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의 사람들
저자 에릭 캔델은 이 책의 1과를 통해 19세기 말 ~ 20세기 초, 오스트리아 빈이라는 도시를 중심으로 태동한 표현주의 예술과 인지심리학의 역사적 배경과 구체적 내용을 기술한다. 2과에서는 관점을 생산자에서 소비자(관람자)로 옮긴 후, 3, 4과를 통해 관람자의 시각 반응에서부터 감정 반응에 이르는 일련의 의식과 무의식의 흐름을 뇌 과학과 인지심리학이라는 현미경을 통해 관찰한다. 그리고 마지막 과인 5과에서는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담아낸다.
따라서 이 책의 내용을 제대로 소화하기 위해서는 1과에서 4과까지의 내용을 상호 참조하여 읽어야 하는 다소 피곤한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 저자의 이런 서술 방식은 그의 문학적 기술의 한계와 내용의 복잡성일 수도 있고, 독자의 완독이 어렵다는 판단에 따른 배려일 수도 있다.
저자의 서술 방식으로 인해 책의 내용이 독자들에게 일목요연하게 전달되지 않았을 수 있다. 독자들은 다소 산만한 느낌을 겪어야 할 수 있고, 때로는 앞장과 뒷장을 계속 넘겨보면서 진도를 나가야 할 수도 있다. 이 책, ‘통찰의 시대’는 저자의 저술 의도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반면, 명확하게 전달되지 않을 가능성 역시도 존재한다. 이러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책이 담고 있는 ‘통찰에 대한 통찰’은 매우 날카롭고 풍부해서 때로는 뭉개버리고 때로는 날카롭게 잘라나간다.
빈, 유대인, 그리고 에릭 캔델
기억과 무의식을 연구하는 사람에게 유년의 경험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활기차고 관능적인 도시 ‘빈’에서 유년기를 보낸 에릭 캔델은 유혹적인 가정부와 함께 지냈다. 대개 일찍 성에 눈이 뜬 소년의 유년 시절이 그렇듯, 그 역시도 자신보다 18살이나 많은 가정부에게 에로틱한 감정을 갖기도 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오스트리아 빈의 부르주아 가정에서 가정부를 고용할 때는 가족의 소년들이 동정을 바칠 자격이 있는지를 염두에 두는 암묵적인 관행이 있었다. 8살에 되던 해 에릭 캔델은 가정부 미치와 육체적인 접촉을 했다. 어린 나이와 임신에 대한 두려움으로 완전한 성관계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미치는 수시로 ‘여성의 성욕’에 대해 그에게 털어놓곤 했다.
과학과 예술을 통찰하고자 하는 이 책의 중심 소재는 ‘여성의 성적 욕망’이다. 이러한 소재는 에릭 캔델이 유년 시절을 같이 보냈던 미치라는 매혹적이고 건강한 여인에게서 나온 것일 수 있다. 물론 그가 가지고 있는 ‘여성의 성적 욕망’이 과연 여성의 보편적 욕망인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최소한 에릭 캔델에게 있어서 이 책에 소개된 ‘여성의 성적 욕망’은 진실일 수 있다.
에릭 캔델의 부모는 각각 1차 대전 이전에 빈으로 이주했다. 현재의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태어난 그의 어머니는 빈 대학에서 1년간 공부했던 지성인이었다. 역시나 현재의 우크라이나 출신인 그의 아버지는 1903년 빈으로 왔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 징집되어 1차 대전에 참전했던 그의 아버지는 상처를 입었고, 마침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다.
1차 대전이 끝나고 11년이 지난해에 에릭 캔델이 태어났다. 당시의 오스트리아는 빈을 포함한 몇 개의 대도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영토권을 상실한 상태였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의 문화는 오히려 이러한 비극의 시기에 찬란하게 부활했다. 구스타프 말러, 쉰 베르크, 모차르트와 베토벤, 하이든의 음악이 온 도시를 감싸고 있었고, 클림트, 코코슈카, 에곤 실레의 작품들은 도시 곳곳에 전시되어 있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빈에서 이미 천년 이상을 살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이라는 도시는 결코 유대인에게 우호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반유대주의 정서가 강한 곳이었다. 1867년 유대인의 정치적, 사회적 활동의 자유를 보장한 새 헌법이 통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반유대주의 정서는 오히려 더 강화되었다.
당시 빈 인구의 20%는 유대인이었다. 온갖 탄압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전역에서 유대인들이 빈으로 모여들었다. 음악, 미술, 공원으로 지어진 빈, 빈은 매우 지적인 도시였고, ‘책의 사람들’, 유대인에게 있어서 빈 만큼 교육에 유리한 도시는 없었다. 빈은 유대인에게는 애증의 도시였다.
1866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한 오스트리아는 영토적 욕구를 문화에 대한 욕구로 바꾸었다. 이것은 마치 정체성 면에서 유대인과 닮아있었다. AD 70년에 영토를 잃은 유대인들이 돈에 집착하듯이 빈은 예술에 집착하고 있었다. 유대인과 빈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지식에 대한 열망이었다.
그 열망 속에서 과학과 예술의 통찰이 이루어졌다. 1930년대 중반 독일 나치의 오스트리아 점령으로 인해 에릭 캔델을 비롯한 빈의 유대인들은 빈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빈 시대의 지성은 에릭 캔델의 인생 전체를 지탱하는 토대로 남아있었다.
“나는 어릴 때 빈을 떠나야 했지만, 그 세기의 전환기에 접했던 빈의 지적인 삶은 내 피가 되어 유장하게 흐르고 있다. 내 심장은 그 시대의 음악에 맞추어 4분의 3박자로 뛴다. 이 책은 그 뒤로 내가 1890년부터 1918년까지의 빈의 지성사에 푹 빠져 지낸 매혹스러운 산물이자 오스트리아 모더니즘 예술, 정신 분석, 예술사에 대한 내 관심과 평생에 걸쳐 연구한 뇌 과학을 종합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빈 1900’, 과학과 예술이 인간의 무의식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에릭 캔델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아델레 블라우 바우어’를 내세워 ‘빈 1900’의 미술이 과거의 미술, 즉, 사실을 추구하는 미술에 결별을 선언했다고 단언했다. 이 그림에서 크림트는 매혹적인 여인을 생물학적 여인으로 묘사했는데, 이는 ‘매혹적’이라는 단어 속에 숨은 DNA의 정체에 대한 힌트(23장 참조. 이후 장수만 표기)이다. 한편 저자는 크림트가 ‘올드 캐슬 극장의 관객석’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통해 관객들의 마음을 그렸다고 이야기하면서 이후 리글의 ‘관람자의 참여’(11장)를 지나 곰브리치의 ‘관람자의 몫’(24장) 으로까지 발전할 이론의 실마리를 숨겨 놓는다.
16세기 과학 혁명으로부터 18세기 계몽사상과 산업 혁명을 거치면서 탄생한 모더니즘의 계보를 길게 설명한 저자는 모더니즘의 자극제로 생물학을 지목한다. 여기서 저자는 생물학이 바로 인간의 본성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라는 그림을 들어 설명한다. 이전에는 기대하지 못했던 장면, 즉 평범한 나체 여인과 그녀를 주목하지 않는 두 명의 남자 이야기. 어딘가 스토리가 끊기고, 성적 그림이 성적이지 않은 시각으로 표현된 이 그림을 통해 저자는 보상 체계와 학습(26장)에 대한 정초적 설명을 한다.
“미술은 우리가 놀라움과 충격을 느끼고 싶을 때 돌아보는 하나의 제도다. 우리는 이따금 건강에 좋은 충격을 얻는 것이 좋다고 직감하기 때문에 그러고 싶다고 느낀다. 그렇게 이따금 주의를 환기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저 틀에 박힌 생활에 빠져들게 되고, 삶이 우리에게 던지는 새로운 요구 사항들에 더는 적응할 수 없게 된다. 다시 말해 미술의 생물학적 기능은 시연, 즉 예기치 않은 것에 내성을 기르는 체육 활동이다.”
저자가 인용한 곰브리치의 이 말속에서 ‘체육 활동’이라는 단어는 ‘학습’이란 단어로 대체될 수 있다. 그리고 학습은 ‘예측한 쾌락’과 ‘결과된 쾌락’ 간의 괴리에서 발생한다. 뒤에서도 언급되지만, 예측과 결과가 같으면 학습 효과는 없다. 그것은 마치 우리의 눈이 고정된 물건은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은 뇌의 작용과 같은 것이다.
저자는 세 가지 특성을 들어 빈의 모더니즘을 정의한다. 첫째는 비합리성이다. 이는 곧 인간은 합리적이라는 계몽주의에 대한 도전이며, 그 도전은 16세기 코페르니쿠스, 19세기 다윈, 그리고 이후 뇌 과학으로 발전하게 될 심리학이라는 연결고리로 구성되어 있다. 이 세 가지 도전은 인간의 ‘무의식’에 대한 개념을 탄생시켰고 그리하여 모더니즘은 인간의 내면으로 과학자, 예술가, 문학가의 시선을 모았다.
빈의 모더니즘을 정의하는 두 번째 특징은 자기 분석이다. 프로이트와 슈니츨러, 그리고 세 명의 미술가(클림트, 코코슈카, 에곤 실레)는 각자의 분야, 즉 과학과 문학과 미술에서 자신을 분석하는 한편, 자기 안에 존재하는 본능적 욕구와 정신세계를 깊이 파고들었다.
빈 모더니즘의 세 번째 특징은 이종 지식의 통합과 일관화이다. 이러한 통합과 일관화의 과정은 생물학적 방법으로 시작된다. 의학자 로키탄스키와 주커칸들은 위에 언급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저자는 이들의 의학적 통찰 방법이 클림트를 통해 ‘아델레 블라우 바우어’의 옷에 그려진 정자와 난자의 기호로 표현하게 한 기원, 즉 내면으로 눈을 돌리게 만든 원인자로 설명한다.
