가지 학문, 즉 유교, 란가쿠(蘭學), 그리고 고쿠가쿠(國學)이다. 유교에 관해서는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고, 란가쿠란 개화의 밑거름이 된 학문으로서 네덜란드(화란)를 대표로 하는 서양문물과 문명, 그리고 기술에 대한 학문을 말한다.     


일본의 바쿠후는 기본적으로는 쇄국정책을 표방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서양 학문에 매우 개방적이었다. 특히 일본식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이 등장하면서 후쿠이 한의 대표적인 존왕양이파 사무라이 하시모토 사나이는 “우리는 서양의 기계와 기술은 받아들이고 그 대신 우리의 윤리 도덕은 지킬 것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야기 한 바와 같이 현재 한국의 극우 친일파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고쿠가쿠이다. 이는 중국학에 대한 의식적인 반발에서 출발한 학문이다. 시(詩)를 중심으로 하는 고대 일본 문학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면서 ’ 아름다움‘ 그 자체가 가장 중요한 가치라는 믿음에 근거한 학문이기도 하다.      


일본식 미학에 경도된 자들은 주자학의 형이상학과 글쓰기를 허례허식으로 비난하면서 일본의 고대 시(詩)야말로 중국의 고대 사상을 주자학보다 더 잘 대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일본 고사기에 등장하는 모든 신화가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우기기도 한다. 일본 전통 설화의 미학적 감각에 대한 자부심과 중국에 대한 거부 등이 합쳐지면서 일본만의 배타적인 미학이 형성된 것이다. 이에 대해 대표적인 고쿠가쿠 학자인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맛있는 것을 먹고 싶고, 좋은 옷을 입고 싶고, 큰 집에서 살고 싶고, 돈을 손에 넣고 싶고,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싶고, 오래 살고 싶어 하는 것은 모두가 인간의 본래적 마음이다. 그런데도 이를 좋지 않은 것으로 여기면서, 오히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태도를 대단하게 생각하여 마치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고 바라지 않는 듯한 척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많은 것은 저 중국풍의 시끄러운 위선과 허위에 다름 아니다. 세상에서 선생이나 거사 등의 공경받는 지식인들 혹은 승려들이 달이나 꽃을 보고는 ’어아 아름답구나’라고 감탄하는 얼굴을 하면서도, 예쁜 여자를 보고는 본 척도 안 하는 얼굴로 지나쳐 버린다면 그것이 본심이라 할 수 있을까? 만일 달이나 꽃을 정취 있게 볼 줄 아는 마음이 있다면 예쁜 여자를 어찌 눈을 옮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달이나 꽃에는 정취를 느끼지만, 여색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은 인간적인 마음이 없는 위선에 찬 인간이다. 하지만 만사에 겉을 꾸미는 것이 통상의 세상사이므로 이는 위선이기는 하더라도 그렇게 비난만 할 일도 아니다.”     


얼마 전 도올 김용옥은 이런 일본의 미학을 가리켜, “일본 문학은 그 자체가 치정과 야만으로 가득 찼다.”라고 비판한 바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 정말로 주목해야 할 것은 마지막 구절이다. “위선이기는 하더라도 그렇게 비난만 할 일도 아니다.”라는 말이 오히려 ’ 일본식 미학‘의 중심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할머니들의 기억, 방문했던 일본인 지인의 집, 대만의 거리를 행진하던 일본군, 그들의 뿌리에는 이러한 이중성의 미학이 자리 잡고 있지는 않을까? 언젠가 국문학을 전공했던 친구가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왜 소설가, 문학가, 수필가, 평론가는 가(家)를 붙이고 시인은 인(人) 자를 붙이지?”     


