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의 사람들
“역사를 관장하는 여신인 클리오는 여신 중에서 가장 내성적이고 조심스럽게 행동해서 여간해서는 사람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저자 가토 요코가 한 말이다. 2007년 말부터 이듬해 설까지 5일에 걸쳐서 진행한 강의를 토대로 쓰인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한 ‘조심스러운 행동’은 자국민, 바로 일본인들을 향하고 있다. 일본인에게 있어서 역사란, 특히 근대의 역사란 그 해석에 있어서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신중함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2008년 새해를 여는 시점에 가토 요코는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역사를 보고 해석하는 데 있어서의 위험성과 조심성에 대해 말했다. 이 말은 생각, 유추, 비교를 거친 풍부한 사례와 지식이 축적된 상태로 역사를 읽어야 한다는 강한 주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가토 요코가 ‘역사 앞에서의 조심성’을 말한 지 10년이 넘은 2019년의 한일 관계는 더욱 악화되어 있고, 아베 정권의 패권주의적 성향은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교과서 왜곡으로 노골화되고 있다.
하루하루를 살아갈 때, 우리는 늘 주변과 나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 평가하고, 판단하게 된다. 과거의 경험으로 현재 상황을 판단하는 인간은 역사를 평가할 때, 유추라는 렌즈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자국의 침략 전쟁을 미화하는 일본의 일부 정치가에게 있어서 과거의 유추는 늘 위태롭다. 그래서 역사는 권력자가 아닌 대중의 기억으로 기록되어야 안전하다.
최근 삼일절 100주년을 기념하는 한 TV 방송에서 “기억으로 기록하다”라는 부재를 단 것은 매우 적절해 보인다. 역사란 ‘기록으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으로 기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억은 부정확하고, 틀린 것일 수는 있어도, 왜곡되거나 조작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보가 가짜 뉴스와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가토 요코 역시도 이 책에서 가능한 많은 사람의 목소리를 담아내려 했다. 물론 자료의 한계로 인해, 소위 ‘보통 사람’의 목소리보다는 글 좀 쓸 수 있었던 지식인이나 정치가, 그리고 군인의 이야기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나름대로 균형을 잡으려 한 흔적을 책의 여기저기에서 발견하게 된다.
저자의 이러한 노력은 상당 부분 소위 아베로 대변되는 ‘일본 현상’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도움이 된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을사늑약과 중일전쟁을 거쳐서, 태평양 전쟁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양심적이고 명철한 지식인들과 군국주의자, 위정자들을 담담히 비교함으로써 역사의 교훈과 위험성을 동시에 던져주는 한편, 근대 일본이 일으킨 전쟁의 역사에 대해 현재의 경고장을 던져주기도 한다.
저자는 태평양 전쟁을 역사적으로 가장 황당한 전쟁으로 묘사한다. 독일이 주도한 양차 세계대전은 보기에 따라서는 독일의 승전이 가능한 전쟁이었다. 심지어 E, H Carr와 같은 저명한 역사학자나 1920년대 대공황기에 활약한 케인스 같은 경제학자는 미국과 영국의 대독일 정책이 필연적으로 전쟁을 발발시켰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만큼 양차 세계대전의 개연성은 존재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일본이 발발시킨 태평양 전쟁은 누가 보아도 어처구니없는 전쟁이었다. 가토 요코는 이 황당한 전쟁이 벌어졌을 당시, 즉 1941년 12월 8일 오전 여섯 시, 대본영육해군부가 “제국 육·해군은 오늘 8일 미명, 서태평양에서 미국, 영국군과 전투 상태에 들어갔다.”라는 라디오 방송을 했을 때, 일본의 보통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에 대해 궁금해한다..
현실적인 역사는 일부 정치가들이나 고위급 군인들에 의해서 이끌려 가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역사의 한가운데를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생각은 더욱 중요할 수 있다. 저자가 처음으로 인용한 보통 사람들의 목소리는 지식인이자 패전 후 도쿄대학 총장이 된 난바라 시게루가 읊은 단가다.
“인간의 상식을 넘고, 학식을 넘어서 벌어진, 일본 세계와 싸운다.”
