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하나가 에덴에서 흘러나와서 동산을 적시고, 에덴을 지나서는 네 줄기로 갈라져서 네 강을 이루었다. 첫째 강의 이름은 비손인데, 금이 나는 하월라 온 땅을 돌아서 흘렀다. 그 땅에서 나는 금은 질이 좋았다. 브돌라라는 향료와 홍옥수와 같은 보석도 거기에서 나왔다.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인데, 구스 온 땅을 돌아서 흘렀다. 셋째 강의 이름은 티그리스인데, 앗시라아의 동쪽으로 흘렀다. 넷째 강은 유프라테스이다.” (창세기 2:10~14)
기독교 성경은 구스(에티오피아)와 그의 아들 하월라(이집트)를 흐르는 두 개의 강, 그리고 메소포타미아를 구성하는 두 개의 강이 에덴으로부터 흘러나왔다고 기술하고 있다. 창세기에 따르면, 네 개의 강물이 흘러나와 두 개의 문명을 창조한 그 근원에 에덴이 있었고, 창조자가 그곳으로 인간을 데려감으로써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다.
창세기의 복합적 서사 속에서는 인간의 이름은 땅이 되고, 인간의 시간은 세대가 된다. 역사의 시원, 땅의 근원, 그리고 인간의 기원이 된 에덴은 신화와 역사로 엮어진 마술적 사실주의로 표현된 시공간이다. 따라서 창세기는 신화도 아니고 역사도 아니다. 만약에 그것이 역사이거나 신화였다면 그곳에 마술이 필요할 리 없다.
올가 토카르축의 강물은 창세기 속 에덴과는 반대로 흐른다. ‘태고의 시간’에서 흑강과 백강은 그 근원이 다르지만 두 개의 강은 방앗간 기슭에서 합쳐진다. 흑강은 북서쪽에서, 백강은 목초지와 잡림목을 휘돌아 태고로 들어온다. 에덴과 달리 토카르축의 태고는 역사의 시원(始原)이 아닌 산물이다.
두 개의 강은 독일과 소비에트일 수도, 나치와 볼셰비키 혁명일 수도, 선과 악일 수도 있으며, 인간의 원형과 역사의 이중성일 수도 있다. 태고는 그것들의 원인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기인된 결과이자 운명이다. 태고는 하늘로 던져진 주사위다. 주사위는 태고가 아닌 태고의 동쪽과 서쪽에서 던져지며, 그 결과에 따라 게임의 시간은 진행된다.
소설 ‘태고의 시간’이 경이로운 것은 사실과 신화, 역사와 신비, 질료와 대상, 상징과 원형이 합쳐져 강물처럼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크고 작은 돌들이 깔린 바닥 위를 강물이 거칠게 흐르듯, 태고의 강물은, 섞이고, 분리되고, 튀어 오르고, 융합되지만 궁극적으로 시간을 넘어선다.
물론 이러한 강물은 비단 폴란드에서만 흐르는 것은 아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인도와 발칸에서, 팔레스타인과 베트남과 한국에서도 흐른다. 다시 말해 근대사의 굴곡에서 원한을 쌓은 모든 땅에서 흐른다.
1962년생, 폴란드인, 심리 상담가이자 소설가, 유년기를 독재 정권에서 보냈던 올가 토카르축은 자신의 조국 폴란드의 역사를 '태고의 시간'이라는 마술적 사실주의로 그려내고 있다. 마술적 사실주의의 사전적 정의는 역사적 인과 법칙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서사를 표현하기 위한 문학적 방법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전적 정의는 마치 “유리 화분과 유리 항아리는 모두 유리로 만든 그릇이다.”라고 설명하는 것처럼 마술적 사실주의가 가지는 문학적 기능을 제대로 설명해 내지 못한다. 마술적 사실주의는 마술적 사실주의의 기법으로 쓰인 문학 작품을 통해서만 개별적으로 정의될 수 있다.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쓴 마르케스는 폭력으로 점철된 20세기 전반기 콜롬비아의 정치적 환경과 중남미의 사회적 현실은 오로지 신화적 기법으로만 표현할 수 있는 것이었기에 마술적 사실주의의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 바 있다.
토카르축에게 노벨상을 선사한 한림원은 그녀의 또 다른 책 ‘야고보서’를 언급하며 “그녀는 이 작품에서 인간이 거의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을 서술해내는 데 최고의 능력을 보여주었다”라고 격찬하기도 했다.
