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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인순 Mar 09. 2019

‘권외편집자’책을 내는 사람들

책 속의 사람들

권외편집자

IMF 충격이 어느 정도 가라앉기 시작하던 1998년 봄, 캐나다 밴쿠버에서 열렸던 한 기술 콘퍼런스에 참석한 적이 있다. 당시만 해도 국제 기술 콘퍼런스에서 아시안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았다. 때문에, 세미나 중간중간 휴식 시간에 복도에서 홀로 커피를 마시고 있는 어색한 모습의 아시안을 만나게 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 콘퍼런스도 마찬가지였다. 나와 60대 후반으로 보이는 한 일본인, 아시안은 딱 두 명뿐이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일본인들은 자신을 아시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치 렉서스가 도요타가 아닌 것처럼. 당시 일본의 소니는 ‘Made in Japan’이 아닌 ‘Made in SONY’라 불린 적도 있다. 나만이 일방적으로 느끼는 같은 아시안이라는 동질감에 의지하여 콘퍼런스가 진행되던 사흘간, 그 일본인과 같은 좌석에 앉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주로 질문을 했고, 그는 질문에 친절하게 답을 해주었다. 화학 계열의 대기업에 다니다가 10년 전에 은퇴했고, 이후로 자유기고가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 그는 지금은 화학 관련 국제 콘퍼런스를 다니면서 취재를 하고, 후기를 작성하여 일본에서 발행되는 전문 잡지에 기고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당시, 한국에도 은퇴한 일본인 중 소위 ‘기술 고문’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전문가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은 주로 한국 업체에 시간제로 기술 지도를 해주고, 큰돈을 챙기곤 했었는데, 이들 중에는 자신들의 한국에서의 경험을 일본의 기술 잡지에 기고하는 일종의 취미(?) 활동을 하는 사람도 꽤 있었다. 그들의 기고 중에는 한국인의 직업의식을 대체로 부정적으로 표현한 내용이 대다수였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캐나다 콘퍼런스에서 그 일본인을 만났을 때 역시도 일종의 경계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경계심은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그에게서 같은 아시안으로서의 동질감이란 찾아볼 수 없었다. 섞이기보다는 구분 짓기에 탁월한 능력을 갖춘 일본의 일부 지식인들에게서 발견되는 기묘한 성향은 사실 역사가 오래된 이야기다. 19세기부터 일본은 아시안이 아니었다.     


일본은 특이하게도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서양과 비교하여 일본의 상대적 우수성을 유난히도 강조했었다. 물론 그것은 러일전쟁의 승리로 그 정점을 찍었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이내 빠른 기술 발전과 제2의 경제 대국의 성취를 통해 그 우수성이 공연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일본인의 자부심이 그에게서도 느껴졌다. 그의 민족주의적 자부심에 대한 근원적 거부감에도 불구하고 사흘간 그와 가까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실행하고 있는 독특한 삶의 방식 때문이었다.    


이 책의 저자 ‘츠즈키 쿄이치’는 1998년 캐나다 밴쿠버의 한 콘퍼런스장에서 만났던 그 일본인을 떠올리게 했다. 저자는 이 책에 대해 ‘잘 팔리는 기획’이나 ‘취재를 잘하는 비법’ 또는 ‘유명한 출판사에 들어가는 방법’을 알고자 하는 이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전제한 후, 단지 현역 편집자에게 세계의 밖으로 나가는 길을 보여주는 것이 자신의 목적이라고 근사하게 말했다. 그 근사한 말속에 역시나 일본인 특유의 겸손을 가장한 오만함이 비쳤다.    


