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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인순 Jan 09. 2020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

책 속의 사람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

1세기 중반, 그리스 아테네에서 동역자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던 바울은 판테온 앞에서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과 논쟁을 벌였다. 바울은 판테온으로 상징되는 범신론적 신관을 가지고 있던 스토아 철학자들에게 범재신론으로 맞섰다.   

   

“내가 다니면서, 여러분이 예배하는 대상들을 살펴보는 가운데,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제단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이 알지 못하고 예배하는 그 대상을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겠습니다.” (사도행전 17:23)      


그리스 신화 속 신이 ‘natura naturata (생성된 자연)’이라면, 바울이 설파하고자 했던 유대의 신은 ‘natura naturans (생성하는 자연)’이다. 훗날 스피노자는 범신론자라는 기독교들의 비판에 대해 자신은 창조된 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신을 믿는다는 말로 응수하기도 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아인슈타인 역시도 자신이 믿는 신이 바로 스피노자가 말한 그 신이라고 말했다.      


바울이 아테네에서 ‘그리스의 신’과 ‘유대의 신’에 대한 충동적 논쟁을 했다면, 2세기 교부들은 신화(Mythology)와 구분되는 신학(Theology)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냈다. 이후 기독교화된 서방의 지식 세계 속에서 신화와 신학, 즉 성서의 언어를 놓고 이어진 논쟁은 슐라이어마허의 근대 해석학을 넘어 볼트만의 탈 신화화에까지 이르렀다.      


르네 지라르가 이 책을 포함하여 ‘폭력과 성스러움, ’ 희생양‘ 등, 자신의 책을 통해 집요하게 끌고 가는 담론 역시도 겉으로 보기에는 ‘신화’와 ‘성서’의 차이에 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좀 더 들어가 보면 지라르는 신화와 성서의 언어에 대한 문학평론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각 시대에 적응이 가능한 사회인류학적 담론으로까지 자신의 이론을 확장하고 있다.      


르네 지라르

지라르의 사회인류학적 담론의 핵심에는 신화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카타르시스지만, 사회적 폭력, 즉 모방의 작동을 멈추게 하는 것은 결국 성서의 유산이라는 논리가 자리 잡고 있다. 지라르는 대표적 사례로 니체의 이중 유산을 지목한다.      


지라르에 따르면, 니체가 인류에 던져준 첫 번째 유산은 디오니소스 신화에서 나오는 집단 폭력이 예수 사건에 가해진 폭력과 같은 유형이라는 발견이다. 그러나 두 번째 유산은 이러한 발견에도 불구하고 니체가 폭력의 본질을 간과함으로써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잘못된 메시지를 전달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폭력의 본질은 모방이다. 모방이란 정체된 상태가 아닌 역동적이고 전파되고, 전염되는 특질 그 자체이기 때문에 위험하고, 또 ‘유산’이라고 불릴만한 것이 된다. 사탄이 모방의 인 격화된 언어라는 사실을 놓침으로써 니체는 디오니소스적 폭력을 찬양했고, 이는 곧 나치 운동의 정신적 핵심이 되었다는 것이 지라르의 주장이다.     


과거 2차 대전 이래 유럽 사회에 만연한 허무주의와 니체 편향적 지적 흐름이 나치의 폭력적 모험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니체를 구원했지만, 나치의 극악무도함을 해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글의 저자는 여전히 니체며, 따라서 니체는 나치 운동의 정신적 핵심을 표현한 사람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니체는 모방적 경쟁 관계도 못 보고 그것의 전염성도 못 보고 있다. 그 때문에 그는 복음서의 입장이 강자 앞에 처한 약자의 편을 드는 편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폭력의 전염에 항거하는 영웅적인 저항이며, 악마적이고 디오니소스적인 폭력의 군중 심리에 감히 반대하는 소수의 선견지명이라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라르의 말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복음서와 신화에 관한 그의 대표적 담론, 즉 ‘희생양 메커니즘’은 니체와 나치를 넘어 법과 제도, 폭력과 전쟁, 신자유주의와 경쟁, 심지어 광주와 세월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논쟁으로 확대될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그의 글을 읽는 독자들은 군사, 정치, 경제, 스포츠, 성, 예술, 지성, 종교 등 모방적 경쟁이 존재하는 모든 길목에 놓인 스캔들 속에서 희생양 메커니즘을 발견할 수 있는 사고의 틀이라는 유산을 물려받게 된다.     