“뇌 과학과 미술은 마음을 보는 서로 다른 두 관점을 대변한다. 과학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모든 정신생활이 뇌의 활동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활동을 관찰함으로써 우리는 미술 작품에 대한 우리 반응의 토대가 되는 과정들을 이해하는 일을 시작할 수 있다. 한편, 미술은 마음의 더 덧없고 경험적인 특성들, 특정한 경험이 어떤 느낌인지에 대한 깨달음을 제공한다. 뇌 영상은 우울증의 신경 징후들을 밝혀낼 수 있겠지만, 베토벤의 교향곡은 우울하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드러낸다.”
인간은 전적으로 의식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며, 따라서 합리적이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한 20세기 초 빈의 지식인들은 인간의 행동이 사실상 무의식에 근거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역설적이지만 무의식이란 의식을 통해 발견될 수밖에 없다. 무의식을 의식의 영역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자기 성찰이 필요했고, 과학자는 과학자대로 예술가는 예술가 나름의 작품 활동을 통해서 자기 분석을 시도했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들은 ‘빈 1900’이란 이름으로 통합되고 일관화됐다.
왜 ‘빈 1900’은 무의식 탐구의 적자가 되었나?
프로이트는 인간의 마음을 철학적 사색의 토대가 아닌 경험 과학의 영역에서 다루었는데, 이러한 배경에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빈이라는 열린 사회가 있었다. 이 열리고 통합된 사회는 프로이트, 슈니츨러, 클림트, 코코슈카, 에곤 실레 등이 각자의 분야에서 의학으로 대변되는 과학을 담아내게 했다.
인간에 관한 진리를 밝혀내기 위한 과학적 방법의 첫걸음은 병리와 임상에 대한 상관관계를 분석하는 것이었다. 인간의 물리적 내면을 들여다보는 여러 가지 방법, 즉 심장을 두드려보고, 청진기를 사용하여 심장박동을 듣고, 병으로 죽은 자를 부검하는 방법은 겉으로 드러난 증상의 원인적 진리를 탐구하는 방식으로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했다.
진단과 부검이라는 의학적 방법은 빈 의대의 로키탄스키에 의해 급속도로 발전하였고, 이는 “현상이란 숨겨진 것의 가시적인 표현이다”라는 고대 철학자 아낙사고라스의 통찰을 의학으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로키탄스키는 진리를 발견하려면 겉모습 아래를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이 바로 저자가 지목한 ‘의학이 클림트를 비롯한 빈의 표현주의 화가들에게 미친 영향’이다.
시간과 공간의 통합이 통찰의 전조를 만들어 내다.
빈의 모더니즘, 그 한가운데에는 저술가, 화가, 과학자들이 모여 소통할 수 있는 공간, 즉 살롱이 있었다. 남편은 해부학자이고 아버지는 신문 발행인이었던 베르타 주커칸들은 빈의 살롱 문화를 이끈 주인공이었다. 1880년 그녀가 남편 에밀과 혼인하던 해부터 빈을 탈출하여 프랑스로 가던 1938년까지 베르타 주커칸들은 그녀가 주인이 된 살롱에서 빈의 모더니즘을 잉태시켰다.
베르타의 남편, 에밀 주커칸들은 시신 해부 과정에 클림트를 초청했고, 해부 과정을 목격한 클림트는 인체에 대한 충격과 깊은 이해를 얻었다. 이후 클림트의 그림에서는 생물학적 발생학과 진화론의 장식들이 발견되기 시작한다. 미술학자 에밀리 브라운은 이 상황의 변화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클림트는(...) 여성을 더 고상한 이상이나 영적인 추월 성의 매체로 삼는 알레고리 적 기능을 뒤엎는다. 다윈 이후에 그림에서 몸은 스스로 벌거벗고 선다. 다른 모든 생물과 똑같은 생식 법칙의 대상인 생물학적 종으로.”
대표적으로 클림트의 그림 ‘희망 1’과 ‘다나에’는 이러한 발생학적이고 진화론적 기호가 풍성하게 발견된다.
오늘날에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학문적 융합이 오스트리아 빈이라는 공간 속에서 역사적 우연으로 일어났다. 무엇보다 로키탄스키의 해부학은 과학과 합리를 근간으로 하는 모더니즘을 배양하기에 가장 적합한 영양분이었고, 살롱이라는 낭만적 분위기는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유혹의 공간임에 틀림없었다.
과학적 정신의 기원이 의학을 통해 열리다.
뇌의 위치와 마음의 위치, 그 상관관계를 찾으려는 시도는 ‘갈’이라는 의학자로부터 이루어졌다. 그는 스트레스를 받는 뇌의 일정 부분이 팽창된다는 지금의 시각으로 보아서는 다소 어이없는 가정에서 연구를 시작했지만, 이는 정신질환의 문제를 뇌 과학적 문제로 접근하는 첫 시도로서의 작지 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즉, 마음은 뇌의 작용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이해한 것이었다.
빈 의대의 학장이었던 로키탄스키의 해부학을 본격적으로 뇌 영역으로 확장시켰던 사람은 마이네르트였다. 그는 대뇌피질 구조를 연구하여 성적 활동이나 동성애의 문제를 풀려고 했다. 그 아래서 프로이트가 교육을 받았다. 최소한 1895년 이전의 프로이트는 심리학자가 아닌 뇌 과학자, 즉 정신과 의사였다.
뇌를 만져서 마음의 문제를 풀려고 했던 시도는 일종의 골상학이었다. 1790년대 아래로 심리학자들이 밝혀낸 40여 가지의 심리적 기능을 설명하기 위해, 갈은 머리뼈의 모양을 분류하였다. 그의 이러한 분류 작업은 히포크라테스의 주장과 같이 마음의 모든 기능은 뇌가 한다는 가정을 증명해 보이고자 한 것이었다. 단순히 이해하자면 많이 쓴 부분은 커진다는 믿음이었다.
본격적인 뇌-마음의 연결 작업은 브로카와 베르니케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두 사람은 생전에 언어장애를 겪었던 사람을 부검함으로써 뇌의 각 부분이 마음을 결정하는 기능적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어서 로키탄스키는 스트레스가 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시상하부에서 발생된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마이네르트는 최초로 정신질환을 연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뇌를 체계적으로 해부하기 시작했다.
마이네르트의 연구를 통해 신경세포에 대한 매우 상세한 정보들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다양한 정신질환이 뇌의 각 부분의 기능과 기능 상실에서 기인된다는 사실을 확정시켜주었다. “해부학적 토대를 파악해 정신의학에 과학 분야로서의 특징을 갖춰 주어야 한다.”라고 말한 마이네르트는 나아가 각각의 정신질환을 유도하는 뇌의 특정 부위를 파악하려 했다.
그에게는 두 명의 걸출한 제자가 있었다. 한 명은 크라프트였는데, 그는 인간 성적 활동의 모든 표준 형태를 폭넓게 연구하면서 동성애를 비롯한 성적 행위에서 정신질환적 요소를 분별해, 이를 질병의 일한으로 규정했다. 마이네르트의 또 한 명의 제자가 바로 프로이트였다. 그는 동료였던 크라프트의 영향을 받아 신경 생물학의 용어를 빌려 정신질환을 기술했다.
한편 프로이트는 브뢰케에게서도 정신 분석의 연구 방법을 배웠는데, 이는 과학적 방법을 심리학에 적용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프로이트는 1900년을 기점으로 과학자에서 심리학자로 변신했다.
“브뢰케와 나는 이 진리를 엄숙히 맹세했다. 생물 안에서는 공통의 물리적-화학적 힘 외에 다른 어떤 힘도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리학자로 변신한 후, 프로이트는 인간의 무의식에 천착했고, 정신분석학이라는 자기 성찰적 심리학의 토대를 구축했다. 이것은 두말할 것 없이 현대 신경과학의 핵심이고, 마음 이론의 기념비적 공헌이었다.
‘빈 1900’의 의학자들은 인간의 마음이 뇌의 구조 및 기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생각을 가졌다. 이는 정신의 물질적 구조를 상상한 것이었다. 초기 골상학은 해부학으로 나아갔고, 부족하지만 일부 마음의 문제가 뇌 과학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의 과학적 한계는 프로이트가 해부학적 방법을 떠나 분석심리학으로 돌아서게 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여전히 자신의 분석심리학이 과학적 방법이라고 믿고 있었다.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믿었던 마음과 뇌가 과학을 매개로 만나다.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빈 1900’의 학자들과 예술가들은 히스테리가 무의식에 기인한다는 가정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고, 처음에는 무의식에 접근하기 위해 ‘최면’이라는 방법을 사용했다. 프로이트는 최면 요법에 이어 자유 연상을 사용하여 무의식을 분석하였는데, 이는 “언어를 써서 무의식을 탐구하는 프로이트의 능력과 무의식을 묘사하고 모더니즘 화가들의 능력 사이에는 놀라운 유사성이 있다.”라는 저자 주장의 근거이기도 하다.
처음으로 최면 요법을 사용하여 인간의 무의식을 탐구했던 브로이어는 사람들의 행동이 자신이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동기에 따라 결정될 수 있다고 믿었다. “사람의 의식이 모르게 숨겨진 강력한 정신적 과정들이 있을 수 있다는 확신”에 근거한 믿음이었다. 인간 무의식에 천착한 프로이트가 이러한 브로이어의 최면 요법에 관심을 두게 된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프로이트는 브로이어에 이어 최면 요법을 정신 분석에 활용했고, 강력한 정신적 과정이 바로 ‘성적 갈등이나 경험’이라는 환원론적 결론에 도달했다. 한편 프로이트의 사후에 발견된 ‘신경학자들을 위한 심리학’이란 논문에서 프로이트가 심리학과 생물학을 결합하고자 시도했던 흔적들이 발견되었는데, 미국의 제임스 조이스와 마찬가지로 프로이트 역시도 ‘과학적 심리학’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하였던 것이었다. 오늘날 심리학자들이 막 생각하기 시작한 학문적 토대를 백 년 전 프로이트와 제임스 조이스가 이미 통찰하고 있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중요한 정신 과정이 지각, 기억, 의식이라는 세 가지 기능에 의해 수행된다는 것을 믿었다. 또한, 정신 사건은 뇌 사건과 병렬적으로 일어난다는 사실도 믿었다. 그러나 그는 골상학 연구와는 다르게 뇌의 한 부분이 한 가지 인지 능력과 1:1로 연결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그는 한기지 정신 사건이 뇌 전체에서 일어나는 작동일 수 있다고 생각했고, 이는 매우 정확한 예측이었다.
