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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인순 Jul 27. 2020

스피노자는 왜 라이프니츠를 몰래 만났을까?

책 속의 사람들

5살 무렵부터 교회에 다녔고, 중학교 1학년 말에 크리스천이 되었던 나는 서른 살이 되던 해에 교회를 떠났지만, 쉰 살이 되던 해에 다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이런 이력이라면 평생을 신과 어떤 방식으로든 관계를 맺고 살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기독교의 신이던, 이슬람교나 힌두교의 신이던, 신과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들은 오히려 신의 실존에 대해 둔감할 수 있다. 믿음이란 모든 의식의 무더기 위에 쌓아 올린 무심한 돌탑과 같은 것이기에 무심코 돌 하나를 더할 뿐이다.     


내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를 떠나 있었던 무수한 시간과 교회에 속해 있었던 적지 않은 시간 속에서 신은 주로 믿음의 대상이었지, 고민의 대상은 아니었다. 어느 순간 (아마도 5, 6년 전), 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와 맞닥뜨린 그 순간, 신에 대한 고민은 바로 인간에 대한 성찰과 회의라는 각성이 파도처럼 반복적이고, 예견적으로 다가왔다.     


그 반복되는 사색의 파도를 건너, 이러저러한 경로를 따라 막달은 골목에서 만났던 사람 중에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가 있었다. 합리주의와 과학의 발달로 대변되는 계몽주의의 새벽을 주체적으로 열어갔던 두 사람과의 만남은 결국, 결론지어질 수 없는 결론들이 살아서 움직이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충격이었다.     


이 책은 바로 이단아 스피노자와 공무원 라이프니츠의 사상을 복잡하지만, 독창적인 저자의 설계도에 따라 엮은 책이다. 이 책에서 저자 매튜 스튜어트는 내재적 신과 초월적 신 (신론), 결정론과 예정론 (세계관), 정신과 물질, 과학과 종교, 도덕과 형이상학 등등 ‘생각의 역사’를 펼쳐 보인다.


1676년 헤이그에서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가 만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저자는 처음에는 이 역사적 이벤트를 소설로 쓸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두 사람의 만남 자체가 가지고 있는 극적이고, 흥미진진하며, 풍부한 의미를 살리기 위해 저자는 결국 인문학적 문법을 택하여 책을 냈다.     


서문에서 밝힌 저자의 저작 배경 때문일 것이다. 만약 소설 형식으로 두 사람의 생각을 역사적 배경 속에서 담아낸다면 어떻게 쓸 수 있을까?라는 호기심이 생겼다. 그러나 이내 웬만한 구성력과 문장력으로는 두 사람의 사상과 근대성의 배경을 담아내기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뒤를 따랐다.     


인문학 서적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내용 전개는 매우 산만해 보일 수 있다. 때문에, 책의 구성에 익숙해지기 전까지 독자들은 상당히 혼란스러운 시간을 견뎌내야 한다. 지나치게 많은 주제가 책 이곳저곳에서 제 나름대로 멋을 낸 춤을 추고 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능산적(能産的) 자연(natura naturans)’과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이 어떻게 세계관과 연결되며, 이것을 구성하는 정신과 물질에 대한 논쟁의 역사가 어떠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형이상학적으로 어떻게 정의되고, 도덕론과는 어떤 관계인지에 대한 사전적 지식이 없다면, 책 속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 두 사람의 사상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이 이 책의 거친 문법을 접하는 것도 나름의 책 읽는 재미가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생경함은 오히려 독자의 상상력과 지식을 여러 방향으로 확장할 수 있어서, 각자가 가지고 있는 관심과 의문, 세계에 대한 의혹과 그 해결사로서의 과학에 대한 태도 등을 다른 각도에서 점검하며 내용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천인 나에게 17세기에 스피노자의 신은 왜 막다른 골목이었을까?      


