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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인순 Sep 27. 2019

‘옳고 그름’ 도덕, 반응하는 사람, 추론하는 사람

책 속의 사람들

옳고 그름

최근 한국 사회는 정치가 도덕을 압도하고 있다. 여기서 압도하고 있다는 뜻은 정치가 도덕을 완벽하게 이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에 따라 상반된 이해관계를 가진 정치적 주체들이 각자가 믿고 있거나 의도적으로 왜곡시킨 도덕의 의미와 기준들이 다면적으로 충돌하고 있다.      


특히 법무부 장관 한 명을 놓고 벌어지는 도덕 전쟁은 전문적인 정치 집단뿐만 아니라 언론 권력, 사법 권력, 심지어 ‘비참한 자들의 정치학’으로 대표되는 사회적 소수자, 또는 소수자 의식을 가진 집단까지 가세하여 그야말로 도덕의 전국시대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쟁 속에서도 도덕을 이야기하는 자와 권력을 이야기하는 자는 확실히 구분된다.      


한국 사회는 나름대로 잘 견뎌내고 있는 것 같다. 해방 전후사로부터 촛불 혁명에 이르기까지 시민들이 쌓아온 정치적 경험과 내성이 보이지 않는 도덕 감성의 방패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 시민의 정의를 지탱하고 있는 도덕 감성은 과연 어떻게 작동되고 있으며, 그 한계와 희망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을 준비하는 데 있어서, 독자들에게 적지 않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도덕에 대한 담론과 논쟁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저명한 실험심리학자이자 신경과학자이며, 철학자인 조슈아 그린은 다음과 같이 도덕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우리 인간은 단순히 냉정하고 객관적인 관점을 가진 자원 할당 자가 아니다. 우리는 누구의 어머니이거나 아버지이고 누구의 아들이거나 딸이며 누구의 형제자매이고 누구의 연인이거나 친구이다. 또 우리는 더불어 사는 시민들이며 우리가 지닌 신념의 수호자이자 예술, 지식, 행복한 삶의 추구 같은 수많은 대의의 옹호자이다. 이런 개인적인 연관과 책임은 우리에게 도덕적 의무와 선택의 정당한 사유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만약 당신이 이름도 모르는 먼 곳의 가난한 아이들을 돕는다는 이유로 당신 자녀에게 생일 선물을 한 번도 사주지 않는다면, 당신은 어떤 면에서 칭찬받을 만하지만, 결코 좋은 부모는 아니다. (...) 과연 지구적 행복의 최대화는 우리 삶의 가치 있는 다른 모든 목적을 밀어내는 것일까? “     


엄밀히 말해 인류의 지성은 도덕이란 주제에 대해 일관되고 합리적인 태도와 답을 내놓지 못했다. 인간이 가족, 이웃, 친구, 동료, 그리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의 관계를 통해 정의된 삶을 살도록 진화한 것이 틀림없다면, 이 세계를 최대한 행복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공리적 도덕 개념을 말할 때, 인간 본성의 이런 핵심적 특징, 즉 진화적 특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인간은 누구나 집단적 본성을 가졌다는 뜻이고, 부족적 특성이 개인의 도덕 기준 설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이다. 물론 진화적 욕구에 지나치게 충성한 나머지, 자신과 자신의 공동체에 도가 지나친 이익을 안겨주면서, 공동체 외의 세계에 피해를 주는 행위는 어떤 경우라도 정당화될 수 없다.      


그래서 도덕이라는 주제 앞에 솔직한 자세로 서 있는 우리에게는 조심스러운 균형감각이 필요하다. 도덕의 균형추가 자신의 방향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미리 인정해야 한다. 저자는 이러한 도덕을 중심에 둔 비균형적 균형감각을 ”자신의 종에 전형적인 도덕적 한계를 이상적 가치로 혼동하는 인간이기보다는 자신의 위선자라는 것을 알고 또 덜 그러려고 애쓰는 인간이길 원한다 “는 말로 설명한다. 그리고 정작 심각한 문제는 자신이 위선자, 즉 약간은 기울어진 저울에 앉아 있음을 시인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주장한다.     