표지를 넘기기 전 먼저, 책의 제목에서 ‘사탄’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성서에서 맘몬이 

재물이나 돈을 의인화한 것이고, 벨리알이 어리석음을 인 격화한 것처럼, ‘사탄’은 바로 모방을 신격화한 것이다.      


지라르에 따르면 사탄은 모방을 통해서 자연과 역사에 관여할 뿐만 아니라, 모방 아닌 다른 아무것도 아니기에 모방 자체이다. 따라서 이 책의 제목은 다음과 같이 바꾸어 쓸 수 있다.      


“나는 모방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          


예수 사건의 재구성

AD 33년 4월 3일 새벽녘, 달빛 밝은 예루살렘의 상부 도시, 원로 제사장 안나스의 집으로 한 청년이 끌려왔다. 새벽부터 소집된 산헤드린 회원들은 그 청년을 둘러쌌다. 청년은 자신이 한 말로 인해 ‘신성 모독죄’로 고발되었고, 종교 법정에 의해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그러나 로마의 식민지였던 유대의 법정은 사행을 집행할 수 없었기에, 청년은 마침 명절 행사를 위해 예루살렘에 내려와 있던 폰티악 출신, 빌라도라는 이름의 총독에게 보내졌다. 사건을 넘겨받은 총독은 사건의 본질이 유대 종교에 관한 논쟁이라 판단하고, 그 청년을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에게 보냈다.      


사건을 인계받은 헤롯 안티파스 역시도 그 청년에게서 아무런 죄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진리란 무엇이냐?”라는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듣지 못한 채, 청년을 다시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다. 빌라도에 의한 두 번째 재판이자 최후의 재판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모여든 군중은 빌라도에게 사형 선고 내릴 것을 강요했다.      


군중들이 고발했던 청년의 죄목은 “신성 모독”에서 “황제에 대한 반역’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청년은 유대의 종교 재판에서 로마 법정으로, 로마 법정에서 유대의 법정으로, 그리고 다시 로마의 법정으로, 끌려다닌 후, 골고다 언덕 위에서 십자가에 달렸다.      


AD 33년 4월 3일 유월절 전날 새벽부터 오후까지 일어났던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청년의 죽음은 이후 이어지는 부활 사건과 함께 2천 년 서방 세계를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종교적 서사가 되었다.      


겉으로 보기에 이 사법 살인 사건에 등장하는 피의자는 모두 3명이다. 산헤드린, 헤롯 안티파스, 그리고 로마 총독 빌라도. 훗날 로마화 된, 기독교는 신조를 통해 이 살해 사건의 주범을 빌라도로 확정했다.      


하지만 이 사건의 진정한 주범은 바로 AD 33년 4월 3일 새벽에 모였던 군중들이었다. 그리고 그날 폭력적인 군중들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바로 모방이었다. 모방이라는 만장일치의 의사결정 구조를 통과하여 그날 모든 원수가 서로 화해하고 친구가 되었다. 다시 말해 희생양으로 인해 극악으로 치달리던 사회적 갈등 관계가 해소된 것이다.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눅 23:12)            


신화와 성서

지라르는 신화나 성서에 나오는 모든 폭력 사건들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사건들이 모든 문화권에서 유사한 모습으로 반복되며, 이러한 유형의 갈등이 인간 사회에 보편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을 들고 있다.     


또 한편으로 지라르는 성서와 신화를 구분하는데, 그에 따르면 신화는 박해자에게는 죄가 없고 희생물에 죄가 있다고 표현함으로써 진실을 왜곡시키고 있지만, 성서는 집단 폭력을 날것 자체로 기술함으로써 신화라는 양식이 폭력 사건에 긍정적인 의미가 부여되는 것 자체를 거부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지라르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을 통해 신화와 성서의 서술을 비교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에페소스라는 고대 도시를 배경으로 한 아폴로니우스의 신화이다. 신화에 따르면 아폴로니우스는 페스트가 창궐한 도시 에페소스의 한 극장 안으로 군중들을 불러 모으고 그 앞에 거지 한 명을 세운 후, 군중들에게 돌을 던지라고 명령했다.      


