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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인순 Jun 20. 2019

‘깃털 도둑’ 아름다움에 집착하는 사람들

책 속의 사람들

깃털 도둑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박제 새들을 보관하고 있는 영국 트링 자연사 박물관.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정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던 2009년 6월 23일, 싸늘함이 감도는 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던 새의 가죽과 깃털 299개가 도난당한다. 도난품 중에는 집까마귀 47마리, 왕극락조 37마리, 케찰 39마리를 비롯하여 푸른 채터러, 불꽃 바우어, 어깨걸이 풍조 등 아름답고 신비로운 색깔의 깃털을 가진 새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도난 사건이 일어나기 수 시간 전, 스무 살의 미국인 플루트 연주자 에드윈 리스트는 런던 왕립음악원에서의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 영국의 작은 도시, 트링으로 가기 위해 기차에 올랐다. 커다란 트렁크를 끌고 기차에 올라탄 에드윈의 머릿속은 이미 판타지로 가득 차 있었다. 그날 밤, 에드윈은 박물관에 침입해 새들을 훔쳐 사라진다. 도난당한 새들 속에는 150년 전 찰스 다윈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가 말레이의 밀림 속에서 목숨을 걸고 수집한 새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로부터 2년 뒤, 커크 월리스 존슨이라는 한 남자는 플라이 낚시를 하던 중, 가이드로부터 이 사건에 대해 전해 듣는다. 그는 깃털을 훔친 도둑이라는 이 특이한 이야기에 완전히 빠져들었고, 사건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5년간의 취재 및 조사를 통해 이 사건이 단순한 도난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커크 윌리스 존슨, 이 책의 저자는 사건의 배후에 숨어 있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충격적인 진실과 왜곡된 세계관을 깃털이라는 주제에 담아 고발한다.     


오래전 영화 ‘흐르는 강물같이’에는 플라잉 낚시 장면이 나온다. 은슬 가득한 강물 위에 투명한 플라잉 낚싯줄이 탄력 있게 흔들리며 반짝이던 풍경은 영화의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낚싯줄의 끝부분에 유난히 반짝이는 벌레 모양의 미끼가 바로 ‘플라이 타잉’이다. 산란을 위해 강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는 이것을 벌레로 착각하여 물게 된다. 이것은 일종의 매듭으로 여러 가지 색깔과 모양이 개발자의 이름을 달고 사용되기도 한다.   

여러가지 종류의 플라이 타잉

최근에는 대부분 인공으로 만든 플라이 타잉이 사용되지만,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아직도 19세기 빅토리아풍의 플라이 타잉이 인기가 높다. 빅토리아풍의 타잉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깃털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1980년대 윌리엄 헨더슨에 의해 개발된 더럼 레인지라는 타잉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중국산 금계의 머리 깃털, 남아프리카산 ‘집까마귀’의 검붉은 오렌지색 가슴 깃털, 남아프리카산 타조 깃털, 그리고 중앙아메리카 저지대에 서식하는 ‘푸른 채터러’의 작은 청록색 깃털이 필요하다.

더렘 레인지 타잉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깃털 도난 사건, 그 자체는 매우 단순한 줄거리를 담고 있다. 천재적인 플루트 연주자 에드윈 리스트는 자신의 주 전공인 연주 외에도 플라이 타잉에 뛰어난 재능을 보유한 타이어였다. 그는 타잉을 보다 정교하게 만드는 데 필요한 소재인 깃털을 대량으로 확보할 목적으로 박제 새들이 보관되어 있던 박물관을 털었다. 더욱 훌륭하고 완벽하며 아름다운 타잉을 만들기 위해 인공이 아닌 천연의 깃털이 필요했으며, 이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이 이 사건의 동기였다.     