대다수 인간이 스스로 도덕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서로 싸우고 다른 집단과 분노와 적대적 의도로 가득 찬 논쟁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인간의 도덕성은 집단 내에만 한정되며, 인간은 '그들'보다 '우리'를 앞세우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다시 말해, 이념 갈등, 종교, 인종의 갈등 등 현대 사회의 도덕적 갈등은 ‘나’와 ‘우리’, ‘우리 집단’과 ‘그들 집단’ 간의 도덕적 불일치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서로 싸운 까닭은 그들이 근본적으로 이기적인 존재였기 때문이 아니라, 도덕적인 사회가 어때야 하는지에 대해 양립할 수 없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악한 것이 아니며, 그들 역시도 사회 정의를 위해 희생할 의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보는 정말로 이기적인 의도를 가진 사람은 우리 속에도 있고 그들 속에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저자가 말하는 ‘상식적 도덕의 비극(Tragedy of Commonsense Morality)’이다. 우리는 누구나 출발점이 비대칭인 사회에서 살 때, 공정성이라는 이름의 정의를 각자의 이익에 맞게 재단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마련이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도덕 판단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저자는 현대 사회에서 벌어지는 도덕적 갈등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나'와 '그들' 사이의 폭을 좁히기 위한 도덕성에 대해 상식을 뒤집는 이론을 제시하는데, 그것이 바로 ‘깊은 실용주의’다. 저자가 말하는 ‘깊은 실용주의’는 공리주의와 많이 닮아있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깊은 실용주의는 ‘경제적 관점을 심리적 관점으로 옮겨놓은 공리주의’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독자는 저자가 도덕 감성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균형’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어떤 철학자도 도덕의 기준에 대해 확고하고 일관되게 자신을 설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또 앞으로도 할 수 없으므로, 도덕에 있어서 균형이 매우 중요한 요소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비록 실패는 했지만, 저자는 도덕 감성에 대해 자신을 설득하려 했던 세 가지 학파를 소개하는데, 벤담과 밀로 대표되는 공리주의, 칸트로 대표되는 의무론, 아리스토텔레스로 대표되는 덕 윤리가 바로 그것이다.     


먼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좋은 균형을 이루기 위한 명시적인 원칙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에게 오직 존재하는 것은 실천의 문제일 뿐이다. 하지만 현재 한국 사회에 이를 적용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왜냐하면, 하나의 정치적 집단에 덕인 것이 다른 집단에게는 악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이러한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칸트는 모든 정치적 부족의 도덕 원리들을 수학의 정리처럼 보편적 진리로 증명하려고 시도하였는데, 니체는 이런 칸트식 야망을 ‘영혼의 은밀한 농담’이라고 악평하기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부족적인 자동 감성이나 칸트의 증명과 같은 철학적 접근방법들은 모두 현대적인 도덕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특히 현재 한국과 같은 도덕의 전국시대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공리주의는 어떨까? 이에 대해서 저자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도덕 철학자로 불리는 존 롤스의 공리주의 비판을 다음과 같이 선제적으로 깔아놓는다.      


“존 롤스에 따르면 행복의 최대화는 커다란 불의로 이어질 수 있다. (...) 다수가 소수를 노예로 부리는 한 사회에서 만약 다수가 이 제도 안에서 행복하다면, 즉 노예가 된 사람들의 불행을 충분히 상쇄할 만큼 행복하다면 이 제도는 옳은 것인가? 롤스에 따르면 훌륭하게 조직된 사회는 몇몇 기본권과 자유가 보장될 때 성립하는 것이지 행복의 최대화라는 포괄적인 목표를 통해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두 가지 측면에서 롤스를 비판하는데, 첫째는 “그래서 공리주의자들이 노예 주의를 지지하는가?”라는 반문이다. 다시 말해 공리주의자들이 말하는 공리를 너무 도식적으로 해석하는 게 아닌가 하는 비판이다.     