돌을 맞아 죽어가던 거지의 눈은 사탄의 눈으로 변했고, 그의 죽음으로 인해 에페소스는 페스트로부터 구원을 받았다. 지라르는 이 이야기 속의 페스트는 일종의 사회적 갈등을 상징하며, 거지의 눈이 사탄의 눈으로 변했다는 표현은 군중들의 분노를 정당화하기 위한 서술 방법이라고 분석했다.     


이와는 상반된 두 번째 이야기는 예수와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끌려 온 여인을 두고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묻는 유대 남성들을 향해 예수는 아폴로니우스와 같은 명령을 내렸다. 여인을 향해 돌을 던져라. 그러나 예수의 명령에는 전제가 붙었다. 첫 번째 돌을 던질 자는 반드시 ‘죄 없는 자’라 야 한다는 전제였다. 이런 전제를 통해 예수는 모방 폭력의 근원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돌을 던지라고 명령한 아폴로니우스와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지라고 말한 예수를 비교함으로써 지라르는 모방에 대한 신화와 성서의 극명한 차이를 보여준다. 뒤에 이야기되겠지만 예수가 말한 첫 번째 돌의 전제, 즉 ‘죄 없는 자’라는 전제는 폭력을 원천적으로 차단해야 할 임무를 지닌 현대의 사법제도에도 적용된다.     


지라르는 아폴로니우스에 이어 오이디푸스의 추방을 예로 들면서 신화의 서술적 특징, 즉 주인공이 매번 정당화되는 서술과 성서의 서술 방법, 즉 일관성 있게 집단 폭력을 정당화하지 않는 서술 방법을 비교한다.     


“첫 번째 방법은 서술자 자신이 아무런 의심도 없이 거기에 가담하고 있으므로 모방이 일어난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서술자는 거짓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스스로는 모든 희생양의 유죄를 진정으로 믿기 때문에 그 거짓을 절대로 바로잡지 못한다. (...) 두 번째는 모방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방법이다. 서술자 자신이 그 모방에 가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방법을 취하는 사람들은 사건을 있는 그대로 진실하게 묘사할 수 있다. 여기서는 부당하게 처벌받는 희생양들이 복권된다. 이런 방법에 속하는 것은 구약과 복음서뿐이다.”     


지라르가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성서적 표현의 특성에 대해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구약의 사건이 있다. 바로 사사의 시대라고 불리는 모방 폭력이 난무했던 시대의 이야기다. 특히 레위인으로부터 발발한 한 엽기적인 사건은 사사 시대의 대미를 장식한다. 이른바 ‘기브아 애첩 살인 사건’이다.           


기브아 애첩 살인 사건으로 보는 폭력의 서사

사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한 레위인이 처갓집을 방문하여 바람나 도망쳤던 애첩을 데리고 돌아오고 있었다. 늦은 저녁 기브아 산지에 도착한 레위인과 애첩은 길에서 만난 한 동향 노인의 집에 머물렀다. 베냐민 지파에 속한 불량배들이 이들을 눈여겨보았고, 한밤중에 노인의 집을 찾아와 레위인을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동성에 의한 성폭행을 우려한 노인은 레위인 대신에 자신의 처녀 딸과 레위인의 애첩을 내주었고, 베냐민 지파의 불량배들에게 밤새 성폭행을 당한 애첩은 새벽녘에 풀려났으나 노인의 집 앞에서 죽고 말았다. 격분한 레위인은 죽은 애첩의 시체를 12등분으로 나누어 이스라엘 모든 지파에게 보내는 것으로 이 사건의 전말을 고발했다.      


이스라엘의 12 지파 중,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모든 지파가 연합하여 미스바에 모였고, 결의에 따라 베냐민 지파를 향한 보복 전쟁을 시작했다. 세 번의 전투 끝에 600명의 장정을 제외한 모든 베냐민 지파를 도살한 연합 지파는 폭력의 광풍이 지나고 난 후에야 자신들이 한 일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그들은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기는커녕, 다음과 같이 자신들이 저지른 보복 전쟁을 후회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스라엘에 이런 일이 생겨서 오늘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없어지게 하시나이까” (삿 31:3)     


이 서사의 결말은 매우 이례적이다. 전쟁에서 승리한 연합 지파는 베냐민 지파가 멸절되는 것을 막기 위해 살아남은 600명의 베냐민 장정들에게 처녀들을 보내줬다.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던 길르앗 야베스에서 400명, 실로에서 열린 포도원 축제에 참석했던 200명의 처녀를 강제로 보낸 것이다.     