이러한 격찬의 내용을 보아 한림원 역시도 토카르축의 작품에서 1982년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작품에서 발견한 것과 같은 마술적 리얼리즘의 가치에 주목했음에 틀림없다.
마르케스의 마술이 라틴 아메리카로 대변되는 인류의 참혹한 현실을 서술하기 위한 문학적 방법이었다고 한다면 올가 토카르축의 마술은 거기에 더하여 사실에 내재된 원형을 찾아 헤매는 심리학적 탐구가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읽어내기가 어렵고 복잡하다.
올가 토카르축
올가 토카르축에게 사실의 토대 위에 원형 심리학적 탐구가 필요했던 이유를 상상해 본다. 가장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은 영구 회귀되는 생명, 그것이 존재한다는 신념, 그것을 찾고자 하는 의지,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구원해 줄 것이라는 믿음, 즉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들이다.
융은 서로 닮았으면서 반복되는 내용의 모티브를 ‘원형 (archetype)’이라고 불렀는데, 융이 말하는 원형은 꿈속에서 나타나는 반복적이고 동일한 장면, 성장 과정에서 공통으로 보게 되는 꿈속 이미지와 같은 것으로, 이 책 ‘태고의 시간’에서 작가가 끝까지 끌고 가는 생명의 반복, 게임의 시간, 그리고 돌아가는 커피 그라인더로 상징되는 것이다.
원형이란 그 자체가 신화를 구성하는 요소이자 집합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에, 토카르축은 이를 통해 폴란드라는 특수한 역사와 지엽적 공간을 넘어서, 인류에 공통으로 살아있는 인간 정신을 찾아 나설수 있는 수단이다.
1795년부터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에 의해 분할 통치되던 폴란드는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1918년 마침내 독립을 이룬다. 이것이 이 책 ‘태고의 시간’의 역사적 배경이다.
태고의 주민 게노베파와 미하우의 시간은 양차 대전,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그리고 마침내 자본주의로 이어지는 전환시대의 폴란드를 배경으로 딸 미시아와 아들 이지도르, 그리고 손녀 아델카의 시간으로 옮겨진다. 그리고 각각의 시간은 실타래에서 풀려나와 결국여러 가지 색깔로 어울려 직조된다.
한 인터뷰에서 토가르축은 이 소설을 쓸 때, 다양한 인물들의 삶과 그들의 시간이 서로 뒤엉켜 있는 실타래가 떠올랐고, 그래서 그 시간의 실타래를 풀어서 현실을 직조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현재와 시간적 거리가 있기 때문에 신화화가 가능해졌고, 동화 같은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덧붙혔다.
토카르축의 조국 폴란드는 독일과 러시아의 사이에 낀 지정학적 조건으로 인해 전쟁을 온전한 비극으로 받아들여야만 했다. 두 개의 전쟁은폴란드의 국토를 통째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시켰다. 이 나라는 대규모 유대인 학살의 현장이 되었고, 볼셰비키 혁명과 나치의 영향을 둑이 무너진 강물처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 책에서 토카르축은참혹한 폴란드의 역사에서 눈을 돌리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마르케스식의집요함, 즉 '찾고 탐구함'을놓치지 않는다. ‘찾는다’, ‘탐구한다.’라고 말할 때는 무언가 ‘숨겨진 것’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 '숨겨진 것'에 대해서 슬라예보 지젝은 언젠가 자신이 들었던 페르시아어를 들어 적절하게 이야기한 바 있다.
“페르시아어에는 '와 남 니하단'이라는 멋진 표현이 있다. ‘누군가를 살해하려면, 시체를 묻은 다음 그 위에 꽃을 심어 시체를 숨기라’는 뜻이다.”
지젝에 따르면 실재란, 꽃이라는 기만적 현실의 층위 아래 놓인 시체, 즉 진짜 현실이다. 때문에, 땅을 파고 실재에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우리의 탐구심은 실재에 대한 혐오감 또는 두려움으로 바뀔 수 있다.
토카르축이 자국의 극우 민족주의자들로부터 살해의 협박을 받고 있는 데에는 이러한 꽃과 시체의 문제가 있다. 그가 폴란드의 치부, 유대인에 대한 범죄적행위를 고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민족에나 무덤 위의 꽃을 제거하면 악취가 진동하는 시체가 놓여있기 마련이다.