프로이트가 1900년 이후 생물학적 방법을 포기한 이유는 두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자신이 고찰한 정신분석학적 해석을 생물학적 모델에 다 담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최면 요법을 포기하고 대신 연상법을 고안했다. 그리고 이 연상법을 토대로 여성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성적 학대의 개념이 실제 여성에게 일어난 경험이 아닌 상상 경험일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을 펼쳤다. 여성들의 욕구는 위장된 욕구며, 따라서 생물학적 모델이 실재와는 다르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프로이트가 생물학적 방법을 버린 두 번째 이유는 당시의 생물학적 연구의 진도를 보아, 행동-마음-뇌, 세 가지 분석 수준의 연결이 불가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러한 결별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는 언젠가는 뇌 과학이 인간의 마음을 제대로 밝혀줄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 그는 그 기대를 담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심리학 용어를 생리학 용어나 화학 용어로 대체할 지점에 이미 와 있다면 우리의 설명에서 부족한 점들은 아마도 사라졌을 것이다. (...) 우리는 생리학 화학이 어쩌면 가장 놀라운 정보를 제공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지만, 우리가 힘겹게 씨름하고 있는 의문들에 그것이 앞으로 수십 년 안에 어떤 답들을 내놓을지 추측할 수는 없다. 그 답들이 우리가 가설로 구축한 인위적인 구조 전체를 날려 버리는 것일 수도 있다.”
훗날 곰브리치는 “심리학은 생물학이다.”라는 말로 프로이트의 믿음을 지지했지만, 이제는 다른 믿음을 가져야 할지 모른다. 언젠가는 “심리학은 AI 공학이다”라는 말을 해야 할지 누가 알겠는가?
프로이트, 뇌와 별개로 마음을 탐구하기 시작하다.
앞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프로이트는 뇌와 별개로 마음을 탐구했다. 이 말은 해부학을 포기했다는 말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당시, 해부학으로는 정신질환을 치료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자는 인지심리학을 고고학과 유사하다고 표현했다. “내가 부지런히 만나고 있는 주된 환자는 나 자신입니다.”라고 말한 프로이트는 고고학자들이 땅을 파듯, 꿈을 통해 인간의 무의식에 접근하고자 했다. 그에게 있어서 의식은 유물을 덮고 있는 두꺼운 땅과 같았다.
뇌를 해부하는 것보다 일상적인 사건, 본능적 충동, 방어기제가 상호작용하는 꿈을 연구하는 것이 인간의 무의식에 접근하기에 훨씬 더 좋은 방법이라고 프로이트는 생각했다. 그가 꿈을 동원하는 방법은 바로 ‘자유 연상 기억법’이었다. 이러한 연구 방법을 토대로 프로이트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결론에 도달한다.
첫째, 정신 과정은 무의식적으로 작동된다. 둘째, 정신적 사건은 결코 우연히 일어나지 않는다. 즉 꿈은 현실과 연결되어 있다. 셋째, 비합리성 자체는 비정상이 아니다. 넷째, 정상적인 정신기능과 비정상적인 정신기능은 연속선 상에 있다. 이는 미술가가 그린 그림의 추함과 아름다움 사이의 연속선에 있는 것과 같은 정신 작용이다. (23장)
마음은 과학 원리에 따른다는 프로이트의 신념은 ‘자아’, ‘초자아’, ‘이드’라는 의식-무의식의 세계를 구상했고, 본능적 충동의 승화가 미술, 음악, 과학, 문화, 문명 구조를 낳는다는 크라프트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그렇지만 프로이트는 ‘여성의 성욕’에 대해서는 놀랄 만큼 무지했는데, 그는 욕망 자체가 매우 남성적이라고 섣불리 단정했다.
“우리는 강하고 적극적인 모든 것을 남성적이라고, 약하고 수동적인 모든 것을 여성적이라고 말한다.”라고 주장함으로써 페미니스트로부터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하 프로이트는 인간 심리 기반을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결합이라고 주장했다.
“삶의 본능은 종의 보전인 ‘에로스’와 죽음의 본능인 ‘타나노스’가 그것이다. 삶의 본능은 종의 보전, 섹스, 사랑, 먹기, 마시기를 포함하며, 죽음 본능은 공격성과 절망 속에서 드러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도 프로이트는 죽음 본능을 별개의 충동이 아니라 성적 본능의 파생물로 보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구스타프 클림트는 프로이트보다 10년 앞서 ‘죽음과 삶’ ‘유디트’에서 공격성과 성욕을 연관 지었다.”
왜 무의식의 극단에는 성욕과 공격성이 있을까? 여성의 원형 심리학을 연구하는 클라리사 에스테스는 심리학의 고전이 된 그의 책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에서 억울하게 죽은 해골 여인에 대한 전설을 여성의 원형 심리학에 도입했다. 이 책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삶과 죽음의 공존을 설명한다.
“삶/죽음/ 삶의 관계는 밤이 낮과 낮을 이어주는 연속체인 것과 같다. 연인들이 이를 이해하면 사랑에서의 해골 여인과 같은 측면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런 경험을 통해 두 사람이 모두 강해지면 실제 세계나 영적 세계에 대해 좀 더 깊이 이해하게 될 것이다. 나는 수십 년 동안 심리상담을 하면서 이런 사람들을 수도 없이 보았다.”
클림트는 어쩌면 자신의 그림 속에서 여성의 원형적 보습을 발견한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성욕과 공격성이란 그것의 의식적 표상으로서 삶과 죽음에 대한 무의식의 본모습이지 않을까?
슈니츨러, 문학으로 내면의 의미를 연구하다.
프로이트가 여성의 성욕을 일종의 콤플렉스로 해석함으로써 그의 무지를 드러냈다면 슈니츨러는 문학 작품 속 ‘내면의 독백’을 통해 여성의 성욕을 주인공 시점에서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를 표현했다. 앞서 인용한 ‘클라리사 에스테스’는 어떤 글에서 남성이 여성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방법을 소개했다.
그녀에 따르면 ‘여성의 이중성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으로 여성으로부터 진정한 사랑을 획득할 수 있다. 여성의 이중성에 대해서는 일본의 여류 소설가 에쿠니 가오리가 그녀의 책 ’ 당신의 주말은 몇 개입니까? ‘에서 매우 섬세하게 표현한 결혼 생활은 이러한 여성의 이중성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월요일 아침, 나는 회사로 가는 남편이 싫어서 그만 입이 부루퉁해진다. 어서 다음 주말이 오면 좋을 텐데, 하고 생각하면서 현관에 구두를 내려놓는다. 그리고 남편을 배웅하고 난 순간, 나 자신도 놀라울 만큼 안도감의 물결이 밀려온다. 안도와 피로, 그리고 잠, (...) 현관을 나설 때 그토록 아쉬워하던 아내가, 문을 닫는 순간 이런 생각을 허리라고는 상상도 못 할 것이다. “
한편 슈니츨러는 당시 한참이던 시오니즘에 대한 비평에서 “반유대주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일종”이라고 일갈했다. 즉 아버지의 종교를 아들이 부정하는 행동이라고 정의하면서 사회적 현상에 대한 심리학적 해석을 시도하기도 했다.
“슈니츨러는 원래 소설가가 아니라 의사였다. 그는 1862년 빈의 유대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요한 슈니츨러는 유명한 이비인후과 전문의이자 빈 대학교 교수였다. 슈니츨러는 1879년 빈 의대에 입학하여 1885년 졸업했다. 로키탄스키는 그 직전에 퇴임했지만, 그의 사고방식은 슈니츨러에게 영향을 주었다.”
저자가 소개한 바와 같이, 빈 의대에서 의학을 공부했던 슈니츨러는 “환자의 질병 역사를 기록할 때, 의사는 이야기로 쓰고 있는 것이고, 그 이야기는 환자 자신의 이야기와 의사의 해석 양쪽에 달려 있음을 깨달았다.”라고 이야기 한 바 있다. 이는 오늘날 심리 상담사가 그림으로 내방자의 심리를 분석하는 현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TV를 보면 가끔 심리 상담사가 검은 잉크 얼룩처럼 생긴 그림을 꺼내 들고 상대에게 이것이 무엇으로 보이느냐고 물어보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상대는 대답하고 상담사는 그 대답을 통해 상대의 내면을 해석하고 자아를 들여다본다. 소위 ’로르샤흐 검사’라고 불리는 심리 투영 검사다. 이에 대해서 대니얼 리처드슨은 그의 책 ‘Man vs Mind’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프로이트, 칼 융과 같은 정신분석가들의 연구를 통해, 심리학자들은 ‘사람들이 보는 것과 그것이 사람들의 내면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는가’에 대한 이론을 발전시켰다. 환자의 반응은 그런 이론과 예상에 비춰 해석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심리치료사가 환자의 생각이 아니라 본인의 생각과 이론을 검사에 투영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결국, 슈니츨러도 인간의 내면을 읽는 작업이 저자와 독자 사이의 지평 속에서 텍스트를 분석하는 해석학과 같은 구조로 되어 있음을 직감했던 것 같다.
연극 관객은 정신과 의사처럼 인간 행동만을 토대로 직접 결론을 끌어낸다고 주장한 슈니츨러는 이후 ‘아이즈 와이드 셧’이란 이름으로 영화화된 ‘꿈 이야기’라는 소설을 통해 이를 서술한다. 영화에서 아내의 욕망을 확인한 주인공(톰 크루즈 분)이 질투심에 불륜을 저지르고 다니는 장면을 심리학적으로 그려낸 것이다. 이는 마치 마르셀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알베르틴에 대한 마르셀의 질투를 연상시킨다. 욕망은 대상과 독립하여 작동됨을 표현한 것이다.
‘여성의 심층’을 파헤치는 점에서 확실히 슈니츨러는 프로이트보다 앞서 있었다. 슈니츨러의 작품 ’엘레 양‘에 나오는 독백은 여성의 욕망에 대해서 슈니츨러가 더욱 정밀한 렌즈로 들여다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니, 나는 나 자신을 팔지 않겠어. 결코, 절대로 나 자신을 팔지 않을 거야. 나를 내놓겠어. 그래, 적절한 남자를 찾는다면, 나 자신을 내놓을 거야 하지만 나를 팔지는 않겠어. 음탕한 여자는 될지언정, 창녀가 되지는 않을 거야.”