이 서사 속에는 제사장 직분을 맡은 레위인이 애첩이 있다는 사실, 그 애첩이 바람이 나서 도망갔다는 상황, 동성 폭력을 요구하는 베냐민 지파의 불량배들, 불량배들에게 딸과 레위인의 애첩을 내준 노인의 행동, 레위인의 애첩과 노인의 딸에 대한 성폭행과 애첩의 사망, 애첩의 시신 유기와 이를 통한 선전 선동, 보복 전쟁과 베냐민 지파의 절멸 위기, 베냐민 지파에 강제로 보내진 여성 등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스캔들이 망라되어있다.     


지라르의 표현에 따르면 이는 “유죄인 희생양과 무죄인 박해자가 무죄인 희생양과 유죄인 박해자로 뒤바뀌는” 전형적 모방의 사례이다. 이 이야기 속에는 고대 이스라엘 사회의 총체적 모순과 도덕적 타락이 고발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기브아 애첩 살해 사건에서 성서는 어떠한 가치 평가도 하지 않고 날 것 그대로의 인간의 폭력성을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 지라르는 이러한 서술 방식이 신화적 서술로부터 성서적 서술을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차이라고 말한다. 이 서술에 대한 해석은 오로지 독자의 몫이다.          


희생제의 와 파라클리트 (보혜사)

신화적 표현이든, 성서적 표현이든 고대 사회에는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작동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법과 희생제의 이다. 희생제의에는 희생양이 필요하고, 위의 사건에서는 600명의 죄 없는 여성이 희생양이 되었다.     


개인적 갈등은 법으로 해소할 수 있지만, 사회적 갈등은 법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을 때가 있다. 갈등의 확산, 폭력의 모방적 전염성 때문이다. 따라서 희생제의가 필요했다. 법이 정의라면 희생제의는 화해이며, 고대 사회에서 희생제의는 사제들에 의해 진행되는 성스러운 행사였다.      


기독교의 예배를 비롯한 유교의 제사, 불교의 예불 등은 고대 희생제의의 변형이거나 발전이라고 해석되기도 한다. 무언가를 희생시켜야만 하는 희생제의는 사회적으로 용인되고 정당화된 폭력이기에 성스럽게 여겨질 수 있었다.      


지라르가 ‘폭력과 성스러움’이란 책에서 설파한 이러한 폭력의 정당성은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일까? 그것은 희생제의가 더 큰 폭력을 예방할 수 있는 작은 폭력이어야 한다는 전제에서 온다. 최소한의 희생을 통해 보복과 폭력의 확산을 막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종교는 늘 좋은 폭력을 수반한다.      


고대 사회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희생제의의 결과이다. 그것은 악을 통한 총체적 선이 구현되는 과정이다. 현재의 종교 행위 속에서도 희생제의의 의도한 결과, 효과 및 희망을 짐작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장치들이 발견된다. 예를 들자면, 기독교인들이 매주 드리는 예배이다.      


지라르는 ‘희생양’이라는 책을 통해, 오늘날 예배로 대변되는 희생제의가 가지고 있는 세 가지 사회적 기능을 제시했는데, 첫째는 사람들이 희생제의에 참여함으로써 뭔가 가치 있고 보상받을 수 있는 행위를 했다고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희생제의 자체가 위기를 극복한 상황을 재현한 것이기 때문에 희생제의를 통해 위기를 극복했을 때와 같이 느낀다는 것이다.      


둘째는 희생제의에 참여한 구성원들이 느끼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다. 말하자면, 희생제의에 참여함으로써 카타르시스에 빠지게 되고, 그렇게 됨으로써 격정과 죄책감 등이 일정 부분 제거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희생제의가 가지는 사회적 기능은 그 자체가 집단적 사건으로서 한 집단의 일체감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희생제의는 사라졌다. 그렇다면 고대 사회와 같은 희생제의 없이 사탄이란 이름을 가진 모방의 강력한 전염성에서 우리를 분리해 줄 수 있는 것, 신화 속에 매몰된 거짓된 서술에서 해방되어 진실한 서술이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예배일까? 그렇기도 하다.      


