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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인순 Feb 17. 2021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들

책 속의 사람들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들

우리는 누구나 어느 정도는 청각장애인이며, 시각장애인이다. 사람은 예외 없이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자신을 들여다보는 데 너무나 미숙하고, 자기의 소리를 듣는 데 턱도 없이 부족하다. 때로는 과대망상이 덫 쓰인 망막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기도 하고, 지나친 감수성과 잘못된 신념으로 타인을 바라보기도 한다. 왜곡된 잔상과 소음에 쌓인 나, 이 책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들’은 바로 이런 인간 현상을 과학적으로 설명해 주는 책이다.      


이 책의 원제목은 ‘만나서 반갑습니다(Pleased to meet me). ’이다. 책의 제목에서 당장 떠오르는 것은 “왜 당신을 만나는 것이 아닌, 나를 만나는 것이 반가울까?”라는 의문이다. 이 제목 속에는 특별히 나를 만나서 반가운 이유가 평소에 인식하지 못한 나의 그 무엇일 것이라는 암시가 깔려있다.     


대체로 우리는 매일같이 거울에 비친 모습을 확인하는 동화 속 마녀처럼 자신이 왕비의 인격을 가졌는지 아니면 마녀의 심성을 가졌는지가 중요시되지 않는다. 아름다운 왕비를 만날 때는 반갑지만, 마녀는 별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해리포터에 나오는 덤블도어 교수가 아닌 이상, 나를 만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런데 왜 반가울까?      


‘창조하는 뇌’의 저자 데이비드 이글만은 이 책의 서평에서 “당신이라는 사람을 만든 무수한 요인에 대해 간결하게 서술했다”라는 칭찬의 글을 달았다. 그러나 사실 이 책은 “무수한 요인을 간결하게 서술”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단순한 요인들을 복잡하게 설명” 하고 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단순한 요인이란 바로 유전자 DNA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조금 당황스러운 지점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은 줄곧 인간의 성향은 DNA에 의해 결정되거나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는다는 환원론적 주장을 펼치던 저자가 갑자기 인간 현상에는 매우 복잡한 요인이 있다고 말한다는 부분부터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렇게 전후 관계가 일치하지 않는 저자의 주장에는 이유가 있다. 바로 공학적 관점과 철학적 관념의 차이가 정리하지 않은 상태에서 논리가 전개되기 때문이다. 철학적으로 매우 단순한 것이 공학적으로는 복잡하게 설명될 수 있으며, 반대로 공학적으로 단순하고 쉬운 것이 철학적으로는 매우 까다롭고 어렵기 때문이다.     


최근, 많은 과학자가 인문학의 범주를 드나들며 철학적 주제를 건드리고 있다. 이런 과학자들이 쓴 책이나 글을 보면, 철학적 표현과 과학적 서술의 복잡성과 단순성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논리의 오류들을 종종 보게 된다.      


우리는 세포의 신진대사로부터 인생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하지만 확대 해석이라는 논리의 무리수를 두어서는 안 된다.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이 책에서 저자가 인간 현상에 대해 화려한 과학적 설명 끝에 내놓은 철학적 결론은 매우 모호하다.      


저자 빌 설리번은 세포생물학과 분자생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는 과학자다. 세상을 물질로 해석하는 유물론자이면서, 인간 정신의 독립성을 둘러싼 오래된 논쟁의 전선에서 독립성이 없다는 측에 선 학자이기도 하다. 이런 자연주의자들을 향해 쏟아지는 전통적인 질문들이 있다.     


바로 인생의 목적은 무엇이고, 삶의 가치는 어디에 있으며,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에 대한 인간의 욕구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등의 질문이다. 아주 작은 방어적 수사를 제외한다면, 저자는 이런 질문들에 대해 모두 물질로서 설명 가능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당신도 이제 알겠지만, 우리가 왜 지금처럼 행동하는지를 이해하기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단 한 가지 설명으로 우리의 모든 행동을 이해할 방법은 절대 없다. 인생의 성공과 실패 역시 자신의 능력 혹은 능력 부족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우리의 행동과 성격은 유전자, 미생물 총, 호르몬, 신경전달물질, 환경 사이의 어지러운 상호작용으로 생겨난다.”     