여기서 음탕한 여자와 창녀라는 이름이 가지고 있는 여성의 자존과 욕망에 대해서는 남성으로서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여성의 심층이 자리 잡고 있다.
슈니츨러가 아버지의 빚을 갚기 위해 자신의 나체를 노출한 후, 결국 자살하고 마는 엘레 양의 이야기를 썼다면 프로이트는 실제로 ’ 도라‘라는 처녀를 치료했다. 1900년 도라 양의 정신을 분석한 프로이트는 그녀의 아버지 친구가 자신을 성추행하고 있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 프로이트는 이 이야기가 그녀의 직접적 경험이 아닌, 상상 속의 경험 즉, 심리적 문제라고 분석하였다. 그녀의 히스테리는 일종의 신경증적 방어기제라고 단정했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정신분석학의 틀에 도라 양의 경험을 가두어 버리고 말았다.
클림트, 미술적 묘사로 현대 여성의 성욕을 표현하다.
여성의 욕망을 분석심리학의 틀에 묶어버린 프로이트와는 달리 슈니츨러는 여성 내면의 다면적이고 미묘한 특성을 잘 이해했다. 그리고 클림트는 오스트리아 미술 속에서 슈니츨러와 유사한 발전, 즉 여성의 독립적인 사회적, 성적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했다.
코코슈카와 에곤 실레는 이러한 클림트의 시도를 자신의 작품 활동으로 받아들였다. 클림트, 코코슈카, 에곤 실레, 이 세 명의 표현주의 화가들에게 있어서 인간 내면의 연구는 정신분석학과 경쟁 관계에 있는 것이었다. 코코슈카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모두는 프로이트 주의자들이자 모더니스트다. 우리 모두 겉모습 아래로 깊숙이 들어가고 싶어 한다. “
그렇지만 미술사에서 빈 표현주의의 길을 연 것은 물론 클림트이다. 이에 대해, 저자 에릭 캔델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클림트가 양식 측면에서만 선구자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그림에 죽음이라는 주제를 정면으로 등장시키고, 여성의 성욕과 공격성이라는 금기시된 주제를 생생하게 묘사한 최초의 오스트리아 모더니스트였다. 빈의 선배 화가들과 달리, 그는 자기 눈앞에 보이는 나체 모델의 성적 욕망을 억누르거나 우의적이거나 양식화한 상징 속에 숨길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는 성의 쾌락에 초점을 맞춘 섬세하면서도 감각적인 그림을 그렸지만, 그의 그림 속에는 여성의 공격능력도 묘사되어 있었다. 따라서 클림트는 양식 면에서는 장식적인 아르누보 화가였고, 주제 면에서는 표현주의자였으며, 두 위대한 표현주의 화가인 코코슈카와 에곤 실레로 이어지는 길을 닦았다. “
클림트 이전에도 조르조네 다카스(잠자는 비너스), 티치아노(우르비노의 비너스), 루이엔테스(벌거벗은 마하), 마네(올랭피아), 모데리아니(흰 방석에 누운 여성 나체) 등 여성의 나체와 성적 욕망을 표현한 그림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그림 속 여인은 관람자를 관능의 눈빛으로 바라봄으로써 대상자 내면의 성적 욕망뿐 아니라 관람자의 욕망도 같이 드러내고 있다.
이는 명백히 ’ 남성 관점에서의 여성의 성욕‘이다. 물론 이러한 그림이 당시의 사람들에게 여성의 성욕에 대한 새로운 학습의 기회를 제공하여 주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클림트의 경우는 달랐다. 그의 그림은 노골적이었고, 여기서 노골적이었다는 말은 여성의 성욕 그 자체를 숨기지 않았다는 뜻이다. 클림트의 그림 속 나체의 연인은 관람자를 바라보지 않는다. 그녀들은 그저 대상의 성적 자족성에만 몰두하고 있다. 인간의 성을 연구했던 루스 웨스트하이머는 그 점을 다음과 같은 말로 강조했다.
”이런 작품들을 남성을 위한-그리고 여성들의 품격을 떨어뜨리는-춘화라고 치부하기에는 어렵지 않지만, 이 그림들은 여성이 성적 자족성을 점점 더 자각하고 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
1894년 클림트는 빈 대학으로부터 강당에 걸릴 그림을 요청받았다. 요청받은 그림의 주제는 의학, 법학, 그리고 철학을 상징하는 그림이었다. 클림트가 의학을 상징하는 그림을 완성했을 때, 빈 대학의 교수들은 그의 그림에 대해 비판을 쏟아내었다. 비판의 내용은 인체를 추하게 그렸다는 것이었다.
반면 클림트를 옹호했던 빈 미술사학파는 이러한 비판에 대해 교수들이 ’ 추함 속에 가려진 진리’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반박했다. 클림트가 그린 그림은 ’ 무의식의 단편적 본질’을 포착한 그림이었다. (23장 참조). 이 그림의 대표적인 표현법은 ’ 단락 된 시각적 이미지의 단편‘인데, 이는 관람자의 적극적인 인지 심리를 통해 관람자를 그림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18장 참조)
빈 대학 강당에 걸어놓은 세 편의 그림에 이어 클림트는 ’ 베토벤 프리즈’를 그렸고, 코코슈카와 에곤 실레는 이 그림으로부터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 캐서린 심프슨의 이야기를 빌리자면 다음과 같다.
”가장 진실한 그림은 대상들이 벌거벗고 질병에 걸리고 고통스럽게 노출되고 분노하고 일그러진 모습을 담은 것이다. “
결국, 클림트의 그림들은 미술을 통해 진리에 다다르고자 했던 모더니즘적 시도였다. 클림트는 ’ 관람자의 몫’이라는 미술의 관계 개념을 통합했는데, 미술 작품을 볼 때는 그 작품이 그려진 시대의 양식을 같이 보아야 한다는 개념이었다.
저자는 이마누엘 칸트를 인용하여 ”자연은 미술과 다르다. 자연에서 추한 것이 미술에서는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다. “고 말하면서 ”특징이 없을 때, 즉 제시할 외면의 진리나 내면의 진리가 전혀 없을 때 말고는 예술에서는 그 어떤 것도 추하지 않다. “라는 로댕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이 말은 예술에 있어서 같은 감정, 다른 표현이라는 역설을 설명해준다. 즉, 16세기나 18세기나 같은 작가의 감성을 표현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겹지 않은 것은 바로 이것이 시대의 표준 양식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들뢰즈가 말한 ’ 이념의 드라마’와 같은 개념이라고 볼 수도 있다. 취향은 진화하며, 예술가가 시대의 취향을 만들어 내고, 관람자는 그것에 반응한다.
”시대에는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 “
저자는 마사초의 ’ 삼위일체’를 예로서 관람자의 참여가 필요치 않은 완결된 드라마로서의 그림이 16세기 이전의 이탈리아 예술의 특징이었다면, 17세기 네덜란드의 화풍은 ’ 서로를 향한 주의‘, 즉 관람자의 참여를 그림의 탄생에 중요한 요소로 반영하였다. 이것이 바로 곰브리치가 이야기한 ’ 관람자의 몫‘이다. (25장)
빈 표현주의 화가들의 역할에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첫째는 사회적 평등보다 감정적 평등을 앞세우는 것이었고, 둘째는 대중을 교육하기보다는 대중과 가치를 공유하는 것이었다. 즉, 모든 이에게 있는 무의식적 불안과 본능적 충동을 드러내는 새롭고 더 감정적으로 생각하는 방식으로 미술과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었다.
후에 곰브리치는 사진술의 발전이 클림트를 시발점으로 하는 표현주의 화풍을 더욱더 상징적인 회화로 이끌었으며, 그럼으로써 여성의 심리와 사진술 간의 간격을 점차 늘려나갔다고 주장했다.
프로이트의 비유, 슈니츨러의 독백이 인간 무의식의 힘을 표현했다면 클림트는 이차원 평면에 정신의 깊이로 나타내고자 했다. 이를 위해 클림트가 활용한 방법은 의뢰로 비잔틴 양식이었다. 클림트는 삼 차원적 표현 양식을 버리고 넓은 이차원 평면에 삼 차원적 인간을 대비시켰다.
클림트는 진리는 평면 속에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산 비탈레 성당의 모자이크, 547년 제국의 풍운아 유스티아누스의 전설적 아내 ’테오도라‘의 모자이크에 매혹되었다. 클림트는 모자이크로부터 평면성과 장식을 결합하는 방법을 배웠다.
이런 그의 미학은 대표적인 작품 ’ 키스’에서 정점에 이른다. 코미니는 이 그림을 두고 ”원 형태와 수직 형태의 화려한 교환 속에서 아름답게 펼쳐지는 욕망의 상호 관계의 궁극적 설정”이라고 극찬했다. 클림트의 초상화 중, 대표적인 작품인 ’아델레 블르흐 바우어‘는 테오도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인데, 이는 선을 배제하면서 인물과 배경 사이의 구분을 고의로 흐릿하게 했다. (16장)
모더니즘으로 나아간 클림트는 두 가지 초점에 자신의 작품 세계를 맞췄다. 바로 성욕과 죽음이다. 이때서야 클림트는 프로이트, 슈니츨러와 함께 인간 행동을 추동하는 무의식적 본능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두 주제를 가장 잘 나타내 줄 수 있는 대상으로서 ’ 유디트’를 선택했다,
유디트의 희열 가득한 얼굴과 홀로페르네스의 잘린 목도, 프로이트가 여성의 성욕이 해방될 때 수반되리라 예측한 심리적 문제를 드러냈다. 즉 성적 불안과 섹스와 공격성의 관계, 삶과 죽음의 인간, 남성의 악몽을 드러낸다. 이는 여성 역시도 남성과 같은 성적 욕구가 있음을 은언 중에 이야기하고 있다.
코코슈카, 욕망의 표출을 거슬러 마음으로 걸어 들어가다.