우리에게도 이런 경험은 있다. 세월호에 갇혔던 아이들은 전화기로 자신들의 마지막 순간을 촬영했다. 이 동영상은 재생되어 매체를 통해 방송되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아직도 이 동영상을 보지 못한다. 고통의 실재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잔인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세월호의 현실은 광화문 촛불 사이를 유영하는 푸른 고래의 거대한 등에 올라탄 아이들에 대한 환상적 이미지다. 아이들은 단단한 두 발로 고래 등을 딛고 서 있었으며, 하늘을 향해 두 팔 벌려 즐거이 노래하고 있었다. 거기까지이다. 우리가 다가갈 수 있는 실재는 대개 환상 속 푸른 고래의 평편한 등 위에서 멈춘다.
우리가 인식하는 세월호의 비극은 마치 무가당 콜라, 디카페인 커피, 무지방 크림, 무 알코올 맥주 등과 같은 것일 수 있다. 그것은 일종의 가상현실이며, 실체를 제거한 상품과 같다. 알코올이 들어가 있지 않은 술을 마시고 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태고의 마지막 집을 지키고 있던 파베우가 자신의 딸 아델카가 가져온 카페인이 제거된 커피 마시기를 거부하는 장면이 나온다.
카페인이 제거된 커피는 가상현실이며, 이는 실재의 단단한 저항적 핵심을 제거한 현실을 제공하기에, 그 종점에서 진짜 현실, 즉 실재 그 자체를 가상의 세계로 경험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건강이야 어찌되었든 커피에는 카페인이 들어있어야 한다.
양차 세계 대전과 볼셰비키와 나치와 독재 정권하의 폴란드, 그 실재를 1962년생 작가가 어떻게 꽃이 아닌 시체로 경험할 수 있었을까? 진정한 비극은 그때 일어났지 지금 일어나지 않는데. 실재의 경험은 당시에 겪을 수 있지 지금 겪을 수 있는 것이 아닌데. 과거 폴란드의 역사는 어느 정도는 환상이라는 토대 위에 구조화된 현실 속에 침잠해 있는데.
결국, 실재는 그것이 실재라는 이유만으로도 현실 속으로 통합해 들어올 수가 없다. 그래서 역사는 비현실적인 유령으로 인식된 채 희석된 희미한 그림자로만 남게 된다.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이것을 벗겨낼 수 있었던 것은 “현재와의 시간적 거리”라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시체를 직시할 수 있는 도구이다.
"시간으로 시간을 인식하다."
시간의 거리는 소설가가 마술사가 되어 꿈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준다. 그것이 작가가 역사의 강물 속에서 원형을 찾으려고 유영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책에는 영속성을 나타내는 몇 가지 상징들이 들어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커피 그라인더’이다. 작가는 미시아가 어머니 게노베파로부터 물려받은 커피 그라인더를 통해 사물에는 진정한 실체가 있다는 사실을 전달한다.
“사물은 시간도 움직임도 없는 다른 현실 속에 몸을 담그고 있다. 단지 그 표면만은 드러나 있고,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나머지 속에 물질적 대상의 의미와 본질이 숨겨져 있다. 커피 그라인더가 바로 그러한 예다.”
이러한 저자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예상컨대 많은 독자가 공감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이 ‘커피 그라인더’ 일 것이다. 이것의 상징성이 무엇일까에 대해서는 사실 오리무중이다. 단지, 한 가지 힌트를 얻는다면 바로 마르셸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로 부터다.
“과거는 그 힘이 미치지 못하는 지성의 영역 밖, 이를테면 우리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어떤 물질적인 대상 안에, 이 물질적인 대상이 우리에게 주는 감각 안에 숨어있다. 우리가 죽기 전에 이러한 대상을 만나느냐 만나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우연에 달려있다. (‘스완네 집 쪽으로’ 중에서)
‘우리의 과거, 시간이 숨어있는 물질적 대상’. ‘태고의 시간’에서 시간은 사물과 연결되어 있다. 게노베파에서 미시아로, 미시아에서 아델카로, 엄마에서 딸로 이어지는 페미니즘의 계보는 커피 그라인더라는 이름의 사랑이다.
“그는 보다 고차원적이고 지속적이며 고귀한 것. 인간보다는 시간에게 더욱 익숙한 것을 원했다. 시간 속에서 그의 사랑을 언제까지나 유지할 수 있는 것. 시간 속에서 그녀를 영영 멈추게 하는 것을 바랐다. 덕분에 그의 사랑은 영원한 것이 되었다.”
