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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인순 Apr 14. 2019

'당신 인생의 이야기'

책 속의 사람들


당신 인생의 이야기

굳이 사이언스 픽션으로 분류되는 이 책은 사실상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에 있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는 언제나 ‘신비의 영역’이다. 작은 입자와 반입자로부터 우주가 시작되었다는 빅뱅 이론이나, 자연선택을 통해 인간이 현재와 같은 수준으로 발전하였다는 진화론, 암석과 대기로부터 생명이 탄생했다는 생명의 기원, 그리고 오늘날 문명이 지구의 암석을 파내고 합성하고 가공하여 만들어졌다는 과학적 사실들은 모두 가늠할 수 없는 신비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딱딱한 두개골 속에 들어 있는 고깃덩어리가 이 우주를 상상하고, 자신의 몸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이 경이롭다.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인간, 푸른 하늘과 태양을 응시하는 인간,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는 인간은 신비 속에서 살아간다. 인류가 만들어 내는 신비로운 이야기 그 이야기는 현실이라는 신비에서 비현실이라는 신비로의 여행 코스를 만들어 내고, 그 여행길 위에는 언제나 인간의 영혼이 걸어가고 있다.      


테드 창은 이 책에는 여덟 가지의 신비로운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공통적으로 두 가지 영역 사이를 오가는 경계의 이야기들이다. 첫 번째 이야기, ‘바빌론의 탑’에서는 땅과 하늘, 인간과 신, 삶과 죽음이 서로의 경계를 순환한다. 두 번째 이야기, ‘이해’에서는 언어와 경험, 우리 뇌의 상향 처리와 하향 처리 간의 전쟁이 전개된다. 세 번째 이야기, ‘영으로 나누면’에서는 존재와 비존재에 대해서, 그리고 네 번째의 이야기, ’ 네 인생의 이야기‘ 에서는 인과론적 언어와 목적론적 언어 간의 소통이 그려진다.      


다섯 번째 이야기, ’ 일흔두 글자’는 ‘창조된 자연(나투라 나투라타 Natura Naturata)’에서 ‘창조하는 자연(나투라 나투란스 Natura Naturans)’으로 나아가는 인류를 긴장감 있게 그리고 있고, 여섯 번째, ‘인류 과학의 진화’는 과학이라는 주제를 놓고 연구와 해석 간의 우호성을, 그리고 일곱 번째 이야기, ‘지옥은 신의 부재’는 선과 악이라는 오래된 주제를 다루고 있다. 마지막 이야기, ’ 외모지상주의에 관한 소고’를 통해 작가는 칼리아그노시스(失美症)와 안티-칼리아그노시스 사이의 논쟁을 객관적으로 조명한다.      


우리 인생의 문제를 집요하게 추적해 가는 작가의 이야기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신념과 치열한 싸움을 해야 한다. 또한, 신비와 현실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기 위한 영혼의 장치를 구축해야 한다.     


바빌론의 탑

신의 사랑과 진리는 이성적 도전을 받아왔다. 이 도전의 역사는 시간을 거슬러 바벨탑에서 시작한다. 바벨탑으로 상징되는 신에 대한 인간의 도전은 그동안 지동설과 진화론, 뇌 과학과 인공지능 등 과학과 이성의 계보를 통해 계속되어왔다. 기도가 아닌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하늘에 도전하고자 했던 인간, 즉, 바벨탑 공정이 하늘의 천장에까지 이르렀을 때, 거기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탑의 높이가 태양을 통과하고 별을 넘어서서 하늘의 천장에 다다랐을 때, 탑을 오르는 수개월의 여행을 거쳐 힐라룸은 천장 바로 밑에 도달한다. 힐라룸과 노동자들은 하늘의 천장을 뚫기 시작하기 전, 하늘로부터 물이 쏟아져 내려와 인간들을 멸망시킬 것이라는 두려움에 직면한다. 두려움은 논쟁을 낳는다. 벽돌공 쿠르두사는 야훼가 이 탑을 비로 흘려보내실 리가 없다고 긍정적인 견해를 피력한다.      


“만약 탑이 신에 대한 모독이었다면 야훼는 이미 오래전에 그랬을 거야. 지금까지 몇 세기나 이 작업을 진행해왔지만, 야훼가 노여워한다는 징후는 티끌만큼도 보지 못했어. 그러니까 야훼는 우리가 천장을 뚫기 전에 저수지를 비워 줄 거야.”      


이에 대해 누군가 반박한다.      


“우리가 더할 나위 없이 순수한 목적을 위해 일해온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현명하게 판단했다는 보장이 있을까? 인간이 자기 몸을 빚어낸 대지를 떠나 살아가려고 선택한 것이 정말 올바른 길이었을까? 야훼는 한 번도 이 선택이 옳았다고 한 적이 없어. 그리고 지금 우리는 머리 위에 물이 저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하늘에 구멍을 뚫으려 하고 있어. 만약 우리의 선택이 잘못되었다면, 야훼가 우리를 우리 자신의 잘못으로부터 지켜줄 것이라는 보장이 어디 있나?”     


