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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인순 Aug 24. 2020

'두 교황'  장벽과 다리

열차 안에서 본 세상

2020년 2월 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의 돌비 극장, 제92회 아카데미상 수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4개 부문에 수상자로 선정되면서, 한국 영화사에 메타 서사가 새롭게 쓰였습니다. 반면, 세계 영화계의 공룡 플랫폼 넷플릭스는 참패를 맛보아야만 했습니다.     


스트리밍 영화 플랫폼 넷플릭스는 ‘아이리시 맨’, ‘결혼 이야기’ 등을 비롯하여 총 24개 부문에 수상 후보자 명단을 올렸으나, 정작 그 결과는 초라했습니다. ‘아메리칸 팩토리’로 다큐멘터리 영화상을, ‘결혼 이야기’를 여우조연상을 받는 데 그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카데미상이라는 거대 이벤트와는 별개로 영화 스트리밍 플랫폼의 영향력은 점점 더 집요하면서도 실효적으로 전 세계 영화 애호가들 사이로 스며들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잘 차려입고 찾는 영화관이 아닌, 거실, 서재, 기차나 여행지, 인터넷이 연결된 모든 곳에서 쉽고 편하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카데미상 같은 거대 이벤트에 그 이름이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스트리밍 플랫폼에서 주목받는 영화들이 매년 등장하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두 교황’이란 영화입니다. 2019년 한 해 동안 넷플릭스를 즐겨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화제가 된 영화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는 베네딕토 16세와 프란치스코, 두 명의 교황에 대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입니다. 현존하는 교황을 직접 다루었다는 점에서 더욱 시선을 끌었던 영화이기도 하지요. 물론 이러한 현존성과 실재성의 역효과로 인해, 생기발랄한 플롯의 전개나 춤추는 맥거핀은 이 영화에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먼저 전체적인 구조를 살펴보면, 이 영화에는 감독들이 습관적으로 구사하는 복선 구조나, 의도적이고 극적인 전환이 보이지 않습니다. 심지어 창의적인 각색조차도 찾아보기 어렵다 보니 관객의 상상력은 처음부터 차단됩니다.      


헝가리 출신의 예술가 '라슬로 모홀리 나기'가 그랬다지요. '미래의 문맹자는 읽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여기서 ‘이미지’를 ‘영상’이라는 단어로 대체할 수 있다면, 영상은 텍스트를 넘어서 전달해야 할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실망스럽게도 텍스트를 넘어서는 영상이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감독이 텍스트를 넘어서는 영상 메시지의 창조에 게으르기만 했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미 두 교황의 과거와 현재를 모두 알고 있는 관객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긴장감을 주고, 시선을 끌고자 하는 감독의 노력이 몇 군데서 엿보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의 콘클라베, 그리고 공산주의로부터 아르헨티나를 보호한다는 목적으로 자행되었던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군사 정권의 소위 '더러운 전쟁(Guerra Sucia)'을 회고하는 플래시 백 (Flash Back)들이 바로 그러한 것들입니다.     


영화의 초반, 감독은 콘클라베에 참여하는 추기경들의 눈빛, 속삭임, 태도들을 흔들리는 렌즈에 담아 긴장감 있게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르헨티나의 ‘더러운 전쟁’에 회고 장면은 다소 김이 빠집니다.     


보통 이러한 ‘김 빠짐’은 선별된 의도에 집중한 나머지, 곁눈질하지 않고 하나의 메시지를 향해 돌진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너무 강한 메시지 전달을 목적으로 제작되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영상을 포기하면서까지 뚝심 있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을 영화 속 전개되는 장면과 대화를 통해서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영화 속 장면은 몇 가지 시간을 건너뛰면서 전개됩니다.      


첫 번째 시간은 2005년 콘클라베, 즉 베네딕토 16세가 교황에 즉위하는 장면입니다. 두 번째 시간은 2013년 로마 교황청에서 베네딕토 신부와 당시 추기경이었던 프란치스코 교황이 만나 대화를 나누는 장면입니다.     


