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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인순 Mar 18. 2020

‘빅 픽쳐’ 사고하는 인간

책 속의 사람들

빅 픽쳐

“우리 인간은 자연계의 무심한 섭리를 통해 빚어졌지만, 사유하고 번영하며 무서울 정도로 복잡한 세상과 어울려 살아갈 줄 아는 멋진 진흙 덩어리다. 이런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재료들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물질적 토대는 때로는 비참한 것이고 우리를 실망시키기에 충분한 것일 수 있다. 따라서 가끔 재료의 영향력을 무시하거나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싶어 질 때도 있다. 그러나 세상을 해석하는데 인간의 자연적 특성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반면 인간에게 물질로부터 기인하는 성향과 욕구가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물질적 토대 역시도 고정된 것은 아니다. 성향과 욕구는 타고난 측면이 있지만 살아가면서 충분히 변화할 수 있는 인간의 특질이며, 그 특질은 사회구조와 유기 호흡을 한다.     


이 두 가지 양면성, 즉 ‘사유하고 번영하며 무서울 정도로 복잡한 세상’과 ‘멋진 진흙 덩어리’로서의 인간이 서로 호흡하고 행복과 불행을 공유하는 방식에 대한 조화로운 사고가 이론물리학자 션 캐럴이 이 책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의 중심이다.     


이 책, ‘빅 픽쳐 (The big picture)’는 물질이라는 기저의 물리적 실체에서 출발하여 물리학, 생물학, 심리학이라는 객관적 사실로 나아가는 과정, 그리고 도덕, 미학, 의미라는 구상된 주관들을 넘어 에테르, 플로지스톤, 유니콘과 같은 환상의 세계로 도달하는 인간의 사고체계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이는 칼 세이건 이후 수많은 인간 담론의 주제가 된 ‘빅 히스토리 (The big history)’와 비견되는데, 빅 히스토리를 ‘역사 이전의 역사’에서 탈인류 (The post humanism)'을 포함하는 역사적 서술이라고 한다면, 빅 픽쳐는 물질에서 환상에 이르는 인간 의식과 사고의 체계에 대한 고찰과 성찰이라고 할 수 있다.      


고흐의 그림을 예로 들어 이를 설명할 수 있다. 고흐가 바라보는 세상과 꿈꾸는 환상은 푸른색과 황금색의 조화와 환상적인 붓질로 캠퍼스 위에 표현된다. 그렇지만 고흐는 자신이 보고 상상하는 세상을 표현하기 위해 특정한 물감에 병적으로 집착하기도 했었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작곡하거나, 건축물을 디자인하거나, 요리를 만들거나, 그 어떤 창작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머릿속에 재료에 대한 구체적 상상이 없이는 완성할 수 없다. 반면 재료의 풍미가 조리법에 따라 다른 맛으로 구현되고, 조화되듯, 창작이란 자체는 재료를 변형시키는 일련의 작업이기도 하다.     


창작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고체계 또한 재료에서 시작하여 추론으로 진행되고 때로는 합리적 추론을 넘어 환상에 이르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주관적이고 객관적인 그 어떤 것도 배제되거나 무시될 수 없다.      


때문에 이 부분에서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해석이다.”라는 니체의 말을 두 가지 측면에서 반박하게 된다. 첫째, 사실보다 해석이 중요하지만,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해석은 무중력 상태에서의 방향 잃은 유영과 같다.     


둘째, 사실을 해석과 비교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사실은 사실이고 해석은 해석이다. 어느 것이 어느 것보다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론물리학자 션 캐럴은 빅 픽쳐라는 단어를 도입하여 우주를 구성하는 재료와 원리에 대한 과학적 지식뿐만 아니라 그것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가져야 할 자세와 인식, 그리고 태도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이를 법률, 사회 윤리학으로까지 확장하고 있다.     


사고와 인식에 대한 다양한 주제로 구성된 책에서 저자가 최종적으로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추정해 본다면, “불확실성을 인정하라!”이다. 영원하지 않은 인생, 욕망을 안고 살아가는 인간이 현실에서 삶의 목적과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조화로운 사고가 필요한데, 불확실성에 대한 인정이야말로 조화로운 사고의 출발이 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러한 조화로운 사고를 ‘시적 자연주의’라는 단어로 정의한다. 여기서 ‘시적’이라는 단어는 하나의 주제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논한다는 뜻이다. 전통적으로 ‘자연주의’란 자연만이 유일한 설명의 도구라고 생각하는 방식임을 고려할 때, 시적 자연주의란 다양성과 유일성의 상보적 개념으로 정의될 수 있다.      


‘시적 자연주의’를 강조하는 저자의 과학적 세계관 속에는 인생의 의미를 찾아보려는 다양한 노력이 담겨있다. 이는 과학적 세계관이란 어떤 과학적 결과도 절대적 진리가 아님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는 저자의 이야기 속에서도 엿볼 수 있다.


총 6부로 구성된 이 책에서 특별히 관심을 끌게 되는 것은 ‘이해하다’라는 소제목으로 쓰인 2부다. 저자는 2부에서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떠한 사고체계와 사유방식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단정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내면의 경험을 뇌에서 일어나는 일을 설명하는 하나의 화법으로 여겨야 한다. 이 화법은 해당 영역 안에서 분명한 진실이다. 이성을 가진 존재로서 인간이 자유의지로 하는 선택을 논할 때도 말이다.”     