논쟁 끝에 그들은 하늘의 천장을 뚫기로 한다. 그들이 하늘 천장을 뚫기 시작하자, 예상한 대로 뚫어진 하늘로부터 물이 쏟아져 내려왔다. 힐라룸은 물을 막기 위해 설치한 방에 갇혀 죽음에 이른다. 그러나 힐라룸이 죽음의 시간을 지나 도달한 곳은 바빌론의 탑이 서 있던 사막, 바로 출발지점이었다. 사막에 떨어진 힐라룸은 생각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원통형 인장. 부드러운 점토판 위에서 그림이 새겨진 원통에 인장을 대고 굴리면 원통이 남긴 자국은 하나의 그림을 형성한다. 점토판 위에서는 각자 반대편에 서 있는 두 인물도 원통 표면에서는 나란히 서 있을 수 있다. 세계는 이처럼 원통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다.”     


힐라룸은 지속되는 인간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왜 야훼가 탑을 무너뜨리지 않았는지라는 질문에 대해 아무리 오랫동안 여행을 해도 인간은 결국 출발점으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나름의 답을 내놓았다. 세대는 지나가도 인간은 자신의 위치를 깨달을 수 있지만, 그 위치는 늘 원점이라는 뜻이다.      


기독교 성서 속에서 바벨탑을 무너뜨린 야훼는 이러한 의견에 찬성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가 무너뜨린 탑은 인간은 되돌아올 수 없는 존재이기에 이 땅 위에서 열심히 살라고 하는 명령이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것에 매달리지 말고 땅 위에서 번성하라.”     


이해

우리는 무엇으로 완전한 게슈탈트, 즉 우리 자신의 정신 활동을 이해할 수 있을까? 언어로? 또는 경험으로?      

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리안 그레코, 그는 한 시간 이상을 물에 빠져 구출된 후, 뇌의 뉴런을 대부분 잃었으나, ’ 호르몬 K‘ 요법을 통해 기억을 되찾고 있었다. 그러나 호르몬 요법은 단순히 그의 기억을 되찾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의 지능을 정점으로 끌어올렸다. ‘호르몬 K’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의사들의 기대 수준을 넘어선 것이다.  


’ 호르몬 K’ 처리 이후, 대상과 상황을 패턴으로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 그레코는 모든 학문에서 게슈탈트를 볼 수 있게 된다. 새로운 능력을 이용하여 그레코는 일명 ’ 호르몬 K’ 프로젝트의 아바타 역할로부터 탈출한다. 그레코는 뇌의 능력을 이용하여 신체를 단련하고, 언어를 분석하는 한편, 효과적인 소통 능력을 개발한다. 그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     


“나는 궁극적인 자아 인식에 도달할 수 있을까? 나 자신의 정신적 게슈탈트들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을까? 나는 종족적 기억을 꿰뚫어 보게 될까? 덕성의 본유적 지식을 발견하게 될까? 나는 어쩌면 마음이 물질에서 저절로 발생했는지 확인하고, 의식을 우주의 나머지와 연관시키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될지도 모른다. 주체와 객체를 융합시켜 무경험에 도달하는 방법을 알아낼지도 모른다.”     


인간의 인지가 경험과 무관하게 발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레코의 의심(?)은 새로운 인간관계의 창조 가능성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근본적으로 소통은 주체와 객체의 공통된 경험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정점에 다다른 지능은 경험 없는 소통이라는 새로운 소통 구조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이기도 했다.     


어느 날 그레코는 자신보다 앞서 ‘호르몬 K’의 대상이었으며, 자신과 같이 프로젝트팀을 탈출한 레이놀즈라는 이름의 사람과 접촉하는 데 성공한다. 상대방의 정체성을 확인한 두 사람은 대화를 시작한다. 먼저 그레코가 레이놀즈에게 말을 건다.     


“깨달음의 위치에서 볼 수 있는 미에 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레이놀즈가 대답한다.      


“자네는 깨달음을 얻은 의식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구조가 필요한지 알고 있네. 그것이 요구하는 산업 분야가 확립될 때까지 기다려야 할 이유가 내게는 없어.”     


이 대화로 두 사람 간의 입장 차이가 확인되었다. 레이놀즈는 지능을 수단으로 보았고, 그레코는 지능을 그 자체로 보았다. 두 사람이 그리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의견 불일치는 결국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사라져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렇게 두 사람 간의 대결이 시작된다.      


그레코는 언어에 의한 연상 유발 공격을 펼쳤으나 레이놀즈는 이를 잘 방어해 냈다. 반면 레이놀즈는 그레코의 언어 방어 체제를 피해 그의 경험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이전에 있었던 몇 번의 조우, 그 조우를 통해 레이놀즈는 시각과 청각의 경험을 그레코의 뇌에 심어 놓았던 것이었다.      


레이놀즈의 공격은 그레코의 뇌 안에서 하향 처리되는 과정을 통해 진행되었고, 그레코는 이를 막을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것은 결국 스스로에 대한 공격이었기 때문이었다. 대결에서 패배를 직감한 그레코는 죽음의 과정을 통해서 게슈탈트를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다.     