세 번째 시간은 2013년 콘클라베를 통해 프란치스코가 교황이 선출되고, 일 년 후, 2014년 월드컵에서 두 교황이 결승전을 관람하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영화의 중간중간 베네딕토 16세가 피아노 연주를 하고, 프란치스코가 베네딕토 16세에게 라틴댄스를 가르치는 장면이 소소하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전개되는 장면, 즉 감독의 앵글은 두 가지 이미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바로 ‘장벽과 다리’입니다.     


장벽과 다리

영화의 중심 시간, 즉 2013년은 가톨릭 역사상 약 600년 만에 교황직에서 스스로 물러난 베네딕토 16세와 교회의 보수화에 반대한 현재의 교황 프란치스코 사이에서 교황 승계가 이루어지는 시점입니다.     

독일 출신의 베네딕토 16세가 교황으로 재직했던 2005년부터 2013년까지의 시간은 가톨릭 교회가 보수로 회귀한 기간이라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10개국의 언어를 섭렵하고, 프랑스 윤리학회 회원이었으며, 21세기 최고의 신학자이자 뛰어난 피아노 연주자였던 베네딕토 16세가 가톨릭 교회 내의 신앙의 쇠퇴, 세속주의의 팽배를 우려하며 여러 가지 보수적 정책을 시행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면 화공학도 출신으로 나이트클럽 경비원으로 일하다가 신부가 된 아르헨티나 출신 프란치스코 교황은 검소함과 겸손함으로 상징되는 사제였습니다. 그는 늘 사회적 소수자들, 특히 가난한 사람에 관한 관심과 관용을 촉구하는 데 앞장섰으며, 소통과 대화를 강조하는 한편, 이를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다해온 ‘어쩌다 교황(?)’이 된 사람이었죠.      

베네딕토 16세가 재직하던 시절, 보수화된 교회의 현실을 비관한 프란치스코(당시는 호르헤 베르고글리오 추기경)는 바티칸에 여러 차례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 그러나 베네딕토 16세는 이를 승인하지 아니하고, 대신에 베르고글리오를 바티칸으로 소환하여 신학적 토론을 이어갑니다.

    

교회의 역할과 신앙의 본질에 대한 진중한 질문들과 날카로운 신학적 비판들이 이어지던 두 사람의 대화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가톨릭 교회의 경직성과 보수화를 비판하던 베르고글리오가 자신의 과거를 참회하는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과거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독재정권에 대해 침묵했고, 예수회 소속 사제 2명이 고문당하고, 자신의 친구가 죽어가는 것을 방관했었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사실 베르고글리오는 '목숨을 구할 수 있다면 누구와도 대화할 것'이라며 독재정권과 타협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동료 신부들로부터 배신자라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던 과거가 있었습니다.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민주 정부가 들어선 뒤, 코르도바로 추방당해 야인 생활을 해야만 했던 베르고글리오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을 자신의 채무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이를 갚기 위해 가장 가난한 자의 밑바닥으로 자신을 밀어 넣었던 것이지요.      


그의 진정성과 헌신은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기에 이르렀지만 정작 자신의 시간에 새겨진 깊은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았습니다. “충분하지 못했다”라는 말로 자신을 질책하는 베르고글리오에게 베네딕토 16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당신은 신이 아니에요. 신과 함께 우리는 움직이고 살고 존재합니다. 신과 함께 살지만 신은 아니에요. 우리는 인간일 뿐입니다."      


베네딕토 16세는 베르고글리오가 척박한 정치 상황 속에서도 헌신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살피는 주교로 살아왔다고 위로하고 지지합니다. 한편, 그 자신도 일부 성직자들의 성폭행 사건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잘못을 교회의 이름으로 덮어준 것에 대해 참회합니다.     


바티칸의 한 모퉁이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잘못을 고백하며, 높았던 마음의 장벽을 조금씩 허물어 갑니다. 그리고 결국, 장벽이 허물어진 자리에 다리를 놓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에 대한 회개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진리가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은 장벽을 쌓는 것이 아니라 다리를 놓는 것입니다. “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이 아르헨티나로 돌아간 후 1년이 지나고, 베네딕토 16세는 스스로 교황의 자리에서 내려옵니다. 그리고 콘클라베에 초대된 베르고글리오는 교황에 선출됩니다. 영화는 두 교황이 각자의 모국인 독일과 아르헨티나가 결승전에 맞붙은 2014년 월드컵 결승전을 TV로 관람하는 장면으로 막이 내려집니다.     


