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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인순 Aug 09. 2019

정한론과 친일개화파

극우 친일파의 뿌리를 찾아서(2)

일본의 정한론 논쟁

따지고 보면 모든 것이 정한론이었다. 메이지 유신의 아버지 쇼인이나 메이지의 풍운아 사가이, 정한론에 반대하면서도 강화도조약을 체결했던 오쿠보, 심지어 조선의 친일개화파를 지원했던 자유주의자이자 민권 주의자인 후쿠자와까지도 그 심연의 정황은 정한론이었다. 

     

쇼인의 정한론은 ’존왕양이’와 ’고쿠가쿠‘ 사상에 근거하고 있다. 그는 일본이 그 옛날 주변국들을 통치하던 위대하고 완전한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유신삼걸 중 한 명이자 당시 가장 존경받는 사무라이였던 사이고는 자신의 목숨을 버려 조선 정벌의 기폭제를 손에 넣고자 조선에 사신으로 가려고 했다.      


사이고의 정한론에 맞섰던 동양의 비스마르크, 오쿠보는 전쟁 없이 강화도조약 체결과 부산의 개항을 이끌었다. 그는 외교적 방법으로 조선을 개항시킴으로써 청국과 러시아와의 세력균형을 유지해 나갔다. 또한, 민권과 자유주의의 기치 아래 조선 정벌을 반대했던 후쿠자와는 사죄 사절단으로 방일한 후 귀국하는 박영효에 다음과 같은 입장을 피력했다.      


“조선 개화의 제1책은 무력을 사용하는 것, 하지만 이것은 인민의 마음을 닫아버릴 우려가 있고, (...). 제2책은 종교를 가지고 국민을 교화하는 것이지만, 조선의 인사들은 불교를 믿지 않고 일본의 불교도 부패 되어 있기에 이것도 바랄 수 없다. 조선 개화의 제3책은 학문을 통하여 문명화하는 방법이다. (...). 이 방법의 효과가 나타나기까지는 속도가 늦다. 그래서 제4책이 필요한데, 그것은 일본의 자본을 투자해 조선의 내지에 공업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쇼인에서부터 후쿠자와까지 정한론의 방법과 절차는 다르지만, 그 기저에는 변하지 않는 목표가 있었다. 첫째는 청국과 러시아로부터 일본 본토를 지키기 위한 조선 통치, 즉 훗날 주권 선과 이익 선으로 정리되는 국제정치적 교두보의 확보. 둘째, 메이지 유신 세력의 ’대정봉환’과 ’판적봉환‘등의 조치로 몰락한 하급 사무라이들의 불만 해소, 그리고 피폐해진 경제를 만회하기 위한 재정 확보. 마지막으로 존왕양이와 고쿠가쿠 사상의 결합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완전하고, 아름다우며, 새로운 일본의 건설이었다.      


저자 함재봉은 이 책에서 일본의 정한론을 추동하는 극동의 국제정세에 대해, 지독하리만큼 무지했고 고집스러웠던 조선의 쇄국 상황을 유난히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대원군에 의한 쇄국 정치, 그 10년의 세월을 보낸 조선의 상황은 강화도조약 체결 후, 일본을 방문한 제1차 수신사 김기수를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수신사의 신분으로 일본을 방문한 김기수는 어화원에서 모리야마 시게루를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그 자리에서 일본의 선진 기술과 근대 문명을 살펴보고, 이를 참고하여 부국강병의 길을 모색할 것을 간곡히 제안하는 시게루에게, 김기수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이 사람은 또한 산중의 빈사로서 견문이 넓지 못하고 재식이 전혀 없으니, 비록 손으로 기물을 잡고 종일토록 만지더라도 실로 어떤 것이 편리하며 어떤 것이 무딘지도 알 수 없으며, 일행의 수행원들도 모두 몸가짐이 근신하고 옹졸하여, 다만 득죄하지 않는 것만으로 준칙으로 삼게 되니 그들도 또한 이 사람과 비슷할 뿐입니다. 비록 날마다 유람하고 구경하더라도 다만 몸만 수고로울 뿐 아무런 이익되는 점은 없을 것입니다. 이번은 현재 맡은 일만 마치고 우리나라에 돌아간 후에 잘 의논 하겠사오며, 또 귀국의 사신이 우리나라에 오면 다시 의논할 날이 있을 것이니 하필 구차스럽게 눈앞의 충고만 따라서 갑자기 책임만 얼버무려, 우리에게도 소득이 없으면서 당신들의 후의만 저버리겠습니까?” 