그레코는 미래의 구세주에게는 심미주의보다 실용주의가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붕괴되어 갔다. 자신의 뇌 속에서 ‘말’이 된 ‘경험’ 그 작동 방식에 대한 이해가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었다.      

“나는 ‘말’을 이해하고, 그것이 작용하는 방식을 이해한다. 고로, 나는 붕괴한다.”


영으로 나누면

인간이 지성이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무엇일까? 증명할 수 없는 것이 증명되었을 때,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는 신념의 토대가 무너져 내린 순간, 그 토대를 무너뜨린 존재가 바로 자신일 때.      

르네는 어느 날 ‘0’으로 나누면 모든 것이 같아진다는 수학적 사실을 발견한다. 그가 발견한 사실의 의미는 인간이 구축한 모든 수학 체계가 사실은 허상이라는 진실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이는 마치 1931년 쿠르트 괴델에 의해 발표된 두 가지 정리, 즉, 수학은 참이라는 것을 본질에서 증명할 수 없으며, 수론의 공리를 통해서는 수론의 무모순성을 증명할 수 없다는 정리가 형식 논리학을 토대로 수학에 엄밀한 기반을 부여하려고 했던 버트런드 러셀과 앨프리드 화이트헤드를 충격 속에 몰아넣은 것과 같았다. 아니 그보다 더 본질적이고 총체적인 충격이었다. 수학은 여전히 유효하다며 애써 르네를 위로하는 칼에게 르네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그건 그들이 사용하는 수학이 단지 트릭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야. 하나의 기억법에 불과해. 어느 달이 큰 달인 지를 알기 위해 손등의 손가락 관절로 셈하는 것과 같은 거야.”     


자신의 신념, 수학적 토대가 무너져 내리자 르네는 점차 미쳐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괴델이 과대망상증에 걸려 굶어 죽은 사실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괴델이 증명한 것은 ‘인간 이성의 한계’였다. 그러나 르네가 발견한 것은 한계가 아닌 토대 자체였다. 그것이 르네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나를 향해 모순이라고 소리 지르고 있는 것 같아. 지금 난 하루 종일 수와 수를 등식으로 잇고 있어.”     


칼은 이해했다. 르네는 지금 고전 물리학자들이 양자역학에 직면했을 때의 그 혼돈, 자신의 이론들이 통째로 부정되고 새로운 이론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그런 상황, 아니 그보다도 더한 상황에 빠져있는 것이었다.      


지금껏 르네는 수학이 우주에서 그 의미를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우주에 대해 모종의 의미를 부여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것은 수학은 우주로부터 독립되어 있지만, 우주에 기호론적 의미를 부여한다는 믿음이었다.     


그러나 영으로 나누면 모든 것이 같아진다는 이론을 발견한 지금은 수학 이론이 모순 자체이고, 수학은 경험적인 것 그 이상의 어떤 것도 아니었다. 수학은 아무것도 아니며, 그렇다면 수학자인 자신은 무엇을 해야 할까?     

당신이 종교인이라면, 당신이 수학자라면, 당신이 과학자라면, 당신이 음악가나 미술가라면, 신이 없어진 세상, 수학과 과학, 음악과 미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증명된 세상에서 당신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르네는 이때의 느낌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하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은 그것과는 달라. 나는 마치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한 신학자가 된 느낌이었어. 그럴까 봐 단순히 불안해하는 게 아니라 그것이 사실이라는 걸 아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아?”     

진정한 과학자는 자신의 이론과 연구의 결과를 맹신하지 않는다. 그 토대가 언젠가는 무너질 수도 있으며, 새로운 이론이 기존의 토대를 통째로 바꾸어 버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기 때문이다. 신학과 철학도 마찬가지이다. 정답 위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정답 없이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네 인생의 이야기

“오늘 밤의 이야기, 너를 잉태했던 이 밤의 이야기를 너에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단다.”      


언어학자 뱅크스는 물리학자인 게리를 만나 ‘너’를 잉태했던 그 밤에 미래의 딸에게 이야기를 남긴다. 그 이야기는 두 가지 시간 위에 놓여 있다. 하나는 잉태 이전의 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잉태 이후의 이야기다. 과거와 미래에 관한 이야기는 복선을 타고 자연스럽게 엮인다.      


과거의 이야기는 인과론적 설명이고 미래의 이야기는 목적론적 통찰이다. 다시 말해 뱅크스의 이야기 속에는 과거와 미래가 씨줄과 날줄로 촘촘하게 짜인 시간의 이야기이고 그 속에는 자유의지가 섞여 있다.     


어느 날 우주로부터 체경이 도착하고, 그 체경에는 햅타포드 형태를 가진 외계인이 탐승하고 있었다. 언어학자 뱅크스는 외계인, 즉 햅타포드와 대화를 시도한다. 그러나 그들의 언어는 인간의 언어와는 전혀 다른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저들의 문자는 단어로 분할되어 있지 않아요. 구성 단어들에 해당하는 어표를 결합해서 문장을 표기하고 있어요. 회전시키고 수정하면서 어표들을 결합하는 거예요.”     


