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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인순 Mar 23. 2020

‘18세를 반납합니다.’

책 속의 사람들 

18세를 반납합니다. (작가 김혜정)

어떻게 하면 아재 개그가 아닌 재미있는 농담을 할 수 있을까?

(그냥, 농담 자체를 하지 마세요!)     


정말로 잘해 주고 싶은데!

(참견하지 않는 게 최선이에요!)     


늘 돌아오는 대답은 이랬다. 그래서 사춘기라는 이름으로 정의되는 15세에서 18세의 아이들에게 말을 거는 것은 지나칠 정도로 위험한 일이다. 따라서 그들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데에는 적지 않은 용기가 필요하다. 그들로부터 공감을 얻어내는 일은 말할 것도 없다. 작가 김혜정은 그런 위험한 짓, 용기가 필요한 일을 하는 사람인 것 같다.      


‘마지막 강의’라는 책을 쓴 랜디 포시는 100세 이상을 산 어느 노인이 타임머신을 타고 10대의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게 되는 그림을 상상했다. 노인이 충고를 담아 10대의 자신에게 인생에 대해 말해 주었을 때, 10대의 자신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랜디 포시는 ”그럴 리 없다 “라고 단언했다.     


그런데도, 그는 “모든 부모는 자식들에게 옳고 그름에 관하여, 현명함에 관하여, 그리고 살면서 부닥치게 될 장애물들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는지 가르쳐주고 싶어 한다. 또 부모들은 행여 자식들의 삶에 나침반이 될 수 있을까 하여 자신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한다. 부모로서의 그런 욕망이 카네기 멜런 대학에서의 '마지막 강의'를 하게 된 이유다”라며 저술의 이유를 달았다. 그러고 보면 그의 저술 자체가 모순이다.     


어른들이 쓰는 성장소설이란 이런 모순을 운명처럼 안고 있다. 자신의 경험과 욕망, 그리고 정체성을 아이들에게 투사하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데, 이는 마치 ‘자기’라는 지뢰가 깔린 땅을 맨몸으로 기어가는 것과 같다. 


그래서 성장소설을 읽을 때마다 옳고 그름에 대한 작가의 의식이 얼마나 투사되어 있는지 의심의 눈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 소설에는 옳고 그름이나 현명함에 대한 억지스러운 격언이 없다. 작가는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전하듯, 그렇게 아이들의 이야기를 건조한 문법으로 풀어놓는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너희는 늙어봤니? 나는 젊어 봤다”라는 흔한 꼰대들의 이야기가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젊어 본 적이 없다. 우리의 푸르렀던 젊은 시절은 늙은 눈에 비친 각색된 계절일 뿐이다.      


18세의 아이들이 보는 색깔, 듣는 소리, 그들이 맡는 냄새와 시간의 속도들, 그들이 보는 세상에서 우리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 흐르는 물을 거슬러 유영하듯 살아온 세상에서 어느 시점에 존재했던 머릿속 풍경을 그려내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우리의 청춘은 너무나 투명했다.     


‘성장소설’이 유년기에서 소년기를 거쳐 성인의 세계로 입문하는 과정에서 주인공이 겪는 갈등과 각성과 성장을 다룬 것이라 정의한다면 무언가 허전하다. 인간의 갈등과 각성과 성장은 결코 유년에서 성인으로 전이되는 과정에서만 일어나는 과도적 현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장은 곧 ‘인간 현상’이다.     


따라서 반납하고 싶은 것은 18세만이 아니다. 30세일 수도, 40세일 수도 있다. 때로는 자신의 전 인생을 반납하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러나 사춘기의 치기로 가득한 17세, 입시라는 현실의 이름으로 모든 것이 매몰되는 19세, 그 사이 나이 18세를 반납할 이유는 특별히 궁금하다.     


이런 특별한 궁금증은 사실 오래전 보았던 한 방송 때문이다. 십여 년 전, 영국 BBC는 인간의 인생에 전체를 조망하는 대규모의 특집을 방영한 적이 있었는데,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실험이 진행됐었다. 사춘기 아이들과 성인들에게 ‘남녀’라는 단어를 보여주며, 연상되는 단어를 말하라고 하는 실험이었다.     


성인들은 주로 ‘사랑’, ‘애정’, ‘결혼’, ‘가족’과 같은 이차적 단어로 대답했지만, 사춘기 아이들은 ‘섹스’, ‘임신’, ‘키스’ 등과 같은 생물학적이고 일차적인 단어들을 연상해 냈다. 뇌과학자들은 이러한 결과를 사춘기에 일어나는 뇌세포의 생몰로 해석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사춘기가 되면 반복적으로 사용되어 확고해진 부분을 제외된 뇌세포는 소멸한다. 소멸하여 텅 빈 곳에 새로운 세포들이 자라나서 다시 네트워크를 구성하기까지의 과정에서 소위 ‘파충류의 뇌’를 지닌 사춘기 아이들은 방황하고 저항하며 분노한다.      