작가는 본격적으로 이 깃털 도난 사건을 거론하기 전에 두 가지 역사적 풍경을 통해 인간들의 미를 향한 욕구, 시대와 유행에 따른 욕망의 변주를 바탕에 깔아놓는다. 그리고 이러한 욕구가 왜 자연계에 생존해 있었던 천연 동물에서 나온 깃털에 대한 욕망으로 이어졌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묻고 있다. 그리고 다소 어색하지만, 이것을 기독교적 창조론과 진화론 사이의 간격으로 갈라놓는다.     


깃털 도난 사건에 앞서 언급한 두 가지 역사적 풍경 중 하나는 진화론의 탄생 과정이다. 다윈과 함께 자연선택 이론을 발견했던 윌리스가 말레이반도의 깊고 위험한 밀림 속에서 새들을 채집하여 정리하고 이를 영국의 박물관으로 옮기는데 소요한 8년간의 세월과 고통, 어려움과 극복의 과정을 상세하게 서술한다.      


저자가 윌리스의 이야기를 길고 세밀하게 설명하는 이유는 새들을 채집한 데 투자한 노력의 크기로 훔친 자의 죄의 크기를 증명하기 위함만은 아니다. 자연을 바라보는 진화론의 관점을 기독교적 세계관에 빗대어 강조하려는 목적이 훨씬 더 강하다.      


19세기 당시의 기독교적 세계관은 이 세상 모든 생명체는 멸종을 당할 수 있다는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인간의 위협이 없는 말레이 제도의 깊고 위험한 밀림 속에서 암컷의 유혹하기 위해 진화시켜왔던 화려한 깃털은 이제는 인간에 의해 멸종될 수도 있다는 진화론적 관점과는 달리, 당시는 세상의 모든 생명을 지배하는 것은 인간의 의무와 권리라는 성경적 믿음이 지배하고 있었다.     


사람의 눈이 닿지 않았던 깊은 밀림 속 새가 형형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아름다운 깃털을 가질 수 있게 만든 것이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가 아니라면 그것을 발견하여 인간의 눈을 위해 사용하는 행위는 정당화될 수 있다. 하나님 보기에 아름다운 것을 인간이 보기에도 아름다운 것으로 전환하는 작업은 죄악이 아니라 은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새의 깃털이 아름다운 것은 새 자신을 위한 것이지 인간의 눈을 위한 것임이 아니라는 신념을 힘주어 이야기한다. 또한, 그가 책의 서두에 진화론자 윌리스의 길고 긴 채집 과정을 서술한 것은 새의 깃털을 가지고 귀부인의 모자를 제작하거나 낚시의 미끼를 만드는 일을 중단하지 않는다면 새들은 곧 멸종하고 말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푸른 채터러 

두 번째로 저자가 언급한 역사의 풍경은 19세기 여성들의 욕망이다. 저자는 19세기 여성들의 모자를 장식하기 위해 희생되어야만 했던 희귀 새들의 숫자를 나열한다. 귀부인들의 모자를 제작하기 위해 사용된 ‘극락새’와 윌리스가 목숨을 걸고 찾아다녔던 ‘극락새’를 비교하면서 인간의 철없는 욕망과 아름다움에 대한 무절제한 집착을 부각한다.     

극락조

플라이 타잉계에서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린 에드윈에게 플라이 타잉은 취미 활동을 넘어선 자신의 열정이 깃든 또 다른 자아와도 같은 활동이었다. 수컷 새들이 암컷을 구애하고자 자신의 깃털을 진화시켰듯이, 여성들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부각하기 위해 깃털 달린 모자를 썼듯이, 가장 아름다운 플라이 타잉을 만드는 것은 에드윈에게 있어서는 자아를 진화시키는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이를 위해서 그에게 새의 깃털이 필요했다.     


결국, 에드윈은 박물관의 새들을 훔치고 새들의 깃털을 인터넷에서 판매한다. 한 달여 시간이 흘러 박물관은 도난당한 새들이 있음을 인지하고 에드윈의 흔적을 찾아낸 경찰은 결국 에드윈을 검거한다. 그러나 재판정에 선 에드윈은 아스퍼거 증후군으로 인정받아 짧은 기간의 집행유예로 풀려난다.      