그러나 지라르는 이 책에서 더 근본적인 것을 지목했는데, 그것이 바로 ‘파라클리트(paraclet)’이다. 이 말의 기원은 ‘파라클레이토스(parakleitos)’인데, 한글 성경에서는 오랫동안 ‘보혜사’로 번역되고 있다. 지라르는 기독교의 탄생을 사탄에 대한 파라클리트의 승리라고 못 받았다.     


“기독교의 탄생은 사탄에 대한 파라클리트의 승리인데, 사탄이라는 이 이름은 원래 피고의 유죄를 입증하는 의무를 진 ‘법정의 기소자’를 의미한다. 이것은 복음서가 사탄을 모든 신화의 책임자로 보는 이유 중의 하나다.”     

고대 종교 또는 고대 신화는 희생양이 유죄라고, 즉 희생 염소라고 가르치지만, 이와는 달리 예수 사건을 통해 희생양의 무고함을 계시한 최초의 종교로서 기독교는 희생양 없이 사회적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하며, 이를 통해 참된 평화와 정의를 이루는 길을 보여주어야 한다.          


사법제도와 인지 불능

재판 제도가 개인을 초월하여 있기에 그 뿌리는 종교적이며, 따라서 오늘날의 사법제도는 본질적으로 종교적 색채를 띨 수밖에 없다고 지라르는 믿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의 눈에 초월적 지위를 가진 것으로 보일수록 재판 제도가 더 잘 작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고대 사회에서 희생제의의 목적에 대해서도 지라르는 공동체 전체를 그 내부적 폭력으로부터 보호함으로써 사회적 유대를 강화하고 조화를 복구하려는 데 있으며, 그러한 희생제의의 현대적 메커니즘이 바로 ‘사법제도’라고 말한 바 있다,     


지라르에 따르면 재판을 중심으로 하는 사법제도가 없는 사회라면, 그 속에 희생양 메커니즘이 성행할 수밖에 없으며, 사법제도가 그 기능을 다 하기 위해서는 재판관이 내리는 판결이라는 이름의 폭력이 판결의 대상자를 제외한 다른 모든 구성원에게는 폭력이 아닌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소위 ‘인지 불능’ 상태가 되어야 한다.      


한 사회의 사법제도가 가지고 있는 가장 핵심적 기능은 법과 원칙에 따른 징벌이라는 폭력을 사용하여 사회적 복수의 연결 고리를 끊어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지라르가 주장하는 고대 사회의 희생제의를 오늘날의 사법제도와 재판 행위가 대신할 수 있는 이유이다.     


현대의 사법제도는 사회로부터 범죄자와 범죄 행위를 차단하여 대중을 보호하는 한편, 동시에 범죄자에 대한 군중의 폭력을 사전에 차단하는 기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재판 제도는 복수를 특수 영역의 당국만이 실행하는 단 하나의 보복으로 한정시킴으로써 복수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하고, 사법 당국은 항상 자신의 결정을 복수의 ‘최종 결정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희생양)     


이러한 관점에서 예수 사건을 볼 때, 헤롯이나 빌라도 모두 사법제도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의 범죄 행위에 대해 최종 결정을 내리지도 않았고, 군중으로부터 죄 없는 자를 보호하지도 못했다. 오히려 그들은 군중의 불법적 보복 행위를 합법적 판결로 정당화시켰을 뿐이다.     


기독교의 전통은 구약에 기술된 유대교의 전통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유대교의 법전이라고 할 수 있는 신명기에는 사법 체계의 궁극적 목적을 설명하고 있다. 바로 “죄 없는 자의 피가 흐르지 않게 하라!”라는 명령이다.     


“주의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서 죄 없는 피가 흐르지 않게 하소서.' 이렇게 하면 그들은 그 피의 책임을 벗게 된다. 이렇게 너희는 너희 가운데서 죄 없는 자의 피를 흘리는 일을 송두리째 뿌리 뽑아야 한다.” (신명기 21 : 1-9)     


사법 체계는 기본적으로 폭력이다. 폭력을 향한 욕구는 다른 사람을 모방하려는 경쟁 상태에서 기인하는데, 폭력 그 자체가 본능적이기 때문에 피할 수 없을 뿐 만 아니라, 일단 폭력이 발생하면 연속적으로 확대 재생산된다.      