클림트의 화풍에 영향을 받은 코코슈카는 곧 클림트의 화풍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클림트의 그림이 ”겉모습을 미화하는 데만 몰두하고 내면의 삶에는 무심했다. “라는 것이 비판의 핵심이었다. 그리고 스스로는 욕망의 표출을 거슬러 심리 안으로 들어갔다. 코코슈카는 자신을 ’ 심리학적 깡통 따개’라고 불렀다.
”초상화를 그릴 때, 나는 사람의 겉모습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성직자, 세속적인 유명인사, 사회적 계급을 나타내는 단서들이 그렇다. (...) 내 초상화가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 주곤 했던 것은 내가 얼굴과 표정으로부터, 손짓으로부터, 당사자에 대한 진리를 직관하고자 시도했기 때문이다. “
클림트가 아르누보와 표현주의 사이를 잇는 다리였다면, 그 다리를 건넌 최초의 오스트리아인은 코코슈카였다. 1658년 발간된 ’ 그림으로 보는 세계’라는 책을 보다, 엑스레이가 조사된 인체의 구조를 그린 삽화에 깊은 인상을 받은 코코슈카는 그 그림을 통해서 ’ 표면 밑의 진리’라는 개념에 다가서게 되었다. 이후, 프로이트가 ’ 자유 연상’이라는 방법을 사용하여 무의식을 파헤쳤듯이, 코코슈카는 그림을 그릴 때, 가능한 모델이 화가를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고, 이를 통해 모델의 내면을 그려내려 했다.
코코슈카가 그림 속에서 모델의 감정을 표현하는 기법은 사실과 질감을 고도로 왜곡시키는 것이었다. 그의 생각에 왜곡이란 기법은 감정을 더욱 강화하기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20장). 왜곡을 통해 코코슈카는 미술의 사실성을 넘어 순수 표현으로 자신의 화풍을 강화했다.
클림트가 고대 성당을 장식했던 모자이크 미술에서 평면 성의 미술을 유추해 냈다면, 코코슈카는 매너리즘 미술로부터 현상과 사실의 세세한 부분을 변형시키고 과장하는 방법을 체득했다. 극적인 심미적 충격을 일으켜 심리를 꿰뚫는 이미지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가 참고로 한 것은 16세기 유화였다. 유화의 서서히 마르는 특징을 이용하여 마른 그림 위에 층층이 막을 칠해서 광택을 내는 덧칠 기법을 사용하는 것이 유화의 특징이다. 대표적으로 티치아노는 이러한 덧칠 기법을 사용하여 표면을 강조하고 왜곡하여 자신의 감성을 관람자에게 전달했다.
코코슈카는 바로 이러한 티치아노의 색채 사용법에서 영감을 얻었다. 후에 곰브리치는 매너리즘이 표현주의와 같은 흐름선 상에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그리고 표현주의를 원시 캐리커처와 매너리즘의 종합이라고 보았다.
그림을 통한 심리의 표현을 이야기하다 보면 뭉크에까지 이르게 된다. 카시러는 뭉크의 그림 역시도 표현주의 작품으로 분류하였다. 그에 따르면 뭉크의 그림들은 인상주의로 대표되는 표면적인 인상에서 지속적이고 강렬한 감정의 표현 수단을 가진 표현주의로의 커다란 전이였다.
한편 모델과 배경과 색깔을 마음대로 휘둘렀던 고흐와 같이 코코슈카 역시도 강렬한 붓질을 사용했다. 고흐가 표현을 변형했고, 뭉크가 감정을 과장했다면, 코코슈카는 심리를 드러냈다. (16장)
그렇다면 클림트와 코코슈카가 그린 대상은 무엇이 다른가? 클림트가 동시대의 대표적이고 표준적 대상을 그렸다면, 코코슈카는 개별화되고 개 성화된 개개인으로서의 대상을 그렸다. 클림트가 대상으로부터 영속성을 강조했다면, 코코슈카는 개인의 심리학적 특징을 강조했다. 클림트가 장식적 모티브를 사용했다면 코코슈카는 이를 거부하고 생략했다.
코코슈카의 이야기를 통해 저자 에릭 켄델은 대상의 성격을 통찰하기 위한 전제 개념으로 세 가지를 강조했다. 첫째, 초상화를 그리는 것은 다른 사람의 정신을 파악하는 좋은 방법이다. 둘째, 대상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은 자기 발견의 여행이다. 즉,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이해해야 한다. 셋째, 몸짓과 손짓은 감정 전달의 가장 확실한 도구이다. 넷째, 감정의 양쪽 끝으로 가면 결국 그곳에는 성욕과 공격성이 있다.
코코슈카의 초상화 속 인물은 왜곡되어 있다. 그것은 모델의 정신을 제대로 조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대상의 성격을 드러내려는 방편으로 코코슈카는 모델의 손을 극단적으로 왜곡시켰다. 다소 허세가 있었던 코코슈카는 자신에게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곤 했는데, 몇 가지 그림에서 이러한 예견 능력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의 초상화 속에는 뇌졸중이나 정신병 등의 전조나 증후들이 종종 등장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는 대상으로의 감정이입이 대상의 내면을 통찰하는 경지까지 이른 것이다. 초상화에 나타난 대상에 대한 통찰은 자화상을 통한 자신에 대한 통찰로 이어진다.
”1910년 봄, 코코슈카는 로스의 주선으로 포렐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 그림에서 포렐의 오른손과 오른쪽 눈은 비전형적이며, 왼손 및 왼쪽 눈과 매우 달라 보인다. 그는 오른손을 구부린 자세로 들고 있는데, 오른손 엄지를 웃옷 왼쪽 소매 안으로 넣어서 받치고 있다. 오른쪽 눈은 왼쪽 눈과 바라보는 양상이 전혀 다르다. 그것은 포렐의 뇌 왼쪽에 뇌졸중이 일어났음을 시사했으며, 포렐과 그의 가족에게도 그렇게 보였다. 2년 뒤 포렐은 현미경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뇌졸중을 일으켰고, 코코슈카가 그렸던 바로 그대로 오른쪽 얼굴과 오른손이 마비되었다. 코코슈카가 전적으로 우연히 포렐의 뇌졸중이 임박한 것을 묘사한 것인지, 아니면 그가 포렐의 신체적·심리적 속성을 자세히 관찰하고 감지해 뇌졸중의 전조인 일과성 허혈 발작을 알아차린 것인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
코코슈카는 인간의 정신-모델뿐 아니라 자신의 정신-깊숙이 놓여 있는 무의식의 본능을 화폭에 포착했는데, 클림트, 슈니츨러와 마찬가지로 그도 빈 모더니즘 화가들의 특징적인 태도인 성적인 본능과 공격적인 보능 사이에 긴밀한 상호작용이 일어난다는 관점을 일찍부터 받아들였다.
코코슈카가 초상화를 통해 뇌졸중의 전조를 예측해 낸 것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이후 에곤 실레의 이야기에서 논의되겠지만 그림의 묘사와 표현은 모델의 내면뿐만 아니라 화가의 내면까지 반영되기 때문이다. 화가는 모델의 사실과 자신의 내면으로 초상화를 그린다. 관람자가 눈치를 채던 그렇지 못하던 그림 안에는 화가의 정체성과 실존이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곤 실레, 타인의 마음에서 자신의 마음으로.
에곤 실레는 스물여섯 나이에 사망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는 300여 점의 유화, 수천 점의 소묘와 수채화를 남겼다. 그의 그림 속 여성은 클림트의 그림 속 여성보다 훨씬 다양하고 풍부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에로티시즘 속에 공격성과 불안을 보다 치밀하게 융합해 냈기 때문이다.
에곤 실레는 자기 내면의 동요와 불안, 그리고 성적 갈등을 행동이라는 양식을 통해 그려낸 최초의 화가였다. 그뿐만 아니라 에곤 실레는 행동이라는 양식을 구현하기 위해 자신의 몸으로 연습과 학습을 했던 예술가였다.
“실레의 성숙한 작품은 음침하며 밝은 색이 아예 없을 때도 있다. 그가 그린 사람들의 몸은 탈구되어 있고, 팔과 다리는 고통스럽게 비틀리고 뒤틀려 있다. 마치 장 마르탱 샤르코의 히스테리 환자와 같다. 하지만 샤르코의 환자들이 무의식적으로 그런 자세를 취한 것과는 달리, 실레의 인물 자세는 손, 팔, 몸을 이용하여 내면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연습한 것이다.”
그의 불안의 근원은 무엇이었을까? 프로이트의 이론에 따르자면, 이를 알기 위해서는 그의 유년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 에곤 실레가 막 자신의 성욕에 눈을 뜨던 시절, 그의 아버지는 성병으로 사망했다. 이러한 삶의 모순은 불안과 근심으로 가득 찬 그의 작품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에곤 실레가 섹스를 죽음과 죄책감에 집요하게 연결 짓고, 모델과 자신을 늘 신경쇠약으로 인해 무너지기 직전의 상태로 그리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1908년 클림트의 그림에 감동한 에곤 실레는 초기에는 클림트의 화풍을 흉내 내기도 했다. 평면적인 배경에 이차원적 인물을 담아내어 관람자가 모델의 내면세계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는 그림들이 이를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클림트의 그림에 감동한 후 2년이 지나자 에곤 실레는 클림트의 화풍에서 멀어진다. 그는 100여 점에 이르는 자화상을 그렸는데, 이를 통해 자기의 마음에 관해 연구했다. 에곤 실레에게 있어서 자화상은 곧 자기 돌아봄이자 자기 분석이었다.
예를 들어 에곤 실레의 자화상은 단순히 자신의 나체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그 변형된 나체 속에는 자아의 완전한 폭로, 자기 분석, 그리고 꿈의 해석이 녹아있다. 철학자이자 미술 평론가인 아서 단토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에로티시즘과 회화의 재현은 미술이 시작된 이래로 공존해 왔다. (...) 하지만 실레는 에로티시즘을 자신의 인상적인 (...) 작품의 결정적인 동기로 삼았다는 점에서 독특했다. 그의 그림은 인간 현실이 본질적으로 성적인 것이라는 (...)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명제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과 같다. 내 말은 실레의 관점에 예술사적인 설명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에곤 실레는 자신을 자신의 그림 속에서 고립시켰다. 인물의 정면과 축을 캔버스의 면과 일치시키는 한편, 입과 코, 눈과 손, 그리고 전신을 강조함으로써 전체적인 불안감을 극대화했다. 이는 자기 자신을 고립의 희생자로 묘사한 것이다.
