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인순 Sep 13. 2019

‘숨’ 성(性)과 판타지

책 속의 사람들

노르웨이 공공예술단체인 ‘미래 도서관’은 2014년부터 매년 작가 한 명의 미공개 작품을 받아 100년 후에 출간하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올해는 그 한 명의 작가로 한강이 선택되었다. 소설가 한강은 5월 25일 노르웨이 공공예술단체 ‘미래 도서관’에 95년 후인 2114년에 출간될 원고 ‘사랑하는 아들에게’(Dear Son, My Beloved)를 전달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 문장을 쓰는 순간 100년 뒤 세계를 믿어야 한다. 인간의 역사는 사라져 버린 환영이 되지 않았고 지구가 무덤이나 폐허가 되지 않았으리라는 근거가 불충분한 희망을 얻어야 한다.”      


작가 한강의 작품 속에 공통으로 숨어있는 ‘과장성’과 ‘상징성’을 고려한다면, 그가 말하는 ‘100년의 믿음’과 ‘지구의 운명’이 무엇인지는 매우 모호해진다. 지구가 폐허가 되지 않으리라는 믿음은 인간을 넘어선 우주적 관점이기에 ‘100년 뒤의 세계’가 100년 뒤의 현실(reality)인지? 아니면 100년 뒤의 실재(the Real)인지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만약 한강이 판타지 작가였다면. 오히려 그가 말하는 ‘100년 뒤 세계에 대한 믿음’의 개념은 은 더욱 명확해졌을 것이다. 최소한 판타지 작가는 자신의 판타지로 실재를 억압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판타지 작가가 그리는 세계는 언제나 ‘실재가 바로 판타지인 세계’이다.      


작가 한강과 같이, 우리에게도 ‘100년 후에 개봉될 책을 창작하는 일이 맡겨진다면 어떤 글을 쓸까?’라는 재미있는 상상을 할 수 있다. 100년 뒤에도 여전히 다시 상상할 수 있는 더 먼 미래에 관해 쓸까? 아니면 예측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신이 추측할 수 있는 후손들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쓸까?      


이 책의 저자, 테드 창이 그리는 SF의 세상은 전자에 가깝다. 그러나 단순하지 않고 구체적이다. 그의 글 속에는 시간이 요동치고 반복되는가 하면, 제자리에 돌아와 서 있다.     


인간의 생은 짧지만, 모두 과거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 서서 미래라는 시간을 짊어지고 살아간다. 양자 역학자들의 주장처럼 우주의 시간이 고정적이지도 연속적이지도 않다고 하더라도, 지구라는 공간 속에 사는 우리에게 연속성을 전제로 하지 않는 시간의 관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연속성 때문에 판타지 작가의 눈은 먼 미래를 보고 있지만, 그의 걸음은 과거와 미래를 오가는 시간의 무게로 인해 비틀거리기 일쑤이다. 이것이 SF 작가가 가지고 있는 운명이다.     


천재적 SF 작가로 불리는 테드 창의 시간은 역시나 정교하게 비틀거린다. 그리고 우리의 상상력은 그의 비틀거리는 걸음을 따라가기에 벅차다. 그것이 바로 테디 창이 그리는 판타지의 힘이다. 그는 이 책에서 시간, 생명, 언어, 사랑, 인간, 신, 창조, 자유 의지 등의 다양한 주제를 9가지의 이야기로 엮어낸다.      


이 책의 내용이 확실히 SF인 것은 그의 이야기가 과학으로 그리는 판타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테드 창의 SF는 ‘Science Fiction’이 아닌 ‘Science Fantasy’라고 분류되어야 한다. 테드 창의 SF의 특징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는 일종의 책임감이다. 여기서 책임감이란 그의 이야기가 구성하고 있는 판타지가 ‘도달할 수 없는 세계’와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는 세상’과 동시에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      


때문에, 그는 우주 공간에서, 또는 인간의 두뇌 속에서 좀처럼 길을 잃는 법이 없다. 작가가 이 책의 3번째 이야기 ‘우리가 해야 할 일’에서 그린 미래 언어 시스템, 즉 자신의 뇌를 읽어 이를 직접 언어로 표현해 주는 시스템에 관한 이야기가 그 ‘책임감’의 대한 대표적인 예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는 글에서 테드 창은 인간의 머릿속의 모든 기억이 자동으로 기록되는 세상이 도래할 때, 인간은 왜 글을 배워야 하며, 어떻게 배울 것이며, 그런 세상에서 글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는 먼 미래의 이야기 같다. 그렇지만 지난 4월 24일 ‘Nature’ 지에 운동 신경병으로 인한 마비 질환으로 말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뇌 신호를 언어로 전환하는 장치에 대한 논문에 소개되었다. 이미 가능성에 한 발자국 들여놓은 판타지인 것이다. 책임감은 가능성의 다른 이름이다. 물론 철학자들은 이를 개연성이라고 부른다.     