의문투성이의 외계 언어 체계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언어학적 관점을 넘어서는 물리학적 통찰이 필요했다. 뱅크스는 그날 밤, 편지를 썼던 그 ‘너’의 아버지가 될 게리라는 물리학자의 도움을 얻게 되는데 이것이 그날 밤 그들의 인과 관계였다.     


게리는 뱅크스에게 ‘페르마의 정리’를 설명해 주었다. “빛의 경로는 언제나 최소 시간에 도달할 수 있는 경로다.”라는 페르마의 정리를 통해 뱅크스는 결국 빛은 목적지가 정해졌을 때, 자신의 경로를 결정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외계의 언어도 목적론적 특성이 있음을 감지한다.     


뱅크스는 게리로부터 외계 언어를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되는 또 하나의 물리 법칙을 배우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변분 원리’다. 게라는 뱅크스에게 모든 물리학의 법칙은 하나의 변분 원리로 다시 기술될 수 있으며, 유일한 차이는 어떤 속성이 최소화되는지 아니면 최대화되는지에 달려있다고 설명한다.     


“‘페르마의 원리가 적용되는 광학에서 극치를 가져야 하는 속성은 시간이야. 역학에서는 또 다른 속성이 적용되지. 전자기학에서는 또 다른 속성이 대두되고. 그러나 그런 원리들은 수학적으로는 모두 비슷해.”     


뱅크스는 페르마의 원리를 햅타포드의 외계 기호로 기술할 수 있다면 다른 원리들도 해석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는다. 광선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 선택하기 전에 자신의 최종 목적지를 알고 있어야 하며, 그래야만 어느 지점에서 굴절될지 결정할 수 있다는 페르마의 정리로부터 햅타포드의 언어를 해석하는 원리를 발견한 것이다.  


미래에 도달할 어느 지점을 미리 알고 있을 때, 해석될 수 있는 현재의 언어. 그곳에 외계 언어의 비밀이 들어 있었다. 뱅크스는 햅타포드의 언어를 연구하면 할수록 자기 생각이 바뀌는 것을 느꼈다.      


“나에게 지금까지 사고란 보통 마음속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의미했다. 전문 용어를 쓰자면 나의 사고는 음운적으로 코드화 되어 있었다. 나의 마음속 목소리는 보통 영어로 말했지만,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었다.”     


물리 법칙을 생각할 때, 인류는 인과적 맥락에서 생각하는 편을 선호해왔다. 그러나 운동 에너지나 가속도처럼 인류가 객관적으로 받아들이는 물리적 속성은 모두 주어진 한 시점에서 어떤 물체가 가지는 성질이며, 이러한 성질은 순차적이고 인과적인 해석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 작용‘이나 적분에 의해서 정의되는 다른 것처럼 햅타포드의 언어는 목적론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작가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사건을 일정 기간에 걸쳐 바라봄으로써 만족시켜야 할 조건, 최소화나 최대화라는 목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가장 처음과 가장 마지막의 상태를 알아야 한다. 원인이 시작되기 전에 결과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뱅크스는 결국 햅타포드의 목적론적 언어 체계에 대해 이해했다. 그리고 그 언어 체계에 따라 사고하게 되었다. 그런 사고 체계의 결과로 그녀는 미래의 25살 딸에게 그날 밤 편지를 쓸 수 있었다. 굴절률의 차이 때문에 빛이 방향을 바꾸었다고 생각하면 이것은 인류의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빛이 목적지에 도달하는 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굴절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햅타포드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물리적 관점은 언어적 관점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모든 언어적 사건은 정보의 전달과 계획의 현실화라는 측면에서 인과적 해석과 목적론적 해석이 양립할 수 있다. 뱅크스는 이렇게 말한다.     


“햅타포드의 언어로 생각하는 법을 배우기 전, 나의 기억은 극미의 담뱃불처럼 타들어 가고 있는 나 자신의 의식이 만들어 내는 한 줄기 담뱃재처럼 자라나고 있었다. 햅타포드의 언어를 습득한 다음에는 새로운 기억들이 거대한 블록들처럼 자리에 맞아 들었다. 각각의 블록은 몇 년 동안의 기억에 해당됐다. 이것들은 순서대로 거나 연속적으로 도착하지는 않았지만, 곧 오십 년에 걸친 세월의 기억을 형성했다.”     


뱅크스가 그날 밤, 편지를 쓴 미래 딸의 나이가 스물다섯인 이유는 이러한 블록의 수명이었을 것이다. 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녀는 자신이 게리와 이혼할 것이며, 편지의 당사자인 딸과도 헤어지게 될 운명을 알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녀는 자신의 목적지를 알고 있었고, 굴절되는 빛과 같이 목적에 이끌리는 경로를 걸어갈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헵타 포드의 언어에는 자유의지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일흔두 글자

창조된 자연과 창조하는 자연. 인간 역시도 자연이라면 인간은 창조하는 자연이다. 기독교 신학자들은 성서에 나오는 기나긴 인간 족보의 의미를 ’ 하나님의 창조의 지속’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신이 탄생시킨 세상, 신의 창조 행위는 인간을 통해 지속하여 간다는 의미이다.     


