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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인순 Feb 21. 2019

‘이 모든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쵁 속의 사람들

이 모든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토마스 네이글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것은 그 사람의 책임인가? 아니면 그를 가난하게 만든 사회적, 생물학적 환경과 조건에 그 책임이 있는 것인가? 이렇게 “자유의지가 존재하는가?”라는 철학적 질문이 사회과학을 만날 때, 논점은 매우 복잡해진다. 신자유주의를 추종하는 사람이라면 가난은 백 퍼센트 가난한 사람의 책임이다. 반면 보편적 사회 정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가난의 원인으로서의 사회적 환경은 늘 고려의 대상이다. 이 양립되는 주장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결국 ‘자유의지’라는 철학적 담론과 만나게 된다..     


철학적 담론이라는 것은 늘 그렇다. 그것 자체로서의 중요성보다는 그것으로 인해 야기되는 사회적 판단 때문에 사라지지 않고 살아남는다. 그러나 오늘날 사회적 판단이나 정치적 논쟁 속에서 철학의 담론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은 일이 되었다. 사람들은 대체로 현상의 이면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깊이 생각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회 속에는 아테네의 긴 회랑이나 장사꾼들과 철학자들이 옷깃을 스치면 지나다니는 아고라는 심심하고 지루하며 무용한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가난한 사람의 책임 관계를 묻기 위해서는 선행하여 논의하여야 할 철학적 질문이 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면 모든 현상의 책임은 결과에 있다. 반면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책임은 오직 결과를 일으킨 선행 조건에 있다. 자유의지를 인정하지 않는, 즉 소위 결정론이라 불리는 이론에 경도된다면 가난한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가난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     


철학으로 번역해 보자면 롤스의 ‘무지의 베일’은 결정론을 가정한다. 그 가정의 주체는 제비뽑기라는 우연, 즉 모든 원인과 경계조건을 우연이라는 묶음으로 처리한 것이다. 그의 정의론은 우연에 의해서 결정된 운명들에 대해서 공동의 책임을 지는 것이고, 그것은 개개의 원인을 소위 ‘퉁’ 친 것이다. 그리고 모든 책임은 그 ‘퉁’ 친 원인에 있다.     


반면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경쟁이라는 필연, 즉 자유의지가 필연이라는 묶음으로 처리된 것이다. 그가 말하는 시장은 자유의지로 가득 찬 곳이다. 이곳에는 주어진 원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모든 사람이 새로운 원인과 필연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 최선이 내놓은 결과에 대해서는 시장에 직접 참가한 사람들의 몫이다.      


이 책 ‘이 모든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서는 이러한 사회적, 정치적 현안들이 제거되어 있다. 저자 토마스 네이글은 오직 철학적 관점에서만 ‘자유의지’를 논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개인의 경험과 욕구의 총체, 지식, 유전적 구성, 사회적 환경 그리고 직면한 선택의 성격 등이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요인들과 어우러져 상황 안에서 개별 행위를 산출하는 것이 ‘결정론’이다.     


결정론에 따르더라도 결과를 강제 추동하는 원인이 너무 많기에 그것은 늘 인간의 인지 능력 바깥에 있다. 그래서 롤스는 이 모든 것을 하나의 가정, 즉, ‘무지’로 표현했던 것 같다. 저자 역시도 결정론이 우리가 우주의 모든 법칙을 알며, 그 법칙들을 이용해 미래에 일어날 일을 전부 예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우리는 인간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복잡한 상황을 알 수 없으며, 상황들에 대해 무엇을 알아내어 예측하려는 행위 자체가 상황을 다시 변화시키는데, 그 상황이 변화하면 예측한 결과 역시 변하기 때문에 결정론이란 예측 가능성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는 것이 결정론에 대한 저자의 정리이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가정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천체의 운행을 지배하는 것과 같은 자연의 법칙들이 존재하며, 그 법칙들은 세계 안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다스리고, 그에 따라 어떤 행위가 이전의 상황들에 의해 일어나도록 결정되면 다른 가능성은 배제된다.”     