테드 창의 SF 소설을 설명하는 두 번째 특징은 ‘철학적 맥락’이다. 그는 과학적 주제를 철학적 맥락으로 색칠한다. 이는 마치 ‘이론의 회색과 문학의 푸르름’을 말한 괴테를 꼰대같이 보이게 만들기도 한다.     


작가가 간직하고 있는 문학적 색깔의 신뢰성을 확인해 보려면, 17년 전에 쓴 ‘당신 인생의 이야기’와 비교해 보면 된다. 이 책 ‘숨’은 17년 전과 그이 책과 과학적 주제 면에서 확실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과학을 주제로 구성된 이야기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철학은 여전히 단단한 색깔로 칠해져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두 번째 이야기 ‘숨’이다.      


“탐험 자여, 당신이 이 글을 읽을 무렵 나는 죽은 지 오래겠지만, 나는 당신에게 고별의 말을 남긴다. 당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의 경이로움에 관해 묵상하고, 당신이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기뻐하라. 당신에게 이런 말을 할 권리가 내게는 있다고 느낀다. 지금 이 글을 각인하면서, 내가 바로 그렇게 묵상하고, 기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인류가 이미 탈휴머니즘 시대에 돌입한 시기로 보인다. 따라서 100년 후, 한강의 자손이 살아가는 세상 저 너머이다. 지구에는 로봇화 된 인공지능만이 남아있고, 인공지능은 자신의 기계화된 뇌를 해부한다. 물론 그가 해부하는 뇌는 인간의 뇌 구조를 그대로 닮아있다.      


그가 자신의 뇌를 해부하는 이유는 우주의 시간이 느려졌기 때문이다. 그는 시간이 느려진 이유를 찾아서 뇌 속을 여행한다. 느려진 시간에 대해 그가 내린 결론은 빅뱅으로부터 형성된 우주의 닫힌계가 엔트로피 법칙에 따라서 평형을 이루어가면서 중력(압력)의 편차가 줄어들었고, 이것이 결국 뇌에 전달되는 바람, 즉 숨을 줄여 버렸기 때문이다.      


줄어든 숨으로 인해 시간에 대한 인간의 지각 속도가 느려진다는 엔트로피 법칙에 따르는 아이디어를 작가는 풍부한 철학적 주제로 꾸며냈다. 우주의 시간이 멈추어지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또 다른 우주와의 연결이라는 상상력도 놀랍다. 작가는 엔트로피 법칙에 따른 시간의 문제, 즉 양자역학적이고 물리학적인 시간의 문제로부터 인간 실존의 문제를 끌어낸다.      


테드 창은 과학의 언어를 빌어 말한 철학적 주제가 개인을 넘어 인류 실존의 문제로 다가가는 데 있어서, 긴장감을 한시도 놓치지 않고 있다. 그 긴장감은 먼 과거 존재했다가 사라져 간 지식에 대한 경외이며, 우연 속에서 헤엄치는 생명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다. 인류의 문명은 어느 하나도 필연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작가는 이 책 속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설령 이런 사실을 자각한다 해도 슬퍼하지 말기를, 나는 당신의 탐험이 단지 저장고로 쓸 수 있는 다른 우주를 찾기 위함이 아니었기를 희망한다. 지식을 원했기를, 우주가 내쉬는 숨으로부터 무엇이 생겨나는지 알고 싶다는 갈망에 의해 움직였기를 희망한다. 우주의 수명을 계산할 수 있다고 해서, 그 안에서 생성되는 다양한 양태까지 계산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운 건물, 우리가 일군 미술과 음악과 시, 우리가 살아온 삶들은 예측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 어느 것도 필연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목록을 차지하고 있는 아홉 가지 이야기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이야기를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라는 이야기이다. 테드 창에 따르면 이 이야기는 인간과 인공지능 사이의 정서적인 관계를 써보고 싶다는 작가의 욕심에서 탄생했다. 테디 창은 진정한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섹스가 아니라,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려는 적극적인 의지라는 것을 설득하기 위해 이 이야기를 썼다.     