에드윈 재판이 모두 종료되었을 때, 에드윈이 훔친 299마리의 새 중에서 박물관으로 돌아온 것은 102마리에 불과했다. 에드윈의 집에서 72마리가 추가로 발견되었고, 19마리는 새를 사간 양심적인 고객들에 의해 반환됐다. 106마리의 새는 결국 찾지 못했다. 아무도 사라진 새들에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이 책의 작가 커크 윌리스 존슨만이 이 사라진 새들을 추적했다.      


여기서 새에 대해 작가가 보인 집요함이 궁금했다. 그 답은 그의 삶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전후 도시 재건을 위해 이라크에서 활동했었고, 이라크 난민 2500명을 미국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 과정에서 미국 정부와의 심각한 마찰과 불이익을 겪기도 했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활동에 대해서 허세를 떨지 않는다. 홀로 사라진 새들을 추적하는 과정에 대해서도 거창한 이유를 달지 않는다.     


사라진 새를 추적하는 저자의 의도와 동기에 대해서는 작가가 사라진 깃털을 찾는 과정에서 만났던 플라이 타이어와의 대화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저자는 한 플라이 타이어에게 현재의 자연관에 종교적인 신념이 영향을 주었느냐고 묻는다.     


“아! 네! 그렇습니다. 그렇고 말고요!’”

“멸종이란 개념이 불편하지 않습니까?”

“아니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렇죠?”

“어쨌든 모든 것은 멸종되니까요.”

“하지만 너무 허무주의적인 생각 아닙니까? (...) 세상이 결국 휴거라는 것 때문에 다 없어질 거라고 생각한다면, 신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잘 돌봐야 할 책임을 버리는 것 아닙니까?”

“완전히 버리는 거죠!”

“그래도 좋다는 말씀이신가요?”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은 우리가 사는 세계가 하나님의 세계와 닮아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뜻은 이 세계를 영원히 존재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50년이 될지, 얼마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때까지 우리가 살아남게 하려는 것이 그분의 뜻은 아닙니다.”     


신의 뜻에 멸종이 전제되어 있다는 플라이 타이어의 이야기를 들은 저자는 다시 “진화를 믿느냐”라고 묻는다. 플라이 타이어가 대답한다.      


“아니요. 전혀요. 조금도 믿지 않습니다. 화석이 진화의 증거는 아닙니다. 신앙에 대해 말씀하고 싶으신가요? 그렇다면 진화가 바로 그런 종교입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거죠. 그것은 그냥 주술에 불과합니다.! 신을 거부하고 타락한 천사들이 인간에게 씌운 거라고요.”     


저자는 “진화의 과정 없이 새들이 어떻게 그토록 독특한 아름다움을 갖게 됐냐”라고 다시 묻자 플라이 타이어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신께서 그렇게 창조하셨으니까요!”     


저자 커크 윌리스 존슨은 플라이 타이어와의 대화를 통해 지구와 자연을 보전하고 영속시킬 의무가 명백히 인간에게 있음을 우회적으로 강조한다. 그가 이라크 난민을 미국에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것도, 사라진 깃털을 혼자서 추적해 왔던 것도 모두 인간이 담당할 의무, 즉 어느 것도 멸종되지 않고, 무엇도 사라지지 않는 지구를 지키는 일이었다.      


몇 년 전 뉴스에 떠들썩하게 보도된 사건 하나가 있었다. 왕솔 나무를 촬영하겠다고 주변의 소나무 25그루를 베어낸 유명 사진작가는 "소나무는 양지 식물이라서 햇빛을 가리면 죽는다. 참나무가 많아서 잘랐다. 또 사진을 찍는 데 방해가 됐다"라고 주장했는데, 그가 그렇게 촬영한 사진이 한 장에 400~500만 원에 거래됐음에도 법원은 고작 벌금 500만 원이라는 관대한 처벌을 했다. 물론 이는 299개의 새를 훔친 에드윈에게 내려진 집행유예라는 판결에 비하면 엄격한 것이었다.     