한마디로 일본이 받아들인 근대 기술과 서양으로부터 전래 된 새로운 문물에 대해서 별반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조정의 요청으로 어쩔 수 없이 일본에 수신사로 왔지만, 조선이 견지하고 있는 성리학의 세계, 청에 대한 사대 정신에서 그리 벗어나고 싶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눈부신 발전상이 크게 부럽지도 않다는 태도였다. 


당시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며 통상 무역을 시작했지만, 사실상 ’조약’이라는 근대 개념에도 생소했고, 국가 간 상품거래에 있어서 관세가 왜 필요한지도, 화폐가 가지고 있는 시장 기능에 대해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본과 청국은 이런 조선을 향해 개화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근대 문물의 학습 및 통상조약의 체결을 거듭 제안했다.      


심지어 조선의 쇄국 기조가 답답하고 걱정됐던 주일 청국 공사관 참찬관 황준헌은 개화파의 인물로 알려진 김홍집이 제2차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 ’조선책략’이라는 외교전략 문서를 직접 작성하여 주기까지 했다.      


불교 승 이동인이 왜관에 설치된 일본 정토진종의 분원 히가시혼간지를 통해 일본 문물과의 첫 접촉을 개시한 후, 북학파 김규식의 제자들이 주축이 되어 구성된 재야의 젊은 학자들이 일본과 접촉하면서 비주류 친일개화세력이 형성된다. 이후 세력을 키운 친일개화 세력은 김옥균을 주축으로 갑신정변을 일으키지만 실패하고 몰락한다. 저자는 그 몰락의 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갑신정변 당시 김옥균은 34세, 홍영식은 30세, 서광범은 26세, 박영효는 24세였다. 김옥균은 다시는 조선 땅을 밟지 못한다. 일본 망명 중에도 조선 조정이 보낸 자객들의 암살 위협에 끊임없이 시달리는 한편, 청과의 관계를 고려한 일본 정부에 의해 일본 내의 오지로 두 차례 유배당하는 등 10여 년을 방랑하며 산다. 결국, 1894년 견디다 못하여 상하이로 망명하지만, 그해 3월 27일 민비가 보낸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된다. 향년 44세였다.”     


이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김홍집, 박영효 등 친일개화파를 귀국시켜 갑오개혁을 주도토록 하지만, 이 역시도 러시아의 아관파천으로 실패하게 되고, 이들은 또다시 망명 생활을 하게 된다. 그 후, 10여 년이 지나고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조선 반도에서 모든 경쟁자를 몰아낸 일본을 믿고 친일개화파는 의기양양하여 돌아온다.     


그러나 이미 청국과 러시아라는 북방 세력을 몰아낸 일본에 있어서 친일개화파는 무용지물이었다. 그들은 일본에 의해 철저히 소외된다. 청과 러시아가 지역 세력으로 버티고 있을 때, 일본은 조선에 대한 침략을 유보하고, 친일개화 세력을 통해 간접적인 이권 확보와 통치를 원했지만, 이미 정한론이 놓여있던 역사의 바퀴는 돌아간 후였다.     


일본으로부터 배신당한 친일개화파, 그러나 그들은 일본을 비판하는 대신에 갑신정변을 무산시킨 조선의 위정척사파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강화도조약 이후 자신들이 주창했던 개화를 추진했다면 일본에 의한 침략은 없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들에게는 오직 청국만 섬기겠다는 위정척사 세력이 일본보다 더 미웠다. 


