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사에 대한 인식과 주장하고 있는 사회구성체 발전이론으로 보아 친일개화파와 가장 근사한 맥을 가지고 있는 세력이 바로 뉴라이트이다. 그리고 뉴라이트 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안병직 교수다. 그의 전공은 한국 근대경제사, 그중에서도 일제강점기 경제사다. 1965년 서울대 경제학과 전임강사로 임용된 그는 강의를 위해 조선 후기부터 현대까지의 한국 경제사를 연구했고, 연구 결과로 나온 것이 그 유명한 ‘식민지 반봉건 사회론’이다.
“한국과 중국의 경제사 또한 일본과 마찬가지로 서구 자본주의 발달사를 놓고 보니 자본주의가 발달하지 않은 것 같다 이겁니다. 그래서 나온 게 ‘식민지 반봉건 사회론’이에요. 마오쩌둥이 만든 이론이죠. 도시에 자본주의 같은 게 나타나긴 하는데 외국 자본 차지이고, 농촌은 여전히 전근대적이라는 거죠. 저 또한 일제강점기를 ‘식민지 반봉건사회’라고 봤습니다.”(신동아. 2006년 6월)
당시, 마오쩌둥 주의자이기도 했던 안병직 교수는 마오쩌둥이 주창한 ‘식민지 반봉건 사회론’에 경도되어 있었고,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민주화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그는 1970년대 말이면 한국 자본주의는 모순이 축적돼 붕괴할 것이고, 그러면 갈 길은 사회주의밖에 없다고 예견했다.
그러나, 1979년에 박정희가 죽고, 1980년 전두환이 집권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견했던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기는커녕, 오히려 경제 부흥이 일어났다. 충격을 받은 안병직 교수는 ”모든 진리는 현실 속에 있으나 연구자는 일정한 이론 틀을 갖고 현실을 보는 것에 불과하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이론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안병직 교수는 결국 ‘식민지 반봉건 사회론’에서 ‘중진 자본주의론’으로 자신의 사회구성체 발전이론의 노선을 갈아탔다. 계기는 1985~1987년 일본 유학이었다. 유학 중 안병직 교수는 나카무라 사토루의 ‘중진 자본주의론’를 접하고는 충격을 받았다. 그는 이때 자신의 기억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 바 있다.
“1984년 ‘역사평론’에 실린 나카무라 사토루의 ‘중진 자본주의론’을 봤다. 제삼 세계도 자립적 자본주의가 가능하다는 주장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동경대에 간 건 한국경제에 새 인식을 얻기 위해서다. (내가) 일본 체류 중, 86년 한국의 무역수지가 흑자로 돌아섰다. 충격이었다. 이것이 내가 ‘중진 자본주의론’을 수용한 이유 중 하나이다.”
안병직 교수에게 있어서, 나카무라 사토루의 이론이 ‘중진 자본주의론’을 수용한 이유 중 하나라면, 그 나머지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 그는 여러 경제학자를 지목한다.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의 국제관계의 중요성을 역설했던 독일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리스트, 선진 자본주의는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안으로부터 나오지만, 후발 자본주의는 국제관계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는 ‘안행형태론(雁行形態論)’을 주장했던 아카마쓰 가나메, 후발 자본주의는 선진 자본주의로부터 기술이라는 성장잠재력을 이전받고, 선발 자본주의가 이용 못 했던 새로운 제도도 이용할 수 있으니 선진 자본주의보다 훨씬 유리하다는 ‘후발성 이론’, 즉 ‘캐치업(Catch up)’ 이론을 주창한 알렉산더 거센크론 등이 바로 그들이다.