이야기 속 주인공, 애나와 데릭은 디지언트, 즉 인공지능 아바타를 키운다. 디지털 세상에서 탄생한 이 인공지능 아바타들은 성장하고 생각하며, 말을 한다. 때로는 로봇의 몸을 이용하여 디지털 세상에서 실제 세상으로 나오기도 하고, 돈을 욕망하기도 하며, 다른 디지언트들과 관계를 맺는 등의 사회활동을 하기도 한다.     


애나와 데릭은 그들이 키우는 디지언트들을 위한 새로운 확장 플랫폼으로의 이전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사업자를 만난다. 그 사업자는 디지언트(인공지능 아바타)가 감정을 갖도록 교육하고, 인간과 같은 성적 감수성을 부여하여, 자발적으로 사랑에 빠지는 행위가 가능토록 하는 비즈니스 모델을 제안한다.     


이 비즈니스 모델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인간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성적이든 성적이지 않든 간에 그 상호작용의 정서적 차원이 강화된 디지언트를 만들고, 이 디지언트들 내부에 애정을 생성시켜, 매력적이고, 다정하고, 진정으로 섹스를 하고 싶어 하는 비인간 파트너를 인간에게 공급하는 것을 수익 구조로 하는 사업이다.


인간과 인공지능 간의 사랑과 섹스, 그 판타지를 통해 테드 창은 자신과 독자에게 관계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책의 뒷부분에 기록한 ‘창작 노트’를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섹스 로봇과 열애에 빠지는 사람들 얘기를 하고 싶었다는 뜻은 아니다. 진정한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섹스가 아니라,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려는 적극적인 의지이기 때문이다.”     


사랑과 섹스에 대한 작가의 담론은 최근 한국 사회를 울렁거리게 했던 ‘리얼돌’ 논쟁에 대입시켜 볼 수 있다. 지난 6일 청와대는 여성의 신체를 본뜬 성인용품인 '리얼돌'의 수입과 판매를 금지해달라는 내용의 국민청원에 대해 규제와 처벌을 더욱 엄격히 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리얼돌 수입 및 판매를 금지해주세요'라는 제목으로 지난 7월 8일 올라온 해당 청원에는 한 달간 26만 3000여 명이 참여했다고 전해졌다.     


한편, 대법원은 지난 6월 리얼돌이 “성적 부위를 적나라하게 묘사해 사람의 존엄성과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했다”라고 본 1심 판결 대신 “개인의 사적이고 은밀한 영역에 대한 국가의 개입은 최소화되어야 한다.”라는 2심 판결을 확정하기도 했다.     


어느 판결이 더 옳은 것일까? 현재까지는 리얼돌이 여성들에게는 일종의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의견이 강하게 제시되고 있다. 얼마 전, ‘오마이 뉴스’라는 인터넷 신문에는 ‘리얼돌 환영하는 남성들에게 묻는다. 무엇이 섹스인가?’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여성으로 추정되는 기고자는 이 기사에서 리얼돌에 대한 생각을 거듭하면 할수록 그려지는 그림은 끔찍하기 짝이 없다고 토로했다. 섹스는 일방적인 행위가 아니라 상호 소통의 과정이지만 리얼돌을 사용하는 일에는 당연히 그런 소통이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런 소통 없는 장면에 대해 기고자는 다음과 같이 극단적으로 표현했다.     


“그렇다고 리얼돌을 단순히 물건으로 바라보자니 그러기에 이건 너무 사람처럼 생기지 않았나? 그러니까 내게 리얼돌을 사용하는 일이란, 누군가와 성관계를 나누는데 그 사람이 미동도 하지 않고 허공을 바라보며 누워있는 것과 같았다. 이건 너무 기괴하고 소름 끼치는 일이 아닌가?”     