이 이야기는 골렘에 관한 이야기다. 골렘은 인간과 다르게 창조된 피조물이고 스스로 창조할 수 없는 자연이다. 유대교의 전례에 따르면, 랍비 중에는 흙덩어리에서 사람과 닮은 존재를 만들어 내는 힘을 가진 사람이 있었고, 랍비가 창조한 이 영혼 없는 흙덩어리 인형이 바로 골렘이다. 골렘은 말을 못 하는 대신 사람의 이야기나 명령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충실한 하인으로 일할 수 있다.      


골렘을 만드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신성한 의식을 치른 후, 진흙이나 점토를 반죽해서 인형을 만든다. 다음으로 신이나 생명을 뜻하는 주문을 외고, 인형의 이마에 ’진리(emeth)“ 또는 ‘신의 이(Schem-hamphorasch)’라는 문자를 쓴 양피지를 붙인다. 이렇게 창조된 골렘은 성장해 가지만 이마에 새겨진 글자를 지우게 되면 골렘은 저절로 부서져서 원래의 흙덩어리로 돌아간다.     


본래 골렘을 만든 것은 하나님이었는데, 이는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기 전의 아담에게 주어진 이름이었다. 성서의 창세기 제2장 7절에는 "여호와 하느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라고 씌어 있는데, 여기서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기 전의 흙으로 빚어진 인간, 그가 바로 골렘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인간이 골렘을 만드는 행위는 신을 흉내 내는 일이며 신에 대한 반역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타인의 생명을 가지고 노는 자는 불손한 자요, 언젠가는 그 자신의 생명도 그런 처분을 받을 것이라 믿었다. 오늘날 골렘에 대한 개념은 다른 개념으로 확대될 수 있다. 인공지능이 대표적인 예다.     


어릴 적 로버트 스트랜턴은 흙으로 만든 인형, 즉 골렘을 만들어 노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그가 이 놀이 속에서 정말로 즐긴 것은 골렘 자체가 아니라 골렘을 창조하는 이름이었다. 랍비들이 골렘의 이마에 부적을 붙이듯, 골렘은 이름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친구 라이어널과 함께 ‘소년들을 위한 명명학 입문’이라는 책을 사서, 물질적 우주와는 구별된 어휘적 우주에 관해 공부하던 어느 날, 라이어널은 진흙이 아닌 인간의 정자를 배양하여 골렘으로 만드는 실험을 스트랜턴에게 보여주었다.      


처음, 정자로 만들어진 미생물에 스트랜턴은 경악했다. 그러나 모든 생물은 오래전, 동시에 창조되었고, 현재의 생명 탄생은 예전에 알 수 없었던 것들의 확장에 불과하다는 ‘전성설(前成說)’을 떠올리며, 이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 세상 모든 이름이 그 하나하나 개별적인 특성이나 능력을 나타내는 여러 개의 통명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배운 스트랜턴은 이름을 통합하고 분해하여 새로운 골렘을 만들어 내었다. 이 골렘은 손가락을 사람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움직일 수 있는 움직일 수 있었고, 이러한 기능으로 인해 인간을 대신하여 골렘을 만들 수 있는 주조를 제작할 수 있었다.     


스트랜턴은 자신이 창조한 골렘의 기술을 이용하면 인간의 일을 대신에 할 수 있으며, 결국 인간을 지금 보다 더욱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도움을 얻고자 주조 기술의 마스터 월러비를 만난다. 그러나 월러비는 이 기술이 절대로 인간을 이롭게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일과 역할을 빼앗고, 결국에는 인간을 불행하게 할 것이라고 반박하는 한편, 스트랜턴의 지원 요청을 거부한다.     


월러비의 거부에 실망한 스트랜턴은 어느 날 왕립학술원 원장, 필드허스트의 초청을 받고 그의 저택을 방문한다. 스트랜턴은 필드허스트의 저택에서 대학 시절 스승이었던 애시본을 만난다. 필드허스트와 애시본은 남성의 정자를 배양하여 대 태아를 만드는 연구를 하고 있었고, 대 태아에 차별화된 능력을 부여하기 위해 명명학(이름을 짓는 학문)을 연구하고 있던 스트랜턴을 프로젝트에 참여시키고자 초청한 것이었다.     


애스본이 진행하고 있던 연구는 정자를 배양한 태아를 성장시키고, 이 태아로부터 다시 정자를 추출하여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들을 검사하는 것이었다. 연구의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세대를 이어가며 추출한 정자로부터 배양된 태아는 다섯 세대가 지나면 더 이상 정자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 연구 결과가 의미하는 것은 결국 인류는 앞으로 다섯 세대가 지나면 멸종하고 만다는 것이었다.      


정자의 배양을 통한 인류의 보존에 대한 희망은 사라졌다. 그러나 애스본은 정자 대신에 난자에 이름을 날인하여 배양한다면 인류를 멸종시키지 않고 계속적인 생식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애스본과 필드허스트는 스트랜턴이 개발해 낸 일련의 명명법에 관한 연구 결과를 이 난자 배양 프로젝트에 적용해서 더욱 완벽한 결과를 얻어내고자 했다.      