노선을 갈아탄 안병직 교수는 1980년대 후반, 우리 학계가 ‘종속성’을 전제로 정치 경제학적 논쟁을 하고 있기에 결국 모든 것이 이념 논쟁으로 귀결된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그는 이러한 이념 논쟁에 에너지를 소모하는 대신, 실증적 연구, 즉 수량-통계를 중심으로 한국 경제사를 연구하기로 하고, ‘낙성대경제연구소’를 설립했다. 그는 2006년 6월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경제의 장기적 발전에 관한 데이터를 정리했어요. 데이터를 정리하다 놀란 게 식민지 시대에도 우리나라 경제가 성장했다는 점입니다. 공장 명부를 갖고 민족별 통계를 정리해봤더니 1916년엔 공장 수가 300개밖에 안 되고 그중 조선인 소유는 30%를 밑돌았는데, 1939년엔 공장 수가 7000개에 이르고, 그중 조선인 소유가 60%를 넘어요. 경제성장률도 꽤 높더라고요. 평균 3.6%.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1.5% 임을 감안하면 꽤 높은 수치죠. 일본(4%)과도 비슷하고요. 이건 제국주의에 종속된 나라에선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않는다는 기존 이론을 부정하는 근거가 되죠. 이런 자료가 있었기 때문에 세계 자본주의 시장에서도 후발 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었어요. 이런 식으로라면 한국뿐 아니라 일본과 중국의 발전 과정도 다 들여다볼 수 있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경제 성장사 중심으로 동아시아 역사를 정리해보기로 한 겁니다. 내가 동아시아 경제 성장사 비교 연구를 학문의 종착점으로 삼은 이유가 여기에 있죠.”
안병직 교수의 이 주장을 들어보면 최근 한국 사회에서 논란이 되는 이영훈 교수의 ‘친일 종족주의’ 주장이 바로 안병직 교수의 위와 같은 수량-통계학적 연구의 틀에서 시작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 결과가 결국은 극우 친일파들의 이론적 영양공급원이 되고 있다.
이영훈 교수가 출판한 책 제목, ‘반일 종족주의’의 이론적 틀이기도 한, ‘식민지 근대화 논쟁’에 불을 지핀 것은 일제강점기 조선 반도의 쌀 생산량과 경제성장률에 대한 논쟁이었다. 이영훈 교수는 1910~1918년 사이, 즉 일제에 강제병합이 이루어진 직후부터 조선 반도의 쌀 생산량이 급증했고, 이를 바탕으로 연평균 3.2%의 경제성장을 이루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허수열 교수는 1910년 이전 통계의 부재로 인해, 이를 기저로 하는 1910~1918년 조선총독부의 통계는 정확하지 않다고 반박했다. 물론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이 데이터가 수정되기는 하였지만, 일제 강점을 합리화하는 일종의 의도적 통계 오류가 있었다는 것이 허수열 교수의 주장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것이 그 유명한 소위 벽골제 논쟁이다.
벽골제 논쟁을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이영훈 교수가 1910~1918년 사이에 쌀 증산이 급격히 증가한 것은 일제가 전라도 지역에 대규모 간척사업을 시행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 것에 대해, 허수열 교수가 1910년 이후, 일제는 대규모 투자를 할 여력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간척사업의 증거로 제시된 벽골제가 실은 백제 시대부터 있었던 저수지였음을 감안할 때, 1910년 당시에도 이미 해당 지역에서 농사가 진행되고 있었다고 반박하면서 시작된 논쟁이다.
허수열 교수의 주장에 대해 이영훈 교수가 다시 “벽골제는 사실 저수지가 아니라 방파제였다.”라고 반박했고, 이에 대해 허수열 교수는 “세종 지리지를 포함한 많은 역사서에서 벽골제는 저수지로 명시되어 있다.”라고 재반박했다. 논쟁이 경제학에서 역사학으로 확대된 것이다.
그들의 주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안병직, 이영훈을 포함하여 뉴라이트 계열의 학자들이 표방하는 이념은 신자유주의적인 실증 사관이다. 그들은 근대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이 실증적 데이터나 문서 없이 허구로만 역사를 기술한다는 이유에서 전통 사학자들을 비판한다. 그러나 사학자 임지현 교수의 ‘부정론의 실증주의’ 비판을 보면, 이러한 뉴라이트 계열의 역사 해석이 매우 근시안적 사관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나치가 홀로코스트를 실행했다면 아돌프 히틀러의 명령서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그런 문서는 한 통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식이다. 명령서가 하늘에서 툭 떨어지지 않는 한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에게는 모든 증언이 거짓이거나 꾸며낸 이야기가 된다. 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부정하는 위안부 부정론자들의 논리도 유사하다. 위안부 부정론자 중 한 사람인 후지오카 노부카쓰는 이렇게 주장한다. ‘일본군이 강제로 조선 여성을 연행했다면, 명령서가 반드시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문서는 한 통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처럼 일본군 위안부 부정론자들도 가해자 측의 범행 기록이 없으므로 사실이 아니라며 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을 위증으로 몰고 간다.”