르네 지라르가 잘 지적했듯이 희생제의를 통해 예방되고 억제되던 폭력이 오늘날에는 사법제도를 통해 더 효과적으로 제어될 수 있다. 그리고 사법제도를 수립하고 유지하는 것은 국가 권력이다. 국가 권력은 사법제도를 통한 폭력을 합법화하고, 그 합법화된 폭력은 폭력의 악순환을 막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국가 권력이 정당화될 수 있을 때만 국가 권력의 폭력도 정당화될 수 있고 폭력의 확대를 막을 수 있다. 때문에, 정당화되지 못한 국가 권력에 대한 도전은 엄청난 폭력을 동반하게 된다.      


이른바 혁명은 국가 권력의 폭력을 또 다른 폭력으로 제어하고 새로운 국가 권력을 수립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국가 권력도 폭력을 제어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법적 판단을 무색하게 만들기도 하며, 견제되지 권력 자체의 횡포는 제어하기 힘들다.          


적폐 청산과 조국 사태그리고 검찰 개혁

지라르가 성서나 신화 사건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 찾아낸 모방과 복수의 메커니즘은 문재인 정부에서 추진되어왔던 ’ 적폐 청산’과 작년 8월부터 진행되어 온 조국 교수에 대한 검찰의 수사, 최근에 있었던 검찰 개혁, 그리고 이를 둘러싼 한국의 언론 속에서도 확인된다.     


특히나 조국 사태라 불리는 사건 속에서는 지라르가 주장한, 소위 희생양 구조가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그가 기소된 행위의 범죄 성립 여부나 도덕적 옳고 그름을 떠나서 정치 개혁, 검찰 개혁이라는 중차대한 사회적 갈등 국면에서 한 인간이 희생양 또는 희생 염소가 되어가는 이미지가 선명하기 때문이다.     


조국이 외교부 장관이나 문화부 장관이 아닌 법무부 장관에 임명된 것은 지라르가 ‘짝패’라고 지칭한 갈등 구조 속으로 검찰을 몰아넣었을 가능성이 크다. 법무부와 검찰은 사실상 사법제도라는 체제의 둥우리에서 알을 깨고 나온 권력의 근친 관계이기 때문이다.      


지라르에 따르면 이러한 ‘짝패 구조’는 치열한 경쟁 구도와 모방 본능을 작동시킨다. 형제나 쌍둥이, 근친 사이에서는 경쟁 관계로 인해 모방 본능이 더 강렬하게 발동하게 되고, 결국 질투와 원한, 선망 등으로 인해 폭력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조국 사태에 등장하는 행위 주체 역시 매우 복잡한 갈등 구조로 엮여 있다. 진보와 보수를 대표하는 정치 세력, 언론과 검찰, 그리고 진보 내부의 주체들, 개인과 집단, 집단과 집단 간 갈등은 정확히 모방과 폭력, 보복과 갈등 사이에서 작동하는 희생제의의 구조를 그대로 닮아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군중을 움직이는 언론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선한 의도를 가지고 행하는 폭력은 좋은 폭력이라 여기는 사회적 통념은 대부분 인지 불능으로 인해 생겨나는데, 언론의 목소리는 대중이 이러한 인지 불능 상태에 빠지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을 간파한 지라르는 희생양 메커니즘에 의한 폭력을 폭력이 아닌 것으로 여기는, 즉 그 정체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인지 불능의 상태에 빠져야 희생양 메커니즘 그 자체가 제대로 작동된다고 믿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희생양 메커니즘에서 폭력을 행하는 자는 그것이 살해인 줄은 알지만, 자신의 부당함에 대해서는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저는 ‘인지 불능’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또한, 저는 폭력의 무의식적 성격은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눅 23:34)라는 구절에 잘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사회적 갈등이 불가피한 것이라면, 폭력 자체를 금지하는 방법으로는 그것의 재생산을 막기 어렵다. 따라서 폭력을 향한 인간의 사회적 욕구가 충족되도록 이를 허용해주되 폭력에 대한 보복이 불가능한 대상, 즉 희생양을 통한 대리 폭력, 즉 희생제의가 필요하다. 이때, 희생제물, 즉, 희생양이 가지고 있는 필수적 특징은 폭력을 당하더라도 보복으로 대항할 수 없어야 한다.      