롤스에 대한 저자의 두 번째 비판은 롤스가 ‘공리’라는 단어를 ‘부(富)’에 한정해서 생각한다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공리는 물질과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공리 자체가 물질은 아니다. 공리는 시장의 상품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친구와 어울리기, 화창한 날, 수학의 정리 증명하기, 이웃의 존경을 받는 일 등등에서 생기는 긍정적 경험이다.      


그러나 저자의 이러한 주장에는 동의하기 힘든 부분이 존재한다. 바로 물질과 심리를 분리하고 이원화시키는 점이다. 저자의 예를 다시 인용해 보자. 노동에 지쳐 친구와 어울리기 힘든 상황, 돈 문제로 화창한 날에 집에만 있어야 하는 경우는 물질과 심리가 결코 동떨어질 수 없음을 말해준다. 우리 사회가 그렇고, 그것이 실제 세상이다.     


직접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공리주의에 대한 무언가 찜찜한 구석 때문에, 저자가 ‘공리주의’ 보다는 ‘깊은 실용주의’라는 생소한 개념을 도입했는지 모른다. 아무튼, 저자는 철학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고차 도덕’을 찾는 데 실패했다고 단정하며, 이러한 실패에 직면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옳게 느껴지는’ 고차 도덕 찾기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넋 놓고 앉아서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지 말라는 것이다.      


“어쩌면 아리스토텔레스 또는 그와 비슷한 누군가가 옳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가 모두 마땅히 염원해야 할 특정한 도덕적 덕목들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또는 어쩌면 칸트 또는 그와 비슷한 누군가가 옳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제1 원리에 입각해 증명되길 기다리는 진정한 도덕 이론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또는 어쩌면 우리는 좀 더 일관성 있는 어떤 것으로, 즉 옳고 그름에 대한 우리의 직감을 더 잘 포착하는 정교한 도덕 이론으로 조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고도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좀 더 실용주의적인 접근을 취할 필요가 있다.” 


사뮈엘 베케트의 희곡에서는 마지막까지 ‘고도’는 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철학의 위안과 기대를 포기하고 우리가 노력해야 할 최선’, 기다려도 오지 않는 고도를 포기하는 동안, 우리가 일어나서 해야 할 일,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깊은 실용주의’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도덕 체계에 대한 설계도를 변경하는 일인데, 저자는 이를 위해 먼저 도덕에 대한 다음의 정의를 신뢰할 것을 요구한다.


1. 도덕성은 생물학적이고 문화적인 진화를 통해 협력을 촉진하도록 설계된 몇몇 심리적인 능력들이다.      


2. 심리적 수준에서 도덕성은 주로 정서적인 도덕적 직관들을 통해 구현된다. 다시 말해 우리가 몇몇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소중히 여기도록 작용하고 나아가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도록 고무하는 직감적 반응들을 통해 구현된다.

     

3. 서로 다른 인간 집단들은 서로 다른 도덕적 직관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커다란 갈등의 원천이 된다. 갈등은 한편으로 서로 다른 집단이 서로 다른 가치를 강조하기 때문에 발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의식적 편향을 포함해 여러 가지 이기적인 편향들 때문에 발생한다. 사람들 사이에 의견의 불일치가 생기면, 사람들은 사고력을 이용해 자신의 직관적 판단을 합리화하려 한다.     


물론 이러한 저자의 주장에는 사회학적 요소가 삭제되어 있다. 그리고 도덕을 둘러싼 다차원적 전장에 적용하기에는 너무나 단순한 무기이다. 이러한 단순성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우리가 직접 느끼는 도덕과 도덕적 판단에 대한 심리적 문제를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저자가 의견을 공유하는 조너선 하이트가 ‘바른 마음’이란 책에서 쓴 다음과 같은 말은 저자의 의견을 좀 더 명확하게 설명해 준다.      