정의(正義)란 이름으로 세워진 장벽들

영화 속 두 주인공 베네딕토 16세와 프란치스코 교황은 세상에 알려진 바와 같이 동성애, 피임, 이혼, 그리고 사제들의 성 추문과 같이 교회 안팎을 넘나드는 일종의 ‘Wokeness’ 대한 신학적 입장들을 섞어나갑니다.   

  

교회에 한정될 수 없는 이러한 ‘Wokeness’ 담론에 대해 보수적 태도와 진보적 입장이 두 교황 사이에서 날카롭고도 격렬하게 부딪치면서 나름의 타결점을 찾아가지만, 결국 결론 없는 화해에 이릅니다. 이 허무한 결론은 무엇을 말해 주는 것일까요?     


언젠가, 트위터 친구인 한 미국인이 ‘Wokeness (사회적 정의와 같은 이슈에 대한 민감성이나 깨임의 정도)‘란 일종의 ’ 상태적 계층 구조(Status hierarchy)‘이자 ’ 사람을 해치는 상처 (Hurt people hurt people)‘라는 글을 계시한 적이 있습니다.      


보수적 관점이 반영된 이 글을 처음 읽었을 때는 일종의 거부감이 들었습니다. 학생 운동이 기폭제가 된, 한국의 민주화 과정을 겪은 세대로서 소위 ‘상태적 계층 구조’라는 말은 반감을 일으키기에 충분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새삼 돌이켜 보면 그의 말을 허투루 들을 수만은 없을 것 같습니다. 미국의 대표적인 진보학자 마크 릴라가 미국 ’신보수주의(New Right)‘의 뿌리는 진보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면, 한국도 미국과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사회적 정의를 바로 보는 눈은 자신의 상태에 따라 쉽게 오른쪽과 왼쪽을 오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Wokeness’는 그것이 ’ 고착된 상태‘일 때, 문제를 일으킵니다. 자기의 생각이 바로 진리라고 믿는 것이 바로 문제의 근원이자, 우리 앞에 가로 놓인 ’ 장벽‘이 되는 것이죠. 때문에, 우리는 정의라는 신념의 벽을 쉼 없이 비판해야 하고, 깨달음의 그림자에 부단한 의심의 눈길을 보내야 합니다.      


가톨릭 교회의 대표적인 보수주의자 베네딕토 16세도 본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가톨릭 교회의 개혁 작업에 참여하고, 한스 큉과 함께 종교 재판소의 후신인 성무성성(聖務聖省)의 폐지를 요구하기도 했던 진보적 성향의 신부였습니다.      


전해진 바에 따르면, 그는 프랑스 68 운동에 영향을 받은 신마르크시즘적 성향의 급진적인 독일 학생들의 횡포, 즉 진보적 성향의 교수 수업조차 방해하고, "성경은 대중을 기만하는 비인간적 문헌", "예수에게 저주를!" 등의 전단과 구호를 무단 살포했던 행위에 충격을 받아 보수적 신앙으로 회귀했다고 합니다.      


이 영화에서 묘사되었듯이 프란치스코 교황도 한때는 폭력적인 군사 정권에 눈을 감았다는 이유로 예수회로부터 ’ 군부의 친구’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었습니다. 이때, 프란치스코가 가졌던 태도는 자신의 신념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인 것이었습니다.     


장벽은 어떻게 무너질 수 있을까요? 이 영화는 인간의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정답 없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이것이 가능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영화의 결론은 어떤 측면에서는 매우 허무합니다.      


결론 없는 화해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정의의 상대화는 사회를 퇴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화해를 이루는 것이 곧 개혁이자, 정의에 대한 상대성을 인정하는 게 바로 진보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늘 불충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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