클림트가 죽은 해인 1918년 가을, 젊은 에곤 실레도 사망했다. 이로 인해 과학과 미술 사이의 대화도 실제적인 종말을 고했다. ‘빈 1900’이라는 역사 속에 출몰했던 프로이트, 슈니츨러, 클림트, 코코슈카, 에곤 실레 등, 다섯 거장은 로키탄스키의 과학이라는 영향력 아래 정신 분석, 문학, 미술 분야에서 엄청난 성취를 이루어 냈다.
“따라서 ’ 빈 1900‘은 생물학과 연결되지 않았고, 프로이트의 역동적 심리학은 미술과 의미 있는 방식으로 연관을 맺지 못했다. 또 ’ 빈 1900‘은 관람자가 미술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설명할 인지심리학도 내놓지 못했고, 무의식적 감정과 미술을 대할 때 느끼는 감정에 관람자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생물학적으로 이해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러한 심리학적, 생물학적 깨달음은 곧 출현하려 하고 있었다. 그 깨달음은 1930년 빈에서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리글, 크리스, 곰브리치, 작가의 마음에서 관람자의 마음으로 지평을 확장하다.
’ 빈 1900‘을 이끌었던 거장 중에 과학과 미술의 만남을 진지하게 고민했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저자 에릭 캔델은 오직 프로이트만이 이를 수행했다고 주장한다. 프로이트는 레오나르도의 그림 속에서 그의 성 콤플렉스를 추출하였다. 프로이트의 예술과 과학을 잇는 통찰은 예리하지도 풍부하지도 않았지만 이후 자신의 두 제자였던 크리스와 곰브리치, 그리고 리글에게 영향을 주었다.
먼저 리글은 과학적 사고를 미술 비평에 체계적으로 적용했다. 그는 “각 문화기의 특징을 파악하려면, 각 시기에 속한 미술의 의도와 목적을 이해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면서, 관람자의 지각 및 감성이 참여하지 않는 한, 미술은 영원히 완성될 수 없다는 생각을 피력했다.
다음 세대의 미술사학자인 크리스와 곰브리치 역시도 관람자의 직접적인 참여가 없는 미술은 완성된 미술이 될 수 없다는 개념을 정교하게 다듬었다. 이러한 개념에 대해 훗날 게슈탈트 심리학자인 루돌프 아른하임은 이렇게 서술했다.
“심리학으로 눈을 돌리면서, 미술 이론은 물질세계와 그것의 겉모습에 차이가 있고, 더 나아가 우리 눈에 보이는 자연과 미술 매체에 기록되는 자연 사이에도 차이가 있다는 점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 눈에 보이는 것은 누가 보느냐와 보는 법을 누가 가르쳤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프로이트 밑에서 의학을 공부했던 크리스는 큐레이터와 정신분석가라는 두 가지 직업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그는 정신 분석을 통해 깨달은 통찰을 미술과 심리학으로 확대했다. 크리스는 화가가 자신의 인생 경험과 갈등으로부터 강력한 이미지를 도출할 때, 그 이미지는 애매할 수밖에 없고, 이 모호성은 관람자의 의식적, 무의식적 인지를 유도한다고 주장했다. 즉, 관람자의 정신이 그림의 모호성의 공간을 채운다는 것이다.
크리스는 캐리커처와 같은 그림에서 나타나는 왜곡이 감정을 전달하고 뇌 지각 및 감정이입에 영향을 미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즉, 무언가 기대와 다른 것이 나타날 때만 뇌의 작동과 감정적 각성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30장)
크리스의 학문적 지원과 격려로 받은 곰브리치는 정신 분석, 게슈탈트 심리학, 과학적 가설 검증에서 얻은 통찰을 근거로 미술에 다면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여기서 게슈탈트란 배치나 형태라는 뜻을 가진 단어로서 전체가 부분의 합보다 훨씬 큰 의미 및 정보를 제공해 주기 때문에 인간은 대상의 세부보다는 전체에 주로 반응한다는 이론이다. (14장)
순수한 눈은 없다. 관람자의 지각은 하향식 영향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18, 22장) 또한 뇌는 창작 기계이기 때문에 관찰을 통해 발명은 이루어진다. (16장)
어쩌면 작품을 생산하는 예술가의 시각과 작품을 바라보는 관람자의 시각이 다르지 않을 수 있다. 미술가가 그림을 그릴 때는 관람자의 시각 반응과 감정 반응을 염두에 두기 때문이다. 한편, 관람자 역시도 미술 작품을 볼 때, 미술가의 작업 과정에 궁금증을 가지게 된다. 미술가와 관람자 사이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그림을 보는 관람자의 시각 반응에서 감정 반응까지,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을 통해 감지된 감각 정보는 과거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분석함으로써 내적 표상, 즉 바깥 세계의 지각을 만들어 낸다. 적절한 지각이 형성되면 뇌는 자신이 받아들인 정보에 맞추어 의도적인 행동을 일으킨다. 이런 방법으로 뇌는 감각 정보의 지각, 생각, 감정, 기억, 행동 등, 우리 정신생활의 모든 측면을 통합한다. 그림을 볼 때, 느끼는 모든 감상 역시도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진행된다. DNA의 공동 발견자 크릭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이것은 기호의 한 사례다. 컴퓨터 메모리에 든 정보는 사진이 아니다. 그것은 사진의 기호다. 기호는 단어와 마찬가지로 다른 무언가를 상징하는 것이다. 개라는 단어는 특정한 종류의 동물을 상징한다. 개라는 단어를 실제 동물과 혼동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기호가 반드시 단어일 필요는 없다. 신호등의 빨간불은 ‘멈춤의 기호다. 분명히 우리는 뇌에도 기호 형태의 시각 경관의 표상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크릭의 이론을 그림을 관람하는 상황에 적용해 본다면, 그림을 볼 때, 우리의 뇌 속에는 눈에 보이는 대로의 그림이 저장된 듯하지만, 사실은 그림의 상징적 표상만이 저장된다. 우리의 눈은 카메라처럼 그림을 그대로 포착하는 것이 아니다. 그림을 볼 때 우리는 과거의 경험과 결합한 모습, 즉 그림과 일치하는 환상을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눈, 즉 망막은 어떻게 생겼을까? 우리의 눈은 세 종류의 추상체와 한 종류의 추상체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추상체는 망막의 가운데 부분에 밀도가 높다. 그래서 망막의 중앙은 세밀한 수준의 분석, 그리고 주변은 전체론적 분석이 가능한 것이다. 리빙스턴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볼 때 느끼는 오묘함은 이러한 망막의 구조로부터 기인된 것이라 주장한다.
모나리자의 오묘한 표정을 좌우하는 입꼬리는 망막의 중심으로 볼 때는 그 미소를 알아차리기 힘들며, 오히려 먼 산을 보듯이 얼굴 옆쪽이나 눈부분으로 시선을 향하면 입꼬리가 더욱 선명하게 느껴지게 되는데, 이것은 바로 우리 망막이 가지고 있는 특성에 기인한다.
그렇다면 그림을 볼 때, 생기는 감정은 무엇이고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 진화의 과정에서 인간의 뇌에는 자신이 경험한 것을 기억으로 저장해 둘 수 있는 해마 같은 기관이 생겨났다. 경험을 기억으로 저장해 놓을 수 있는 이 회로망은 인간과 동물 사이의 간격을 현재와 같이 서로 도달할 수 없는 차이까지 만들어 냈다. 현재만 이해할 수밖에 없는 동물은 음식이 있으면 그냥 먹겠지만 그것을 먹고 배고팠던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먹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동물은 ‘눈물 젖은 빵’을 먹을 수 없다.
결국, 과거 위주의 뇌가 나타나면서 감정이 생기게 된 것이다. 에릭 캔델의 설명에 따르면 이것은 뇌의 하향 처리이다. 감정이란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통해 그 과거에서 본 미래 즉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판단한 다음, 거기에 판단의 색을 입히는 것이다. 해마의 덕분에 하향 처리가 가능해진 뇌는 다시 대뇌피질이라는 부분을 통해 미래를 예측하는 일을 하게 된다.
감정의 주된 목적은 소통과 선택과 회피이다. 그중에서 소통의 기능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분야가 예술이다. 연극을 하는 사람은 특정한 감정선을 표현하기 위한 표정과 소리를 연습한다. 음악을 하는 사람은 그것을 운율과 리듬과 화성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미술가는 선과 색깔과 구도로서 대상을 묘사한다. 예술가의 사명이란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전달하는 것인데, 저자는 표현주의와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통해 이를 설명하고 있다.
먼저 표현주의 화가들은 감정의 해체를 통해 새로운 형상으로 담아낸다. 그러나 그러한 ‘담아내기’에도 일정 부분 기술적인 요소들이 존재한다. 작가는 현대의 뇌 과학이 밝혀낸 인지의 비중을 설명하는데, 가장 강력한 인상을 주는 것으로 역시나 얼굴, 그중에서도 눈, 코, 잎으로 구성되는 복잡하고 세밀한 묘사를 꼽았다. 다음으로 코코슈카와 에곤 실레의 그림을 예로 들어 몸의 왜곡, 그리고 손의 왜곡이 주는 시각적 주의 정도를 배열했는데, 이 역시도 뇌의 반응 영역과 반응의 민감도에 기인한 것이다.