“우리가 사이좋게 지내려면 우리는 모두 덜 독선적이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중의 거의 모두가 좋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며, 나아가 우리가 서로 다른 도덕적 직관을 지닌 서로 다른 문화적 집단에 속해 있기 때문에 우리 사이에 갈등이 생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상대방의 도덕적 합리화를 간파하는 데는 매우 뛰어난 반면에 우리 자신의 합리화를 깨닫는 데는 그렇지 못하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은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하며 덜 위선적이고 더 타협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이 책의 저자 조슈아 그린과 조너선 하이트가 공유하고 있는 이런 생각은 오늘날 한국적 상황에 적용하기에는 그야말로 어림도 없는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고차적 도덕’을 향한 마지막 희망의 물꼬를 닫아야 할까? 그렇지는 않다. 저자는 동의할 수 없을지 몰라도,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권력이다. 그리고 민주 사회에서의 궁극적 권력은 시민이다. 그러니 마지막 희망은 시민에 대한 설득에 달려있다.     


저자 역시도 이러한 설득의 목적을 가지고 이 책을 썼을 것이다. 저자는 “내가 사회적 보수주의자가 아닌 까닭은 본질에서 집단 수준의 이기주의라 할 부족 주의가 큰 행복에 이바지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행복의 방법론으로 ‘깊은 실용주의’가 매우 효과적이라고 독자들을 설득한다.     


“가진 자들의 돈을 약간 가져가는 것은 그들에게 별다른 해를 입히지 않는다. 반면에 못 가진 자들에게 자원과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현명하게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매우 큰 효과를 발휘한다. 이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다. 깊은 실용주의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는 목적, 즉 저자가 가르쳐 주기를 원하고, 독자가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도덕적 사고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저자는 우리가 두 가지 근본적으로 다른 도덕적 문제를 안고 있다고 전제한다. 하나는 ‘나’ 대 ‘우리’의 문제이고 또 하나는 ‘우리’ 대 ‘그들’의 문제이다.      


한편, 우리는 두 가지 상이한 도덕적 사고를 할 수 있는데, 하나는 감성에 의존하는 빠른 사고이고, 또 하나는 추론을 사용하는 느린 사고이다. 저자는 우리가 집단 간 충돌하는 도덕의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도덕의 문제’와 ‘도덕적 사고’를 적합하게 대응시켜 나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공동체 내에서 개인의 도덕성을 판단할 때에는 도덕 감정과 양심에 충실한 빠른 사고를 대응시키고, 정치 집단 간 도덕성의 문제를 판결할 때에는 추론을 통한 최선을 염두에 둔 방법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인정했듯이 조국 장관을 둘러싼 도덕 문제의 핵심은 도덕에 대한 설계 오류다. 독재 정권에 항거했던 386세대들의 도덕은 독재 정권에 대한 정치적 자유와 평등한 사회에 맞게 자신의 도덕관을 설계해 왔다.      


그러나 오늘날 20대들의 도덕의 설계도는 평등보다는 공정에, 정치적 자유보다는 경제적 자유에 맞게 제작되어 있다. 조국 장관이 사회적 정의에만 몰두한 나머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돌보지 못했다는 말속에는 그런 도덕 설계의 오류가 깔려 있다. 그러나 이것은 ‘나’와 ‘우리’의 관계에서 성립되는 감성, 즉 빠른 사고가 필요한 도덕 영역이다.     


조국 장관의 문제를 집단과 집단, 세력과 세력 간의 문제로 확대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감성적 접근보다 공리적 접근, 즉 숙고한 추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 안에는 한 명의 도덕적 문제 (나-우리)와 그 한 명이 속한 국가의 도덕적 문제(우리-그들)가 충돌하고 있다.      


시민들은 판단해야 할 것이다. 한 명의 위선자를 바라보는 도덕의 문제와 무소불위의 권력을 둘러싼 사법 개혁이라는 도덕의 문제에 대한 깊은 실용주의적 판단 말이다. 어떤 것이 사회적 도덕의 근본에 더 가깝고, 영구적 정의의 실현에 더 접근하는 것이며, 무엇보다도 시민의 행복에 기여하는 것인지. 그리고 어떤 것에 우선순위가 있는지. 추론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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