이 말만큼 태평양 전쟁을 정확히 표현한 말은 없을 것이다. 당시 미국의 국민총생산량은 일본의 열두 배, 중화학공업과 군수산업의 기초가 되는 철강 생산량 역시 열두 배, 자동차 보유 대수는 160배, 석유는 776배나 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러한 차이를 소위 ‘야마토 정신’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허황한 꿈을 바탕으로 전쟁을 시작했다.
이 책 제목인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에서 ‘전쟁’이 태평양 전쟁을 지칭하는 것이라면, ‘그럼에도’라는 단어는 당시의 일본과 미국의 국력의 차이뿐 아니라 1938년 당시의 복잡한 국제정치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이 책이 역사를 다루고 있는 만큼, 독자들은 나름의 실존적 관점을 선택적으로 조정할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관심을 가질 만한 것은 전쟁을 이끌었던 논리가 아니라 전쟁을 반대했던 논리들이다. 다시 말하면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전쟁에 대한 경고와 군국주의에 대한 비난을 서슴지 않았던 지식인들의 이야기들이다.
“일본인은 어릴 때부터 ‘목이 말라도 남의 샘물은 마시지 마라’라고 배우지 않았던가”라고 한탄했던 요시노 사쿠조(도쿄 제국대학 법학부 교수), 제국 군인의 신분으로 “일본은 전쟁할 자격이 없다 ‘라고 단언했던 미즈노 히로노리와 같이 만주사변과 이어지는 태평양 전쟁을 반대했던 지식인들의 경고는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미국과 영국의 도움, 그리고 러시아의 공산 혁명으로 러일전쟁에서 겨우 승리한 일본은 이에 고무되어 만주사변과 양차 대전에 참전했지만 결국 태평양 전쟁에서 참혹하게 패배했다. 그러나 일본인들에게는 오히려 자신이 일으킨 전쟁에서 스스로가 피해자라는 의식이 자리 잡았다. 일본인들의 일방적 피해 의식은 자신들의 침략 전쟁으로 인해 고통받았던 이웃 나라에 대해 눈을 감아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저자는 일본인의 이러한 자해적 피해 의식에 대해, 그 원인을 두 가지로 분석한다. 첫째는 ’ 일본식 수동 표현‘이다.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수백만의 일본 군인이 전사했다. 일본인들은 미혼인 채 자손을 남기지 못하고, 이국에서 비명횡사한 젊은이들은 죽은 넋에 재앙이 깃든다고 생각했다. 일본인들은 이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신사를 짓고 매년 참배를 했다. 이러한 참배 의식은 일본인들의 일방적 피해 의식을 강화했다.
두 번째로 2차 대전 말기, 러시아군의 참전으로 인해 만주지역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살해당했다. 당시 군인을 포함하여 만주에 거주하던 일본인이 모두 200만 명이었는데, 이중 약 25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의 기억은 일본인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상처가 훗날 피해 의식으로 자라났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그러나 저자 가토 요코는 이러한 피해 의식이 정당하지 못한 것이라 주장한다.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의 포로가 된 미군 병사의 사망률이 1.2%에 불과했던 반면, 일본군에 포로가 된 미군 병사의 사망률은 37%를 넘었다는 통계를 제시하며, 일본의 잔혹성을 고발한다. 그뿐만 아니라 독일이 전시에도 국민에게 보급되는 식량의 양은 절대로 줄이지 않았던 것에 비해, 일본 국민이 전시에 섭취한 음식의 양이 60%나 감소했던 점을 들어 일본은 전쟁의 상대국뿐만 아니라 자국민에 대해서도 그 잔혹성을 보여주었다고 말한다.
이 책은 일본의 근대사에서부터 태평양 전쟁에 이르기까지, 제국주의가 세계를 어떻게 지배해 왔으며, 그 가운데 일본의 군국주의는 어떤 방식으로 대응해 왔는지를 매우 세밀하고 꼼꼼하게 조명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처구니없는 전쟁 속으로 행진해 가는 일본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역사를 어떻게 읽어내야 하는지에 대해, 그리고 역사적 관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은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
또한, 극동아시아에 위치한 일본이 왜 유럽 강국들이 싸우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야 했는지, 어떤 관점에서 일본은 미국을 선제공격했는지, 중국은 어떤 전략으로 일본에 맞섰는지 등에 대한 명쾌한 분석이 독자들을 끌어들인다.