이 말이 뜻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고차원적인 사유를 하던, 또 사회의 구조에 대한 심층적이고 체계적인 분석을 하던, 그 바탕에 있는 물질적 기반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고 저자가 자연주의, 즉 물질적 결정론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애정과 소망이 있다. 그것이 진화나 교육을 통해 길러진 것인지 아니면 환경에 의해 부여받은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의 당면 과제는 나의 애정과 소망을 타인의 그것과 조화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다시 말해 물질로서 뇌에서 일어나는 일과 인간의 애정과 소망의 실현을 조화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당연히 인간의 생물학적 진화나 교육적 성과, 그리고 구조적 환경에 대해 조화로운 사고 능력을 갖추는 지루한 작업을 해나가야 한다. 그것은 내가 공산주의나 지독한 자본주의자일지라도, 또는 페미니스트나 자연주의일지라도 예외일 수 없다.     


저자는 이러한 조화에 대한 대표적인 예로서 지도와 교통 상황을 비교하고 있다. 우리가 정작 알고 싶은 것은 교통 상황이지만 교통 상황을 제대로 설명해 내기 위해서는 지도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여기서 지도가 사실이나 물질이라면 교통 상황은 해석이자 추론이 된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면 교통 상황이란 주거의 밀집도와 분포, 자동차 보유량과 도로 점유율 등과 같은 각종 사회구조와 이벤트에 좌우되는 것이고, 좀 더 들어가 보면 이러한 사회구조와 이벤트 역시 각각의 물리적 조건에 의해 제한된다. 결국, 사실과 해석은 불가분의 관계로 얽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석하는 자, 생각하는 존재, 판단하는 주체로서 우리가 가져야 할 일차적인 자세는 어떤 것이어야 할까? 그것은 바로 열려있는 사고이다. 저자 션 캐럴은 이론물리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수학적 접근이나 과학적 이론의 절대성을 신봉하지는 않는다. 이 세상의 모든 진실은 일정 부분 형이상학적인 추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완전한 증거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것은 신뢰도가 높고 또 어떤 것은 불확실성이 더 클 뿐이다. 이것은 우리가 소망할 수 있는 최선이면서 세상이 우리에게 허락해 준 방식이기도 하다. 인생은 짧고, 그 짧은 인생 동안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     


‘열려있는 사고’는 결코 과학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격언이 아니다. 진화론자든 사회학자든, 또는 심리학자나 법률가든 자신의 학문적 분야의 특수성을 모든 것에 환원시키고자 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극단적’이란 단어를 사용하여 비판해야 한다.     


최근 한국 사회의 논쟁을 한마디로 정의하라고 하면 ‘증거 전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증거란 진실을 가운데 둔 논쟁이자, 공방이다. “확실한 근거를 대라!”, “증거가 있느냐?”라는 질문을 들을 때마다 “도대체 어떤 사건에 대한 증거란 무엇을 뜻하는가?”라는 질문이 떠 오른다.     


증거에 의한 처벌이 가능한 이유는 법이 존재하기 때문인데,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법이란 것도 우리가 소망할 수 있는 최선이자, 세상이 우리에게 허락해 준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즉,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모든 사회운동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언제든지 착각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역사의 궤도는 정의의 방향으로만 구부러지는 매끄러운 철로가 아니다. 그런 까닭에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추정을 반복하고 검증하고 오류의 가능성을 인정하면서 더 나아지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그것이 스스로 부패하지 않는 유일한 대안이기 때문이다.      


이제 총선이 다가오고 있고, 우리는 투표를 해야 한다. 우리는 분명히 어떤 패턴의 작용에 따라 좀비처럼 투표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한계이다. 우리는 사실에 집중하기 힘들며, 오직 해석된 사실에 의해 결정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의 저자가 힘주어 강조한 인식과 사고의 문제를 되짚어서 성찰하고 반성한다고 해도, 우리의 굳어진 생각을 바꾸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때문에, 저자의 다음과 같은 말은 위안이 된다.     


“우리는 각자 어느 쪽으로든 어느 만큼은 자신이 기울어져 있음을 잊지 않으면서 늘 증거를 객관적으로 보려고 애쓰면 된다. 이것이 광막한 우주에서 코딱지만 한 행성을 보금자리 삼아 연명하는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최선일 것이다.”     


과학자들이 상자 안의 모든 원자가 어떻게 행동할지를 알지라도 계를 유동적으로 해석되어야 하는 과제는 여전히 남아있는 것처럼, 인간과 사회를 연구하는 사회학자나 운동가들이 인간 사회의 개개인 행동 특징을 이해한다고 해서 그 집단이 어떤 유형의 유기체적 동태를 지녔는지를 전부 이해했다고 볼 수는 없다.      


우리는 언제든 틀릴 수 있다. 따라서 늘 이웃의 증거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상대 논리에 귀 기울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사고가 패턴화 되어 있지 않은지에 대해서 늘 경계해야 한다. 사고의 패턴화는 근육의 섬유화가 근육의 기능을 상실시키듯이 우리의 사고 기능을 망가뜨리기 때문이다.     


이 책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다시 한번 정리하자면 “자신의 신념에 대해 확신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성과 믿음, 자연주의와 사회 구조론, 심리학과 철학, 직관과 추론, 의미론과 지칭론, 유명론과 실재론, 인지를 주제로 하는 어떤 이론도 스스로 망가질 준비를 하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것이 우리의 불완전한 최선이다.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누가복음 2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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