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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인순 Sep 25. 2019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저녁을 사는 사람들

책 속의 사람들

2002년. 고비 사막 나흘째 날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후, Za = Also sprach Zarathustra 로 표기)에는 ‘저녁’이란 단어가 32번 나온다. 1부에서 3부까지 15번, 나머지는 4부에 집중되어 있다. ‘저녁’이란 단어에 천착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니체는 Za를 통해 ‘신의 죽음’을 필두로 ‘힘에의 의지’와 ‘위버멘쉬’를 거치면서 ‘영원 회귀’로 이어지는 미래의 긍정적인 인간상을 제시하고 있는데, 여기서 미래의 베일이 벗겨진 인간상을 찾는 여정에  Za의 1부 일곱 번째 글, ‘읽기와 쓰기에 대하여’에 쓴 다음의 글이 눈에 밟힌다.    


“글로 쓰인 모든 것 가운데서도 나는 사람의 피로 쓰인 것만을 사랑한다. 피를 가지고 쓰라!. 그러면 피가 정신임을 알게 될 것이다.”      


어떤 번역자들은 ‘피로 쓰라’는 이 말을 ‘정열과 영혼으로써 쓰라’고 해석하여 주석을 달았는데, 나는 이것이 적절치 못한 해석이라 생각한다. 피로 쓰라는 것은 ‘실존으로 쓰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다. 다시 말해 Za를 단지 머리로만 이해하지 말고, 삶에 체화된 실존적 의미를 찾아 이해해야 하며, 궁극적으로 자기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이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Za에서 나에게 실존적 물음을 던져주는 상징이 바로 ‘저녁’이다. 나의 나이가 그렇고 처한 환경이 그렇다. 내가 이십 대였다면 ‘해뜨기 전’이나 ‘광명의 심연’에, 삼십 대였다면 ‘정오’나 ‘태양’에 천착했을 것이다. 그때는 그것이 나의 실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 있어서 실존의 시간은 ‘저녁’이다.      


참고로 Za에서 ‘해뜨기 전’이란 말은 딱 한 번 나오고, ‘정오’라는 단어는 네 번 나온다. 그러고 보면 니체 역시도 자신의 운명에 걸린 실존의 시계를 저녁에 맞추어 놓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저녁’이란 단어에 걸린 실존적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2002년 카오스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나는 마흔 살이었고, 깊은 우울증에 빠져있었다. 심리상담사는 마흔 살이 되면 많은 남성이 자기 인생에 회의를 느끼고, 때로는 비정상적인 행동을 한다는 보편화를 통한 위안을 던져주었다.     


한편, 정신과 의사는 호르몬의 변화라고 말하며 처방전을 내밀었고, 태양과 달리기와 바나나의 효용을 설명해 주었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조심스러운 수사를 동원하여 시간만이 근본적인 해결방법임을 은근히 노출했다. 물론 나는 개인적으로 니체와의 소통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내가 선택한 것은 사막이었다.     


2만 피트가 넘은 비행기에서 내려 본 사막은 고도에 비해 가까워 보였고, 사막을 뚫고 달리는 기차에서 본 지평선은 아득했다. 마침내 기차에서 내려 자동차를 타고 포도를 달릴 때, 사막이 현실이 되더니, 신발이 반쯤 모래에 묻힐 때가 되어서야 겉돌던 사막은 비로소 내 안으로 들어왔다.      


2002년, 칠월. 첫 번째 사막 여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이후로 사막을 찾을 때마다 세월이 수놓은 각색과 편집에도 불구하고 사막을 말할 때의 시원의 아득함은 좀처럼 변하지 않았다. 사막에서 시원을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곳에는 변할 수 있는 것이란 바람과 모래, 그리고 태양뿐이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그곳에 놓고 온 나의 ‘저녁’ 때문이었다.     


호텔 메이드가 청소를 위해 문을 두드리기 전까지 침대에서 뒹굴던 나는 정오 즈음에 일어나 시장으로 나가 어슬렁거렸고, 오후가 다 지날 무렵이면 사막으로 향했다. 그리고 능력이 닿는 한, 사막 깊숙이 들어가 저녁노을이 질 때까지 사막의 모래언덕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태양이 지면 내 우울증도 사라지기를 기원했다.     


다음 날 정오가 되면 다시 우울증을 안고 일어났다. 그렇게 사흘이 흘렀다. 사막에서 돌아온 나는 늦은 저녁, 호텔 레스토랑에서 홀로 식사를 하고 있었고, 경박한 경음악이 흘러나왔다. 한여름 사막 도시의 호텔은 유난히도 에어컨을 강하게 틀어놓았기 때문에 실내는 오한을 느낄 정도로 추웠다.      