이 말에서 느껴지는 과학자의 오만함은 무엇일까? 결국, 인간 행동의 원인은 (저자가 의도했든 아니든 상관없이) 과학자들의 힘든 연구를 통해서만 해석될 수 있다는 태도가 아닐까?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은 DNA가 조종하는 실에 매달린 꼭두각시이고 이 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과학밖에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유전자 편집, 후성유전학 약물, 미생물 총 리모델링, 뇌와 컴퓨터 등 과학적 성과를 통해 DNA의 완전한 통제로부터 조금씩 벗어나고 있으며, 덕분에 우리는 좀 더 도덕적이고 이타적 생명체로 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DNA의 한계 속에 사는 내가 DNA에서 벗어날 수 있는 희망 역시도 DNA 조작이라는 과학적 성과에 달려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의 의문이 생긴다. 도대체 이기적 유전자를 극복하기 위한 ‘부단한 자기 성찰’의 주체는 누구이며, 왜 자기 성찰을 해야 한단 말인가? 기존에 극단적 진화론자들이 주장한 바와 같이 인간이 스스로 생존하기 위해 이타성을 가지게 진화한 것인가? 아니면 도킨스의 주장대로 사회적 유전자, 즉 밈이 작동한다는 것인가? 이 책에는 이런 의문에 대한 설명이 충분치 않다.     


저자는 인간이야말로 이기적 유전자를 향한 반란을 일으키는 특수한 종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오만한 자아, 탐욕, 부정직, 사기, 우리 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 수십억의 사람들이 가난의 굴레에서 고통받는 동안 소수의 사람이 세상의 부를 독차지하게 만드는 사회적 위계에 대한 내성 등에 반기를 드는 유일한 생명체가 인간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러한 철학적 주제에 대한 저자의 답변은 결승점 바로 앞에서 멈춘다. 도대체 이기적 유전자를 향해 반기를 드는 그 주체는 누구인가? 이기적 유전자가 이기적인 자신에게 반기를 든다는 것인가? 이에 대해서도 저자는 설득력 있는 답변을 준비하지 못한 듯하다.      


이 책에서 가장 관심이 끄는 부분은 종교적-사회적 자아에 대한 생물학적 해석이다. 왜 나는 정치적으로 우파이고, 좌파인가? 나는 진보적 과제에 대해 왜 긍정적으로 또는 부정적으로 반응하는가, 왜 인간은 종교를 가지는가? 등의 문제에 대한 DNA를 앞세운 설명들이다.     


‘유전자 정치학’의 연구 결과, 유전자가 우리의 투표 성향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고 소개한 저자는 투표의 향방이나 정치적 입장에 대한 완고한 태도가 결국은 DRD4 유전체와 편도체의 활성 특성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보수주의자들은 공포와 불안을 느낄 때 활성화되는 뇌 영역인 편도체가 더 커진 경향이 있는 반면, 진보주의자들은 본능적인 생각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데 관여하는 뇌 영역인 앞쪽 띠 겉질이 더 커진 경향이 있었다.”     


우리 뇌가 비정치적인 신념에 대해서는 다소 유보적이지만 정치적 이념에 대해서는 완고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도 정치적 신념이 자아상과 쉽게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모호한 대답을 한다.      


보수주의자는 발생 가능한 위험을 감지하는 데 더 뛰어나며, 진보주의자는 위험을 평가하는 데 더 뛰어나기 때문에 이런 다양성이 상호보완적인 문명의 능력으로 볼 수 있다는 저자의 논리 안에는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가 공존하는 이유도 결국은 사회의 존속과 생존 때문이라는 주장이 숨어있다.      


그렇다면 사회적 생존을 위협하는 극단적 좌파와 우파는 어떤가? 저자는 그들이 그저 상호보완성을 깨는 사람들이라는 상식적인 답변만 내놓는다. 진보와 보수가 존재하는 이유가 한 공동체의 생존과 보존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고개가 갸우뚱거려지기고 한다.     


한편, 저자는 종교에 대해서도 과학적 해석을 내놓는다. 종교가 실존적 위기를 달래주는 것과 함께 우리가 단기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 투자되는 뇌의 에너지를 절약해 준다는 점에서 진화론적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이든 다 신이라고 부른다.”라는 에드워드 애비의 말을 인용하여 종교는 우리 지식의 뚫린 구멍을 간단히 메워 주는 도구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뇌의 에너지를 절약해 주면, 어떤 진화론적 이점이 있는 것인지?, 뇌의 에너지를 적게 쓰기 위한 다른 인간 행동은 또 무엇이 있는지? 에 대한 언급은 없다.     