소설가, 문학가, 수필가, 평론가, 시인 모두 사실은 일본의 근대어이고, 이것을 우리가 외래어로서 차용하여 쓰고 있다. 시인에 인(人) 자를 붙인 것에도 다분히 이런 고쿠가쿠, 즉 일본식 미학의 배경이 있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이다. 한국의 극우 친일파들이 일본을 칭송하는 내용에는 하나같이 이런 ’ 일본식 미학‘에 대한 존경심이 깔려 있다. 도로 위의 칼날 같은 교통 표지선, 일본식 완벽주의와 장인정신, 낙엽 하나 떨어져 있지 않은 신사, 등교할 때 90도로 허리를 굽혀 선생님에게 인사하는 아이들, 그리고 이를 같은 자세로 받아주는 선생님, 심지어는 투표용지에 정치인의 이름을 써서 투표하는 제도에 이르기까지 일본식 미학은 한국의 극우 친일파에게는 원더랜드이다.     


그러나 작금의 한국 대법원 판결에 대한 일본의 백색 리스트 제외 사건의 경과는 ’ 일본의 미학‘이 가지고 있는 교활함과 허위, 거짓과 안면 바꾸기를 여실히 드러내 주었다. 아베를 비롯한 일본 내각과 정부 인사들의 뻔뻔하고 파렴치한 모습은 노리나가가 이야기한 ’ 통상의 세상사‘ 속에서의 일본인의 처세를 짐작게 한다. 오직 한국의 극우 친일파들만이 이에 눈 감고 있다.      


일본계 한국인 교수 호사카 유지 교수는 한국의 극우 친일파에 대해 말한다. 그는 일본의 우익 기업들이 한국의 유망한 인재들에게 생활비와 장학금을 지불하면서 新 친일파 인재들을 양성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A급 전범 출신 사사카와 료이치가 만든 사사카와 재단을 대표적인 사례로 들었다.      


현재 가장 악랄한 극우 친일파로 활동하고 있는 서울대 출신의 모 교수는 오래전 위안부 문제를 논하는 tv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자신의 일본 유학 경험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아! 일본 사람 대단해요. 이런 것까지 꼼꼼하게 기록해 놓았거든요.” 그는 일본군 전쟁 위안부에 대한 망언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고, 당시 할머니들을 찾아가 사과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그의 사과는 거짓과 허위이자 ’ 일본식 미학‘이었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현재 한국에 존재하는 친일 세력은 3가지로 분류된다. 첫 번째, 소위 쿨 재팬이라 불리는 일본 문화 애호가들. 두 번째, 일본식 미학에 경도된 중산층 지식인들, 세 번째, 일본과의 이해관계에 얽혀있는 지식인들이다.     


세 번째 부류에 해당하는 이해관계에 얽힌 지식인들이 바로 ’ 극우 친일파‘들이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결핍된 인권의식이다. 강자의 약자에 대한 가해는 약자가 힘이 없기 때문이라는 믿음이다. 인권이라는 것은 힘의 유무를 가리지 않고 존중되어야 한다는 자연법 정신을 그들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둘째는 패권주의다. 세계는 무조건 힘의 논리로 작동되며, 그것이 정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힘이 정의다." 때문에 힘으로 조선을 강탈한 일본에는 잘못이 없으며, 힘이 없어 침략을 당했던 조선이 바보라는 인식이다.     


셋째는 패배주의다. 한국은 근본적으로 일본의 상대가 안 되며, 그것은 양국 간의 국민성의 차이에서 기원한다는 생각이다. 따라서 겉으로는 힘을 길러 일본을 이기자고 주장하나 마음속에는 일본에 대한 패배의식으로 가득 차 있다.     


가장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이 넷째다. 그들은 진보 정부에 대해 뿌리 깊은 반감을 품고 있다. 결국, 문재인 정권을 공격하는 세력은 무조건 우리 편이 되는 것이다. 이들이 문재인 정부를 공격하는 아베의 편에 서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이다.     


마지막으로 빈약한 역사의식이다. 아베 정권의 배경을 구성하는 메이지 유신의 정한론이 어떤 식으로 그 모양과 내용을 바꾸어 가며 현재에까지 이르렀는지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거나 암묵적으로 정한론에 동조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다섯 가지 공통점의 배경에는 '일본식 미학'에 대한 무한한 경외감이 자리 잡고 있다. 그들은 일본을 한국과는 상대할 수 없는 문명국가로 보고 있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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