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인순 Jun 10. 2020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정치하는 사람들

책 속의 사람들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

이 책은 미국의 대표적인 진보주의자이자 컬럼비아대학의 인문학 교수인 마크 릴라가 지난 2016년 미국 대선 당시 힐러리의 패배 원인을 분석하고 이를 통해 미국 진보주의의 새로운 정치적 방향을 모색한 책이다.

      

막말과 기행으로 가는 곳마다 구설수를 불러일으켰던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된 사실은 미국의 진보적 시민을 충격에 빠지게 했다. 트럼프라는 예상치 못한 정치적 소나기를 맞으며 저자는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우산을 걱정했고, 그것이 이 책을 쓰게 만든 배경이다.     


그리고, 흠뻑 젖기 전까지는 예상할 수 없었던 정치적 소나기, 즉 힐러리 패배의 원인을 저자는 미국 진보 진영의 '정체성 정치'에서 찾아냈다. 그가 지목한 정체성 정치란 페미니즘, LGBT(성 소수자), 인종, 난민 문제 등 사회적 소수자의 의제에 함몰된 나머지 국가적 어젠다와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는 운동권 정치를 의미한다.      


“‘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 (Black Lives Matter)’라는 구호로 대표되는 운동은 연대감을 구축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교과서적인 사례다. 그 운동이 아프리카계 미국인에 대한 경찰의 학대를 공론화하고 반대함으로써 지지자들을 모으고 양심 있는 모든 미국인에게 경종을 울렸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학대를 빌미로 미국 사회 전체를,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 역사를, 미국의 모든 법 집행기관들을 고발하고 마우마우 단의 전술로 이견을 묵살하면서, 죄를 자백하고 참회할 것을 요구하기로 한 그 운동의 결정이 공화당 우파를 이롭게 했다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마크 릴라의 이 비판적 주장은 운동권 정치가 가진 우둔함과 영향력의 한계를 겨누고 있다. 진보 진영이 모든 의제를 오로지 정체성 중심으로 이끌고 가는 오래된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정치적 우둔함에 빠져 있는 한, 반대 세력에게 정치적 의제의 주도권을 빼앗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진보가 성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자기 정체성을 뒤로하고 보편적 ‘시민의 지위’를 최우선으로 하는 정치적 메시지와 전략을 제시한다. 마초에게 여성의 고통을, 백인에게 흑인의 아픔을 공감하려는 시도는 그 자체에 정치적 한계를 내재하고 있으며, 따라서 진보의 목소리를 키우기 위해서는 여성과 유색인종을 아우르지만, 결국 시민이라는 좀 더 크고 묵직한 메가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진보주의자들은 평등한 권리를 보장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해 왔다. 진보주의자들은 우리가 불운한 이들과의 연대감을 느끼고 그들을 돕기를 바란다. (...) 반면에 정체성 진보주의자들은 그 단어를 버림으로써 전략적 모순에 빠졌다. 정체성 진보주의자들은 그들 자신에 대해서 말할 때, 자신들의 차이를 단언하고 싶어 하고 자신들의 특수한 경험이나 욕구가 배제되는 조짐만 보여도 성마르게 반응한다.”               


근거 없는 도덕적 우월론자 콤플렉스에 빠져 있는 진보주의자에게 마크 릴라의 비판은 아픈 ‘뼈 때리기’이다. 물론 그의 비판은 한국의 진보주의자에게도 아프게 다가온다. 이러한 불편한 진실을 담아 마크 릴라는 몇 가지 현실적 제안을 한다.     


첫째, 소수의 정체성 메시지를 버리고 ‘시민의 지위에 대해 집중’하라는 것, 둘째, 모든 메시지의 방향이 ‘우리라는 개념’에 맞추어 확장되어야 하고, 셋째, 소위 운동권 정치를 포기하고 ‘제도 정치’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정치는 선거 정치’이며, 선거에서의 승리를 위한 민주적 설득 방법을 개발할 것을 주문한다.     

마크 릴라

마크 릴라는 이 책에서 지금까지 미국의 진보주의는 모든 시민적 연대의 다리를 불태우는 자멸적 정치를 부지 간에 수행해 왔다고 비판한다. 그의 비판에는 극단적 주장과 소수 정체성에 근거한 순진한 열정이 오히려 선거 정치의 패배와 이로 인한 민주주의 제도의 역행을 가져왔다는 진단이 깔려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분명 정치에 관한 생각의 지평이 넓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물론 그 생각의 지평은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방향, 양방향으로 확장되어 있다. 예를 들어 현실 정치를 정체성 정치와 선거 정치(제도 정치)로 구분하여 이분법적으로 대응하는 저자의 논법에는 동의할 수 있는 부분과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 공존한다.      


