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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인순 Jul 27. 2019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

판타지 월드

남겨둘 시간이 없습니다.

소설을 쓴다면 판타지를 쓰고 싶다. 한때는 사실주의의 세계가 아니라면 집중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꽤 긴 시간이었다. 생각이 바뀌게 된 것은 표현주의 미술을 접하고 나서부터이다. 표현주의 그림을 보면서 “똑같이 그릴 거라면 왜 그릴까?”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19세기 중엽 일본의 대표적 문인이었던 나쓰메 소세끼는 후학들에게 “자신의 경험에 비추지 않으면 소설 같은 건 한 글자도 쓸 수 없네.”라고 이야기하면서도 “그대로 쓸 거면 내가 뭣 하러 쓰겠나.”라는 말을 덧붙여 동시대의 유명한 프랑스 소설가 에밀 졸라로부터 시작한 자연주의에 대한 거리와 관망의 자세를 확인해 주었다.     


사실주의를 넘어서 자연주의가 대세의 풍미를 자랑하던 시절에 나쓰매 소세끼의 이러한 관망의 자세는 어쩌면 사실주의에서 판타지로 넘어가는 문학적 다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자연주의는 경험과 과학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인지과학은 “보이는 것이 사실적 세계와 같다면 우리의 뇌는 왜 필요한 것일까?”라는 역설적 의문을 던져주기도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자연주의와 판타지는 다리가 아니라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일 수 있다.      


따라서 인공지능의 시대에 판타지는 “그대로 존재한다면 내가 왜 존재하겠냐”라는 존재론적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가 일고 이야기하는 것이 경험하고 떠날 세상에 대해 국한된 것이거나, 체험하지 못한 과거에 관한 것이라면 우리 인생의 유한성이 매우 초라해 보인다. 이것이 우리 상상력에도 오메가 포인트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판타지는 양자역학의 세계이다. 불확실성을 두려워하지 않고, 카오스를 견뎌내며, 보이지 않는 세계를 즐기는 자에게만 의미로 다가오는 판타지. 설명할 수는 있으나 눈앞에 가져다 놓기는 힘든 세계에서 사는 법을 아는 자들이 즐기는 판타지. 바로 그것이 판타지이다. 르 권은 이렇게 말한다.      


“불확실성의 자유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이 판타지 소설을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다. 나로서는 과학은 좋아하는 어떤 사람이 판타지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상상을 쉽사리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과학과 판타지는 둘 다 아주 지대한 부분을 불확실성에 기반하고 있으며 풀리지 않는 의문들을 기꺼이 수용하고 있다.”     


자연주의와 판타지를 연결하고 있는 ‘동전’으로서의 기능, 즉 한쪽에는 사실주의적 얼굴을, 다른 쪽에는 상징적 의미를 담아야 하기에 사이언스 픽션(SF)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문학적 분류에 따르면 픽션이라는 대분류 영역 아래에 판타지라는 소분류의 지점이 있다. 픽션의 하위분류 체계에는 동화나 우화 같은 Traditional Literature(TL), 판타지(F), 사이언스 픽션(SF), 리얼리티 픽션(RF), 역사 픽션(HF), 그리고 미스터리(M)가 문학적 공간을 채우고 있다.      


가끔 이러한 분류 작업이 왜 필요한 것일까?라는 의문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사이언스는 그 자체가 리얼리티가 아닌가? 역사를 현실적으로 다룬 픽션은 없을까? 과학과 역사와 리얼리티를 가진 미스터리물은 어쩔 것인가?라는 질문들이다. 이런 질문이 들 때마다 개인적으로 늘 돌아가게 되는 역사적 지점이 있다. 바로 세계 제1차 대전이다.     


판타지를 이야기할 때, 세계 1차 대전이라는 역사적 경험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이 어리석고도 잔혹한 전쟁의 역사를 배경으로 세계 3대 판타지 중 2개의 판타지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톨킨의 ‘반지의 제왕’이었고, 또 하나는 C.S 루이스의 ‘라니아 연대기’였다. 그로부터 한참 뒤인 20세기 후반에 어슐러 K. 르 권의 ‘어스시 연대기’가 탄생했다. 톨킨과 루이스의 20세기 초반과 르 권의 20세기의 후반은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세계 1차 대전은 세계 전쟁사와 비교하여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다. 준비되지 않은 전쟁. 이는 독일이나 프랑스, 그리고 영국 등 전쟁의 주체들이 전쟁의 가능성에 대비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능력이 감내하기 힘들 정도로 지나치게 많은 과학적 준비를 한 전쟁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준비하지 않았다’란 말의 본래 의미는 공격적 전쟁 수단이나 기술에 대비한 수비의 방법이 고안되지 않은 채, 전쟁에 내몰린 젊은이들의 역사를 향하고 있다.      


이를 극명하게 증명해 준 것이 북부 프랑스에서 있었던 ‘솜’ 전투다. 솜에 모인 독일, 프랑스, 영국의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국가가 개발한 전쟁 기술에 당황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죽음의 참호 속에서 생명의 소모 재가 되었다. 반년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서부전선에서 죽어간 수십만 명의 젊은이들이 참호 속에서 보았던 노란 나비가 바로 판타지다. 이는 ‘서부전선 이상 없다.’라는 매우 진지한 소설 속에 들어있지만, 판타지가 없기에 이 소설은 참호 속에서 끝난다.      


솜 전투에 참전했던 톨킨과 전쟁에서 부상당한 C.S 루이스는 오래된 옥스퍼드 거리에 있는 팝 ‘이글 앤 차일드’로 돌아가, 그곳에서 각각의 판타지를 쓴다. 그들의 대화 속에는 그들이 지향하는 판타지의 세계가 있다.     