사실 이러한 친일개화파의 위정척사파에 대한 갈등과 공격 논리는 현재 대한민국의 극우 친일파들이 문재인 정부에 대해 가지고 있는 원한과 거의 동일하다. 그들은 문재인 정부가 매우 친중(親中)적이고 국제정세에 둔감할 뿐만 아니라, 세계화를 부정하는 미개한 종족주의에 빠져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갑신정변의 실패 후, 미국으로 망명했던 친일개화파 서재필이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 후, 귀국하여 독립문을 세우고, 독립협회를 설립하고,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저자는 많은 사람이 ’독립문‘, ’독립협회‘, ’독립신문’에서 말하는 ’독립‘이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으로 오해하고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독립이란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이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뜻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서 1880년대 조선의 개화 사상가, 개화 운동가들의 사상적 시작점은 중화로부터의 독립에 있었음을 강조하고, 당시 독립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친일이 가장 합리적인 전략이라고 믿었던 그들의 실용주의적 태도를 이해시키려는 저자의 의도가 엿보인다. 이 책에서 저자 함재봉은 19세기 조선과 일본의 역사를 객관적이고 세밀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19세기 조선과 일본을 바라보는 역사관은 그렇게 객관적이지도 담담하지 않다.      


저자는 19세기 조선의 위정척사 사상과 쇄국 정책에 내재한 어처구니없는 무지와 편견, 몽매함에 대해 사료를 토대로 정밀하게 들여다보고 있으면서도 메이지의 개혁 세력과 친일개화파 간에는 본질적 차이가 있었다는 점을 지나치고 있다.      


메이지의 개혁 세력은 정치적으로는 ’존왕양이‘, 철학적으로는 고쿠가쿠를 지향하는 정치적 집단이었다. ‘존왕양이’이란 천황제도를 옹호하되, 외세를 배척하는 사상으로 외세를 받아들이는 것의 궁극적인 목적이 ’양이‘에 있음을 천명하고 있다. 이는 근본적이고 배타적이며, 보수적인 사상이다.     


한편, 철학적으로 고쿠가쿠에 천착한 메이지의 정신은 일본이 기술적으로는 서양에 열세하지만, 문화적으로는 훨씬 우수하다는 집단적 자긍심에 기초하고 있다. 이러한 철학은 당장은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문화적으로 지배하겠다는 정신적 쇄국에 속한다.     


그러나 조선 친일개화파의 정치적 입장은 철저히 청으로부터의 독립에 있었다. 방법론적으로 친일만이 조선의 개화를 가장 안정하게 이룰 방법이라 믿었지만 이에 따른 철학은 부재했다. 철학의 부재는 일본의 근본적인 전략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방해 요소였다.      


결국, 이러한 친일개화파의 한계는 일본의 이중적 태도를 제대로 꿰뚫지 못하는 원인이기도 하였다. 갑신정변과 청일전쟁, 그리고 이어지는 러일전쟁으로 일본의 이익 선이었던 조선이 주권 선으로 바뀌고, 이익 선은 만주로 대체되는 과정에서 친일개화파는 확대 지향의 일본에 속절없이 이용당하고 버려졌다. 불행한 역사이지만 일본의 책략 앞에서 위정척사파나 친일개화파는 똑같이 무지했다.     


오늘날 일본의 무역보복에 대하여 일본을 비난하기보다는 자국의 정부를 공격하는 극우 친일파의 이념적 동력과 그 기저에는 친일개화파와 같은 정서적 동질성이 놓여있는지 모른다. 진보는 무능하고, 국제 질서에 무지하며, 정치적 방편을 적폐로 모는 세력이라는 이미지를 개화기의 쇄국 정치나 위정척사 사상으로부터 빌려 쓰고 있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상륙과 거의 3년 넘게 아베 정권과 격을 세웠던 박근혜 정부의 과거를 돌이켜 볼 때, 이러한 이미지 덧씌우기는 역사적 왜곡이다. 특히 개화기 조선의 상황을 현재에 빗대어 비판하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논리 비약이다.      