이런 정치적 복잡성의 대표적인 예로 지난 5월 25일,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백인 경찰이 무릎으로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의 목을 눌러 숨지게 한 사건과 이 사건에 대응한 넷플릭스 코리아의 슬로건이 파생시킨 문제를 들 수 있다.     


플로이드 살해사건 직후인 5월 31일 넷플릭스의 공식 트위터에는 ‘To be silent is to be complicit. Black lives matter(침묵은 동조다. 흑인의 목숨도 중요하다)’라는 글이 올라왔다. 이후 넷플릭스 코리아는 본사의 트윗을 인용해 번역된 메시지를 올렸다.      


번역된 문구는 ‘침묵하지 않겠습니다. 우리 모두의 삶은 중요합니다’였다. 넷플릭스 코리아의 번역, 즉 ‘흑인의 목숨’을 ‘우리 모두의 삶’이라고 번역한 부분은 ‘정체성 정치의 언어’를 ‘시민의 지위에 대한 보편적 언어’로 바꾼 것이다.      


‘흑인’이라는 정체성에 뿌리를 둔 단어를 ‘우리 모두’, 즉 보편적 ‘시민’의 단어로 바꾼 넷플릭스 코리아의 번역은 결과적으로 저자 마크 릴라의 조언에 충실한 정치적 번역이다. 그러나 문제는 간단치 않다. 바로 넷플릭스 코리아가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의 삶은 중요합니다’라는 문구가 미국에서는 이미 흑인 인권 운동을 반대하는 세력의 구호가 되어있었다는 사실이다. 즉, 이 구호는 ‘흑인의 목숨도 중요하다’를 사용하던 21세기 흑인 인권 운동에 대한 반대 보수 진영의 역공 슬로건이었다.     


2016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 전후, 흑인 인권 운동에 반대하는 이들이 ‘모두의 목숨은 중요하다’를 외치면서 흑인 인권 운동의 의제를 선점해 버렸다. 이렇게 ‘의제를 담은 언어’를 빼앗겨 버린 상태에서는 마크 릴라의 제안, 즉 정체성 의제의 포기는 오히려 보수의 의제만 강조하는 꼴이 되어 버린다.     


최근, 플로이드 살해사건으로 야기된 폭동 및 시위가 글로벌 금융위기로 경제적 직격탄을 맞은 이후 11년 시간 동안 진행되어 온,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로 해석하려는 분위기도 있다. 이러한 해석은 그 의도와는 달리 흑인 인권의 문제를 희석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예상되었던 대로 플로이드 살해사건에 대해 미국의 민주당은 미온적인 태도를, 트럼프는 러스트 벨트의 백인을 겨냥하여 선거 정치적인 행보를 취했다. 그러나 대중은 흑인 인권이라는 정체성 언어와 시민의 지위라는 보편적 언어를 구분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위자나 경찰, 모두가 무릎을 꿇었다.      


미국의 다급해진 민주주의, 위기의 진보주의에도 불구하고 정치 운동은 선거 운동이라는 저자의 주장에는 충분히 공감이 가지만, 한편으론 정체성 정치가 보편적 시민의 지위와는 별개의 것이고 때문에 선거 운동이 될 수 없다는 식의 도식화에는 딱히 수긍이 가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측면에서 올해 있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미국 시민들은 어떤 선택을 할지 매우 궁금하다. ‘플로이드 살해사건’이라는 정체성의 의제와 ‘경제 불평등과 코로나 19’라는 시민의 지위에 대한 의제가 어떤 정치적 결론으로 가닥을 잡을지 말이다.


이 책을 읽는 가장 큰 재미는 미국의 정치적 상황을 한국과 비교해 보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한국과 미국은 서로 완벽히 다른 거울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서 있다. 미국의 진보가 미래에 대한 상상력 부족과 손에 잡히지 않는 정체성에 매달려 있다면, 한국에는 오히려 보수 진영이 퇴색한 이념과 정치적 향수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마크 릴라는 “정체성 진보주의는 정치의 기획이기를 그치고 복음주의적 기획으로 변신했다. 양자의 차이는 이것이다. 복음주의의 핵심은 권력을 향해 진실을 말하는 것이지만 정치의 핵심은 권력을 장악하여 진실을 방어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진실 방어를 위한 현실적 대안을 주문한다.      