지라르는 희생양이 없어야 한다는 사람들이 생각에 오히려 반대한다. 그에 따르면 희생양은 사회를 파괴하지만, 또한 곧 재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희생양은 불멸의 존재며, 그런 의미에서 숭고한 존재라는 것이다.      


“신화의 끝에 가서 폭력적 만장일치가 공동체를 화해시킨다는 것과, 그리고 공동체 위기에 ‘책임이 있는’, 그래서 ‘죄가 있는’ 바로 그 희생양에게서 이런 화해의 힘이 나온다는 것을 알고 나면 이 모든 것이 설명될 수 있다. 그러므로 희생양은 변화를 두 번 겪는 셈이다. 첫 번째 변화는 해를 끼치는 부정적인 변화고, 두 번째 변화는 이로움을 주는 긍정적인 변화다.” (희생양)          


속죄양과 SNS

지라르는 속죄양의 개념을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폭력의 전이 현상으로까지 확대한다. 그는 속죄 의식에서 올리던 유대인 제의의 희생물인 염소에서 그 개념을 찾아냈는데, 이는 그 혐오감은 덜하지만, 전이의 원칙이 같다는 점에서 그리스의 파르마코스 제의와 본질에서 동일한 것이라 보았다.     


따라서 속죄양이라는 개념은 종교적 제의와 사회적 추방이라는 제도를 넘어서 제의화 되어 있지 않은 온갖 폭력의 집단적 전이 현상을 지칭하는 것이다. 폭력의 범주는 언론이나 사법제도가 발달한 오늘날에 있어서 그 작동의 수단이 더욱 다양화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사소한 뒷담화와 SNS의 댓글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SNS의 댓글로 인해 자살한 연예인들을 기억하고 있으며, 습관화된 뒷담화, 즉 대화에 참여한 모든 사람이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을 대상으로 퍼붓는 비난에 익숙하다. 없는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아 대화 참여자 간의 유대관계를 증대시키는 인류의 오랜 습관 역시도 일종의 속죄양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지라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집단의 구성원들은 그들의 ‘속죄양’을 아주 강하고 아주 진지하게 비난한다. 대개는 아주 어처구니없고 아주 사소한 사건으로 속죄양에 대한 거짓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하는데, 이런 거짓 여론은 모방의 회오리와 속죄양 메커니즘의 조금 완화된 형태라 할 수 있다.”     


지라르는 이러한 속죄양 현상이 오늘날에는 물리적인 폭력으로 나타나지 않고 ‘심리적인 폭력’으로 나타나는데, 이 폭력은 감추기가 더 쉽다고 강조한다. 그 이유로 폭력의 전이에 가담한다는 비난을 받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자신의 무고함을 진지하게 주장한다는 점을 들고 있다.           


사진 속 희생 염소들

헝가리 출신 유대인 사진작가 로버트 카파는 2차 세계 대전 중에 찍은 한 장의 사진을 남겼다. 사진 속, 프랑스 여인은 아무렇게나 잘려나간 머리카락을 가리지도 못한 채, 경찰에 의해 동네 밖으로 쫓겨나고 있다. 그녀의 가슴에는 아이가 안겨져 있다.      

그 아이는 아마도 독일군으로 짐작되는 남성과의 사이에서 난 아이일 것이다. 그녀가 프랑스를 배신하고 독일에 부역했던 매국노인지, 아니면 단순히 적국의 남자를 사랑했던 순수한 여인인지는 알 길이 없다. 다시 말해 그녀가 희생 염소인지, 아니면 희생양인지는 불분명하다.      


사진은 변명이나 정당화를 하지 않는다. 때문에, 그 서술 방법이 성서와 닮아있다. 날 것 그대로를 보여줌으로써 사실을 있는 대로 고발하고 있다. 보기에 따라 이 사진 속 피고인은 군중 들일 수도 있고 여인일 수도 있다. 단, 확실한 것은 그들의 사법제도가 군중들로부터 희생양을 보호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와는 다른 또 한 장의 사진이 있다. 1945년 4월 29일. 밀라노의 로레토 광장에 있는 한 정육점 건물에 걸려있던 몇 구의 시체를 짝은 사진이다. 시체는 광장에 모인 시민들의 돌팔매질 때문에 심하게 손상되어 있다.      