그러나 결정론에 대한 이러한 주장은 늘 한 가지 대답하기 힘든 질문에 봉착한다. 만약 누군가의 행위가 그의 본성과 상황에 따라 미리 결정되었다면 그에게 어떻게 행위의 책임, 즉, 결과의 책임을 물을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이다. 결정론에 따르면 누군가가 쌍둥이 빌딩을 폭파했다고 해도 그것은 자연재해와 다르지 않다. 물론 결정론자들은 다음과 같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     


“만일 그가 당신의 음반을 훔쳤다면 그것은 그가 사려 깊지 못하고 정직하지 못함을 보여준다. 그 행위가 미리 결정되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별개의 문제다. 또한, 만일 우리가 그를 비난하지 않거나 처벌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가 다시 같은 일을 반복할 위험이 있다.”     


이러한 변명에도 역시나 모순이 존재한다. 위의 말에 따른다고 하더라도 그가 사려 깊지 못하고 정직하지 못한 것 역시 사전 조건이 되는 것이고, 그가 같은 일을 반복하거나 하지 않을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결정론을 받아들일 때, 당면한 순환 모순이다. 그렇다면 결국 자유의지는 존재해야만 하는 것인가? 저자는 여기에도 문제는 있다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행위가 당신의 욕구, 믿음, 성격 등에 의해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다면, 행위란 그냥 일어난 무엇이 될 것이다. 거기에는 어떤 설명도 있을 수 없다. 이 경우에 그 행위가 어떻게 당신의 행위가 될 수 있겠는가?”     


토마스 네이글은 결국 “이 질문에는 답이 없다”라는 가능한 답변을 내놓는다. 자유로운 행위는 이 세계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 특성이어서 분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원인 없는 결과와 원인 없는 행위는 분명히 구분된다는 것을 비록 설명할 수 없을지언정 우리는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사마리아인이 선한 행동을 하는 데에는 무언가 알 수 없는 선행 조건 (욕구, 믿음, 성격 등)이 있었겠지만, 그가 그런 행동을 할 때는 아무런 조건이나 원인이 없는 것이다.     


결정론이 맞는지 틀리는지는 알 수 없다. 자유의지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가능한 미래의 선행 조건, 즉 현재의 행동이 선한 의지로 가득 차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것이 의지가 아니더라도 손해 볼 것이 없으며, 결정되어 있다고 해도 회의주의자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롤스의 방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사회적 공동의 책임을 감수해야 하고, 애덤 스미스의 언어로 말하자면 시장을 도덕 감정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다. 그러면 철학적으로 ‘자유의지’가 인정되던 그렇지 못하던 우리는 사회적, 정치적으로 이를 해석함으로써 보다 긍정적인 행동의 동인으로 삼을 수 있게 된다.      


저자는 자유의지에 앞서서, 더욱 근본적인 철학적 과제를 던져준다.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인지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은 정말로 존재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내가 알고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인가? 이 엉뚱한 질문 역시도 철학적으로 대답하기 쉽지 않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것들에 대한 우리의 관념, 즉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관념이라는 검증 주의와 경험의 주체인 인간만이 존재하는 모든 것이며, 물리적 세계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유아론(solipsism)적 회의주의를 논리적으로 설명한 저자는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결론에 대신한다.     


“그러나 이 모든 논의를 거친 후에도 여전히 나는 다음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세계 안의 모든 것들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심각하게 믿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우리는 외부 세계의 존재를 본능적이고도 강하게 받아들인다. 다시 말해 그것은 철학적 논변으로 제거될 성질이 아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나 사물이 존재한다고 단지 가정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들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심지어는 이러한 우리의 믿음이 그거 없음을 보여주는 듯한 논변들을 검토한 후에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나? 세계가 있고 없고 가 나의 인식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가? 철학적 주제를 이번에는 종교적으로 해석해 보자. 위에서 말한 저자의 주장이 옳다면, 인간이 ‘신의 존재’를 믿지 못할 이유는 없다. 신이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은 단지 인간의 마음속 환상이라고 주장한다면, 마찬가지로 이 세상도 존재하리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질 수 없다. 결국, 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증명할 수 없다.          


저자는 이러한 논점을 시각 경험을 들어 설명한다. 시각 경험이 어떻게 야기되었는지 설명하려면, 외부 세계에 대해 말해주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들에 먼저 의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저자의 말은 결국 마음을 통해 인지되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뜻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불타는 노을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듣는 이의 마음속에 노을의 경험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곧, 마음속의 노을은 우리의 마음밖에 실재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를 가장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례가 있다. 바로 뉴턴에 대한 괴테의 비판이다.     