”나는 스피노자의 신을 믿는다.”라는 아인슈타인의 잘 알려진 말처럼 스피노자는 근대의 초입에서, 그 누구보다도 더 신에 대해 알고 싶어 했고, 또 신의 의지에 따라 살고자 했던 사람이기에 신을 찾는 길의 끝에 그가 서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스피노자의 의지가 추적한 신은 전횡적인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력을 내던져 버리고 오로지 보편적인 정신의 빛, 즉 이성의 인도에만 응답하는 그러한 신이었다. 이성이라는 단어가 주는 바리사이적 가치를 조금만 수정한다면, 기독교 세계에서 탈출하고자 했던 유대 사회의 이단아 스피노자가 신을 찾아 나선 길은 예수와 마찬가지로 ‘마음의 삶’에 집중한 길이었다.      


이는 신에게서 출발해 계시가 된 진리의 절대적 확실성이 아닌, 오직 이성에 의해 구축된 강철 같은 마음만이 절대적 확실성의 원천일 수 있다는 믿음과도 일치한다. 그러면 이러한 믿음은 어디서 출발한 것일까? 이 책을 읽으면서 얻은 가장 번뜩이는 깨달음이 이 질문 속에 들어있다.     


저자는 스피노자의 삶을 한마디로 ‘바니타스(vanitas)’ 즉, ‘허무’에 대한 극복으로 정의했다. 바니타스란 절대적 무(無)로 굴러 떨어질지 모를 가능성, 즉 “아무런 의미 없이 무의미한 종말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우리 삶과의 조우”라고 말한다.      


생물학자이자 진화론자인 최재천 교수는 한 강연에서 인간이란 단순한 유전자 전달자에 불과하며, 따라서 인생의 가치나 삶의 목표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는 심지어 자살하고 싶은 충동까지 일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진화론자 최재천 교수가 느꼈던 자살에의 충동, 그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말한 바니타스가 아닐까? “인생에 주어진 목적은 없다.”. “삶의 보편적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진화론적 세계관에서 삶의 목표와 가치를 찾아내는 데에는 바니타스라는 견고한 바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편 라이프니츠 역시도 신을 향한 출발점을 ‘마음’에서 찾았다. 그는 “인간의 마음이란 한시도 쉴 수 없는 것”이라는 말로 생각의 역동성을 강조하였는데, 이것은 인간의 인지 특성을 생물학적 숙명으로 정의한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인간이 태어나서 가장 많이 하는 것이 바로 생각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다시 말해, 또 다른 인식을 향한 움직임이 없이 그대로 멈춰 두는 것은 마음을 고문하는 것이다”     


때문에, 라이프니츠의 철학을 규정지은 것 역시도 도무지 만족할 줄 모르는 지극히 인간적인 결핍이었다. 그에게 결핍이란 모든 인간에게 잠재되어있는 특성이며, 자신으로부터의 끝없는 도피, 낯선 곳에서 맞이하는 아침에의 동경이자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원천이었다.      


스피노자의 허무, 라이프니츠의 결핍, 그것을 극복하고자 바라본 곳에 바로 신이 있었다.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신에 대한 질문은 곧 인간에 대한 질문이 된다. 인간 지성의 빛을 통해 찾아낸 신, 바로 근대를 받아들인 천재들이 짊어져야 할 과제이자 숙명이었다.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가 맞이한 근대, 즉, 17세기는 기독교 전통인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기독교가 문명의 원천이며, 인간이 모든 창조의 목적이라는 믿음의 2/3가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이미 깨져 나간 시대였다. 때문에, 스피노자에 앞서, 데카르트는 “인간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존재자를 두 가지, 즉 신체(물질)와 마음으로 정의하였다. 그는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바로 마음 때문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다. 데카르트에게 생각하는 존재, 인간은 다음과 같은 말로 알 수 있듯이 독립된 두 개의 실체로 구성되어 있었다.     