이 글의 기고자는 성욕은 섹스로 연결되지만, 성폭력은 상호 행위를 일방적으로 하겠다는 폭력에 대한 욕구와 연결된다고 주장하면서, 만일 남성들이 이 두 욕망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거나 혹은 이 모든 욕구가 섞인 것이 성욕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매우 위험한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한 ‘리얼돌’을 보고 거부감이 아니라 '성욕'을 느꼈다면 그 욕망의 내용은 무엇인지, 평소에 여성을 어떤 존재로 바라보았는지, 무엇을 섹스라고 생각했으며 그것이 어떤 행위로 구성되어 있는지 생각해 보라고 공격적으로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랑과 섹스, 그리고 리얼돌의 문제는 기고자가 생각한 만큼 단순하지 않다. 이에 대해 슬라예보 지젝은 한 강연을 통해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다시 말해 유아기에 가졌던 성 판타지를 잊고 평범하고 동물적인 성관계를 갖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이에 대해 라캉은 ‘진정한 성관계는 없다’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성'을 판타지의 연결고리로 본 것이죠. 그래서 이러한 판타지가 유지되어야 성관계도 유지될 수 있다는 말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지젝은 남녀 간의 정상적인 성관계만 가능하고 그 외의 것은 다 변태이고 도착이라 가르친 들뢰즈의 생각과는 달리, 프로이트적인 생각에 다가간다. 섹스는 여러 형태가 가능하고 변형이 가능하다. 즉, 정상적인 성관계에서 변형될 가능성이 많기에, 여러 형태의 도착과 변태적 또는 변형된 방식을 채우는 것은 끝이 없이 나타날 수 있다는 선택적 의견을 선보인다.     


“무엇이 인간적이며 무엇이 변질되었는가? 무엇이 변경되었는가? 우리는 단지 동물적 성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 판타지가 있는 성을 가진다는 겁니다. 인간은 성안에서 혼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성적 행위에 상대방이 있는 것이고, 때문에, 판타지가 있어야 성이 유지됩니다. 이것이 바로 프로이트가 주장했던 것입니다.”     


지젝에 따르면 우리가 ‘섹스’를 상상하는 것이 섹스, 그 자체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며, 섹스와 동반된 여러 가지 판타지를 상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사랑과 무엇이 다른가? ‘리얼돌’을 통해 어떤 상상력을 동원할 수 있으며, 인공지능과 어떤 판타지를 공유할 수 있다는 주장을 반박하기 어렵다.     


섹스가 진정한 사랑의 표현인지, 아니면 기괴하고 소름 끼치는 일인지에 대한 판단. 또는 인공지능과의 사랑이 관계에 대한 의지인지 아니면 변태적 속성인지를 구분하는 기준은 그 행위자가 대상에 대해 가지는 판타지가 어떤 것인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면, 누구도 타인의 판타지를 억압할 자격은 없다.     


성은 단순히 육체와 관련된 것만은 아니며, 어찌 보면 다른 경쟁적인 형이상학적 내용이 있다는 지젝의 지적과 함께, 인공지능 아바타와의 사랑, 리얼돌과의 섹스 등을 마주한 우리들의 감정적 대응이 불러일으키는 것에 대한 물음은 더욱 난해해진다. 미래가 난해한 이유이다.     


지젝이 '현실'(reality)과 실재(the Real)에 대한 라캉의 구별을 이용하여 '현실이 곧 판타지'라는 자신의 논리를 전개한 것은 ‘현실이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를 금지하고 억압함으로써 구성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판타지로서의 인공지능 아바타와의 사랑, 그리고 이미 현실(reality)이 된 리얼돌과의 섹스에 대한 거부는 역설적이게도 자연스럽지 않은 집단적 판타지에 의해 자행된 또 다른 억압의 결과는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성(性)에 대한 판타지는 물론 시간에 국한된 주제는 아니다. 이런 점에서 2016년 맨 부커상을 받았던 한강의 ‘몽고반점’을 다시 한번 주목할 만하다. 2004년에 출판된 이 소설에서 작가는 처제와 형부 간의 섹스라는 극적 상황을 통해 아름다움과 시원의 문제를 상징적 판타지로 그려놓았다.     


“베란다 난간 너머로 번쩍이는 황금빛 젖가슴을 내밀고 주황빛 꽃잎이 분분히 박힌 가랑이를 활짝 벌렸다. 흡사 햇빛이나 바람과 교접하려는 것 같았다. (중략) 삶의 처음이자 마지막 순간인 듯, 활활 타오르는 꽃 같은 그녀의 육체. 밤사이 그가 찍은 어떤 장면보다도 강렬한 이미지로 번쩍이는 육체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한강. ‘몽고반점’ 중에서)      


작가의 이전글 식민지근대화론과 뉴라이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