경음악은 크리스마스 캐럴로 이어졌다. 당시만 해도 그 사막 도시의 호텔은 계절에 맞추어 음악을 틀 정도로 세밀한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탓이었다. 듣기 좋은 음악이라고 해서 선곡됐을 것이고, 시기 부적절하게 틀어졌을 것이다.      


미친 사람처럼 웃음이 나왔다. 신기하게도 꽉 막혔던 숨이 터지는 것 같았다. 시간은 칠월이었고, 공간은 사막이었다. 귀에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피부에는 에어컨으로 인한 차가운 공기가 닿았다. 저녁이었다.      

다음 날 저녁, 다시 사막을 찾았고, 모래언덕에 앉아 엉뚱했던 크리스마스 캐럴을 생각했다. 다시 웃음이 나왔다. 멀리서 여행객이 다가왔다. 나는 그때까지 가지고만 있었던 카메라를 꺼냈다. 사진을 부탁했다.


“Give me a shot!”     


이후 우울증은 조금씩 치유됐다. 물론 그 치유의 메커니즘은 아직도 미스터리다. 심리상담도 아니고, 정신과 치료도 아니다. 니체는 더더욱 아니다. 어쩌면 정의할 수 없는 긍정의 파토스를 발견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Za에서 말한 “본연의 자아는 감각의 눈으로 찾으며 정신의 귀로 듣는다.”라는 말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오래전 스티브 도나휴라는 비즈니스 컨설턴트는 젊은 시절 사하라 사막을 여행했던 자신의 경험을  ‘사막을 건너는 여섯 가지 방법’이라는 제목의 자기개발서로 엮어냈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사막을 건너는 방법'이 아니라 '사막에서 살아가는 방법'이다. 니체의 말을 빌리자면 “나의 행복은 생존 그 자체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2002년 사막의 원주민들이 전해 준 이야기가 있다. 사막 아래에는 강이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바람에 날려 모래언덕이 사라지고 나면 사막 아래 흐르던 강물이 모래를 뚫고 올라오는데, 그것이 바로 오아시스라고 했다. 과학적, 지리적 근거를 떠나서 그들이 사막에 살 수 있는 것은 그런 희망의 강이 지하에 흐르고 있다는 믿음 때문일 수도 있다. 저녁이 아름다운 이유는 또다시 세상을 비출 빛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확실한 인생의 ‘저녁’이 찾아왔다. Za에서 ‘저녁’은 ‘몰락’을 상징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2002년 7월의 기억도 ‘몰락’의 기억이다. 몰락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던 나는 다시 시작될 세상이 낯선 아침 일지 아니면 익숙한 정오 일지 모르는 카오스에 싸여 있었다. 이제 또 한 번의 몰락을 준비할 때이다. 시간이 그렇고 상황이 그렇다.     


니체 역시도 몰락의 저녁을 두려워하거나 기대했는지 모른다. 니체는 몰락해 가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들이 저쪽으로 넘어가는 자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Za. 의 3부 ‘낡은 서판과 새 서판에 대하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 속에서 나는 몰락하고 싶다. 죽어가면서 그들에게 나의 가장 풍성한 선물을 주고 싶다. 나는 이것을 태양에게서 배웠다. 저 지나치게 풍요한 자가 저물어 갈 때, 그때 태양은 무진장한 재산 속에서 황금을 바다에 뿌렸다. 이리하여 가장 가난한 어부까지 황금의 노로 노 저어 가는 나는 일찍이 이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태양처럼 차라투스트라도 몰락하기를 바란다.”     


‘저녁’이란 단어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것이 소설 속 어린 왕자가 마흔네 번이나 보았던 ‘해 질 녘’이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어린 왕자가 유일하게 이유를 말하지 않았던 장면이기도 하다. 언젠가 어린 왕자가 슬플 때마다 보았던 그 ‘해 질 녘’ 역시도 몰락의 의미를 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긍정의 파토스에도 불구하고 몰락의 시간은 여전히 슬프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준비를 하는 시간이기에 슬픔을 무릅쓰고 해야 할 일이고, 하루에도 마흔네 번씩이나 보아야 할 풍경이다.     


“너의 별에선 몇 발자국만 의자를 당겨 앉으면 되겠더구나. 그럼 넌 원하는 만큼 여명을 바라볼 수 있었지. / 한 번은 해가 지는 걸 마흔네 번이나 본 적도 있는걸요! / 잠시 네가 덧붙이더구나. / 왜 해질 녘이 좋아질 정도로 슬플 때가 있잖아요. / 마흔네 번이나 볼 정도로 그렇게 슬펐니? / 하지만 어린 왕자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철학자들은 Za의 부제 ‘모든 사람을 위한, 그러면서도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은 니체 자신의 정신적 고독감을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것은 마치 ‘해 질 녘’을 마흔네 번이나 본 어린 왕자가 자신의 슬픔에 관해 묻는 자에게 아무런 답을 하지 않은 것과 같은 고독일 것이다. 때문에 Za의 부제에는 이미 슬픔이 담겨 있다. 나는 아무도 없는 작은 별에서 여명을 바라보는 니체를 상상한다.      