“데카르트 주의자들이 도대체 마음과 신체가 어떻게 상호작용할 수 있는지, 즉 한 왕국이 다른 왕국과 어떻게 소통할 수 있는지 설명하고자 할 때 ‘문제’에 봉착한 이유는, 마음과 신체가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에 속해 있는 것들이라고 전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마음과 물질을 분리에 대해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는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며, 반드시 자연의 법칙을 따라야 하고, 그러한 자연만이 참된 숭배의 대상이다.”라고 믿었다.     


따라서, 스피노자가 찾아낸 신은 철저히 내재적인 신이지 타동적인 신이 될 수 없었다. 여기서 내재적이라 함은 자신의 원인을 자신이 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모세에게 나타난 ‘스스로 존재하는 신’과 같은 문법을 지닌 신이기도 하다.     


저자에 따르면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구원은 자유이며, 자유를 위해 필요한 단 하나의 실체는 바로 ‘신에 대한 사랑’이었다. 저자는 라이프니츠의 시각을 통해 동시대의 인물 스피노자를 관찰했다.     


“(스피노자의) 신은 홀로 실체이며, 혹은 그 자체로 존립하는 존재이며, 혹은 그 자체를 통해서 생각할 수 있는 존재이다.”     


라이프니츠의 이 말은 자신과 동시대를 살았고, 또 철학적으로 영향을 받았던 (저자에 따르면 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 주의자였다) 라이프니츠의 명민한 시각은 스피노자의 신을 바로 자유라고 지칭한다. 저자는 다시 한번 라이프니츠의 말을 인용한다.     


“스피노자는 자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즉, 어떤 행위나 결정이 외재적 충동으로부터 귀결된 것이 아니라 순전히 그 행위자의 본성으로부터 귀결된 것일 때, 자유롭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가 신만이 자유롭다고 말한 것은 옳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를 떠나, 데카르트가 결론을 내렸던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을 따른다. 그는 신체를 구성하는 가장 근원적 요소가 원자라면, 정신은 모나드라는 요소로 되어 있다고 믿었다. 그는 스피노자의 신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신은 어떤 이가 묘사한 것처럼 형이상학적이고, 가상적이고, 사유나 의지나 행위를 할 수 없는 그런 무언가가 아니다. 그런 식의 묘사는 신이 곧 자연이고 숙명이고 운명이고 필연이고 세계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오히려 신은 실체이자 인격이자 마음이다. “     


저자는 스피노자에 대한 이러한 라이프니츠의 비판은 오히려 그가 스피노자와 본질에서 유사한 신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줄 뿐이라고 주장한다.      


즉, ‘형이상학 서설’에서 라이프니츠가 ”모든 가능한 세계 가운데서 최선의 세계”를 선택하는 존재라고 한 말은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믿는다. (...)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의지와 욕망을 의식하고 있지만, 그들이 그렇게 욕망하고 의지하도록 결정해 놓은 원인에 대해서는 무지하기 때문이다.”라는 말과 사실상 일맥상통하며, 둘 다 결정론적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가 보기에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가 바라보는 세계관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무엇일까? 스피노자의 세계관은 우리의 모두의 심적 행위가 궁극적으로는 물리적인 과정과 짝지어질 수 있으며, 그러한 물리적 과정 자체는 인과 법칙에 따라 필연적으로 작동된다는 일종의 결정론이다.     


반면, 라이프니츠의 세계관은 모나드라는 환원론적 개념을 동원하여 마음과 신체가 평행하게 움직이면서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신이 짜 맞추어 놓았다는 일종의 평행 조화론으로 정리된다.     


스피노자에게 마음과 신체는 동떨어지지 않은 하나의 실체라면, 라이프니츠에게는 모나드와 원자로 구성되는 독립된 실체인 것이다. 따라서 인간과 연결된 스피노자의 신은 내재적이지만 라이프니츠의 신은 초월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뇌과학이나 인지 과학은 누구의 의견에 동의하고 있을까? 당연히 스피노자의 주장에 과학적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 때문에, 스피노자가 17세기에 이러한 주장을 한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구원의 문제를 신체에서 찾았다는 점이다.      


