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의 사람들
임지현 교수의 역사학은 포스트모더니즘적이다. 역사학이란 관점에서 보았을 때, 포스트모더니즘은 ‘선’과 ‘악’ 사이에 경계를 세우지 않는다. 역사적 ‘회색지대’를 살피고 복잡하게 얽힌 사실들과 그것을 연결하는 맥락 속에서 질문을 던지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적 역사학이다.
그러나 임지현 교수에게 있어서 역사의 회색지대는 단지 선과 악 사이에만 존재하는 공간이 아니다. 악과 악 사이, 그리고 지나친 도덕과 냉정한 이성 사이에 살아 숨 쉬는 호기성 공간이 그가 탐구하는 역사의 현장이다.
그가 악과 악 사이의 거친 회색지대를 탐험하는 이유는 악이 선으로 기억되는 것과 선이 악으로 묻히는 것을 경계하고, ‘적의 적’이 우리 편이 아니듯, ‘악의 악’이 선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기 위함이다. 예를 들어 미국은 911 테러 사건을 일으킨 이슬람 과격분자들을 절대 악이라고 선언하며, 이를 응징하는 자신들을 선한 신의 전사로 묘사한다. 그러나 911 테러라는 역사의 회색지대 위에는 어느 것이 검고, 어느 것이 흰지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그곳에는 오직 악과 악의 회색지대만 존재한다. 그러나 악의 축축한 회색지대에 묻힌 자들의 기억을 파헤치면 우리에게 선한 이야기를 들려줄 죽은 자들이 누워있다. 그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선과 악이란 것이 결코 일방적이고 단순하게 결론 내려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임지현 교수는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면 기억은 죽은 자와 산 자의 대화라고 이야기한다. 그가 말하는 죽은 자와 산 자의 대화는 역사가 아닌 기억으로 진행된다. 역사가로서의 임지현은 확실히 역사의 기록이 아닌 기억의 맥락 위에 서 있다. 그래서 자신을 ‘기억 활동가’라고 부른다. 처음에는 역사가로서의 작업을 기억 활동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낯설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저자의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하면 그 의미를 깨닫게 된다.
”베트남 전쟁에서 벌어진 한국군의 잔학행위에 대해 자네들은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왜 1945년 이후에 태어난 일본의 전후 세대에게는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끝난 일본 제국주의의 잔학한 통치에 대한 책임을 묻는가? “
베트남 전쟁, 한국군에 의한 인민 학살의 책임이 한국인이라는 집합체에 속한 나에게 있는가? 이 역사의 딜레마 역시 하나의 기억 전쟁이다. 이 딜레마를 풀기 위한 유일한 해결책은 과거에 벌어진 일에 대한 책임과 그 과거를 기억할 책임을 구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베트남 인민 학살에 대한 책임은 없지만, 그것을 기억할 책임은 있다.
‘로마인 이야기’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시오노 나나미는 한국과 일본의 젊은이들이 각자의 역사가 아닌 로마의 역사를 놓고 이야기한다면 양국 사이에 놓인 역사의 이해에 좀 더 객관적으로 다가갈 수 있다고 장담했다.
기억하는 자로서의 역사에 대한 책임을 시오노 나나미가 이해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전후 세대의 한국과 일본의 젊은이들은 각자의 기억에 대한 책임을 거부할 수 없다.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당사자로서의 실존적 책임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서로 책임져야 할 부분들은 아직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오래되고 먼 나라의 경험을 끌어들여 역사적 책임을 희석하는 것은 술자리에서의 농담과 덕담만으로도 충분하다.
세월호에 갇혀 수장된 아이들과 공수부대에 의해 살해된 광주의 젊은이들, 죽음과 같은 인생의 침몰의 겪은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 유대인 홀로코스트와 난징대학살의 희생자들, 심지어 2차 대전 당시 태평양의 작은 섬에 갇혀 아사한 일본군들의 기억은 모두 우리가 대화할 상대이자 맥락이다. 임지현 교수는 죽은 자의 억울함과 원한을 풀어줄 ‘영매’가 바로 역사가가 도달하여야 할 가장 높은 수준의 위치라고 믿고 있다.