아마도 저자는 미신과 종교의 차이를 혼동하고 있는 듯하다. 희생과 고통을 감내하는 종교의 가르침과 그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소비되는 엄청난 규모의 정신적 에너지에 대해서 무지한 것이다. 뇌의 에너지를 적게 쓰는 쪽으로 인간이 진화한다면 수학이나 철학, 문학 등이 왜 인간종에게만 특별하게 발전된 것인지? 에 대한 대답도 없다.     


따라서 이 책의 제목 번역은 명백히 잘못됐다.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들”이라는 철학적 표현 대신, “나를 만드는 것들”이라는 과학적 표현을 쓰는 것이 더 적절했을 것이다.     


포스트휴먼(Posthuman) 시대의 정크 철학(Junk Philosophy)

포스트휴먼(Posthuman) 시대를 이끄는 주류 학문은 두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는 진화론에 기반을 둔 유전공학이고 둘째는 뇌공학에 기초한 인공지능이다. 이 두 학문의 결합체는 우리 자신을 설명하는 완벽에 가까운 이론 체계를 만들어 우리 인생의 운명적 과정을 설명하려고 끊임없이 시도한다.     


이 책에서도 저자 빌 설리번은 인간의 정체성을 DNA, 후성유전을 일으키는 메틸기와 히스톤 단백질, 우리 몸의 세포보다도 더 많은 세균, 그리고 뇌를 구성하는 신경세포들의 네트워크로 규정하면서, 이러한 과학적 통찰을 인간관계와 인생의 의미라는 철학적 범주로까지 확장하려 시도하고 있다.     


“이제 머지않아 우리는 우리의 창조주를 개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것이다. 우리는 유전자를 편집하고, 후성 유전적 표지를 조작하고, 미생물군 유전체를 리모델링하고, 뇌를 조작하는 방법을 개발하고 있다.”      


포스트휴먼 시대에 인공지능과 유전공학이 친하게 지낼 수 있는 이유는 인공지능이야말로 인간 무의식의 내면에 작동하고 있는 DNA 기재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공지능은 우리 DNA의 욕망을 읽어내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때문에, 포스트휴먼 시대의 과학적 성과물들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해 좀 더 고민해야 한다. 인공지능과 유전공학을 연결하여 탄생시킨 과학적 성과를 무기로 철학적 결론을 내리려는 섣부른 시도는 결국 정크 철학을 양산해 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포스트휴먼(Posthuman) 시대의 정크 과학(Junk Science)  

2017년 미국 과학계에 충격적인 사건이 하나 있었다. 미국 스탠퍼드대의 미하우 코신스키라는 조직행동학 교수가 동성애자를 판별하는 얼굴 인식 인공지능 연구 결과를 발표한 것이었다. 2020년, 그는 또다시 얼굴 인식 기술을 토대로 개인의 정치 성향을 판별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코신스키의 연구에 따르면 인공지능이 정치 구호 등이 적힌 모자나 티셔츠 같은 도구 없이도 얼굴 사진만 보고 그 사람이 진보 성향인지, 보수 성향인지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미국과 영국, 캐나다의 온라인 데이트 웹사이트와 앱에서 자신의 정치 성향을 함께 표시한 108만여 명의 등록자들의 얼굴 사진을 수집했다.     

코신스키는 이렇게 수집한 얼굴 사진을 얼굴 인식 알고리즘에 집어넣고 각각의 얼굴 특징을 대략 2000가지의 데이터 요소들로 압축시킨 다음, 이를 진보 또는 보수 성향에 연결될 수 있는 공통 요소로 추출했다.      


하지만 코신스키의 이런 연구는 유사과학적 아이디어에 기반한 것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사진을 통해 개인 성향을 예측하는 것은 가능한 얘기이긴 하지만, 이는 기껏해야 우연히 맞출 확률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라는 것이다.     


코신스키를 비롯한 인공지능 연구자들은 왜 굳이 이런 문제가 있는 연구들을 계속하는가 하는 것일까? 코신스키 자신이 밝힌 이유는 “프라이버시 문제에 대한 경종을 울리기 위한 것”이었다. 디지털 발자국(digital footprints)이라는 렌즈를 통해 사람과 사회 과정, 행동을 이해하려는 시도라는 것이다.     


인간의 의식이 생존의 문제로부터 좀 더 심오하고 형이상학적이며, 철학적인 분야로 그 관심을 확장했듯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연구되고 개발되는 포스트휴먼 시대의 성과물들 역시도 인간과 가치와, 의식과 의미의 영역으로 진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보여준 저자 빌 설리번의 진군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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