Za에는 많은 개념 체계가 담겨 있다. 신의 죽음, 힘에의 의지, 영원 회귀, 인식, 신체, 위버멘쉬, 선악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개념 체계를 바탕으로 하는 복합적 사유를 통해 니체는 자유정신과 육체와 정신의 통일체로서의 신체를 갖는 긍정적인 미래의 인간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 시작점에는 언제나 ‘몰락’이 있다.      


니체가 예견했던 100년 후의 인간인 우리는 니체 이후의 독일 해석학과 프랑스 철학, 그리고 무엇보다도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니체 시대의 생경했던 개념 체계들을 그리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다.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실존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인데, 나에게는 그것이 ‘저녁’이라는 단어로 정리되었다.     


서문 (1-1)

보라! 나는 나의 지혜에 싫증이 났다. 지나치게 너무 많이 꿀을 모아 둔 꿀벌처럼. 나는 자선을 베풀고 나누어 주고 싶다. 사람 중에서 현명한 자가 언젠가는 또다시 그 어리석음을 기뻐하고, 가난한 자가 또다시 그 풍요함을 즐길 때까지. 그러므로 나는 낮은 곳으로 내려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 마치 그대가 또다시 빛을 이 세상에 비추기 위해 저녁마다 바다 저쪽으로 가라앉는 것처럼.      


서문 (1-7)

그러는 동안에 저녁이 되었다. 주위는 어둠에 싸였고 군중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 스스로 호기심이나 공포심에 싫증 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시체 옆에 앉아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는 시간이 흐르는 것을 잊고 있었다. 밤이 되자 찬 바람이 불어와 이 고독한 두 사람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자 차라투스트라는 일어나서 스스로에게 말했다. “오늘은 참으로 즐거운 고기잡이를 했다. 사람은 잡지 못했으나 대신 시체를 잡았다. 인간의 존재란 무서우면서도 무의미하다. 하나의 익살 부리는 어릿광대마저 인간에게는 재앙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인간에게 생존의 의의를 가르치리라. 그것은 다시 말해서 초인이며 인간이라는 검은 구름에서 생겨나는 번갯불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인간과는 멀다. 아직도 나의 마음은 그들의 마음과 말을 주고받지를 못한다. 인간에 있어서 나는 아직도 익살 부리는 어릿광대와 시체 사이의 어중간한 존재이다. 밤은 어둡다. 차라투스트라의 길도 어둡구나. 차갑게 굳어 버린 나의 벗이여! 나는 그대를 묻을 곳으로 걸머지고 갈 것이다.’’     


1부

(독서와 저작에 대하여)

그대들은 나에게 말한다. ‘인생은 괴롭다.’라고. 그러나 그대들은 무엇 때문에 아침에 긍지를 갖다가도 저녁이면 체념해 버리는가? 인생은 괴롭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약해져서는 안 된다. 우리 모두는 무거운 짐에 견딜 수 있는 수탕나귀이며 암탕나귀인 것이다. 그 육체 위에 이슬 한 방울이 맺혔다고 떨고 있는 장미의 꽃봉오리와 우리는 어떠한 공통점이 있는 것일까? 정말 그렇다. 우리가 인생을 사랑하는 것은 삶에 익숙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일에 익숙한 까닭이다.      


(자유로운 죽음에 대하여)

그대들의 죽음에도 그대들의 정신과 덕성이 훨훨 타며 빛나야 할 것이다. 마치 대지에 비치는 저녁노을처럼. 그렇지 못하면 그대들의 죽음은 실패로 끝나게 될 것이다.     


(주는 덕, 3)

우람한 대낮이란 인간이 짐승과 초인 사이의 행로 한가운데 서서 저녁에 이르는 길을 최고의 희망으로써 축복할 때이다. 그것은 새로운 아침에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때 몰락하는 자는 초월하는 자가 되기 위해 스스로를 축복하리라. 그의 인식의 태양은 그를 위해 대낮에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모든 신은 죽었다. 이제 우리는 초인이 살기를 원한다.’ 이것이 언젠가는 우람한 대낮에 있어서 우리의 최초의 의지가 되게 하려무나!”      


2부

(가장 고요한 시간)

어제저녁 무렵에 나의 아주 고요한 시간이 나를 보고 말했다. 이것이 나의 무서운 여주인의 이름이다.          