부정론의 실증주의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의 증언에 담긴 기억의 진정성에 타격을 입히기 위해 사용된다고 임지현 교수는 주장한다. 그는 ‘기억 전쟁’이라는 책에서 이와 유사한 사례로 예드바브네의 유대인 학살사건, 난징대학살, 베트남 대기근을 들고 있다.
예를 들어, 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제국의 지배 아래 있던 1945년 200만 명 베트남인 아사한 설에 대해 일본 주류의 반응은 베트남 전체 인구의 15%에 달할 만큼 높은 아사율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 대기근 사건에 관해서도 문헌 자료가 거의 없어 증언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부정의 실증주의는 결국 베트남 희생자들의 기억을 부정하고 일본의 책임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기억에 관한 사실의 폭력인 것이다.
기억에 의존하는 생존자의 증언보다는 문서 자료가 항상 더 신뢰할 만하다는 것, 이것이 안병직 교수나 이영훈 교수의 역사에 대한 인식론이다. 실증주의로 무장한 부정론자들이 증인들의 불완전한 기억을 파고들어 ‘거짓말’, ‘혐오스러운 조작’, ‘진실의 왜곡’, ‘사실의 날조’, ‘전적으로 날조에 의존한 싸구려 픽션’, ‘각주가 있는 소설’, ‘수백 가지 거짓말’ 등의 언어적 폭력이 역사적 비극의 생존자-증인들에게 가해지고, 이는 ‘실증’의 이름으로 정당화된다고 임지현 교수는 주장한다.
안병직, 이영훈으로 이어지는 뉴라이트 학자들의 역사연구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수량-통계를 이용한 실증주의적 해석을 중심으로 한다. 그러나 수량과 통계만으로 한 사회의 다양한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추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론적으로 실증도 어렵다.
예를 들어 2011년 국가별 성폭력 신고 건수 통계를 보면 수치가 가장 높은 국가는 핀란드로 10만 명당 181명에 이른다. 캐나다가 77명, 한국은 40명, 그리고 프랑스는 38명이다. 반면 일본은 6명, 러시아는 11명, 필리핀은 2명에 불과하다. 이 통계 수치를 보고서 일본인이 한국인보다 성인지 감성이 6배 이상 높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일본 후생노동성이 2016년 3월에 직장 내 임산부 차별 및 성희롱에 대해 발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성희롱 피해를 보았다고 응답한 사람은 28.7%였다. 이후 대처 행동에 대해 ‘참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라고 답한 사람이 63.4%로 가장 많았다.
같은 수량 및 통계 수치가 전혀 다른 사회적, 역사적 현상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단편적인 통계와 수량 데이터로 사회 현상을 정의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더욱이 여기에 철학적 관점을 더하면 역사학은 더욱 복잡해진다.
2차 대전 당시 나치 치하에서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가르쳤던 가다머는 ‘진리와 방법’에서 역사적 사건의 의미는 역사적 사실과 달리 객관적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고, 어떤 시대에 속해 있는가에 따라 하나의 사건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는데, 가다머는 이를 ‘이해는 역사적’이라는 말로 가름했다.
게다가 역사에 던져진 인간은 결코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한다. 우리는 항상 선입견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자신이 속해 있는 문화를 배경으로 세상일을 해석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인정한 후에야 비로소 무언가를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안병직 교수나 뉴라이트 학자들을 극우 친일파라고 치부하는 것은 너무나 극단적 편 가르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들의 편협한 시각이 극우 친일파 학자들의 사상적 자양분이자 핵심 논거가 되고 있다는 사실 또한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