한국인으로서 저자가 분석한 동학과 삼일운동에 대한 평가 역시 새로웠다. 동학 혁명은 내정과 국제 관계의 불일치가 주는 역사적 불행으로 표현되었고, 삼일운동에 대해서는 1차 세계대전을 정리하는 파리강화회의를 통해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대한 비판을 끌어낸, 그리고 결국은 일본이 국제연맹을 탈퇴할 수밖에 없는 원인적 사건으로 평가했다.
무엇보다 이 책이 주는 가장 큰 의미는 역사를 보는 시각에 대한 것이었다. 저자는 역사는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도 하지만 오판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역사란 사실보다 해석이 더욱 중요하다는 이야기이다.
예를 들어 근대 일본은 전쟁의 역사적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라는 질문에 대해, 저자는 당시 일본은 전쟁을 혁명으로, 점령지를 보상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청일전쟁을 통한 조선 반도의 점령, 러일전쟁의 승리로 쟁취한 만주 찬탈을 혁명과 보상으로 평가했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또 다른 질문, 즉 이것이 단지 근대 일본만의 문제였을까? 오늘날에는 이러한 시각이 존재하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9.11 사건을 빗대어 끌어낸다.
저자는 책의 서언에서 장 자크 루소의 ’ 전쟁과 전쟁 상태‘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했다. “전쟁은 국가와 국가의 관계에서 주권, 사회계약에 대한 공격, 다시 말해 상대국의 헌법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행해진다 “. 이 말에 따르자면 미국의 이라크 공격이나 이란에 대한 미국의 태도는 헌법에 대한 공격, 즉 전쟁이 아니라 일종의 토벌인 것이다. 현재 북한에 대한 미국의 태도 역시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저자는 혼돈의 근대 일본 사회에서도 역사를 바로 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역사에 대해 가져야 하는 올바른 태도와 시각을 다시 한번 조명한다.
10대 시절부터 자유 민권 사상에 관심을 가졌고, 주간 ’ 평민신문’을 창간하기도 했던 고토쿠 슈스이는 1910년 메이지 천황을 암살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돼 순교했다. 일본 최초로 공산당 선언을 일본어로 번역하여 동아시아에 보급하는 한편, ’ 프롤레타리아’를 ’ 노동자’라는 단어로 번역했던 고도쿠 슈스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을 존경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메이지 시대의 대표적인 시인이었던 이시카와 다쿠보쿠. 한국의 대표적인 근대 시인인 백석은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이름 중에서 ’석(石)‘자를 따와 자신의 호 ’ 백석(白石)’을 작명하기도 했다. 그는 26년의 짧은 생애 동안 고향을 향한 그리움, 근현대 도시인의 슬픔과 서정, 국가주의에 대한 저항과 민중적 자각, 삶의 회한과 냉소 등을 그려 메이지의 대표적인 문학가로 평가되었지만 러일전쟁 이후의 일본의 정황에 대해 끊임없이 비판했다.
가토 요코는 일본의 서점에 쌓여있는 중국, 한국 등을 비하하는 자극적인 책들에 대해 가슴은 후련할지 모르지만, 의미 없는 책이라고 말한다. 그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 가슴이 후련한 ‘책은 전쟁의 실태를 확인하는 적절한 ’ 질문’을 던지지 않습니다. 둘째, 그러한 책은 사료와 사료에 들어있는 잠재적 정보 모두를 공평하게 해석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결국 과거의 전쟁을 이해했다는 진정한 충족감,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비슷한 종류의 책을 몇 번이고 읽게 됩니다. 이러한 시간 낭비, 돈 낭비는 젊은 세대에게는 맞지 않습니다. “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언급되는 시대, 독립 유공자에 대한 갑론을박이 벌어지는 현재, 임시정부 탄생의 비밀이 논쟁거리가 되는 정세, 미국과 북한이 여전히 대립하고, 이를 중재하고자 하는 문재인 정부의 노력이 지속하고 있는 형세, 독도를 둘러싼 일본의 교과서 왜곡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역사를 다시 읽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