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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인순 Aug 28. 2020

'아뉴스 데이' 무고한 사람들

열차 안에서 본 세상

“Ecce agnus Dei, qui tollit peccata mundi.”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 요한복음 1:29 -     


2차 대전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1945년 12월의 폴란드. 무거운 공기가 짓누르고 있는 수녀원의 사이로 한 수녀가 빠져나갑니다. 눈길을 걸어 그녀가 찾은 곳은 프랑스 부상자들을 전문으로 치료하는 적십자 병원이었습니다. 병원을 찾은 수녀는 한 의사에게 긴급한 도움을 요청합니다.  

수녀의 국적을 확인한 의사는 그녀에게 폴란드 적십자를 찾아가라며, 병원 밖으로 밀어냅니다. 이내 급한 수술에 참여한 의사, 수술을 마치고 잠시 휴식을 취하던 중, 창문 밖으로 자신이 내쫓은 수녀 마리아가 눈 위에서 기도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결국, 의사 마틸드는 마리아 수녀와 함께 수녀원을 찾습니다. 그리고 비 정상 분만으로 인해 고통의 비명을 지르고 있는 수녀의 배를 가르고 아기를 받아냅니다. 다음날, 산모를 치료하기 위해 다시 수녀원을 찾은 의사는 또 다른 산모를 발견하게 됩니다.     

2차 대전 중, 독일군과 소련군의 싸움터였던 폴란드. 전쟁을 위해 파견된 군인들은 체류하고 있는 동안 수녀원에 있는 수녀들을 강간했던 것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대략 25명의 수녀가 40번 이상 강간을 당했다고 합니다. 처절한 악몽의 시기가 지난 후에도 수녀원은 깊은 슬픔에 싸여 있습니다.     


믿음과 순결 서약을 지켜야 한다는 종교적 열망에 쌓인 원장 수녀는 수녀원과 수녀들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수녀들이 임신한 사실을 숨기고자 합니다. 태어난 아이는 원장 수녀에 의해 비밀리에 외부로 입양 처리됩니다.     


한편, 수녀들 역시도 신 앞에서 한 순결 서약을 지키기 위해 마틸드의 진단과 치료를 거부합니다. 수녀들의 처지를 대변하면서도 그 고통에서 눈을 돌릴 수 없는 마리아 수녀, 그리고 잘못된 종교적 신념을 버리고 치료에 임할 것을 요구하는 의사, 마틸드.      

숨 막히는 갈등을 이겨내지 못한 마틸드는 수녀원을 떠납니다. 그리고 적십자 병원이 있는 도시로 향하던 중, 러시아군에 의해 집단 강간을 당할 위기에 처합니다. 다행히, 착한 러시아 장교에 의해 화를 면한 마틸드는 수녀원으로 돌아갑니다.     

강간의 위험을 겪으면서 마틸드는 전쟁 중 러시아군과 독일군에게 강간당했던 수녀들의 고통에 진심으로 공감하게 됩니다. 그들은 모두 같은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수녀원에 다시 러시안 군인들이 들이닥칩니다.     


수녀들이 다시금 화를 당할 것을 염려한 마틸드는 수녀원에 전염병이 돌고 있다는 거짓말로 러시아군으로부터수녀들을 보호합니다. 이를 계기로 수녀들은 마틸드를 믿고 의지하게 됩니다.     

마틸다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수녀원은 조금씩 생기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전쟁 중에 수녀원을 스치고 지나갔던 수많은 이야기와 그로 인해 남겨진 상처들이 하나씩 드러납니다. 그러던 중, 소피아 수녀가 출산합니다.     


마틸다는 수녀원장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당분간 소피아 수녀의 출산 사실을 숨기자고 말합니다. 마리아 수녀는 그럴 수 없다고 말하지만, 결국 마틸다의 이야기를 따르게 됩니다. 서로를 믿고 의지하게 된 의사 마틸다와 수녀 마리아 그들은 깊은 이야기를 나누게 됩니다.      

“신앙이란 온종일 물음표 속에서 찰나의 희망을 보는 거죠.”     


고통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마리아는 우리에게 전쟁만 없었다면 행복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틸다에게 행복의 조건을 묻습니다.     


“당신은 뭐가 부족하죠?”     


마틸다가 말합니다.     


“누구든 쉽게 대답하지 못할 질문이네요”     


프랑스 적십자 병원에 하나의 소식이 전달됩니다. 한 달 후, 폴란드에서 철수한다는 소식입니다. 바에 앉아 술을 마시는 마틸다는 두고 가야 할 수녀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마침내 여러 명의 수녀가 동시에 출산 진통을 하는 시기에 이르자 마리아는 마틸드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혼자 처리할 수 없는 상황을 감지한 마틸드는 상급자인 동료 의사와 같이 수녀원을 방문하여 진단과 치료를 하지만 이는 원장 수녀에게 더욱 큰 불안감을 안겨줍니다. 그리고 결국 불행한 사건이 터집니다.     