그러던 중, 스트랜턴에게 카발리스트 로스가 찾아온다. 로스는 자신이 개발한 ‘글을 쓰는 능력’을 가진 골렘과 스트랜턴이 개발한 ‘손가락을 움직이는 능력’을 가진 골렘을 결합하여, 소위 ‘창조하는 창조물’을 개발하자는 제안을 내놓는다. 카발리스트가 왜 골렘 개발에 관심을 갖는가?라는 스트랜턴의 질문에 로스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저는 실제적인 응용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카발리스트들의 목표는 신을 더 잘 아는 것입니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최상의 방법은 신이 어떻게 만물을 창조했는지 연구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여러 이름에 대해 명상함으로써 지고의 의식 상태에 돌입합니다. 명상하는 이름이 강력할수록 신성에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     


그러나 스트랜턴은 로스를 믿을 수 없었다. 카발리스트들이 ‘창조하는 창조물’을 상업적 목적에 전용한다든가, 불손한 분야에 활용할 위험성에 대해서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고, 결국 로스의 제안을 거부한다.     

스트랜턴과 애시본은 우연히 프로젝트에 대한 필드허스트의 목적과 의도를 알게 된다. 필드어스트는 이 기술을 활용하여 인종적 조정과 통제를 하고 싶어 했다. 쉽게 말하자면 히틀러가 하고자 했던 인종 개량을 목적에 두고 있었다.     


필드허스트의 의도를 알아낸 스트랜턴과 애시본은 이를 막기 위해 비밀리에 두 세대 태아를 유발할 수 있는 이름을 태아에 날인하는 방법을 준비한다. 그러나 이 역시도 두 세대 이후의 생식에 대해서는 완전한 자유를 보장할 수 없는 불완전한 대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하나의 사건이 발생한다. 월러비의 사주를 받은 괴한이 스트랜턴을 공격한 것이었다. 스트랜턴은 필드허스트의 도움을 받아 겨우 살아난다. 아이러니하게도 스트랜턴을 구해 준 사람은 그가 기만할 작정으로 음모를 꾸미고 있는 바로 그 장본이었던 것이었다.      


필드허스트의 음모를 무너뜨리기 위해 고민하던 스트랜턴은 결국 하나의 방안을 떠올렸다. 바로 얼마 전 카발리스트 로스가 제안한 그 방법이었다. 스트랜턴은 카발리스트 로스가 개발한 ‘자신의 글을 쓰는 능력’과 자신이 개발한 ‘손가락을 움직이는 능력’을 결합하여 ‘창조하는 자연’이 창조자, 즉 인간의 의도에 통제되지 않고 자유로운 생식이 가능하게 하는 연구를 구상한다.      


”스트랜턴은 인류라는 종이 자기 자신의 행동이 허락하는 한 얼마든지 생존할 수 있는 날을 머리에 그려보았다. 번영도 몰락도 오로지 스스로의 행동에 의해서만 결정되고, 미리 정해진 종의 수명이 다했다고 허망하게 멸종해 버리지 않는 날을, 다른 종들은 지질학적인 계절 속에서 꽃처럼 피고 지는 일을 거듭하겠지만, 인류는 스스로 원하는 만큼 존속할 수 있을 것이다. “       


인류 과학의 진화  

”해석학은 과학적 탐구를 위한 적절한 방식 중 하나이며, 독창적인 연구와 마찬가지로 인류의 지식 체계를 증대시킨다. 게다가 인류 연구자들이 메타 인류가 간과한 응용 방법을 찾아낼 가능성 있다. “     


작가의 이 말은 어쩌면 내가 이 책을 읽고 있는 동안 깊이 빠져들게 만드는 과학의 세계를 묘사한 것일 수 있다. 해석학의 정수는 소설, 즉 이야기다. 과학으로 도출된 결과물들과 이 결과물들이 담고 있는 세계사적 함의를 토대로 세상을 그려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진정 인류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도 상상해 보고, 인간이 서 있는 자리의 신비성에 대해서도 관찰하는 것이다.      


소설이야말로 해석학이다.      


지옥은 신의 부재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은 신과 영원히 단절되는 것을 의미할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     


기독교 성서중 하나인 ‘욥기’는 매우 신비로운 책이다. 이 책은 해묵은 선과 악의 문제를 매우 풍부한 이야기를 가지고 풀어나간다. 선한 사람이 반드시 축복을 받지도 않으며, 악한 인간이 저주를 피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는 매우 심오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심오한 이야기는 욥기 42장에 이르러 무너지고 만다. 하나님 앞에 선과 악의 문제에 대해 논쟁하던 욥이 회개하고 다시 축복을 받는 이야기 때문이다.      


이러한 어색한 결말 때문에 어떤 성서학자는 욥기의 42장 이후는 후대의 편집자가 추가한 이야기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작가 테드 창 역시도 이를 매우 부자연스러운 ‘이야기의 덧붙임’으로 이해한 것 같다. 따라서 작가는 욥기의 42장 이후를 제거하는 수술을 통해 이 이야기를 재생산했다.     