반면, 한국의 경우, 정치적 복음주의에 빠진 것은 오히려 보수 진영이다. 그리고 그것은 일종의 근본주의에 가깝다. 반면, 과거 10년간 보수 진영에 의해 철저히 밀려나 있던 한국의 진보 진영은 오히려 권력만이 자신의 진실을 방어하는 유일한 방법임을 너무나 절실하게 깨달은 듯하다.     


그러나 그 깨달음이 얼마나 오래 갈지는 다소 회의적이다. 그래서 한국과 미국의 상반된 정치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한국의 진보에 주는 메시지는 절대 가볍지 않다. 독재 정권에 저항하면서 탄생한 한국의 진보는 그 뼛속 깊은 곳에 자기만의 진실을 고집하는 오래된 DNA를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현재 한국의 진보는 그 특유의 낭만주의적 상상력의 분열을 겪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정치적 낭만주의는 두 가지 감정에 의해서 분열하는데, 첫째는 자율적이고 진정한 자아로 남기 위해 도피하려는 충동이고, 또 하나는 사회를 변화시켜 자아의 확장처럼 보이게 만들려는 충동이다.     


“나이 든 진보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시민권, 베트남 전쟁, 군비축소, 빈곤, 식민주의 등은 정치적 사안들이었고, 그것들에 대해서 항의할 가치가 틀림없이 있었다. 그러나 부모에 대한 건방진 태도, 약물 사용, 시끄러운 음악 듣기, 자유연애, 채식주의, 동양 신비주의가 이 모든 정치적 사안들과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저자가 말한 ‘진정한 자아에의 도피’와 ‘자아 확장의 욕망’ 사이에는 한국 사회의 정치적 담론이 살아서 꿈틀거린다. 소위 ‘페이스북 정체성’ 즉 내가 규정하는 자아가 바로 확장되는 자아라는 담론이다. 그리고 이 담론이 진보 진영을 갈라놓기 시작했다. 결국, 정체성 정치는 필연적으로 내부마저도 갈라놓게 마련이다.     


두 번째로, 우리는 진정한 자아와 확장하고자 하는 자아가 구분되지 않는 세상에서 살고 있기에 ‘페이스북 정체성’ 속에 진보나 보수의 진실이 어떤 방향으로 정치적 의제가 되어야 하는지는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누가 그것을 선점하는가는 더 중요하다. 총선에서 보수주의 정당의 참패 이후, 이미 ‘의제의 선점’ 경쟁은 시작되었다.     


“정체성 진보주의자들은 자신들에 초점을 맞추고 자신들이 속한다고 느끼는 집단들에 초점을 맞춘 나머지 평범한 민주 정치를 더욱더 업신여기게 되었다는 것이 내가 말하려는 바다. 왜냐하면, 평범한 민주 정치란 자기 자신과 유사하지 않은 사람들을 상대하고 설득하는 일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민주 정치를 외면하면서 정체성 진보주의자들은 드높은 설교단 위에서 더러운 대중에게 설교를 하달하기 시작했다.”     


정의나 도덕에 대한 설교식 주장의 위험성을 알리는 저자의 이 메시지는 어떤 측면에서 보면, 진보와 보수를 떠나 모든 정치적 집단 자체의 고유한 정체성은 존재하지 않으며, 표방하고 연출하며 실행하는 방향성과 이미지가 바로 그때그때의 정체성임을 주장하고 있다.     


나아가 저자는 자기 진영의 정치적 자아를 방어하고 확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대중을 설득하여 선거에서 이기는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소수파 진보 중에는 타인보다 더 진보적이라는 차별성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이들도 많았다. 그들에게 진보란 세상을 바꾸기 위한 수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기만족을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이런 소수파 진보로는 진보의 가치와 신념을 사회에서 실현하지 못한다.”     