신생아들을 수녀원 밖으로 입양 보내는 과정에서 자기 아이를 빼앗긴 수녀가 자살하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태어난 아이를 수녀들의 가족이나 친지들에게 보낸다는 말과는 다르게 원장 수녀는 누군가에 의해 발견되길 기대하며 아이들을 유기해 온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마리아 수녀는 순명의 의무를 거스르며 원장 수녀에게 반항하고, 태어난 신생아들을 마틸드가 머무는 곳으로 데리고 갑니다. 아이들의 처리 문제를 두고 고민에 빠진 마틸드. 그녀는 문제 해결을 위한 한 가지 방안을 생각해 냅니다.      

적십자 병원 주위를 맴도는 전쟁고아들을 수녀원으로 보내 그곳에서 태어난 아이들과 함께 양육을 받도록 하는 방안이었습니다. 이 방법이면 수녀원에 있는 아이들에 대해 누구도 의문을 품지 않을 것이고, 수녀원의 명예와 신생아들의 생명을 모두 지켜낼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적 기록과 심리적 해석

감독 ‘안느 퐁텐(Anne Fontaine)’는 2016년 한 영화 전문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사실적 기록에 심리학적 해석을 더 한 것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감독이 이야기하는 사실적 기록이란 1945년 프랑스 적십자 소속 의사로서 폴란드 지역에 근무하던 ‘마들렌 폴리악(Madeleine Pauliac)’의 일기를 말합니다.      


한 때, 레지스탕스로도 활동했던 마들렌 폴리악은 2차 대전 후, 폴란드에 파견되어 부상으로 인해 잔류해 있던 프랑스 군인들을 치료하고 송환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그녀는 1946년, 교통사고로 사망하였습니다. 그리고 70년이 지난 후 그녀가 쓴 노트가 발견되었고, 노트에는 폴란드 수녀원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마들렌 폴리악(Madeleine Pauliac)

기록과 해석을 근거로 한 영화들이 대개 그렇듯, 이 영화 역시도 플롯과 스토리가 큰 무리 없이 날줄과 씨줄로 엮여 있습니다. 영화 속 스토리가 사실적 기록이라면, 심리학적 해석은 플롯 구성의 토대가 된 것이지요.     


유명한 판타지 작가 ‘르 권’은 서사의 필수적 궤적인 스토리가 변화와 복잡성을 표현하는 플롯보다도 더 중요하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심리학적 해석은 가끔 플롯과 스토리를 일치시키는 매듭의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영화 속에서는 기록에 바탕을 둔 날줄과 해석에 근거한 씨줄이 만나는 순간들이 존재하는데, 그 첫 번째 매듭이 바로 수녀들이 부른 성가의 사이사이 끼어든 고통의 비명입니다. 이 매듭은 빅뱅과 같이 영화의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는 시점(始點)이 됩니다.     

플롯과 스토리가 엮이는 두 번째 매듭은 바로 소련 검문소에서 마틸드가 강간을 당할 뻔한 장면입니다. 감독, 안느 퐁텐의 말에 의하면 고통받는 수녀들에 대한 마틸드의 이해에 있어서 이 장면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을 기점으로 마틸드는 수녀들과 함께하는 방식의 변화를 경험합니다.      