한편 관람자의 감정 반응을 일으키는 마지막 요소로 색깔에 대해서는 황금색의 예술가 반 고흐로 대표되는 인상주의 표현기법을 소개한다. 강렬한 햇빛과 투명한 공기로 유명한 프랑스의 남부를 여행하면서 고흐는 동생에게
“태양, 햇빛, 더 나은 단어가 없으니 연한 유황색, 연한 레몬색, 금색이라고 해야겠어, 노란색이 정말로 아름답지 않니!”라고 말했다. 로버트 휴스는 반 고흐의 노란색이 단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그 안에 들어간 사람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풍부하고 절묘할 정도로 서정미를 구현한 반 고흐의 색깔이 단순히 즐거움을 표현한 것이라고 본다면 잘못 생각한 것이다. (...) 모더니즘의 색채 해방, 순수한 광학적 수단을 통해서 감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방식은 그의 유산 중 하나였다. (...) 요컨대 반 고흐는 19세기 낭만주의가 마침내 20세기 표현주의로 넘어갈 수 있도록 한 연결점이었다.”
뇌는 대상의 행태나 운동보다 100밀리 초 빨리 색깔을 지각한다. 이것은 얼굴의 신원을 지각하는 것보다 더 먼저 표정을 지각한다는 뜻이다. 미술에서의 색은 단순히 사물을 묘사해주는 것을 넘어 다양한 감정을 표현해 주는 데 사용된다. 색은 대체로 뇌의 어느 한 곳에서 처리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부분에서 분산처리될 가능성이 크다.
저자에 따르면 인상파 화가들은 빛과 어둠의 등급 범위를 최소한으로 유지하여 그림을 보는 관람자의 주의를 원색을 자각하는 쪽으로 더 집중할 수 있게 했다고 한다. 이것은 인상파 화가들이 색깔을 통해 감정을 전달하는 방법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과학자들은 인간 감정의 다중 목적을 추론해 냈다. 감정은 인간의 정신생활을 풍성하게 하며, 동반자를 고르는 일을 비롯하여 사회적 의사소통을 촉진하며, 합리적인 행동을 할 능력에 영향을 미치며, 잠재적인 위험을 피하는 동시에 유익하고 쾌락을 주는 잠재적인 원천에 접근하도록 돕는다.
인간의 몸은 상황에 적응하거나 대응하기 위해 호흡, 근육, 신경전달 물질, 그리고 자율 신경계 등의 변화를 일으킨다. 이러한 변화는 반드시 ‘감정’이라는 반응과 동시에 이루어지며 그 감정은 일정한 틀로 표현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두 가지 질문에 봉착한다. 첫째,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데 왜 ‘감정’이 필요한 것일까? 그리고 또 하나, 감정은 왜 보편적인 표정으로 표현되어야 하는가?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오리무중이다. 그러나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다윈이 답을 내놓았다.
다윈에 따르면 인간은 한정된 얼굴 표정을 통해 감정을 전달한다. 행복과 두려움 사이에 놀람, 혐오, 슬픔, 분노 등은 사실 대상이 있기에 필요한 것들이다. 한 세기 뒤에 미국 심리학자 폴 에크만은 다양한 문화에 속한 사람들의 10만 가지가 넘는 표정 샘플을 가지고 이를 증명했다. 이는 마치 오늘날 우리가 쓰는 핸드폰의 이모티콘으로 표현되는 수십 가지 얼굴 표정이 감정 전달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과 같다.
인간은 사회 소통을 근간으로 하는 존재이며, 따라서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기 위한 신호전달 체계가 필요했고, 그것이 바로 얼굴 표정이다. 표정은 주로 눈, 코, 입을 중심으로 하는 근육 체계로 이루어져 있으며, 시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보편적인 양태를 띄고 있어서, 소통으로서의 기능이 가능하다. 어쩌면 감정은 다른 신체적 변화 유발자의 기능이 아닌 단지 소통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일 수 있다.
“육체와 분리된 순수한 인간 감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저자가 소개한 제임스의 이 말은 감정은 육체의 유발자가 아니라 육체의 반응 그 자체라는 함의를 담고 있다. 연구에 따르면 감정은 두 가지 경로, 즉 ‘의식적 지각’과 ‘무의식적 지각’을 통해서 동시에 발생한다.
무의식적 지각은 환경 변화에 반응하여 몸의 생리적 변화를 유발하는 것이고, 무의식적 지각은 각성과 평가, 인지의 과정을 거쳐서 ‘느낌’에 이르는 것이다. 여기서 느낌이란 뇌 속 ‘편도체’의 활성을 뜻한다. 길을 가다가 곰을 만났을 때, 의식적으로 곰의 포학함을 평가한 다음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곰을 보는 순간 먼저 본능적으로 반응한 후, 나중에야 무섭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은 바로 느낌이라는 감정에 이르는 두 가지 경로를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곰을 본다는 시각으로부터 감정을 유발하는 편도체에 이르기까지, 자극의 전달은 결국 직접 경로 (무의식 경로)와 간접 경로 (의식 경로)에서 미소한 시차를 두고 이루어진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우리가 그림을 볼 때도 동일하게 작동되는데, 저자는 이를 코코슈카와 에곤 실레의 표현주의 작품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두 사람의 작품에서 공히 보이는 소위 ‘추함’에 대한 인상이 바로 그것이다.
감정을 결정짓는 편도체와 인지를 관장하는 전전두엽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연구 결과는 인간의 사고와 감정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 협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이는 그 유명한 도덕에 관한 트롤리 문제에서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저자의 통찰은 프로이트가 말한 이드와 에고, 그리고 슈퍼에고를 각기 관장하는 뇌의 지도를 그려내는 데까지 이른다.
아름다움과 추함의 기준은 무엇이며, 그것의 기준이 일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저자는 아름다움의 보편적 기준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한다. 미적 판단의 공통적 기준은 모두 번식력과 건강, 그리고 내 질병 성을 향상하는 방향에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사람의 얼굴 중, 이러한 방향을 충족하는 조건은 첫째, 대칭형이어야 하고, 둘째, 초승달 눈썹, 큰 눈, 작은 코, 도톰한 입술, 가름하고 작은 턱 등이 있어야 하며, 셋째, 어느 한 부분이 강조된 얼굴이다. 저자는 자기 아내의 얼굴을 이에 대한 모범으로 제시한다.
코코슈카와 에곤 실레의 그림에 나오는 여인들의 모습 속에는 아름다움과 추함이 섞여 있는데, 이는 관람자가 기묘한 느낌을 받게 만들지만 이러한 느낌을 통해 예술은 우리가 결코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거나 아예 경험하고 싶지 않을 생각, 감정, 상황에 우리를 노출한다. 이러한 노출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며, 다양한 경험과 감정을 탐구하고 시도할 기회를 준다.
기묘함, 노출이라는 단어로 상징되는 시각 자극은 보상과 결핍되었을 때, 더 강하게 반응하는데 이는 특정할 신경세포 집단을 발견함으로써 과학적으로 확인되었다. 이미지의 긍정적인 가치 및 부정적인 가치의 변화가 편도체의 활성에 영향을 미치고, 서로 다른 신경세포 집단이 서로 관여함으로써 그 영향이 나타난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림의 관람자는 화가가 모델의 열망과 목표에 관해 무엇을 전달하여 시도하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초상화가 제공하는 이 마음 읽기 훈련은 남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느끼는지 추론하는 우리의 능력을 훈련시킨다. 그래서 더턴은 예술이 ‘인간이 접할 수 있는 가장 심오하면서도 감동적인 경험 중 일부’를 제공한다고 말했다.
“미술은 화가와 관람자가 모든 인간의 뇌를 특징짓는 창작 과정을 서로 전달하고 공유하려는 본질적으로 즐겁고 유익한 시도다. (...) 아하 하는 순간, 우리가 남의 마음을 들여다보았음을 문득 깨닫게 되는 순간으로 이어지며, 화가가 묘사한 아름다움과 추함의 바탕에 깔린 진리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는 바로 그 과정을 말이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다른 사람에게도 마음이 있나?”, “아름다움에 기준이 있나?”라는 질문에 대해 저자는 일종의 보편성을 근거로 “있다!”라고 조심스럽게 대답한다. 만약에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없다면 그리고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이 없다면 예술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미술 작가는 작업 과정에서 끊임없이 관람자의 눈과 의식의 흐름을 관찰하고, 그 흐름에 따른다.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이 없다면 그것에 접근하는 것도, 그것에게서 멀어지는 것도 불가능하다. 최소한 저자의 논리에 따르면, 얼굴에 표정이 있고, 그 표정으로 감정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마음이 존재한다는 증거이다.
그렇다면 마음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매우 복잡한 뇌 구조와 신경세포 간의 네트워크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감정이입을 통해서 읽어낸다. 자폐아에게는 마음의 이론을 형성하는 능력이 결핍되어 있다고 프리스는 주장했다. 자폐아가 남의 마음 상태나 느낌을 추정할 수 없고 남의 행동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이론이다.
“우리는 지극히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남의 마음의 모형을 구축함으로써 남의 행동을 읽을 뿐 아니라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모형을 만들려면 마음의 이론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 즉 남이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는지 상상할 수 있고 남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으려면 인간의 마음을 이해해야 한다. 이 내면 시뮬레이션을 완성하려면, 우리 뇌는 자신의 모형도 필요하다.”
그림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작품에 감정이입을 하기 위해 마음의 모형을 만들어 내고 그 모형을 통해 작가의 마음을 읽어내는 것이다. 관람자는 그림에 참여하고, 작가는 자신을 그림에 참여시킨다. 그러면서 화가와 관람자는 그림에 동시에 참여하게 된다.
사회적 뇌가 사회적 정보를 처리하고 마음의 이론을 만들 수 있는 메커니즘은 다섯 개의 체계가 계층 구조를 이룬 망이다. 첫째, 우리는 남의 얼굴 표정을 분석하여 감정 상태를 해석한다. 둘째, 남이 물리적으로 존재하는지와 어떤 행동을 할지에 대한 예측 한다. 셋째, 생물학적 움직임을 분석하여 남의 행동과 의도를 해석한다. 넷째, 거울 뉴런을 통해 남의 행동을 모방한다. 즉, 역지사지로 판단한다. 다섯째, 남의 마음 상태를 추정하고 그것을 분석한다.
이러한 메커니즘 위에서 그림을 관람할 때, 느끼는 감동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뇌 과학은 이를 상향 조절과 하향 조절로 설명한다. 시각 자극은 도파민 체계를 가동한다. 도파민 체계는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을 분비하며, 보상을 중개한다. 보상이란 사람이나 동물에게 긍정적인 가치를 지닌 대상, 자극, 활동, 내부 신체 상태를 말하는데 일종의 쾌락 상태이다. 이러한 쾌락이 바로 감동이다. 다음으로 우리 뇌의 하향 처리는 이러한 감동에 비평을 가하고, 새로운 감동을 만들어 낸다.