작가 올가 토카르축은 이 책속에 또 하나의 중요한 상징을 남겨 놓았다. 그것은 바로 숫자 ‘4’이다. 작가는사랑하는 여인, 루타, 그녀의 참혹한 인생을 사랑하고, 그리워다 죽은이지도르의 눈을 통해 우리에게 말해 준다.
“바로 그 순간, 이지도르는 네 번째 얼굴을 언뜻 본 것만 같았다. 나머지 세 개와 똑같은 형상이었다. (...) 하지만 그의 눈에 들어오는 건, 여전히 자신을 마주 보고 있는 한 개의 얼굴과 양옆에 있는 두 개의 옆모습뿐이었다. 이제야 그는 뭐가 부족한 듯한 이 알 수 없는 느낌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그리고 만물의 근저에 달리 슬픔, 모든 사물과 현상이 깃들여 있는 슬픔이 어디서 생겨났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사랑하는 여인 루타와 함께 태고의 심장을 찾은 이지도르는 여기서 본 세 개의 얼굴과 보이지 않는 나머지 한 개의 얼굴을 통해, 훗날 세상의 모든 것들이 넷으로 이루어졌다는 비밀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결국 '화해'를 위한 단초가 된다.
작가는 처음부터 상속자의 게임을 통해 일관성 있게 자신의 의도를 전달한다. ‘게임의 시간’에 등장하는 8개의 방은 중심으로부터 밖으로 각각 두 개의 통로를 거쳐 나가게 설계되어 있다. 그렇게 두 개의 통로를 통해 나간 세상은 또다시 네 가지로 분리된다.
이 게임으 시간은 다시 한번 에덴에서 갈라지는 네 개의 강과 그로 이루어진 두 개의 문명이 떠오르게 한다.이러한 상상력의 장치를 통해 작가는 강력하게 융의 심리학을 끌어다 쓴다. 1940년 융은 ‘삼위일체 도그마에 대한 심리학적 접근’이라는 책을 썼다.
이 책에서 융은 근대 근동에는 ‘아누’, ‘벨’, ‘에아’가 있었고, 이집트에는 ‘아버지’, ‘아들’, 그리고 ‘카-무테프’로 이루어진 삼위 신이 있었으며, 기독교에도 삼위일체가 있고, 심지어 피타고라스의 사상에도 삼위 성이 있었다고 이야기 하며, 사위일체설의 포석을 놓았다.
융에 따르면 종교의 인지 구조 위에 있는 삼위 성은 결국 인간의 무의식 속에 있는 악을 수용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는 잠재의식 속에 들어있는 또 하나의 요소를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잠재의식, 즉 제4요소가 바로 원형적 요소이며, 사람들의 꿈속에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이라 했다.
융은 수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성모 마리아를 신의 어머니로 부각하는 데에도 이런 원형적 상징이 자리 잡고 있다고 주장했다. 다시말해 '삼위 일체 + 성모', 또는 '삼위 일체 + 악'이라는 삼위 성에 제4요소를 대응시키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무의식의 작용이라는 것이다.
삼위일체의 상징은 너무 도덕적이고 영적이기 때문에 그 상징만으로는 실제로 삶에서 체험하는 악을 통합할 수 없으며, 따라서 사위 일체의 상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이 책 ‘태고의 시간’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책 중, ‘게임의 시간’은 융이 1952년에 쓴 ‘욥에의 응답’에 기술된 융의 사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 또한, 1550년에 출간되었던 ‘현자와 장미원’에 있는 다음 구절로부터 소위 ‘연금술사의 돌’, 또는 '만다라'의 상징을 통해 폴란드 역사의 구원 서사를 재구성했다.
“남자와 여자로부터 둥근 원을 만들라. 그다음 사각형을 추출하고 그것으로부터 삼각형을 만들라. 그리고 원을 만들라. 그러면 당신은 현자의 돌을 얻을 것이다.”
유리 화분을 정의하기 위해 먼 길을 돌아왔지만, 아직도 유리 화분은 ‘무언가를 담기 위해 유리로 만든 물건’ 정도까지만 모호하게 정의된 것 같다. 토카르축의 마술적 리얼리즘이 결국 무엇을 담기 위한 것인가를 알아내지 못하면 유리 화분을 완전히 정의할 수 없다.
마태복음 5장 25절에는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있을 때 급히 화해하라”라는 구절이 있다. 2세기의 철학자 카르포크라테스는 이 구절을 “그대는 그대의 그림자와 화해하라”라는 말로 이해했다고 한다.