극지방에 사는 밍크를 살해하여 목에 두르거나 옷을 만들어 입는 행위, 악어를 죽여 그 가죽으로 여성용 핸드백을 만드는 사업 등은 너무나 보편화되어, 일부 환경보호 운동가들 외에는 관심조차 가지 않는 이야기가 되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재생산해 내기 위해 자연의 아름다움을 훼손시키는 이러한 모순된 행위는 아름다움의 추구가 아니라 일종의 속물근성에 가깝다.      

19세기에 유행하던 깃털 달린 모자

따지고 보면 5월의 투명한 태양 아래 자라나는 장미를 꺾어, 꽃병에 꽃이 두는 행위 역시도 이러한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얼마 전에는 절벽에 뿌리를 박고 자라는 동강할미꽃을 찍기 위해 뿌리를 훼손시키는 관행들이 신문에 소개되기도 했다. 생명의 지속과 자연의 보전이 동물의 경계를 넘어 식물에 이르게 되면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진다. 이는 마치 동물을 먹는 것은 안 되고 식물을 먹는 것은 가능하다는 논리는 어디에서 오느냐는 질문과 같다.      


남방 돌고래를 보존하기 위해 수많은 고등어를 먹이로 줄 때, 우리는 남방 돌고래와 고등어의 생명에 대한 우선권을 어떻게 정해야 할까? 이를 단순히 멸종의 가능성 순으로 정해도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영원히 멸종시킬 필요 없는 돼지를 죽이고 먹는 것은 고사리를 따 먹는 것과 같은 것일까?      


이러한 복잡한 질문에 대답을 못 한다고 해서 자책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아름다움을 향한 지나친 욕망이 사실은 깊은 속물성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알아둘 필요가 있다. 아름다움을 확인한 인간은 늘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자 한다. 먼 옛날 여성을 꽃이나 새와 같이 생각했던 마초들 역시 자신의 아름다운 아내를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능력과 품격을 증명해 보이려고 했다.      


여성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을 소유한 남성의 능력이 곧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에 대한 객관적인 잣대로 여긴다면 그것은 아름다움이란 절대적 가치의 문을 열지 못하고 오직 문에 난 열쇠 구멍으로 아름다움을 관찰하고자 하는 일종의 관음증에 불과하다.     


이 책에서 저자는 메리 대처의 말을 인용한다. 메리 대처는 1875년 ‘하퍼’에 기고한 글에서 “마음 고운 여성들이 맹목적인 스타일에 눈이 멀지 않았다면 어떠한 생명체에게도 불필요한 고통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채식주의자들의 선한 논리가 언제나 일관성의 문제에서 좌절하듯이 친 환경주의자들의 논리도 소위 경계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어디까지가 친환경일까? 예를 들어 오늘날 플라이 타잉은 플라스틱으로 만든 소재로 대체될 수 있다. 플라스틱이라는 경박한 소재만 참아낼 수 있다면 굳이 빅토리아 방식의 타잉, 즉 새의 깃털을 직접 사용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반면 플라스틱이라는 소재가 가진 친환경적이지 못한 이미지를 떠올린다면 이것 역시도 마음 편하지 못하다.     


이 책에서 저자 커크 윌리스 존슨은 거창한 ‘지속가능성’을 언급하지 않는다. 환경운동이라는 거대한 타이틀을 내세우지도 않는다. 생명의 경계와 창조론에 대한 복잡한 담론도 그냥 넘어간다. 사라진 깃털을 조용히 추적하고 담담히 서술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윤리적 삶의 당위성에 대해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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