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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인순 Nov 16. 2020

'시녀이야기' 디스토피아와 유토피아

책 속의 사람들

시녀이야기

화려하지만 모호한 수사들, 여성일 수 없는 실존적 한계까지 더해져 더욱 불편해진 이야기들은 책을 읽는 동안 서서히, 그리고 조금씩 구체화된다. 그럴수록 독서의 속도는 현저히 떨어지고, 속도의 지침이 ‘느림’에 이르자 안갯속에 가려진 듯했던 수사의 의미들이 명확해지고, 또 그만큼 절실해졌다.      


절실함에 대한 공감, 그것은 언어와 육체라는 원초적 소재들이 가진 힘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념과 사상과 해석과 개념의 겉옷들이 벗겨진 본래의 것들에 대한 깨달음, 아니 깨달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느낌의 힘이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20세가 후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점령한 도시 길리어드, 그 디스토피아적인 도시에서 시녀로 살아가는 한 여성의 이야기가 그려져 있는 이 소설은 일종의 판타지다. 디스토피아도 그 비극 안에 낭만성이 그려져 있다는 측면에서 판타지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비극적 낭만성은 두 장마다 펼쳐지는 ‘밤’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구술된다.     


이 소설의 막후 이야기인 ‘시녀이야기의 역사적 주체’라는 글에서는 2195년 6월 25일에 ‘국제 역사 학회 총회’라는 가상의 이벤트 현장이 서술되어 있다. 여기서 당시의 학자들은 20세기 말 주인공이 살아갔던 길리어드의 역사적 배경에 관한 연구 결과를 발표한다. 길리어드라는 판타지가 신화 또는 역사가 되는 순간이다.     


흔히들 ‘이갈리아의 딸들’이 유토피아적 페미니즘 소설이고, ‘시녀이야기’가 디스토피아적 페미니즘 작품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궁극적으로 현실적 슬픔에 바탕을 둔 일종의 비극의 판타지라는 면에서 두 개의 작품은 유사하다. 본질에서 판타지는 실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갈리아의 딸들’이 실재의 초월이라고 한다면, ‘시녀이야기’는 실재의 심화이다.      


시녀이야기의 원제목은 ‘The Handmaid’s Tale’인데, 여기서 꼬리라는 뜻을 가진 ‘Tale’이란 단어는 ‘여성의 질’ 또는 성적 대상으로서의 여성을 비하하는 비속어이다. 이 단어는 인류가 좀처럼 극복하지 못하는 의미의 간격을 암시하는데, 그것은 바로 여성의 생물학적 기능과 사회적 지위의 불일치이다.     


소설의 배경이 된 도시 길리어드에는 아내(Wives), 자녀(Daughters), 시녀(Handmaids), 하녀(Marthas), 가난한 아내(Econowives), 아주머니(Aunts), 미망인(Widows), 비 여성(Unwomen), 접대부(BunnyClubgirls)등 아홉 개의 여성 계급이 존재한다.      


여성의 계급 구조는 모두 남성들과의 관계를 정의한 것으로서 이 중 ‘시녀(Handmaids)’는 아내들을 대신하여 아이를 출산하는 일을 전문으로 담당하는 여성들이다. 때문에, 그들의 존재 가치는 오직 출산에만 한정된다.     


소설 속 주인공 이름은 오브레드이다. 브래드에 종속된 존재라는 뜻으로 그녀가 아이를 낳아주어야 할 남성의 이름에 종속된다. 길리어드에서 시녀의 이름은 모두 그렇다. 시녀의 이름은 고유명사가 아니다. 아이를 갖지 못한 여성은 이름을 잃어버리고, 새로운 시녀가 오면 다시 이 이름을 물려받는다.     


마가릿 애트우드

대표적인 페미니즘 작가인 마거릿 애트우드는 페미니즘 문학 부류에 속하는 이 소설에서 거창한 페미니즘의 담론을 펼치지 않는다. 대신 그의 주장은 세밀하고 정교한 표현과 묘사를 통해 어느새 실존의 갑옷을 뚫고 스며드는 가랑비처럼 우리의 영혼을 적신다. 그리고 우리를 여성(Gender)으로 바꾸어 놓는다. 이것이 그녀의 문장이 가지는 힘이다. 싸움을 걸지 않고 이기는 힘.


그러나 한 가지, 여전히 작가의 표현이 모호하고 이해되지 부분이 존재한다. 이는 독자가 작가에 미치지 못하는 경험의 부족일 수도 있고 실존적 한계일 수도 있다. 아무튼 “그곳에 왜 그런 표현이 쓰였을까?”라는 의문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진다.