츠즈키 쿄이치는 1956년생이다. 그는 20살 때부터 사진사로 편집일을 했으며, 대부분 생을 프리랜서 편집자로 살아왔다. 그러기에 그는 누구보다도 세상 밖에 대해서 잘 안다. 밴쿠버에서 오만한 은퇴 기술자 옆에 앉아 있었듯이 츠즈키 쿄이치의 이 책에서 손을 놓지 못한 데는 이유가 있다. 비단 편집자뿐만 아니라 세상 밖으로 나가는 길은 누구에게나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길은 자신의 존재로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길이며,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대다수 사람을 만나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다수자’란 말을 많이 사용한다. 그가 말하는 다수자란 고급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는 미식가가 아니라 초라한 혼밥 집에서 점심을 때우는 직장인이고, 화려하게 장식된 집에서 사는 귀족이 아니라 좁고 평범한 단칸방에서 사는 생활인이다. 고급 호텔에 묵는 관광객이 아니라 모텔에서 잠을 청하는 여행자다.     


그 때문에 숫자로서의 다수자는 정치적으로는 소수자다. 저자에 따르면 권력과 돈으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사람들이 소소한 일상을 채워 나가는 방식을 연구하는 것이 저널리즘이다. 결국, 저자에게 있어서 저널리즘은 거리에서 ”왠지 신경 쓰이는 것’을 발견했을 때, 그것을 취재하고 편집하고 출간하는 작업이다.    


이 책에는 ’ 권외 편집자’로서의 자유로움보다는 취재의 처절함과 치열함이 잘 그려져 있다. 어디서부터 유래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본 저널리스트들의 탐사 정신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대표적인 예로 이번 김정은 위원장의 베트남 방문 중, 잠시 정차한 기차역에서 일본인 기자는 김정은의 담배 피우는 모습을 촬영하는 데 성공했다.     


저널리즘이란, 탐사 정신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이 책을 읽는 동안 머리를 맴돌았던 질문이다. 언젠가 철학자 김정운은 에디톨로지에서 “창조는 편집이다.”라는 말을 했다. 그에 따르면 ‘호모 에디 토렌스’ 즉, 편집하는 인간이란 기존의 의미체계를 해체하고 걸러진 정보들을 다시 모아 새로운 의미체계를 만드는 인간이다.     


그에 말에 받아들인다면, 저널리즘이란 해체와 재결합의 반복이다. 여기에는 해체의 기술 못지않게 편집의 기술도 필요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해체와 편집의 기술, 즉 저널리즘은 잡지나 신문에만 해당하는 기술은 아니다.              

얼마 전 개봉했던 영화, ‘말 모이’ 역시 강력한 저널리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어 사전을 편찬하고자 하는 조선어학회의 투쟁을 통해서 방언을 모으는 취재, 전문가들의 집필과 편집 작업, 공청회를 통한 공론화 과정, 보존과 인쇄를 위한 극적 활동을 식민지 상황을 배경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책에서 가장 어리둥절했던 부분은 저자가 ‘미야타케 가이코츠’를 예를 들어 현대 일본 저널리스트들의 나약함을 비판한 이야기다.   

 

츠즈키 쿄이치


“시대가 이렇고 불황이 저렇고 상사가 어떻다고 구시렁거리기는 쉽다. 그러나 지금보다도 훨씬 엄격했던 시대에 정치권력을 비판했던 언론인 미야타케 가이코츠는 22세에 불경죄로 금고 3년의 실형 판결을 받았고 필화 사건으로 4번의 수감, 15번의 벌금형, 14번의 발행 정지 및 발매 금지를 당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베스트셀러 잡지를 만들어냈다. 매일 밤 신주쿠역 서쪽 출구에서 ‘자작 시집 팝니다’라는 팻말을 들고 수십 년째 서 있는 사람도 있으며, 술집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작품집을 출판하는 사람도 있다. 잘 나가는 출판인들은 그들을 바보 취급하기도 하지만, 몸을 파는 것과 마음을 헐값에 넘기는 것 중에 무엇이 인간으로서 부끄러운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    


저자는 저널리즘의 올바른 자세를 이야기하기 위해 ‘미야타케 가이코츠’의 사례를 꺼내 들었지만, 이것이 저자가 이야기하는 저널리즘과 과연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의아하다. 단지 자신은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수자’의 이야기를 담고 싶어서 책을 출간한다는 그의 도덕적 입장을 고려한다 해도 그의 이야기에 미야타케 가이코츠를 소환시키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    