강화도조약을 전후한 조선의 모습, 청나라와 일본의 개화에 대한 요구와 제언과 충고, 심지어 협박에도 불구하고 위정척사를 주장했던 조선의 모습을 현재의 문재인 정부와 동일시 하는 것이 오늘날 극우 친일파들의 일관된 선전이다. 얼마 전, 야당의 원내 대표가 정부가 발표한 전략 소재의 자급화 전략이 쇄국 정책이라고 비난한 것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이다.     


저자 함재봉은 이 책의 뒷부분에서 대부분 친일개화파는 국권침탈 이후, 친미개화세력으로, 그리고 이어서 기독교와 결합한 친미기독교 세력으로 발전해 갔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2010년 3월 아산정책연구원장으로 취임, 2014년엔 이사장직을 맡았던 저자는 그의 아버지가 유학하던 시절 미국에서 태어났다. 외국에서 인생의 반을 산, 그의 사상은 굳이 분류하자면 친미기독교에 속한다.     


저자 함재봉의 할아버지는 독립운동가이자 개신교 목사였던 함태영 전 부통령이다. 아버지는 학자이자 외교관으로 1983년 아웅 산 폭탄 테러 사건 때, 순직한 함병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이다. 그는 2017년 이 책을 포함하여 총 5권의 책을 쓰겠다는 목표를 말하며, 우리의 역사와 뿌리의 맥락을 추적하는 작업을 예고하였다. 2017년 11월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100여 년 전 조선이 망하고 그 정체성마저 무너지면서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시대적 고민이 시작됐다. 새로운 사람 찾기에 나선 것이다. 그래서 가장 먼저 기존 우리 것을 지켜야 한다고 나선 것이 이항로 최익현의 위정척사파다. 그들은 그 기원을 병자호란 이후 형성된 친명반청(親明反淸) 소중화(小中華) 의식에서 찾았다. 그리고 일본에 가 본 김옥균 유길준 등이 이렇게 세상이 변했는데 안 따라갈 수 있느냐며 제기한 것이 친일개화파이고, 이들이 결국 실패하면서 미국 기독교에서 대안을 찾은 이들이 윤치호 서재필 이승만 등 친미기독교파다. 그다음이 볼셰비키 혁명 이후 반제국주의·반자본주의를 조선 독립의 최고 이념으로 받아들인 이동휘 같은 친소공산주의파다. 1920년대 가장 뒤늦게 들어온 게 민족주의다. 나라를 뺏기고 이념도 종교도 다르지만, 어디에서 살든 결국 엮어주는 것은 피, 혈통이라는 매력적인 민족 신화를 만들어낸 신채호 같은 인종적 민주주의파다.” 


극우 친일파의 뿌리를 찾기 위한 첫걸음에서 이 책에 주목하게 된 것은 그가 말한 ‘인종적 민주주의’라는 단어 때문이다. 현재 극우 친일파의 논객 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가 최근 출판한 책의 제목, ‘반일 종족주의’에서 ‘인종적 민주주의’와 같은 맥락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저자의 주장 속에서 지속해서 반복되는 것이 ‘인종’이란 단어다. 그의 글과 말 속에서 인종이란 단어는 ‘인종적 민주주의’, ‘인종적 민족주의’ 등으로 변주된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주장은 한편으로 자가당착적인 측면을 노출한다. 스스로 친일, 친중, 친미와 같은 종족주의적 편 가르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위정척사 사상은 반미, 반자본주의를 표방하는 한국 좌파의 이념적 기저를 형성하고 있다. 북한은 가장 지독한 친중 위정척사와 인종적 민족주의가 합해진 것이다.”     


저자는 위와 같은 말로 북한 정권과 한국 좌파의 뿌리를 개화기 위정척사에서 찾고 있다. 이는 해방 정국의 변화와 한국 전쟁 이후의 한국 사회 이데올로기의 변화과정을 생략한 과도하고 무모한 해석이다.     