반면, 이 소설을 통해 몇 가지 의문이 해결된 부분도 있다. 첫째는 “왜 페미니스트는 항상 화가 나 있을까?”라는 오래된 질문이다. 언젠가 한 여성 운동가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아마도 그만큼 고통스럽기 때문이 아닐까요?”라는 반문이 돌아왔다. 그러나 고통이 크다고 항상 화가 나 있는 것은 아니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표현에 따르면 페미니스트가 항상 화가 나 있는 이유는 언어의 한계 때문이다. 즉, ‘화’는 고통의 문제가 아니라 고통에 대한 설명의 문제이다. 작가는 이를 “용서하고 싶어도 용서할 수 있는 권력이 없다”라는 말로 ‘겨우(?)’ 표현한다.     


“무언가를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말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말이란 결코 정확할 수 없으며 언제나 뭔가 빠뜨리기 때문이다. 현실에는 너무 많은 단편이 있고, 관점들이 있고, 반목들이 있으며, 뉘앙스가 있다. (...) 당신이 혹시 남자라면, 그리고 여기까지 포기하지 않고 읽어왔다면, 제발 명심해 달라. 당신은 여자로서, 남자를 용서해야만 한다는 유혹이나 기분에 절대 시달리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잊지 마라. (...) 용서 역시 일종의 권력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오래된 두 번째 의문은 소위 ‘사회적 정의와 같은 이슈에 대한 민감성’으로 번역되는 ‘Wokeness’를 둘러싼 해석이다. 언젠가 미국의 한 심리학자는 Wokeness를 일종의 “남에게 상처를 주는 상처’라고 정의한 바가 있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아픔은 그것을 인식하는 순간부터 더욱 아프기 때문이다. 상처의 고통은 그 상처에 집중하는 만큼 커진다.      


특히 병리적 아픔과는 달리 사회적 아픔은 결국 타자의 각성과 제도적 장치를 통해 해소될 수밖에 없기에 필연적으로 ’ 사회적 불편함‘이 요구된다. 이 ’ 불편함‘을 ’ 남에게 주는 상처’로 해석한다면, 현실적으로 부정할 방법이 없다. 이런 갑갑한 상황에서 우리는 판타지 속으로 숨어든다.      


소설 속에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로부터 모든 것을 박탈당한 주인공 오브레드가 “우리”라는 단어에 대해, 잠자리를 요구하는 연인에 대해, 그리고 박탈에 대해 새로운 감정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 역시 이전에는 인식하지 못했던 새로운 해석과 감정, 즉 Wokeness이다.      


때문에, 소설에서 작가가 구상하는 디스토피아는 어느 날 예기치 못하게 맞서는 인식의 변화일 수 있다. 이전까지 느끼지 못했던 디스토피아, 그것은 언제든 갑자기 도래할 수 있는 우리의 세상이자, 이미 도래했던, 그리고 지금도 실존하는 세상인 것이다.     


어떤 냉정한 심리학자의 말처럼 Wokeness는 일종의 상처, 그것도 남에게 상처를 주는 상처일 수 있다. 그러나, 최소한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상처이다. 그래서 남에게 상처를 주는 한이 있어도 풀고 가야 할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그래도 좋은 일들도 집어넣으려고 애를 써왔다. 예를 들어 꽃 같은 것, 그마저 없다면 도대체 지금 어떤 기막힌 지경에 이르렀을까? 그렇지만 이 이야기를 하고, 또 하고, 되풀이할 때마다 나는 고통스럽다. (...) 하지만 나는 이 서글프고 굶주리고 황폐하고 절뚝거리고 사지가 절단된 이야기를 계속하려 한다. 왜냐하면, 그래도 나는 이야기를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기 때문이다.”     


작가에 따르면 길리어드라는 디스토피아는 초창기 구약 시대와 19세기 구 유타주에서 행했던 일부다처제일 수 있다. 여성에 대한 억압 체제는 중세 기독교일 수 있고, 러시아 KGB나 차르의 비밀 첩보원일 수도 있다. 길리어드의 인종 차별적 정책은 여전히 존재하는 우리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산아 제한 정책은 길리어드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아는 역사만 보더라도 모택동 이후의 중국이나 1980년대 루마니아에도 있었다. 또한, 인류에게는 발칸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인종 말살의 경험이 있다. 막후 이야기인 ‘시녀이야기의 역사적 주체’라는 글에서 2195년의 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그렇다면 우리의 작가는 여러 사람 중의 한 사람일 뿐이며, 그녀가 속해 있던 역사적 순간이라는 넓은 윤곽 속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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