“전후 세대가 귀 기울여 듣고 응답하려는 그 ‘누군가’는 누구인가? 그 ‘누군가’는 어떻게 죽었고 그의 죽음은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가? 죽은 자인 그가 산 자인 우리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죽은 자들이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은 무엇이며, 그 안에 담겨 있는 간절함은 무엇인가? 산 자는 그 메시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들의 부름에 귀 기울이고 간절한 원망에 응답하는 우리의 위치는 어디인가? 또 그 응답의 방식은 어떠해야 하는가? 전후 세대는 과연 기억을 통해서만 식민주의, 홀로코스트, 제2차 세계대전과 연결되는가? 혹은 지금 여기의 삶이 식민주의나 제노사이드의 비극과 연루되어 있다면, 그 연루되어 있음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 책은 이와 같은 저자의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그러나 책의 마지막에 이르러 저자는 자신이 제기한 문제에 대한 어떤 답도 내놓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기억 활동가로서 역사의 정답을 찾아 떠나는 여정은 절대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예단이다. 그러나 그의 기억 활동가로서 작업의 지향점이 그렇듯이 정답을 찾아가는 여정 속에서 기억은 새롭게 축적될 것이고 맥락은 현실의 이름으로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동안 임지현 교수의 기억 활동이 담아내는 역사적 담론은 ‘초국가적 역사’였다. 이 책 ‘기억 전쟁’도 이러한 활동의 연장선 위에 있다. 저자가 소환하는 역사의 내러티브는 독일 나치에 의한 유대인 집단 학살, 일본 제국군에 의한 난징대학살, 미국 노예제와 식민지에서 자행된 원주민 학살, 아르메니아 집단살해, 일본군‘위안부’, 1980년 광주 학살 등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이 내러티브를 실존으로 끌어내야 한다. 우리에게는 이미 세월호가 있고, 촛불 혁명이 있으며, 권력자들에 의해 자행된 각종 미투 사건이 있다. 마침 오래전 억울하게 유명을 달리한 여배우의 죽음이 그녀를 알고 있던 또 다른 여성의 기억으로 다시 소환되었다. 안타깝지만 그 여성은 그녀를 알고 있는 작가와 법조인으로부터 ‘역사 왜곡’이란 이름으로 다시 고소를 당했다.
이로 인해 오래전 죽은 한 여배우를 둘러싼 기억의 회색지대가 달리는 시간 속에 펼쳐지고 있으며, 아무도 원치 않았던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됐다. 이 책은 오래된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넘어, 현실 속에서 전개되는 맥락과 진실에 대해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와 관점에 대해서도 넘치는 교훈을 전해주고 있다.
이 책의 1장에서 주목해야 할 내용은 ‘홀로코스트’와 ‘안티 홀로코스트’ 간의 법정 투쟁에서 확인된 ‘실증적 부정론’에 대한 이야기다. 저자는 이야기를 통해 저자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기억 활동가가 되어야 하는 필연성을 우회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2장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실존적으로 공존하는 회색지대에 대한 세부적 사실들이 독자들의 역사적 신념을 흔든다. 저자는 나치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유대인 학살에 가담했던 폴란드인들이 자신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로 둔갑시키는 맥락을 파헤친다. 이는 독자들에게 역사의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기억의 흑마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에 대한 고민을 던져준다.