또한, 그는 한국의 독립 주체 세력을 이해하지 못한다. 삼일운동에서 보여준 포괄적인 자유와 민주 의식을 해석해 내지도 못한다. 그것은 역사를 밖에서만 보았기 때문이다. 역사를 안에서만 바라보는 것도 문제지만 바깥의 시각에서만 관찰하는 것은 더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는 친일개화파가 그야말로 일본을 제대로 이해한 정치세력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친일개화파 역시도 일본의 주권 선과 이익 선의 확대 과정과 군국주의로의 변화 가능성을 예고하는 국가 전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결국 일본으로부터도 배척을 당했다.     


“역사는 역사고 안보는 안보다. 복잡할 것이 없는데, 그걸 섞어 버린 것이 문제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한국은 중국 속국이었다고 했는데, 아무도 중국대사관에 가서 시위를 벌이지 않는다. 중국이 (사드 문제로) 저렇게 못되게 구는데도 반중 정서도 없고 반중 데모도 없다. 어떻게 중국대사관이 아닌 롯데 앞에서 데모할 수 있나. 그건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가 아닌가.”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저자가 한 이 말은 그가 좌파에는 개방적 자세를 요구하지만 스스로는 매우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잣대를 숨기고 있다.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는 것이 있다. 중국의 '항일전쟁 및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 승전 70주년(전승절)' 기념행사에서 박 대통령이 시 주석과 함께 서 있던 광경이다.      


이후 박근혜 정부는 중국과의 약속을 깨고, 사전 협의도 없이 전격적이고 일방적으로 사드 도입 결정을 내렸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태도는 친중인가? 아니면 미국에 대한 사대주의인가? 반면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한국 우파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다”라는 식의 운명론적 논리를 들이댄다.      


“우파는 친일개화파와 친미기독교파가 섞인 것이다. 친미기독교파는 오늘 한국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윤치호는 뿌리 깊은 인종차별주의 본산인 미국 남부의 핵심 중 핵심인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공부했다. 거기서 백인 인종주의를 겪었고 미국에 갔던 사람 대부분처럼 차라리 일본이 낫다고 했다. 그런 뼈아픈 경험에서 윤치호도 결국 친일파가 된다.”      


어쩔 수 없이 친일파가 되어야만 했던 윤치호가 겪었던 뼈아픈 경험을 거론할 때에는 한국에서 박정희 정권을 살아냈던 많은 민중의 뼈아픈 경험도, 일제하에서 신사참배의 강요 경험도, 제암리 교회 학살사건의 경험도, 위안부와 강제노역의 경험도 같이 고려되어야 한다. 거듭 말하지만, 저자의 친미기독교의 정체성에는 가장 중요한 경험이 누락 되어 있다.     


“한국 사람이 공유하는 리추얼(ritual), 의식·예법 같은 것이 만들어져야 한다. 국적 불명인 결혼식 입학식 같은 의식도 있겠지만 정말 작은 데서, 가령 길거리 리추얼 같은 것을 찾아가야 한다. 한국인은 아는 사람에겐 예의 바른데, 모르는 사람에겐 그렇게 무례할 수 없다. 친소관계에 갇혀 시민, 국민까지 못 간다. 언제까지 혈연·지연·학연에 매달려 살 수는 없지 않은가.”     


결국, 저자는 자신이 말한 ‘종족’의 개념을 토로한다. ‘길거리 리추얼’ 이나 ‘혈연, 지연, 학연’, 그리고 ‘친소관계’라는 개념 속에 녹아있는 미개한 한국에 대한 편견은 앞에서 언급한 전 서울대 교수 출신의 극우 친일 인물의 논리와 직접 연결된다. 그들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반일 종족주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20세기 전반, 일본이 한국을 36년간 식민지배한 역사에 관해 오늘날 한국인들의 정신 깊은 곳에 잠복해 있는 배타적인 감정으로서, 아무런 사실적 근거 없이 허위와 위선, 거짓말로 쌓아 올린 샤머니즘적 세계관”     


일단, 이 정의는 일제의 국모 살해, 신사참배 강요, 제암리 학살사건, 위안부, 강제징용 등 참혹한 행위가 실제로 없었거나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또한, 오늘날 한국인들의 무의식 속에는 일본에 대한 배타적 감정은 허위이며, 한국인은 극히 샤머니즘적이라는 유령적 믿음에 거초하고 있다.     