그림자와 화해하라는 것은 자신의 자아와 화해하라는 의미이다. 결국 나를 송사하는 자는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태복음에 나오는 ‘화해’라는 단어는 두 가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주위를 둘러싼 적대적 환경과의 화해이고, 또 하나는 자기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자신과의 화해이다. 그곳이 두 개의 강이 합쳐지는 방앗간 기슭이다.
그렇다면 토카르축이 이야기 하는 화해의 강물은 어디에서 어디로 흐르는 것일까? 토카르축의 마술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심리학적 상징으로 미루어 짐작해 볼 때, 그것은 자기의 안으로부터 밖으로 흐르는 것이 틀림없다.
그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 인터뷰에서 불교를 좋아하는 이유로 공감과 연민을 들었고, 공감과 연민이야말로 말로 오늘날의 병든 세상을 치유하는 가장 효과적인 처방약이라고 강조했었다.
따라서 올가 토카르축이 ‘태고의 시간’에서 사용한 마술적 리얼리즘은 ‘화해’를 담기 위한 장치이다. 그녀의 유리 화분은 꽃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투명한 유리 너머로 꽃의 뿌리까지도 보여주고 있는데, 때로는 그곳에 시체가 놓여있을 수 있다.
이제 토카르축이 이야기 한 '화해'의 문제를 아시아로 가져와 보자. 2000년 6월 ‘무기의 그늘’의 작가 황석영 씨는 ‘전쟁의 슬픔’의 작가 바오닌을 만났었다. 당시, 두 사람 모두 베트남 전쟁을 주제로 소설을 썼던 경력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황석영씨는 68년 베트남전에서 돌아온 뒤, 한 번도 베트남을 가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베트남을 방문하지 않는 이유로 ‘베트남에 대한 사죄’의 절차 없이는 관광 목적으로 베트남 땅을 밟지는 않을 것이라는 다짐을 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날, 바오닌과의 만남으로 그는 그 숙원을 풀었다. 처음 만남에서 황석영 씨는 바오닌을 향해 큰절을 했었다. 그리고 그의 ‘큰절’에 대한 숨은 사연을 이야기했었다.
“85년 일본 문단의 초청을 받아 도쿄에 간 적이 있어요. 그때 ‘노마 히로시’라는 작가를 만났는데 80이 넘은 분이었지요. 그분이 저를 처음 보는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큰절을 하며 사과를 하는 거예요.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하여 진심으로 사죄한다고. 그때 참 감동했는데, 이번에 그걸 베트남 작가에게 돌려준 셈입니다.”
이 보석 같은 소설에서 굳이 아쉬운 점을 찾아본다면, 비참한 폴란드의 현대사와 문명화된 인류의 비문명적 사건과 비교하면 작가가 문학적 표현의 아름다움에 지나치게 치중하고 있다는 점이다. 더하여 곳곳에 장치된 문학화(?) 된 원형 심리학적 탐구 방식들은 오히려 독자가 삶을 파괴하는 행위에 대한 현실적 감각을 무디게 할 수 있다는 우려다.
1982년 12월 8일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스톡홀름 한림원에서 거행된 노벨 문학상 수상식에서 ‘라틴 아메리카의 고독’이라는 유명한 수상소감을 남겼다.
“올해 스웨덴 한림원은 단지 문학적 표현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공할 만한 현실에 주목했다고 저는 감히 생각합니다. 종이에 쓰인 현실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있고, 우리의 끊임없는 하루하루 죽음의 매 순간을 결정짓는 현실 말입니다.”
우리 현실을 타인의 방식으로 해석하면, 우리는 갈수록 이해받지 못하고, 갈수록 덜 자유로워지며, 갈수록 고독해질 뿐이라고 주장한 마르케스는 유럽인이 라틴 아메리카를 이해하는 방식은 자신의 역사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우리가 폴란드의 문학을 읽는 방법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올가 토르가축은 말한다. 우리에겐 ‘화해’가 필요하다고. 종이에 쓰인 현실이 아닌, 죽음의 매 순간을 결정짓는 현실로 말이다.
“나무의 입장에서 인간은 영원하다. 그들은 고시치니에츠의 길가에서 항상 보리수 그늘 밑을 오가고 있다. 나무가 보기에 그것은 정체도, 움직임도 아니다. 인간은 영원히 그 자리에 있다. 다시 말해 아예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늘 똑같은 모습으로 비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