3장에서는 전후 희생자의 경험, 피해자가 삶의 현장에서 경험한 기억들이 서로 만났을 때 출현한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현상들, 충돌하고 왜곡되는 기억의 변주, 동질 의식과 구분의 틀을 살핀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실존이 아닌 기억의 공간 속에서 냉정한 이성과 지나친 도덕 감정의 경계 선상에 존재하는 문제들을 들추어내는 한편 역사적 용서란 무엇이며, 경계인의 삶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최근 신재민 전 사무관이나 김재우 전 수사관의 폭로를 통해 우리는 기억의 기능과 역기능에 대해 돌아보게 된다. 어떤 측면에서 그들도 경계인이다. 경계인에 대해서 누군가는 부주의하게 기억을 소환시킬 수 있고, 또 누군가는 자신의 잘못을 방어하기 위해 기억을 확대 재생산할 수도 있다.
가해자가 피해자가 될 수도 있고, 기억이 정치적 어젠다로 악용되거나 이데올로기적 여론전에 내몰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을 단지 가짜 뉴스나 정치적 농단으로만 바라본다면, 어떤 역사적 발전도 기대할 수 없다. 이것이 우리가 민주주의를 민주화해야 할 필요성이기도 하다.
기록에서 증언으로. 기록과 기억의 싸움.
‘편린들 : 전시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 1939~1948’. 이 책은 나치 강제수용소 두 곳을 거치면서 생존한 1939년생 빌코미르스키의 수기이다. 미국과 영국의 문학상을 휩쓴 이 책은 훗날 자신의 고아원 시절 경험을 각색, 폴란드 강제수용소 생활로 꾸며낸 가짜 이야기로 판명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의 책을 읽은 홀로코스트의 진짜 생존자들은 빌코미르스키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들을 기억의 멍에에서 해방시켜 주어 고맙다.”라는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도 했다. 진짜가 가짜의 이야기에 공감한 것이다.
이런 날조된 수기가 가지는 공감의 능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임지현 교수는 “진짜 수기와 가짜 수기의 경계에는 이처럼 과거의 기억과 문학적 상상력이 뒤엉킨 회색지대가 놓여 있다”라고 말한다. 또한, 역사는 과학이 아니기 때문에 수기의 진위를 판명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날조된 수기의 호소력이 어디서 나오는 가를 묻는 것이라 했다.
회색지대에 놓인 기록의 호소력은 단지 문학적 수사에 의해서만 창조되지는 않는다. 음악, 사진, 그림, 시각과 청각을 포함한 감각의 묘사와 수사를 통해서도 호소력은 창조된다. 저자 임지현 교수는 ‘아이히만의 재판’을 예로 들어 역사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있어서 현장성이 주는 묘사와 수사의 힘을 강조한다.
역사상 처음으로 법정 곳곳에 카메라를 숨겨 재판의 상황을 생중계했던 아이히만 재판은 증거와 자료만으로 이루어지는 실증주의적 방법이 아닌,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으로 진행됐었다. 증언자의 행동, 목소리, 표정, 그리고 감정 표출 등으로 인해 재판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홀로코스트의 실체적 진실을 더욱 생생하게 전달받았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러한 ‘아래로부터의 기억’, 즉 풀뿌리 기억과 그 기억의 전달에는 때때로 과장과 부정확, 정치적 왜곡과 의도적 조작의 위험이 녹아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실증 주의자들은 이러한 문제점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때로는 역사적으로 힘없는 자들의 풀뿌리 기억을 파괴하려고 한다.
따라서 실증주의는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될 수밖에 없다. 역사적 범죄자들은 대개 실증주의의 이데올로기에 경도되어 있다. 임지현 교수는 이러한 자들을 실증주의적 부정론 자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일본군‘위안부’ 부정론자인 후지오카 노부카스는 “일본군이 강제로 조선 여성을 연행했다면, 명령서가 반드시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문서는 한 통도 발견되지 않았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홀로코스트의 부정론자인 데이비드 어빙은 “히틀러가 학살에 개입했다는 문서를 대는 사람에게는 1,000달러를 주겠다”라는 희롱 조의 제안을 하기도 했다.