이러한 과학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진정 궁금한 것은 이성으로 뒤범벅된 어른들의 정돈된 언어가 아니라 18세의 뇌세포들이 들려주는 날것의 이야기이다. 그들의 두려움, 외로움, 암흑과 같은 텅 빈 공간 속에서 살아남은 기억의 잔재들, 그 무지막지한 미지의 공포들 말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김혜정 작가의 소설 ‘18세를 반납합니다.’를 읽으면서, 이성의 실타래를 풀지 않고 오로지 감각으로 받아들일 준비를 처음부터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이 소설은 다섯 가지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인터넷에 돌고 있는 서평을 찾아보면, ‘52Hz’는 사춘기 성 정체성의 문제를, ‘봄이 지나가다’는 왜곡되고 거짓된 관계를 극복해 가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소희’는 외로움에 지친 타자의 삶에 대한 책임감에 관한 이야기라고 쓰여 있다.     


한편, ‘퍼니랜드’는 내 안에 갇힌 자아를 탈출시켜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찾아 떠나는 여정을 그렸다고 했고, ‘유자 마들렌’은 강퍅한 현실 속에서 피는 꽃과 같은 청춘을 묘사했으며, ‘청개구리 심야식당’은 집을 떠나 방황하는 아이들에게 대한 따듯한 환대를 그렸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식상한 문학 비평(?)이야말로 독자의 편견이 투사된 것은 아닐까?. 차라리 ’ 파충류의 뇌‘, 사춘기의 텅 빈 머릿속에 살아남은 소규모의 뇌로 감지되는 감각의 언어가 더 역동적이지는 않을까?     


그래서 흔히 말하는 ’ 느낌적인 느낌(?)’으로 이 소설들을 말하자면, ’ 52Hz‘ 는 분홍빛, ’ 봄이 지나가다 ‘는 회색빛, ’ 소희‘는 보랏빛. ‘퍼니랜드’는 푸른빛이고 ’ 유자 마들린‘이 유잣빛이라면 ’ 청개구리 심야식당‘은 흰빛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는 다른 빛깔로 느껴질 것이다.     


어쩌면 이 모든 빛깔이 모여 투명하게 빛나는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가 경험했던 그 시절은 투명하지만 찬란했고, 고통스러웠지만 여전히 그리운 것인지 모른다. 그렇게 우리들의 18세는 투명하게 반납되었고, 그 위의 인생이 어떤 색깔로 그려졌을지는 별로 궁금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성장소설의 주제는 정체성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이 정체성은 인간의 근원적인 이중성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일본의 소설가 와타야 리사는 ‘발로 차 주고 싶은 등짝’이란 소설을 통해 사춘기 아이들의 이중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아무것도 가치 있는 게 없다.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모두에게 주목받고 싶고, 생의 한가운데에 선 주인공이 되고 싶어 진다.”     


18세의 상처와 아픔을 반납한다니 속이 후련하다고 표현한 이 소설 속 아이들의 말속에도 18세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 그리고 절대 후련하지 않은 회한들, 그 감정의 이중성이 느껴진다. 어쩌면 성장이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는 기로를 반복하여 지나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그러고 보면 우리가 잘 아는 성장소설 속 주인공들은 저마다의 이중성을 지니고 자신의 삶을 선택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나 조루즈 베르나노스의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와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그리고 ‘해리포터’까지, 심지어는 성서 속 다윗의 이야기가 모두 그랬다.


사춘기란 ‘파이 이야기’처럼 자신 안에 호랑이를 안고 사는 시기일지도 모른다. 호랑이와의 위험한 동거를 마치고 어느 이름 모를 모래톱에 호랑이를 내려놓듯이 그렇게 18세를 반납하지만, 이제는 망망대해를 홀로 여행해야 하는 쪽배를 탄 존재로 남게 된다.     


언젠가 유럽 출장 중에 거리에서 두 손을 꼭 잡고 걸어가던 두 명의 여자아이들을 본 적이 있다. 많아 보아야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아이 중 한 명은 누가 보아도 남성성이 넘쳐흐르는 여자아이였다. 다른 여자아이는 연신 한 손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었고, 그 와중에도 나머지 한 손은 남성성 가득한 아이의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슬픔이 그들 두 명의 어깨에 걸려있었다. 물론 내가 알 수 없는 세계의 슬픔이었다. 사춘기의 아픔일까? 성 소수자들의 애환일까? 아니면 그것이 복합된 슬픔일까? 내가 걸어가는 10m 앞에는 그렇게 내가 도무지 알 수 없는 세계가 걸어가고 있었다.      


영국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줄리언 바지니는 자신의 책을 통해 ‘성 정체성’이야말로 모든 정체성의 기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온갖 사회적 비난과 편견을 무릅쓰고도 성전환 수술을 하거나 커밍아웃을 감행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 양보할 수 없는 정체성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정체성의 근간에는 존재의 이중성, 또는 다중성이 자리하고 있다. 두 개를 견딜 수 없는 세상, 여러 개를 허용하지 않는 세계, 뇌의 소멸과 생성, 그리고 과도기라는 시간, 18세가 버리고 넘어야 할 정체성의 위기이다.      


‘18세를 반납합니다’ 이 소설을 읽고 있는 지금, 남도에는 벌써 벚꽃이 피고 있다. 아직 만개하지 못해 오히려 여문 봉오리가 조금씩 벌어지고 있는데, 조금 있으면 검은색 가지들을 가릴 정도로 만개할 것이다. 겨울이 가고 있고, 계절은 끊임없이 반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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