어느 날, 사고로 자신의 아내를 잃은 닐은 자신과 같이 신의 개입으로 가족을 잃거나 비정상적인 상황에 빠진, 또는 불행해진 사람들의 격려 집회에 참여하게 된다. 집회에 모인 사람 중에는 신의 개입, 즉 천사의 강림에 의한 사건들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보인 사람도 있었고, 부정적이거나 중립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다.      


닐의 경우는 이러한 신의 개입을 비교적 중립적으로 바라보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닐은 지옥에 간다는 것이 낮 선 상황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신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고, 따라서 신으로부터 격리되는 것 자체가 두렵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 한 사람, 재니스 라일리는 그의 어머니가 임신 팔 개월이 되었을 때, 태 속에서 사고를 당했다. 재니스는 다리가 없이 지느러미 모양의 발이 고관절에 붙은 채 태어났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이 신의 축복이라고 믿으며 행복한 아이로 성장했고, 청중 앞에서 신의 축복과 인간에 대한 선한 요구를 강론하는 행복한 설교자로 살고 있었다. 최소한 천사 라시엘이 강림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어느 날 천사 라시엘이 강림하여 그에게 길고 아름다운 다리를 주고 떠났다. 그리고 장애인들 앞에서 신의 축복과 선한 요구를 설파하던 그녀는 점점 깊은 갈등에 빠지게 되었다.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장애인들에게 그녀는 자신과 같은 신의 축복을 약속할 수 없었고, 자기에게 일어난 기적이 이 사람들에게도 일어나리라는 확신을 줄 수도 없었다. 천사 라시엘이 주고 간 그녀의 길고 아름다운 다리가 그녀에게는 축복이 아닌 재앙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또 한 사람이 있다. 독실하지는 않지만 경건한 집안에서 정상적이고 풍족하게 자라난 이선 미드는 자신의 인생에 신의 징표가 있기를 고대하며 자랐다. 재니스가 경험했던 천사 라시엘의 강림이 있던 날, 이선 역시도 이 사건을 목격했다. 라시엘 강림 사건 현장에서의 구호 활동이 연이 되어 이선 역시 격려 그룹의 회합에 참여하게 되었다.     


닐과 재니스, 그리고 이선은 천상의 빛을 보기 위한 성지 순례 중, 강림하는 천사를 추격한다. 추격 과정에서 닐은 천상의 빛을 목격하고 죽음에 이른다. 천상의 빛을 목격한 또 한 사람, 재니스는 눈이 멀게 되고, 이선은 이 모든 광경을 목격한다.      


천상의 빛을 본 닐은 지옥에 떨어지면서 삶은 사랑이며, 고통조차, 아니 고통이야말로 사랑이라는 신의 신비를 깨닫는다. 천상의 빛으로 인해 눈이 먼 라일리는 다시금 청중 앞에서 신의 사랑을 전파하는 설교자로 서고, 이선은 자신이 경험한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전도사가 된다. 지옥의 닐, 눈이 먼 재니스, 그리고 불행을 목격한 이선은 각자 진정한 신앙에 대해 깨달음을 얻는다.      


”닐은 자신이 신의 의식 너머에 존재함으로써 신에게 사랑받고 있지 않다는 사실조차 알고 있지만, 이것도 그의 감정에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무조건적인 사랑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설령 아무런 보답을 받지 못하더라도. “          


외모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 다큐멘터리

’ 보정 속옷을 뜻하는 코르셋을 벗어난다는 의미로, 남의 시선을 의식해 억지로 꾸미지 않을 것을 주장하는 사회적 운동‘. 최근 페미니즘 논쟁에서 종종 등장하는 탈-코르셋에 대한 사전적 정의다. 그런데 이 정의에는 모순이 존재한다. 바로 ’ 억지로‘라는 단어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 아름답게 보이고자 하는 것이 ’ 억지로 하는 행동‘일까?     


이 마지막 이야기는 아름다움의 본질에 관한 이야기이다. 작가는 칼리아그노시아(失美症)라는 정신 질환에 착안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담아낸다.     


어느 날 인류는 칼리아그노시아(失美症)를 실용화하는 데 성공한다. 상품의 이름은 ’바자주 스펙스 버전‘이다. 이 상품을 통해 소위 칼리 요법을 시행하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 기준을 상실하게 된다. 펨블턴 대학은 신입생에게 이 요법을 의무화하려는 제도를 상정시킨다. 그리고 이에 대한 논쟁이 진행된다. 조지프 와인가트너란 신경학자는 실미증을 유발할 수 있는 상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모든 동물은 배우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개체들의 번식 잠재력을 평가하는 기준이 있고, 진화를 통해 그 기준을 인식하게 해주는 ’ 회로’를 발달시켰습니다. 인간의 사회적 교류는 얼굴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우리의 이 회로는 잠재적인 생식 능력이 상대방의 얼굴에 어떻게 나타나 있는지에 관해 가장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이 회로의 작용을 상대방이 아름답다든지 추하다든지, 혹은 그 중간의 어느 단계에 해당된다든지 하는 감각으로서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특징들을 전담 평가하는 신경 경로들을 막음으로써 우리는 인위적으로 실미증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대체로 과학자들이 연구한 아름다운 얼굴의 기준은 깨끗한 피부, 좌우 대칭성, 그리고 균형 있는 비율에 따라서 결정되는데, 얼굴의 윤곽과 인상을 인지하면서도 이러한 미적 기준에 무감각한 것이 바로 실미증이다. 라이언스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자신의 딸을 이 학교에 입학시키려고 한다.      