실증 주의자들은 늘 실증으로 증인을 핍박한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내가 바로 증인이다.”라고 외치는 성폭행 피해 여성들에 대한 고위급 정치가나 언론인, 저명한 교수, 유력 예술가, 인기 연예인들의 대응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증거를 대라!”라는 압박. 그들이 잘 쓰는 방법은 증거를 인멸하고 피해 여성을 인격 모독으로 법정에 세우는 것이다.
저자는 루마니아 출신의 유대계 심리학자인 도리 라우브가 이야기한 ‘지적 기억’과 ‘깊은 기억’을 인용하여,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증인의 증언은 사실에 어긋나기 때문에 오히려 더 진정성이 있다는 주장을 한다. 불완전한 기억이 완전한 기록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를 이야기하는 자는 늘 빈곤에 서 있다. 그것은 정보의 빈곤이라기보다는 경험의 빈곤이다. 우리는 침몰하는 세월호 속에서 죽음을 경험하지 않았고, 광주에 있는 도청에서 총을 맞고 쓰러지지 않았다. 어두운 밤, 안희정의 문 앞에 서 있던 김지은의 기억 역시 우리는 오직 추측만 할 뿐이다. 기억은 어떤 실증 자료로도 증명할 수 없다.
임지현 교수는 실증주의 부정론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혐의’의 정치에 대한 위험성을 강조하면서 이스라엘의 총리 네타냐후를 예로 든다. 최근 미국의 힘을 등에 업고 자신의 정치적 위기를 예루살렘 문제로 넘어가려 했던 네타냐후 총리는 결국 재선에 성공했다. 그는 2015년 10월 예루살렘에서 열린 ‘세계 시오니스트 대회’에서 히틀러에 대한 다른 해석을 내놓은 바 있다.
당시 그의 주장에 따르면 히틀러를 부추겨 유대인을 학살하게 한 것은 예루살렘의 이슬람 율법 학자 하지 아민 알 후세이니였다는 것이다. 독일에서 유대인을 추방하면 그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으로 몰려올 것을 우려하여 후세이니가 히틀러에게 유대인을 전부 죽이라고 이야기하여 홀로코스트의 실마리를 제공했다고 그는 주장했다. 이것이 바로 실증주의적 부정론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혐의의 정치’이다.
저자는 또 하나의 의미심장한 예를 든다. 바로 1945년 일본의 패망 이후, 한반도의 일본인들이 고국으로 귀환하는 과정을 그린 ‘요코 이야기’이다.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은 이 책이 식민지 한반도에서 일본인들의 행태를 미화하는 한편, 가해자 일본을 피해자로 둔갑시켰다고 극렬히 비난했다.
그러나 정당한 비난을 넘어서 한국의 일부 민족주의자들은 책의 주인공이자 저자인 요코의 아버지가 731부대의 장교였다는 혐의를 창작해냈는데, 이것 역시도 혐의의 정치를 통한 기억의 탄압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저자 임지현 교수는 한국인의 기억이 소중한 만큼, 일본인의 기억도 존중되어야 하며, 그리하여 기억 공간 속에서 희생자를 두 번 죽이는 부정론의 국제적 연대에 맞서는 한편, 아픔에 공감하는 기억의 연대를 강화해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실존의 회색지대,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가?
“민주주의를 민주화한다는 21세기의 문제의식으로 보면, 1980년 5월 광주에서 공수부대 군복을 입고 있던 아주 평범한 한국 청년들의 행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가 더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최근 들어 전두환의 발포 명령의 진위를 가리는 증거들이 발견되고 있다. 특히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증언을 한 조비오 신부에 대한 명예 훼손 소송과 일부 정치인의 북한군 개입설로 인해 당시 전두환을 비롯한 고위급 군인들의 광주 학살에 대한 책임론이 다시 한번 주목받고 있다.