실제로 그는 줄곧 일제강점기에 식민지에 대한 차별은 없었으며, 일본은 식민지에 대해서 ‘일본 예외주의’, 즉 근대화를 위한 산업화와 인민들의 생활 개선을 위해 동등하고 공정한 정책을 썼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실, 샤머니즘적 세계관이란 초월적 존재가 살아있으며 현 존재와 연결되어 있다는 세계관으로 이를 추종하는 대표적인 나라가 일본이다. 천황제, 신도국가로부터 시작하여 야스쿠니 신사에 이르기까지 일본은 그야말로 샤머니즘이 생활로 살아있는 국가이다. 그런데 그들은 왜 한국인을 향해 ‘샤머니즘’이란 단어를 사용했을까?      


이는 샤머니즘이란 단어에 내재 되어 있는 전근대성과 미개성을 강조하면서 이를 한국인의 이미지로 각인시키기 위한 레토릭이다. 저자는 ‘문명충돌과 다문화주의; 그 논리와 한계’라는 논문 속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다.      


“문명충돌론이 걱정하고 다문화주의가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들은 자유민주주의-자유시장 경제 체제를 통해 해결할 수 있고 또 해결해야만 한다.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이론적으로 논증되지 않는 ‘문명’, ‘인종’, ‘문화’의 본질을 인정하고 그 틀 속에서 국제 정치와 국내 정치의 갈등을 분석하고 해소하고자 하는 것은 문제를 악화시킬 뿐이다.”     


이 어렵고 점잖게 쓰인 말을 쉽게 바꾸자면 “모든 문명과 문화의 충돌, 그리고 국가 간 이해관계의 충돌은 약육강식의 관점에서 해결해야 한다.”라는 것이다. 여기에 작동되는 원리는 신자유주의, 패권주의, 국수주의뿐이다. 더욱이 문명, 인종, 문화라는 단어와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다는 주장 속에 한일간의 역사적 문제를 숨겨놓고 있다.      


문제의 원인을 분석하고 역사적 미 해결점을 찾아내는 것이 국가 간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주장은 동의하기 어렵다. 대표적으로 독일 메르켈 수상이 러시아의 전승절 군사 퍼레이드에 불참하고 무명용사 묘에 헌화한 전례를 들 수 있다.      


메르켈은 역사에 얽힌 문제의 원인과 내용을 정확히 꿰뚫어 보았기에 자신이 현재 있어야 할 곳을 정확히 찾을 수 있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같이 인민해방군의 군사 퍼레이드를 관람하는 높은 관람대에 서 있다가 어느 순간에는 사드의 재배치를 승인하는 자리와 위안부 합의의 자리에 서 있는 등의 우왕좌왕하는 의식소멸 상태와는 비교되는 것이다.     


의도했었던 그렇지 않았던, 저자의 역사의식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극우 친일파 지식인들의 주장과 맥이 닿아있다. 극우 친일파 지식인들이 주장하는 역사의 구체성, 즉 위안부나 강제노역의 문제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이 사료와 해석과 이해를 통해 결론을 내리면 될 일이니 기다려 볼 수 있다.      


그러나 한가지, 문제를 제기해야만 하는 것은 극우 친일파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는 이중적 태도와 일관성이 결여된 주장이다. 이는 단순한 언행일치와 논리의 문제가 아니다. 누구나 자신의 언어와 행동을 완전히 일치시킬 수도 없고, 완벽한 논리를 구성하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극우 친일파 지식인들의 경우는 언어와 행동이 늘 충돌하고 논리의 앞뒤가 대상에 따라 전도된다.      


예를 들어 위증, 허위고발, 보험 사기 등의 수치를 근거로 한국을 거짓말이 횡횡하는 저급 국가라고 비난하면서도 자기 자신들은 현재의 한국경제가 IMF 당시와 유사하고, 영세자영업자들이 전부 몰락하고 있으며, 국민의 50%가 박근혜 탄핵을 반대했었다고 하는 등의 근거 없는 가짜뉴스를 생산하고 있다.      