괴테는 프리즘을 통해 빛을 일곱까지 색으로 분리해 냈다. 이는 빛의 물리적 성질을 확인한 연구 결과이다. 이에 대해 괴테는 ‘색채론’이라는 책을 통해, 물리적 빛은 인간의 생체적 빛을 통해서만 인지된다고 반박한 바 있다. 오늘날의 생물학적 연구 결과에 따르면 괴테의 말이 옳다.      


인간의 시각 세포, 즉 원추 세포는 R-G-B, 즉 빨간색, 녹색, 파란색을 인지할 수 있는 세포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은 이 원추 세포를 통해 여러 가지 빛깔을 혼합적으로 분별해 낸다. 결국, 물리적 빛은 생체적 빛에 의해 각색되거나 걸러지는 것이다.      


그러나 뉴턴이나 괴테가 모두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가 마음을 통해 빛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마음 밖에는 빛이라는 물리적 현상과 물질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신은 우리의 인지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감각과 의지에 의해서 우리 마음속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하는 현대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을 이런 차원에서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내가 느끼는 빛깔과 다른 사람이 느끼는 빛깔은 같은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사과를 먹을 때, 혀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변화가 신경을 타고 뇌로 전달되어 전기 자극을 주게 되면 뇌에서는 물리적 변화를 통해 사과 맛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감각 전달의 메커니즘은 과학으로 이미 규명되었다. 그러나 사과 맛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뇌세포에서만 일어나는 물리적 사건인가? 아니면 정말로 사과로부터 기인하는 어떤 다른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과학자가 우리 뇌 속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우리의 뇌 안에서 활성되는 뇌세포는 분별해 낼 수 있을지언정, 사과 맛 자체를 찾아낼 수는 없다. 그렇다면 나의 경험은 나의 마음 안에 갇혀 있는 것이고, 이런 경험이 다른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나리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물론 케네시 밀러와 같은 학자는 이에 대해 “물질(뇌세포)과 물질의 작동은 다른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물질은 마음이 될 수는 없지만, 뇌의 작동이 마음이 된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서 저자는 다소 부정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무엇을 경험할 때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뇌에서 일어나는 일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일어난다면, 경험을 비롯한 마음의 상태가 곧 뇌의 물리적 상태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활발히 작동하는 신경 체계를 갖춘 몸에 일어나는 일이 우리에게 전부라고도 할 수 없다. 한 가지 가능한 결론은 영혼이란 것이 존재하며, 이는 몸과 상호작용하게끔 우리의 몸에 붙어 있는 것이다.”     


저자는 복잡한 물리적 유기체와 완전히 심적인 영혼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이원론적 입장 역시도 가능한 결론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물 분자를 분석한다고 해서 물의 성상이나 기능, 그리고 맛을 예측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물질을 분석한다고 모든 것을 확인할 수는 없다고 강변하다.     


과학자들이 다루고 있는 것은 물리적 세계 안에 분명히 존재하는 무엇이다. 즉 모두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것을 다룬다. 물리적인 것으로 구성된 전체는 더 작은 물리적 부분들로 분석될 수 있다. 그러나 심적 과정은 그럴 수 없다. 여러 물리적 부분들을 더해서 하나의 심적 전체를 만들 수 없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이 책은 마음, 몸, 자유의지 외에도 선악과 정의, 죽음과 삶에 대한 철학적 담론들을 매우 정교하고 세밀하게 다루고 있다.      


“역사가가 과거 어떤 시기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묻는다면, 철학자는 ‘시간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수학자가 수의 관계를 탐구한다면, 철학자는 ‘수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물리학자는 원자의 구성과 중력의 원리에 관해 묻겠지만, 철학자는 우리의 마음 외부에 무엇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 물을 것이다. 심리학자는 아이들이 어떻게 언어를 습득하는지 탐구하겠지만, 철학자는 ‘어떻게 단어가 의미가 있게 되는가?’라고 묻는다. 요금을 지불하지 않고 몰래 극장에 들어가는 행위의 부당성에 대한 누구나 물을 수 있겠지만, 철학자는 ‘무엇이 어떤 행위를 정당하게 또는 부당하게 만드는가?’라고 묻는다.”              


이 책을 통해 철학자들의 관심과 철학적 담론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사회에 참여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정치적 존재로서의 해석과 이해가 필요하다. 그래서 롤스와 애덤 스미스가 만나야 하고, 뉴턴과 괴테는 논쟁해야 하며, 철학 위에 종교적 신론이 꽃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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