그들은 틀림없는 ‘악’이다. 그렇다면 광주 학살을 승인하고 명령했던 수뇌부들의 책임이 현장에서 시민을 사살했던 개개의 군인들에게 역사적 면죄부를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져야 한다. 임지현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광주에 대한 사회적 기억은 신군부 살인자들을 비난하는 차원을 넘어 이 평범한 청년들이 왜 아무 의심 없이 사살 명령을 이행했는가를 묻기 시작할 때 책임감 있는 기억으로 바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은 시위대가 전부 빨갱이라는 교육을 받았다. 군대라는 특수 조직에서 명령에 대한 거부는 그들에게는 곧 배신이었으며, 발포에 대한 거부는 엄청난 희생을 감수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전두환을 비롯한 군 수뇌부의 악마성에 더해진 그들, 즉 평범한 청년들의 악마성 역시도 역사의 질문을 받아야 한다. 그것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를 “홀로코스트는 독일의 과거사가 아니라 현대 문명에 잠재된 위험이다.”라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이야기를 인용하여 설명한다. 홀로코스트의 잠재된 위험이 한국의 광주에서 실현되었고, 또 미래 언젠가, 어딘가에서 실현되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다.
저자는 마치 영매가 되어 죽은 자들의 기억을 소환하듯 전후 동유럽의 역사 속에서 회색지대들을 찾아낸다. 저자가 찾아낸 회색지대 속에는 방관자라 불리었던 수동적 공범자, 악과 악 사이에서 서로에게 역사적 책임을 떠넘기려 했던 피해자, 희생으로 다른 희생을 덮으려는 희생자, 희생자가 된 가해자, 그리고 공범자가 된 가해자가 있다.
전후의 세계사 속에는 유대인 홀로코스트에 앞서 자신들의 홀로코스트를 먼저 생각해야 했던 폴란드인, 냉전 체제의 이데올로기적 사슬에서 해방된 동유럽의 주민들이 홀로코스트를 중심으로 구성된 서유럽의 기억 문화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저간의 사정, 반공주의 하에서 살아남기 위해 ‘유대인=희생자’라는 등식을 부단히 지우려고 했던 미국의 유대인, 홀로코스트에서 생존한 유대인들을 경멸했던 팔레스타인의 시오니스트가 있었다.
또한, 나치보다 더 적극적으로 홀로코스트에 참여했지만 자신을 희생자 프레임으로 방어했던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인, 스탈린 체제와 나치 체제에서 이중의 희생을 감당해야만 했던 발트 3국을 비롯한 동유럽인, 태평양 전쟁 당시 원자 폭탄과 만주에서의 러시아군에 의한 학살의 기억을 토대로 스스로 희생자라고 주장했던 일본인이 있었다. 그들을 생각할 때, 역사는 결코 이분법적으로만 볼 수 없다.
역사적 실존의 회색지대에는 늘 불편한 기억을 지우려고 하는 자들이 존재한다. 이에 대해 기억 활동가 임지현 교수는 다음과 같은 말로 경고장을 내민다.
”기억은 과연 역사의 적이다. 공식적인 역사를 만들고 지키려는 자들이 불편한 기억들을 자꾸 지우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기억이란 게 지워질 수 있다고 믿는다면 너무 순진하다. 거의 잊힌 기억이라도 누군가 그것을 지우려는 순간 바로 어제의 일처럼 분연히 들고일어나기 마련이다. “
국경을 넘는 기억들, 기억의 연대 공간
2013년 7월 30일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 기억 활동가들이 미국 최초로 글렌데일시에 ‘평화의 소녀상’을 세웠을 때, 글렌데일 시장은 일본 극우 TV에 나와 한인들이 미국의 소도시에 평지풍파를 일으켰다고 비난했다. 물론 한국계 이민자들은 이에 크게 반발했다. 그러나 더 주목할 만한 것은 일본계 미국인 모임인 NCRR이 글렌데일 시장에 대한 비판에 가세했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갈등을 해소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최선의 방법은 (...) 그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한 글렌데일 시의회의 한 아르메니아계 의원은 ‘평화의 소녀상’을 건립하는 것을 지지하고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저자는 이러한 현상을 일종의 ‘유사 경험에 대한 기억 공간’으로 해석한다. 일본계 미국인은 이민 초기 미국인들로부터 인종차별을 경험했고, 아르메니아인은 오스만 튀르크에 의한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의 희생자들이었다. 희생자로서의 그들의 경험은 한국의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공감의 근원이 되었다. 한국인, 일본인, 그리고 아르메니아인 간의 공통된 기억 공간이 생긴 것이다.