3부

(유령과 수수께끼)

이틀째 저녁이 되자, 그의 입은 아직 닫혀 있었지만, 귀만은 다시 열었다. 먼 곳에 서 와서 다시 먼 곳으로 가려고 하는 이 배에서는 많은 기묘한 이야기, 위험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본의 아닌 행복에 대하여)

오오, 나의 삶의 오후여! 오오, 저녁노을을 앞둔 행복이여! 오오, 출렁거리는 바다 위의 항구여! 오오, 불안 속의 평화여! 나는 그대들 모두를 믿지 않는다. 진실로 나는 그대들의 간사한 아름다움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다. 너무도 부드러운 벨벳과 같은 미소를 의심하는 애인을 닮았다. (중략) 사랑에 빠진 남자, 질투가 심한 남자가 애정을 냉혹 속에 감추고 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거절한다. 이처럼 나도 이 행복한 시간을 물리친다. 물러가라! 그대 행복한 시간이여! 그대와 함께 본의 아닌 행복이 찾아왔다. 나의 가장 깊은 고통을 기꺼이 맞아들이기 위해 나는 여기서 있다. 그대는 곤란할 때 찾아왔다. 물러가라! 그대, 행복한 시간이여! 차라리 나의 아이들이 있는 곳에 가서 머물도록 하라! 빨리! 그리고 저녁이 되기 전에 나의 행복으로써 그들을 축복하라! 벌써 저녁이 다가온다. 해가 떨어진다.”     


(작아지게 만드는 덕-2)

나는 새로 닭장 속에 뛰어 들어간 수탉을 닮았다. 암탉까지도 그것을 쪼아댄다. 그렇다고 내가 이 암탉을 나무라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들에 대해서는 모든 사소한 불쾌한 일을 대하는 것처럼 정중하다. 작은 일에 바늘을 곤두세우는 것은 고슴도치에나 맞는 지혜라고 생각한다. 저녁 무렵 그들이 난롯가에 둘러앉을 때 모두 나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만 아무도 나를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내가 배운 새로운 정적이다. 나를 둘러싼 그들의 소음은 나의 사상 위에 외투를 둘러씌울 뿐이다.     


(배신자에 대하여-2)

그러나 이런 일 때문에 그대는 광명을 꺼리는 사람 가운데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들은 광명이 있으면 어쩔 줄을 몰라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대는 매일 그대의 머리를 더욱 깊이 밤과 안갯속에 틀어박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진실로 그대는 시간을 곧잘 선택한다. 왜냐하면, 밤의 새들이 또다시 밖으로 날아갈 시간이기 때문이다. 광명을 두려워하는 시간이 왔다. 일을 두려워하는 시간이 왔다. 일을 끝낼 저녁때이다. 일을 끝내 야겠다. 그러나 축하할 만할 때는 아니다.     


(오래된 서판과 새 서판-2)

도대체 춤추고 초극되고, 춤추며 넘어서는 것이 그곳에 있어서는 안 될 것인가? 가벼운 것, 가장 가벼운 자들을 위해 두더지와 무거운 난쟁이가 없어야 좋을 것인가? 내가 ‘초인’이라는 말을 길에서 주운 곳도 그리고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어떤 그것이라는 사실을 주운 곳도 거기였다. 또한, 인간이란 일종의 다리이며 목적이 아니라는 것, 즉 새로운 여명으로의 길로서 그의 한낮과 밤을 기쁨에 가득 차 찬양한다는 것을. 또한, 위대한 한낮에 관한 차라투스트라의 말이나 그 밖에 제2의 저녁노을처럼 인간의 머리 위에 걸려 있는 것을 주운 곳도 거기였다. 진실로 새로운 밤들과 더불어 새로운 별들을 나는 그들에게 보여 주었다. 그리고 구름과 낮과 밤 위에 나는 화려한 천막과도 같은 웃음을 펼쳐 놓았다.      


(또 하나의 춤의 노래-1)

그대는 이제 피로한가? 저 건너에는 양 떼가 있고 저녁노을이 보인다. 목자가 부는 피리 소리를 따라 잠자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대는 그토록 심하게 지쳐 버렸는가? 그대를 저쪽으로 끌어가겠다. 팔을 늘어뜨려라! 그대가 갈증이 나면 무엇인가 마실 것을 주리라! 그러나 그대의 입은 그것을 마시려 하지 않는다.      


(또 하나의 춤의 노래-2)

이리하여 우리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서늘한 저녁이 달려오는 것 같은 푸른 목장으로 눈길을 보내고 함께 울었다. 그러나 그때야말로 모든 생명은 나의 지혜가 일찍이 사랑스러웠던 것 이상으로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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