톨킨 : 맞아. 자네의 격려와 재촉이 없었다면 나는 결코 ‘반지의 제왕’을 끝내지 못했을 거야

루이스 : 내 무덤 앞에서 했던 말이군.

톨킨 : 아니. 어떻게 무덤 속에서 들었단 말인가?

루이스 : 흠. 흠. 어차피 판타지인걸, 무얼 그렇게 따지나?      


루이스의 말처럼 전쟁도 사랑도 현실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리얼리티를 따질 필요가 없는 것인지 모른다. 이 책의 저자 르 권은 페미니스트이자 아나키스트이다. 그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현실적 제한 역시 20세기라는 길고 긴 참호 위를 날아다니던 노란 나비와 그리 다르지 않다.      


르 권의 ‘이스시 연대기’에는 특별히 철학적, 인문학적 배경이 매우 섬세하게 녹아 있는 판타지 세계가 있다. 그녀의 판타지는 어느 별, 어느 우물에서 길어낸 것일까? 20세기를 싸워왔던 페미니즘 작가들에게 있어서 르 권의 판타지는 남녀의 사회적 위상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판타지가 얼마나 유용한 건지를 깨닫게 했다. 그리고 보면 1977년에 출판되어 오늘날 페미니즘 소설의 고전이 된, 브란텐베르그의 ‘이갈리아의 딸들’ 이 왜 판타지여야만 했는지 이해되며, 그 소설 속 농담들이 안고 있는 슬픔이 느껴진다.     

어슐러 K. 르 권

이 책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에서 저자 르 권은 문학, 페미니즘, 진화론과 기독교 신앙, 신자유주의와 성장, 그리고 고양이에 이르기까지 우리 주위를 맴돌다 지나가는 온갖 사소한 주제들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그 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단어를 풍부한 문장으로 재탄생시킨다. 예를 들자면 진화론에 대해서는 ‘신념에의 신념’으로 페미니즘에 대해서는 ‘이해하기 애쓰기’라고 표현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작가가 말한 많은 주제 중에서 가장 주목한 것은 ‘판타지 쓰기’이다. ‘서사적 재능과 도덕적 난제’라는 제목으로 2012년 5월에 쓴 글에서 르 권은 스토리와 플롯에 관해 이야기한다. 르 권은 판타지에 있어서 플롯은 인과나 개연성을 통해 이야기의 모양과 형태를 부여하지만, 자신은 오히려 스토리의 가치를 더 높이 평가한다고 했다.     


“나는 스토리의 가치를 높이 산다. 스토리에서 서사의 필수적 궤적을 본다. 일관성의, 이야기의 진전, 여기에서 저기까지 어떻게 독자를 이끄는가 하는 것들 말이다. 내가 볼 때, 플롯이란 이야기의 움직임이 보여줄 수 있는 변화나 복잡성이다. 스토리는 계속된다. 플롯은 진행에 정교함을 부여한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판타지를 쓰려고 하는 작가나 예비 작가들에게 도전이 된다. 오늘날 소위 장르 문학의 하나로서의 판타지는 웹 소설이라는 새로운 문학 플랫폼을 만나면서 양적으로 어마어마하게 성장하고 있다. 동양적 감성과 역동성을 가진 무협지, 언제나 과거로 돌아가고야 마는 시대물, 감성의 얇은 곳을 간지럽히는 로맨틱 판타지 등, 유치한 상상이 이러한 성장의 자양분이다. 그러나 르 권은 이러한 유치한 상상과 판타지를 구분한다. 


“유치한 상상과 문학적 상상에는 주된 차이점이 있다. 어린아이는 ‘이야기를 말함’으로써 상상 속을 배회한다. 특정한 목적 없이 언어의 소리와 환상적인 이야기의 순수한 유화에 만족한 채로 그 차이를 어렴풋이 이해하는 것. 그게 바로 유치한 상상력은 매력이다. 하지만 판타지 소설은, 민담이든 세련된 작품이든 성숙하고 고도로 감각적인 이야기이다. 물리 법칙 몇 가지는 무시해도 되겠지만 인과 관계를 무시할 수는 없다.”     


물리 법칙은 위반하더라도 인과 관계는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저자는 판타지의 최종 지향점은 ‘자유’라고 말한다. 판타지를 써 보았거나 쓰려고 하는 사람은 ‘인과 관계’와 ‘자유’라는 다소 모순되어 보이는 개념의 조합에 공감할 것이다. 결국, 자유란 인과 관계를 벗어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는 중력을 이겨낼 수는 있지만, 하늘로 올라갈 때는 반드시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두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판타지가 지향하는 자유는 불확실성의 자유이다. 이러한 자유는 중력을 거스를 수는 있어도 대신에 서사적 예술의 의무와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그런데 그 의무와 책임이라는 것은 규정된 것도 아니고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 찾아 나가야 하는 불확실성의 세계이다. 


1929년에 태어난 어슐러 K. 르 권은 2017년, 그녀의 나이 87살에 이 책을 썼다. 최근 유시민 작가는 60이 넘으니 명민하고 치열한 글쓰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느낀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르 권의 책을 읽다 보면 이러한 유시민 작가의 말은 엄살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2018년 그녀 나이 88살에 영면에 들었다.      


그녀의 작품을 보면 희망과 좌절감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그녀의 문장 하나하나가 뿜어내는 심오한 통찰을 보면서 좌절을 느끼기도 하며, 그녀의 나이를 보면서 상상력의 힘과 희망을 품게 되기도 한다. 판타지를 쓰고자 하는 사람에게 그녀는 빛을 건네준다.     


“신과 이성과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이 길을 잃은 무서운 사막, 호랑이들이 꼬리로 나무에 매달리는 밤의 숲을 기꺼워하며 광기로 가는 길을 밝히는 상상력의 타오르는 빛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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