이러한 기억 공간 속에는 ‘안네의 일기’로 상징되는 나치즘과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차별을 상징하는 ‘아파르트헤이트’가 연결되어 있고, 홀로코스트와 미국의 노예제도가 연대한다. 그러나 임지현 교수는 이러한 기억 공간의 심층에 놓인 정치적 도구화를 경계한다.
실제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의 범죄를 폭로하고 그에 반대하는 운동의 동력을 재생산하는 데 ‘아라파트 헤이트=나치즘’이라는 공식이 필요했다. 미국은 홀로코스트와 같은 비극을 겪지 않기 위해서는 미국식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는 체제 선전에 나치즘을 이용했다. 기억의 공간 속에는 소위 ‘체제 옹호를 위한 도구화’가 쉽게 숨어든다.
저자의 이야기는 홀로코스트의 저변에 깔린 식민주의 기억을 지적하면서 제삼 세계의 문제로 넘어간다. 저자는 1944년 당시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에서의 네덜란드 여성들의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예로 들면서 홀로코스트보다 깊은 인종차별의 문제를 꺼낸다. 전후 네덜란드 여성에 대한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기소와 처벌 과정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것은 전지 민간인에 대한 성적 착취와 폭력을 심판했다기보다는 감히 아시아 남성이 백인 여성을 성적 착취의 대상으로 삼은 것에 대한 인종주의적 보복의 성격이 강했다. 흑인 여성에 대해서는 성폭력을 서슴지 않았던 미국의 인종주의자들이 백인 여성에 대한 흑인 남성의 성폭력을 절대 용납할 수 없었던 것과 같은 이치였다. (...) 이는 백인 남성에 대한 도전으로 읽혔다. “
얼마 전, 한국당의 정진석 의원은 페이스북에 “세월호 그만 좀 우려먹으라 하세요. 죽은 애들이 불쌍하면 정말 이러면 안 되는 거죠. 이제 징글징글해요”라고 말했다가 이후, 이것이 “유족이 아닌 정치인을 겨냥한 메시지였다”라며 해명하기도 했다. 이 말의 맥락을 보면 이것은 틀림없는 세월호 가족들에 대한 모독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우리는 배울 점이 있다. ‘기억의 도구화’, ‘경험의 정치화’ 이것은 우리가 늘 경계해야 할 부분이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자의 무게, 지나친 도덕과 냉정한 이성의 회색지대
우리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노회찬 전 의원의 자살을 기억하고 있다. 인간을 극한 상황으로 몰아 인간적 삶과 생존을 맞바꾸게 함으로써 생존을 향한 합리성이 인간성을 삼켜버리게 할 수도 있고, 그런 합리성에 저항하여 스스로 목숨을 버림으로써 도덕성을 지키고자 할 수도 있다. 최소한 노무현 전 대통령과 노회찬 전 의원은 후자를 선택했다.
두 분의 자살이 잘한 일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냉정한 이성의 일방적인 우세를 주장하는 것 역시도 아니다. 단지 우리는 두 분의 자살 사건의 배경에 있는 비인간화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저자는 나치 통치의 잔악성은 무엇보다도 희생자들을 파괴하기 전에 비인간화했다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소위 ‘나치의 게임 법칙’이라고 불리는 것, 자신의 일가족이 몰살되든지 아니면 이웃의 유대인을 죽음으로 몰던지, 자기와 함께 사형을 당할 사람을 선택하던지, 아니면 선택을 거부함으로써 더 많은 사람이 죽게 놔두던지, 자신이 구호한 아이와 함께 죽던지, 아니면 아이를 죽이던지, 하는 식의 나치의 게임 법칙 속에서 저자는 냉정한 합리성과 지나친 도덕성 사이의 질문을 던진다.