2차 대전이 끝날 무렵, 독일군으로 위장하고 스위스로의 탈출을 시도하던 무솔리니 일당이 파르티잔에게 체포되어 사살되었고, 그 시체가 로레토 광장에 거꾸로 매달린 것이다. 무솔리니의 시신 옆에는 그와 마지막까지 함께 했던 스물아홉 살 연하의 아름다운 여인 클라라 페타치의 참혹한 시체도 나란히 걸려있었다.      


일본 작가 이사카 코타르의 소설 ‘마왕’ 속에는 무솔리니의 마지막 애인 클라라의 ‘뒤집힌 치마’ 이야기가 나온다. 소설 속에서 클라라의 시체는 거꾸로 매달렸고, 그녀의 치마는 뒤집혀졌다. 군중들은 이를 관능적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한 사람이 시신에 다가갔다. 그리고 자신의 허리띠를 풀러 클라라의 치마를 묶어 주었다. 이사카 코타르에 의해서 회자되기 시작한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 역시 불분명하다. 애초에 파르티잔들이 그녀의 다리와 치마를 한데 묶어서 달아놓았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파르티잔의 사법제도든 이사카 코타르가 상상한 사법제도든, 중요한 것은 그들이 여인의 마지막 남은 인권을 보호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생각해 보면 언론이란 이런 ‘클라라의 뒤집힌 치마’와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 우리의 치마 속을 감추거나 들추거나.


오늘날 희생양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

지라르가 희생양 담론을 끌어내고 확대하는 이유에 관해서는 이 책 3부, ‘희생양에 대한 오늘날의 근심’에 기술되어있다. 이 글에서 그는 역사의 진보나 인권의 확대가 희생양 담론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같은 시대, 어딘가에는 희생양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살아가는 인생은 그렇지 않은 인생과 비교하여 확실히 다르다는 것이다.     


언젠가 동방정교회 출신 신부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세계에 대해서 상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러시아를 제외한 세계 각지에 있는 정교회 신도들이 과거 천년 동안 대부분 이등 시민으로 살아왔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등 시민으로서 사는 것의 의미를 아느냐고 물었었다.     


그가 말한 이등 시민으로 사는 것의 의미는 항상 인권의 문제를 안고 사는 것을 뜻했다. 사회적 소수자, 또는 이등 시민은 늘 그가 속한 사회의 인권 문제에 예민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연약하고 폭력에 대한 보복 수단이 없다. 때문에, 언제나 희생양이 될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사실상 이것이 희생양 담론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가장 중요한 의미이다.      


SNS에 달린 댓글 공격으로 자살한 연예인, 검찰의 조사를 받다가 자살한 관료나 기업인, 경쟁적인 권력으로부터 정치적 압박을 받는 짝패 구조 속의 인사들이나 정치인들, 그들을 둘러싼 희생양 메커니즘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예수가 던지라고 했던 그 돌은 언론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정의될 수 있다. 언론이란 이름의 돌은 과거 고대 사회의 희생제의가 가지고 있는 선한 의미, 즉 군중으로부터 범죄자를 보호하고, 죄 없는 자의 피 흘림을 방지하고자 했던 사회적 장치와 성스러운 폭력 체계를 송두리째 파괴하고 있다.     


지라르는 우리가 ‘인권’이라고 부르는 말의 핵심은 어떤 개인이나 집단도 그 사회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서부터 나온다고 강변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 자신도 이유, 없는 돌을 맞을 수 있다는 자각으로부터 사회 정의를 향한 메커니즘은 작동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본질에서 이기적인 우리는 자신이 처한 사회의 문제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거나, 스스로 박해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인정하는 사람들이 아니기에 늘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만 사회적 의무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만큼 우리 삶은 근본적으로 희생양에 의존하고 있는지 모른다.     


고대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히브리인들은 자신의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발라 학살을 피했다. 오늘날 수많은 위험에 노출된 우리 역시도 희생양을 통해 자신 속에 숨어있는 악과 대면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희생양이 뿌리는 피의 영역 속에서 안전할 수 있는 것이다.     


“고대 문명에서 자비라는 개념은 극히 제한된 집단 내부에만 해당하였다. 그리고 경계는 언제나 희생양으로 표시되었다. 모든 포유류는 자기 영역을 자신의 분비물로 표시하는데, 인간도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그들의 특별한 분비물이라 할 수 있을 희생양을 포유류의 영역 표시 같은 행위를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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