스피노자는 마음을 신체의 관념이라고 정의했다. 마음이 신체의 관념이란 뜻은 마음이 실제로는 어떤 절대적인 의미에서도 통일성이나 자기 동일성을 지니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마음은 스스로 알지 못하며, 마음은 오직 신체적인 변화만을 감지하는 것이라는 것이 스피노자의 생각이었다.      


때문에, 스피노자에게 구원의 문제는 신체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결국,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인간을 구원해 줄 수 있는 신은 바로 신체, 즉, 자연이 된다. 스피노자는 미래의 인지 과학과 뇌공학을 향해 다음과 같이 예견했다.     


“아직까지 아무도 신체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경험을 통해 알아내지 못했다. (...) 신체를 물질적인 것으로 간주할 때, 순전히 그것의 본성에 관한 법칙들만을 가지고서는 그렇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아무도 신체의 모든 기능을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그 구조를 정교하게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동물의 세계에서 우리가 인간의 명민함을 능가하는 많은 것들을 발견하고, 몽유병 환자들이 깨어있을 때는 감히 생각도 하지 못할 많은 일을 잠자는 중에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언급할 필요도 없다.”     


결국, 이 책에서 등장하는 두 명의 인물,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중에 저자가 캐스팅한 주인공은 스피노 자이다. 그리고 라이프니츠는 조연의 역할을 충분히 해낸 천재이다.     


구원이란 무엇일까? 인간이 구원되어야 할 이유는 또한 무엇일까? 예수가 말한 “진리를 알라!,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한 말속에는 이에 대한 대답이 들어있다. 진리 탐구의 궁극적 목적은 자유롭기 위함이다.      

유대인 스피노자는 딱히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예수의 증언을 “자유가 바로 구원”이라는 말로 바꾸어 말했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서 진리란 바로 지성이다. 인간이란 사는 동안 온갖 감정의 먹구름 속에서 헤매고, 좌절과 슬픔의 언덕을 수없이 넘어야 한다.


인간에게 그것을 극복할 방법은 오로지 ‘지성’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질서 있는 감정이다. 질서 있는 감정을 구성하는 진리, 자유, 지성과 자연에 대한 스피노자의 생각을 저자 매튜 스튜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자연’은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활짝 꽃이 피어나고 소란스럽게 벌리 윙윙거리는 그런 종류의 자연이 아니다. 그것은 ‘빛의 자연(본성)’ 혹은 ‘인간의 자연(본성’이라고 할 때의 ‘자연’)에 더 가깝다. 다시 말해, 이성적인 탐구의 주제가 되는 것으로서 ‘자연’인 것이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지성은 신을 향해 있다고 믿었다. 인간의 구원은 바로 행복이고, 행복하기 위해서는 자유가 필요하며, 자유롭기 위해 신은 곧 자연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라이프니츠의 지성은 신과 자연을 분리해야만 만족할 수 있었다.      


현대를 사는 우리가 17세기를 산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에 주목할 이유는 충분하다. 그들이 살았던 17세기가 과학 혁명으로 인한 근대화의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과학과 합리성이라는 커다란 파도에 바위 같던 기독교의 가치관이 조금씩 부서지기 시작한 17세기는 오늘날 인공지능으로 인한 포스트 휴머니즘 담론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나 라이프니츠가 결정적으로 직면했던 근대성의 문제는 오늘날 뇌공학과 인공지능을 중심으로 하는 포스트 휴머니즘에 직면한 우리에게도 갈등의 문제와 조율의 숙제를 안겨주고 있다. 저자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것은 이른바 신과 자연 사이의 잠재하는 파괴적인 갈등, 즉 신성에 대한 믿음과 지속적으로 팽창 중인 강력한 과학적 지식 간에 빚어질 갈등을 어떻게 조율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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