또한, 일제 통치하에서 일본인보다 더 악랄했던 조선인 군무원들의 이야기와 나치에 점령된 폴란드 예드바브네에서 유대인 이웃들을 학살한 형제가 학살에 가담한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자신들은 역사의 희생자라고 주장했던 사실 등은 역사의 경계인으로서 가지고 있는 풀뿌리 기억이 얼마나 불편한 진실인가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한편, 조선인 군무원으로 일본군에 복무했다가 인도네시아 해방군에 가담하고, 결국 네덜란드군에 사로잡혀 총살당한 양칠성, 식민지 시대에 일본으로 건너가 세계 레슬링을 제패했던 역도산, 그가 일본인을 대표하여 전후 미국의 프로레슬러들을 제압했던 이야기, 그리고 소학교 교사, 만주국 육군사관학교 학생, 일본 육사 생도, 일본군 장교, 남로당 당원을 거쳐 정치적 반공주의와 경제적 스탈린주의를 절묘하게 결합했던 박정희에 이르기까지, 경계의 기억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저자는 묻고 있다.
저자는 또한 이러한 경계에 대해, 1945년 일본의 패전 당시 11세의 소녀였던 요코의 이야기를 다룬 ‘요코 이야기’와 독일의 노벨상 수상 작가 귄터 그라스의 ‘게걸음으로 가다’를 비교하여 이야기한다.
‘요코 이야기’가 오직 패전의 역사 공간에서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탈출한 요코의 이야기를 통해 일본인 스스로가 받은 피해만 강조하고 있다고 한다면, 1945년 1월 30일 독일인 피란민을 태우고 동프로이센의 고텐하펜 항구를 출발한 직후, 소련 잠수함의 어뢰를 맞고 침몰한 이야기를 다룬, ‘게걸음으로 가다’는 가해자인 독일인과 그 가해자에 가해를 더했던 소련 사이에서 역사적 맥락을 놓치지 않고 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역사적 문제에 대한 용서를 이야기한다. 전후의 복잡한 역사의 회색지대 속 기억을 이야기할 때, 용서라는 것은 필연적이다. 한일 간의 문제 역시 그 중심에는 용서가 있다. 용서란 주제에 대해서 임지현 교수는 매우 냉정하다. 용서란 오로지 피해 당사자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수년 전,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을 대신하여 일본을 용서하겠다면 화해와 치유의 재단을 설립한 박근혜 정부를 생각해 보면 이는 명확해진다. 누구도 다른 사람의 실존을 대신하여 가해자를 용서할 수 없다. 용서는 피해자 당사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최근 독도 지킴이 서경덕 교수는 자신의 SNS에서 가끔 자신에게 편지를 보내는 우익 인사들 이야기를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자신에게 편지를 보내오는 우익 인사들이 공통으로 하는 말이 있다고 한다. 바로 ”당신은 젊어서 잘 모르는가 본데, 우리나라가 이 정도로 살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의 지배 덕분이야.”라는 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라는 책에서 가토 요코가 이야기 한 바와 같이 나치가 타국의 국민을 학살했다고 한다면 일본은 자국의 국민을 학살했고, 특히 식민지에 대한 일본의 통치 방식은 ‘파리 강화 회의’에서 일본의 동맹국으로부터도 강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일본의 강제적 식민지 통치 방식은 삼일운동에 의해서 전 세계에 알려졌다. 그렇다면 ‘일본의 덕분’을 이야기하는 우익 인사들에게 있어서 삼일운동은 왜곡된 기억일 뿐이다.
일부 우익 인사들의 이러한 기억의 왜곡, 전두환의 광주 학살 부정, 세월호 원인 은폐, 미투 운동의 갈등 등이 우리가 ‘기억 전쟁’을 계속해 나가야 할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