참고로 미야타케 가이코츠는 1867년에 태어나 1955년에 죽은 일본의 작가이다. 그의 생몰 연도가 말해주듯이 그는 일본의 조선반도 침략 및 세계 제2차 대전이라는 세기적 격변기를 살았다. 그는 1901년 ‘골계(滑稽) 신문’의 실제적인 발행자인데, 이 신문은 시사 비평과 세태 풍자로 매우 큰 인기를 끌었었다. 특히 미야타케는 정치인들에 대한 풍자나 비판을 서슴지 않았는데, 그중의 하나가 안중근 의사에 의해 살해당한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의 죽음은 세계에 대손실은커녕 일본에 작은 손실도 주지 않았다. 비명의 죽음에 동정을 보내고 죽은 자를 애석해하는 것이 인정이니 우리도 이를 비난하지는 않지만, 그 정도를 넘어 광적으로 애석해하는 것은 대 반대다."    


미야타케 가이코츠가 이 글을 실은 신문의 제목 ‘골계’는 자연의 질서나 이치를 의의 있는 것으로 존중하지 않고 의미를 추락시켜, 익살스러운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웃음 속에 진실을 담아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골계 역시도 고정된 의미의 해체와 유희적 언어로의 편집 과정을 통해서 태어나는 것으로 진정한 저널리즘일 수 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샤를리 에브도와 같은 것이다.    


어쩌면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체포된 후, 심문을 받을 때, 이토 히로부미의 15가지 죄를 나열했던 것 역시도 하나의 저널리즘일 수 있다. 저널리즘은 궁극적으로 행동을 낳기 때문이다.               


자신에 대한 은근한 자랑으로 꽉 채운 이 책에서 저자는 “매월 입금되는 돈 보다 두근거림‘을 강조한다. 그리고 편집자로 산다는 것의 사소한 행복이란 바로 경력이나 학력 없이도 호기심과 체력과 인간성만 있으면 거둘 수 있는 성과가 있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글을 쓴다는 것, 책을 낸다는 것의 기쁨을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힘들다. 더욱이 글쓰기에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고, 나름의 목적이 있으며, 다양한 행복이 있기 때문이다. 생계를 유지하기에도 벅찬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시인으로 사는 삶을 고집하는 사람도 있고, 시나리오 쓰기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번번이 공모전에 낙방하지만, 여전히 책상에 앉는 사람도 있다. 반면 저자와 같이 거리에서 새로운 것을 찾는데, 그 목적을 둔 사람도 있다.    


”이 시리즈의 작업을 통해 이런 결론을 얻을 수 있었는데, 보다 의미 있었던 일은 자신만의 세계를 의식할 수 있게 된 점이었다. 러브호텔이나 바이브레이터의 다지 내부, 폭주족 형씨, 데코 토라의 운전기사도 세상의 차가운 시선과 평가를 단호히 거부하고 자신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그런 세계를 취재하게 해 준 덕분에 책으로 만들 수 있었던 내가 세간의 평가에 휘둘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취재 대상을 존경한다고 해서 그 삶의 방식을 따라 하라고는 하지 않겠지만, 배울 만한 부분이 있다면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도 좋을 것이다. 팔리지 않는 아티스트를 취재해서 그들의 문장이나 사진으로 나만 돈을 벌어도 되나 하는 생각도 했다. 물론 엄청난 돈이 되지는 않지만 말이다. “    


이 책은 심오한 철학을 담고 있지 않으며, 그렇다고 편집자로서의 대단한 기술적 내용이나 아름다운 시어로 쓰인 개인사의 회고도 없다. 그러나 무언가 행동의 변화를 일으키는 작은 힘이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이 책은 우리가 거리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들,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작은 아이디어들, 지루하지 않은 이야기들, 그런 것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쓰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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