저자의 이 말은 단 한순간도 권력의 의지를 감추지 않았던 독일의 보수주의자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마치 권력이 본래 가질 만한 것이 못 된다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싫습니다. 권력의 반대는 힘이 없는 것, 바로 무기력입니다. 실천에 옮길 수 없다면 좋은 아이디어라고 해도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최근 조국 사태를 둘러싼 정체성 정치가 일부 진보, 중도의 진영으로 이어지는 다리를 태워버린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총선에서 진보 진영이 승리한 것은 시민의 지위라는 차원에서 조국의 문제와 검찰의 문제를 비교할 때, 후자가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여진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시민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저자의 말을 총선에서 승리한 한국의 진보 정당이 새겨들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시민의 정치적 입장은 유동적이고, 진보나 보수라는 그릇에 영원히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세간에 돌고 있는 ‘대깨문’이라는 말이 아픈 것은, 그 악의적 단어 속에는 ‘어떤 경우라도 변하지 않는 사람들’이란 비판적 빈정거림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변하지 않는 시민을 상정한 전략이라면 그것은 이미 진보적 가치를 상실한 정치다. 이전에는 극우를 상징했던 이러한 단어들이 오늘날 진보를 겨누고 있는 이 상황을 단지 일부 보수 언론의 왜곡으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한국의 진보는 조국 국면과 윤미향 논란을 겪으면서 운동권 세력에서 기득권 세력으로 변질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정의연은 위안부 할머니라는 소수의 정체성을 넘어 모든 고통받는 여성의 인권이라는 보편적 정의로 나아가기를 원했으나 결국은 소수 정체성의 문제에 발목을 잡히고 만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볼 때, 정체성이 사라진 정치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대북 관계나 젠더 문제, 평등에 기반한 경제 정책 등, 정체성에 기반한 문재인 정부가 일면 대중의 비판을 받는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선거의 승리를 위해 그 정책들을 버려야만 하는 걸까?      


다시 미국의 관점으로 돌아가서 플로이드 살해사건에 대한 미국발 뉴스는 미국의 대다수 백인이 “흑인의 목숨도 중요하다”라는 정체성 슬로건에 동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달하고 있다. 흑인들을 옹호하고 있는 미국 백인들의 태도는 분명하다. 지금, 이 순간에는 모두의 목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로 흑인의 목숨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때로는 보편적인 시민의 지위에 관한 의제가 소수의 정체성을 표방한 의제에 흡수되고 통합되는 예도 있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서 마크 릴라는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     


이 책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라는 제목은 ‘더 나은 보수를 상상하라’라는 말로 바꾸어 써도 될 만큼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또한 강하다. 정체성 정치를 그만두고 시민의 지위를 높일 수 있는 상상력과 공동선을 위한 메시지 창조에 집중하라는 조언은 한국의 보수에도 적용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1989년 1월 11일, 미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 중 한 명인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퇴임을 앞두고 TV 연설을 했다. ‘언덕 위의 빛나는 도시(Shining city upon a hill)’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진 이 연설을 통해 레이건은 위대한 미국의 미래를 국민에게 제시했다.     


영화배우답게 잘생긴 외모와 과하지도 모자라지 않은 감정을 담은 그의 감동적(?) 연설 속에는 미국의 보수가 가지고 있는 뿌리 깊은 청교도적 비전이 보인다. 그 의지와 야망은 미국인들이 한 번도 포기하지 않은 정치적 자부심이기도 하다. 이렇게 트럼프 이전 미국의 보수는 시민의 비전과 의제를 장악해 왔다.     


총선에서 참패한 뒤, 미래 통합당 비대위원장이 된 김종인 위원장이 “보수란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한 말은 보수의 정체성 정치를 포기하고 시민의 지위에 관한 의제를 선점하자는 의도에서 마크 릴라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특히 최근에 그가 쏟아내는 ‘코로나 약자 보호법”이나 ’ 전일 보육제‘등의 공약은 시민의 지위에 대한 의제를 선점하고자 하는 포석이라고 볼 수 있다. 미래 통합당의 일부 국회의원이 이에 반발하고 있지만, 이들에게는 저자가 인용한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 직후에 한 버니 샌더스의 성명이 약이 될 것이다.     


“여러분이 민주당 내에서 보게 될 싸움들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정체성 정치를 넘어서는 마느냐에 관한 것입니다. 대기업의 우두머리 혹은 최고 경영자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면, 그것은 미국이 한걸음 발전했다는 증거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그 최고 경영자가 일자리를 국외로 반출하고 노동자들을 착취한다면, 그가 흑인이냐 백인이야 라틴계냐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작가의 이전글 ‘18세를 반납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