슐츠는 도파민 신경세포가 음식, 섹스, 마약과 같은 실제적인 직접 경험뿐만 아니라 그 보상을 예고하는 자극에도 활성을 띤다는 것을 시사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따라서 도파민의 분비는 실제로 쾌락이 실행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 기대만으로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측한 쾌락에 대한 도파민 신경세포의 반응은 미술 작품을 볼 때, 경험하는 쾌락의 생리적 토대일 수 있다. 미술을 감상하고 대리 경험하는 쾌락을 넘어서는 차원의 보상은 결코 실현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생물학적 보상을 예고하기 때문에 행복한 느낌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한편 예측한 쾌락과 실제로 결과된 쾌락이 동일하지 않을 때, 학습효과가 나타난다.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예측과 결과가 같을 때, 우리에게는 아무런 학습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위대한 자연을 보는 순간의 경이로움, 예상한 것을 뛰어넘는 결과물을 볼 때, 우리의 뇌는 학습된다. 여기서 클림트의 그림을 볼 때, 우리의 뇌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클림트의 그림이 관람자의 조절계에 어떤 반응을 일으킬지 추측해 보자. 기초적인 수준에서 그림의 빛나는 금박 표면, 부드럽게 묘사한 몸,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룬 색채의 조합이라는 미학은 쾌락 회로를 활성화하여 도파민 분비를 일으킬 수 있다. 유디트의 매끄러운 피부와 드러난 젖가슴이 엔도르핀, 옥시토신, 바소프레신의 분비를 촉발한다면 성적 흥분을 일으킬 수도 있다. 홀로페르네스의 잘린 머리에 함축된 폭력, 유디트 자신의 가학적인 시선과 위로 올라간 입술은 노르에피네프린의 분비를 일으켜 심장박동과 혈압을 높이고 싸움 혹은 도피 반응을 촉발할 수도 있다.”
남은 문제들
뇌 공학자 김대식 교수에 따르면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우리는 지금 누워있는 자신이 바로 어저께 이 자리에서 잠이든 바로 그 나라고 믿는다고 한다. 이렇게 어저께와 오늘이라는 시간, 그리고 침대라는 동일한 공간 속에서 계속 연결된 존재를 나라고 부른다는 것, 이것이 정체성이라는 것이다.
김대식 교수는 ‘나라는 존재는 바로 연장성’이라고 정의한다. 우리의 신체 세포는 일정 시간이 지나면 죽음과 생성의 과정을 통해서 바뀌지만 유일하게 우리의 뇌세포만은 태어날 때의 그대로 죽을 때까지 유지되는 것이 우리가 감정을 가지게 되는 생물학적 토대라는 것이다.
김대식 교수의 말이 맞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연장성’을 통해 그림을 본다. 에곤 실레가 그렸던 작가 중심의 정체성과 곰브리치가 언급했던 관람자 중심의 정체성에는 바로 연장성에 기인된 존재가 그 바탕에 있다.
‘빈 1900’과 같은 시기에 독일에서는 해석학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성서 해석학으로부터 시작된 해석학은 우리가 접하는 모든 세계는 근본적으로 텍스트와 같이 해석될 수 있다는 가정을 발전시켰다. 모더니즘 자체도 보편화된 교회 권력으로부터의 해방되어 과학으로 인간 해석과 이성으로서의 역사 해석이 그 근본에 깔려 있다.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독일어를 쓰는 도시만 오스트리아라는 국가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생각할 때, 에릭 캔델이 독일의 슐라이어마허, 하이데거, 가다머로 이어지는 독일의 해석학의 성과들을 독자의 마음, 관람자의 감정을 읽어내는데,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은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따라서 이 책은 리글, 크리스, 곰브리치의 관점에서 더욱 길게 쓰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자면 관람자의 지각 및 감성이 참여하지 않는 한 미술은 미완성인 채로 남는다고 하는 주장은 이해의 해석학을 주창했던 가다머의 해석학을 닮아있고, 게슈탈트 심리학을 도구로 한 미술 관람은 근대 해석학의 토대를 구축했던 슐라이어마허의 ’전체‘-’부분‘간 순환 해석과 매우 흡사하다. 또한 “컴퓨터 메모리에 든 정보는 사진이 아니다. 그것은 사진의 기호다.”라는 시각 정보에 관한 서술은 리퀴리의 상징 언어를 떠오르게 한다.
두 번째로 남은 문제는 ’ 환원주의‘에 대한 주제로서 저자가 쓴 다음과 같은 주장에서 시작된다.
“곰브리치가 옹호하고 내가 이 책에서 개괄한 형태의 환원론적 접근법은 과학의 핵심이지만, 많은 이가 인간의 사유를 환원론적으로 접근하다가는 우리가 마음의 활동에 흥미를 잃게 되거나 하찮게 여기게 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심장이 몸 전체로 피를 내보내는 근육 펌프임을 알아차렸다고 해서, 그 대단한 기능을 탄복하는 심정이 한순간이라도 변한 적은 없었다. 마찬가지로 뇌의 생물학을 이해한다고 해서 사고의 풍성함과 복잡성을 부정하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환원론적 접근법은 한 번에 한 가지씩 정신과정의 구성 요소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생물학적 현상과 심리적 현상 사이에서 전에는 예측하지 못한 관계를 지각할 수 있게 하여 우리의 시야를 확장할 수 있다.”
다른 증거주의 및 과학주의자들의 신념처럼 에릭 캔델도 최종 공식, 즉 환원론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이것이 작가의 눈이 아닌 관람자의 눈에 상대적으로 게으름을 피우는 이유일 수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가다머와 스피노자의 이야기를 동시에 들어 볼 필요가 있다.
“해석학은 자연과학의 방법론에 맞서 제안된 정신과학의 탐구 방법이다. 자연과학은 객관성과 엄밀성을 가장 중요한 잣대로 삼는다. 하지만 사람의 삶은 이 같은 자연과학의 잣대로만 평가될 수 없다.” (가다머. ‘진리와 방법’ 1960)
"요약하자면 나는 성서 해석의 방법이 자연 해석의 방법과 다르지 않고, 그것과 완전히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자연 사물의 정의를 확실한 자료에서 끌어내서 자연을 연구하는 것이 자연 해석의 방법에서 본질적인 것처럼, 확실한 자료와 원칙에서 올바른 추론을 통해 성서 기자의 진의를 끌어내는 것이 성서 해석에서도 필요하다. 이러한 방식으로 모든 사람은 오류를 범하지 않고 발전할 수 있다." (스피노자. 신학-정치론. 1670)
예술을 과학의 눈으로만 바라보는 것이 올바른 시각인지에 대해서는 더 두고 보아야 할 문제이다.
마지막으로 논의가 되어야 할 부분은 ’ 인공지능‘이다. 프로이트는 미술품을 관람할 때의 생물학적 심리학적 깨달음이 곧 출현할 것이라고 예견하였는데, 그의 전망은 그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빨리 다가왔다. 지금은 심리학적 용어가 화학이나 생리학이 아니라 AI 알고리즘으로까지 확대되어 있다. 뇌 과학이 인간의 마음을 완전히 밝혀낸 것은 아니지만 밝혀진 내용만큼은 빠르게 인공지능으로 옮겨지고 있다.
얼마 전, 미국 서던 캘리포니아대학(USC)의 연구원들은 엘리라는 이름의 아바타에게 사람들이 자신의 감춰진 비밀을 털어놓는지에 대한 실험을 진행했다. 그 결과 타인보다 엘리에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은 경향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The science times‘에 따르면, 미국의 스타트업 워봇은 이 같은 연구 결과를 응용해 AI 심리상담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기계에 말한다는 생각에 사람들이 자신의 심리 증상에 대해 좀 더 솔직하게 털어놓는다는 점을 응용한 것이다. 워봇의 알리손 다아시 대표는 현재 수준으로는 AI 심리상담 프로그램이 전문적인 상담사를 대신할 수는 없지만, 심리상담 기회를 얻기 힘든 이들에게는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현재 워봇은 130개국에서 수십만 명의 이용자가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한편 ’ 인공지능과 예술의 관계’를 연구하는 여운승 교수는 최근 EBS 강의에서 데이터가 부재한 상태에서 인공지능이 음악을 창작해 내는 과정을 소개했다. 프로이트와 표현주의 예술가, 그리고 미술사학자들이 빈 1900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에 담긴 데이터로부터 영향을 받아 자신의 작품을 창작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데이터 없는 창작이란 매우 놀랄만한 것이다.
또한, 이 강의에서는 여운승 교수는 통합과 통찰의 관점에서 인간보다 유리한 인공지능의 특성을 고려할 때, 앞으로 인간과 인공지능의 역할이 재조정될 가능성 역시 무시할 수 없다고 했다. 다시 말해서 창작의 역할은 인공지능이 수행하고 인간은 창작에 필요한 데이터만 공급해 주는 보조의 역할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빈 1900’에서 보았던 창작에 대한 개념에도 변화가 있어야 한다. 예술의 이면에 자리 잡은 마음의 문제와 왜곡을 통한 표현의 문제, 저자와 관람자의 감정의 교류와 공유 등에 대해서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림을 창작하거나 관람할 때, 우리에게 전달되는 감동과 감정은 뇌의 상향 처리와 하향 처리에 기인한다. 그러나 인공지능의 경우 시각이나 청각이 뇌하수체를 통과하여 시각세포나 청각 세포에 전달되는 과정, 즉 상향 처리 과정이 생략된 채, 저장된 데이터와의 비교 분석을 통해서 창작에 참여하는 하향 처리 과정만 남게 된다. 이런 경우 예술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기능, 즉 감동과 감정은 어떻게 처리될 수 있을 것인가?.
김대식 교수는 ‘과거의 뇌’가 감정을 만들어 낸다고 했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이 활용하는 Big Data는 감정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감정과 감동, 쾌락이 빠진 예술이 예술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