이승만의 자유, 독립사상은 자유 방임이 아니라 근로, 저축, 분업, 경쟁, 통상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고, 이는 하나의 문화이자 세계화에 대한 건전한 인식이라고 주장하면서도 분업, 경쟁과 통상의 자유를 파괴하는 일본에 대해서 입을 다물 뿐만 아니라 친미, 친일이라는 개화기의 국제관계에 교조적으로 천착하고 있다.      


특히 극우 친일파의 핵심 지식인이기도 한 전 서울대 교수는 자신이 교장으로 있는 한 유튜브 교육 방송을 통해 자신은 모든 비난과 의견에 열려있으므로 적극적으로 참여해 달라고 거듭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신의 주장을 확인하는 기자의 인터뷰를 거부하고 심지어 욕설과 폭행을 가하기도 했다.     


그는 서울대 교수 시절인 2004년 9월, 손석희 아나운서가 진행하던 100분 토론에 나와 위안부 할머니들을 동두천의 성매매 여성들과 비교하여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다. 그는 다음날 나눔의 집을 찾아가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사죄하면서, 앞으로 일본 과거사 청산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했었지만, 오히려 위안부 할머니들이 일종의 매춘부였다는 자신의 논리만 더욱 강화시켜 왔다.     


위안부 할머니에 대한 모욕은 둘째 치고라도 그가 언급하는 동두천의 성매매 여성이라는 표현 자체도 불편했다. 아니나 다를까, 최근, 아베 신조의 측근인 에토 세이이치 총리 보좌관이 방문한 대한민국의 여야 정치인들에게 '한국은 과거 매춘 관광국'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베 정권 인사의 매춘관광과 극우 친일파 인사의 동두천 성매매 여성, 그리고 위안부 할머니로 이어지는 이 불안하고, 불편하며, 저급스럽고 악랄한 논리 연결과 발언을 견디어 내며, 정말로 추잡한 창녀는 자기의 몸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팔아먹는 자들이라는 마르케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제, 극우 친일파의 뿌리에 대해 결론을 내려야겠다. 그들의 역사 인식은 조선 개화기에 멈추어 서 있다. 그들은 대원군 쇄국 정치 10년과 청국을 앞세워 갑신정변을 진압했던 위정척사 사상을 오늘날 대한민국의 진보 세력과 문재인 정부에 대입하고 있다. 그래서 여전히 친일개화파에서 친미기독교파로 이어지는 근대의 깊은 항아리 속에서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     


극우 친일파에게 있어서의 자유민주주의는 실상 신자유주의다. 그들은 신자유주의의 논리를 역사, 정치, 사회, 국제관계 등 모든 분야의 갈등을 해소하는 전가의 보도이자 만능열쇠로 착각하고 있다. 그들에겐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보다 학교나 철도 같은 물질적 효용성이 더욱 중요하게 여겨진다. 따라서 강제징용과 위안부, 세월호와 불매운동을 물질과 효용의 잣대로만 재단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극우 친일파는 메이지 유신의 대표적 사상인 고쿠가쿠, 즉 ‘일본식 미학’에 경도되어 있다. 아베와 박정희가 사랑했던 요시다 쇼인이 꿈꾸던 아름답고 완전한 나라, 조선을 비롯한 주변국을 통치했던 강하고 존경받는 일본이라는 유령 국가를 지향하고 있다. 반면, 극우 친일파에게 있어서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거짓말을 잘하는 나라, 자유와 독립이 요원한 국가, 야만에서 문명으로 이전되지 못한 민족이다.     


아베 정권의 마지막 사명은 타락하고, 부패하고, 망쳐버린 일본의 역사를 요시다 쇼인이 꿈꾸던 아름답고 완전한 역사로 수정하고, 일본이 1차대전과 2차대전의 주역으로서 세계 역사에 참여할 수 있었던 그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다. 대한민국 극우 친일파의 주어진 사명은 이런 아베 정권의 꿈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산을 깎고, 골짜기를 메우며, 길을 평탄하게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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