“세이브룩에는 골암이나 화상, 선천성 불구 등의 이유로 얼굴이 기형인 학생의 수가 일반 학교의 평균치보다 높습니다. 그런 자식들을 둔 부모들이 다른 아이들한테 따돌림을 받는 일이 없도록 이곳으로 전학을 오는 겁니다.”     


성경학자 와인가트너는 실미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실미증은 실인증과 매우 유사한 인지 특성이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얼굴 실인증은 우리의 뇌 속에 얼굴의 시각적 정보처리를 전담하는 특수한 ’ 회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로 간주되었습니다. 우리는 다른 물체들을 보는 것과는 다른 방법으로 얼굴을 봅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얼굴을 알아보는 것은 얼굴에 대해 우리가 실행하는 여러 정보처리 과정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얼굴 표정을 알아보는 일을 전담하는 회로도 있고, 다른 사람의 시선의 방향이 바뀌는 것을 탐지하는 회로조차도 있습니다.”     


칼리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칼리가 절대적으로 인간의 매력을 손상시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강조한다고 주장한다. 즉, 칼리를 통해 외모에 대한 편견을 가지지 않는 성숙함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칼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걸 성숙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전문가 시스템이 당신을 대신해서 결정을 내리는 것일 뿐입니다. 성숙함이란, 차이를 눈으로 보지만,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테크놀로지에 의한 지름길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칼리를 찬성하는 사람들의 논리도 만만치 않다. 칼리가 단순한 눈가림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아름다움이야말로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있기 때문에 칼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대상과 상황을 제대로 볼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칼리아그노시아 협회 회장 월터 램버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코카인을 예로 들어봅시다. 천연 형태의 코카 잎은 쾌감을 줍니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정도까지는 아니지요. 그러나 정제하고 순화하면, 그것은 여러분의 쾌락 수용기를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강렬하게 자극하는 약물로 변신합니다. 그러면 중독성이 생기는 거지요. 아름다움 또한 광고주들 덕택에 비슷한 과정을 거쳐왔습니다. 진화는 우리에게 잘생긴 외모에 반응하는 신경 회로를 부여했고, 시각 피질이었지요. 그렇지만 백만 명에 한 명밖에는 없는 피부와 골상을 가진 사람에게 전문적인 메이크업과 수정을 가한다면, 여러분이 보게 되는 것은 더 이상 천연 형태의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그것은 정제된 약제급의 아름다움이고, 미모의 코카인입니다. 생물학자들은 이것을 ’ 초자극‘이라고 부릅니다.”     


종교학 교수의 입장에서 보면 칼리는 일종의 영지주의와 같다. 육체는 아무것도 아닌, 오직 인간의 영적 상태만이 의미 있는, 그런 것이다. 영지주의를 반대하든 찬성하든 상관없이 종교적 관점에서의 육체적 아름다움은 배척의 대상일 수 있기에 종교학자는 칼리에 찬성한다. 종교적 관점에서의 칼리는 또 다른 문제를 달고 나타난다. 바로 ’ 도덕‘의 문제이다. 생물학자 와인가트너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그러나 사실은 이렇습니다. 우리에겐 개인의 사고 내용에 액세스 할 수 있는 수단이 없습니다. 인격의 넓은 양태를 형성한다든지 뇌의 자연스러운 특수화에 조응하는 변화를 만들어 낼 수는 있지만, 이것들은 극히 조잡한 조정에 불과합니다. 이민자들에 대한 적개심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신경 경로 따위는 마르크스주의나 발에 대한 페티시즘을 전담하는 신경 경로와 마찬가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칼리로 인해 도덕적 문제가 야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과 예술의 관점에서 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타메라 라이언스는 “미를 본다는 건 사랑을 닮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라고 주장한다. 생물학자 와인가트너는 많은 사람이 만약 실미증을 가지고 있다면 모나리자의 미소에서 얻는 감동은 없을 것이라는 우려를 표명했다고 이야기한다.     


칼리 요법이 상용화된다면 페미니스트들의 탈코르셋 운동도 의미를 잃어버릴 것이고, SNS상에서의 사진 조작도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칼리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를 인식할 수 있고, 용기 있는 행위나 고결한 행동에서 우러나오는 아름다움을 볼 수 있을 것이며,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사랑의 눈을 통해서 보는 것임을 알 수 있다고 마리아 데수자는 주장한다.      


칼리 요법에 대한 이 이야기의 결론은 없다. 단지 우리가 아름다움의 본질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도대체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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