공동체의 안녕과 가치에 집중하면서도 이를 파괴하는 마리아의 행동을 극단적으로 막아서지 못하는 수녀원장, 생명을 위해 규율마저도 깨뜨려 버리는 마리아, 자신의 운명을 사명으로 받아들이며, 공동체와 생명의 가치를 모두 지켜내는 무신론자 마틸드. 그들 모두는 같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화이트 스노우’나 ‘코코 샤넬’ 등, 다른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안느 퐁텐의 영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심리학적 해석은 매우 중요합니다. 때문에, 이 영화에서도 원장 수녀와 마리아 수녀 그리고 의사 마틸드 사이에 흐르는 심리적 갈등을 읽어내는 것이 이 영화를 보는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영화 속 마틸드와 마찬가지로 무신론자인 감독 안느 퐁텐은 이 영화의 제작을 앞두고 두 번의 긴 피정을 했다고 합니다. 이는 수녀들과의 공동생활을 통해 수녀 공동체의 진정한 내면을 이해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한 인터뷰에서 “영화가 기독교 신앙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은 안느 퐁텐은 믿음이란 “매우 연약하고 매우 유동적인 것”이라고 대답한 바 있습니다. 믿음이란 한 번 가지고 있다고 해서 영원히 그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과 예술 등 많은 것을 믿지만 가톨릭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수녀들과 함께 살면서, 그리고 이 영화를 작업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우리의 이야기가 194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이런 종류의 일은 여전히 매일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말이죠. 전쟁과 근본주의가 있는 곳마다 이런 종류의 학대가 여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안느 퐁텐의 이 말속에는 그녀가 이 영화를 제작하게 된 배경과 목적이 명확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무신론자 안느 퐁텐이 종교 속으로 들어가 근본주의의 심리를 파헤쳤다면 우리는 거꾸로 종교 밖으로 나와 근본주의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근본주의란 종교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법조계에도, 학계에도, 교육의 현장에도, 그리고 의료계에도 근본주의가 존재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조직의 가치와 안녕, 그리고 제도를 지켜내기 위해 생명과 인권의 가치를 버리는 사람들입니다.     


움베르토 에코는 비극과 희극의 차이를 완결 구조의 여부에서 찾았는데, 안느 퐁텐은 이 영화가 완결 구조를 가지길 원했던 듯합니다. 조금 비현실적임에도 불구하고 해피 엔딩으로 영화를 마무리했으니 말이죠.     


실제 마들린 폴리악은 수녀들과 일한 직후,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영화 속 결론 즉, 현지의 고아를 수녀원에 입양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습니다. 안느 퐁텐은 베트남의 한 수녀원이 현지 고아들을 입양한 역사적 사실을 폴란드의 수녀원 이야기와 결합하여 행복한 결론으로 재창조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허구가 의미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근대사에서 유사한 역사를 가진 두 나라, 즉 폴란드와 베트남의 이야기를 엮은 것은 일종의 판타지이지만 매우 현실적이지요. 덤블도어 교수가 해리포터에게 “머릿속 이야기라고 해서 현실이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 것과 같지요.     


무고한 사람들과 구원자

이 영화의 원제는 ‘The Innocents(무고한 사람들)’입니다. 한국에서는 ‘아뉴스 데이’ 즉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번역되어 개봉되었습니다. 번역의 의도를 대충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번역의 적절성에 대해서는 의문이 갑니다.     


‘무고한 사람들’이란 말은 죄를 덮어쓴 사람이라는 단순한 의미를 지니지만 요한복음 1장 29절에 기록된 ‘아뉴스 데이(Agnus Dei)’, 즉 ‘신의 어린양’은 전통적으로 두 개의 의미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희생 제물이고, 또 하나는 희생을 통해 구원을 일으키는 자를 상징합니다.     


두 번째의 개념, 즉 구원을 일으키는 자로서의 아뉴스 데이는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의 논쟁을 거치면서 인간의 한계에 대한 지나친 강조점이 되었고, 중세의 알마니안 논쟁을 거치면서 구원에 대한 인간의 의지를 완전히 무력화시켰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에서 한 “나의 모든 희망은 오로지 당신의 자비에 있나이다. 당신이 명하는 것을 주시고 당신이 원하는 것을 명하소서.”라는 고백은 중세를 거치면서 자기 성찰이 아닌 예수 숭배의 신학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이러한 예수 숭배의 신학은 예수의 의지를 곡해하고, 성화를 위한 실천을 배제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적 성찰

을 죄 많고 부서진 인간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그곳에서 뿌리 깊은 근본주의로 변질시켰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자신의 고통을 인내하는 ‘무고한 자’가 아닌 세상에 군림하고자 하는 ‘구원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감독 안느 퐁텐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는 일종의 ‘학대적 행위’입니다. 그녀가 영화 속에서 제도에 집착하는 유신론자(원장 수녀)와 생명의 가치에 집중하는 무신론자(마틸드)를 대칭 구도 위에 올려놓고 바라본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 속에서 이루어진 교회와 의사의 만남은 그래서 참으로 절묘합니다. 오늘날 광장을 오염시키는 일부 기독교 세력과 의료의 현장을 떠나는 의사들에게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그들 스스로 무고한 희생양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스스로 사회의 구원자라는 숨겨진 신념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들에게도 영화 속 마틸드가 강간의 위험 속에서 발견했던 공감의 시간과 공간이 찾아올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부활하신 예수가 세상의 왕으로 군림하지 않았듯이 자비를 구하는 기독교인은 세상의 승리자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Agnus Dei, qui tollis peccata mundi, miserere nobis.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https://youtu.be/AiuC_CaObb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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