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의 사람들
기독교 성경은 “태초(in the beginning)에 하나님이 있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문장은 기독교 신학의 최후까지 남아있을 질문이다. 반면 과학자들은 태초, 즉 “빅뱅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나?”라는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 말하곤 한다. 시간과 공간과 질량과 중력은 모두 빅뱅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종교와 과학은 여기서 갈린다. ‘처음 이전’이 있었다면 ‘종말 이후’가 있을 것이고 이것은 내세를 다루는 종교적 세계관이지만, 과학의 범주는 ‘처음’이 있었다면 필연적으로 ‘종말’이 있다는 논리를 포함한다. 이 책의 내용은 과학의 범주에 속하며, 주제는 ‘종말까지(until the end of time)’ 존재하는 인간의 물질적 토대이다.
과거를 향한 인간의 과학적 상상력은 빅뱅에서 멈춘다. 최근, 빅뱅 이전의 물리학적 우주를 설명하는 시도들이 있지만, 이 역시도 빅뱅에서 유추한 과학적 상상력의 연장선에 불과하다. 여전히 태초는 과학의 범주를 넘어선 상상력의 임계점이다. 그리고 이 임계점에서 시작하여 엔트로피라는 법칙을 따라 도달할 또 하나의 임계점, 그것이 바로 ‘종말 (end of time)이다.
저자 브라이언 그린은 엔트로피 법칙으로부터 계산된 필연과 당연함을 전제로 태초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우주와 생명 현상에 관해 설명한다. 물론 이는 수많은 거인의 어깨와 어깨를 짚고 이어온 설득력 있는 개념과 이론들, 법칙과 설명, 그리고 양자역학과 물리학이 동원된 연대기적(?) 설명이다.
여기서 ’ 연대기적‘이란 단어를 쓴 이유는 저자 스스로 밝힌 바와 같이 시간이 처음 흐르기 시작했던 시점부터 종말의 순간까지, 우주가 걸어왔고 걸어갈 길을 살펴보겠다는 전제와 저술 의도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은 집대성이다. 독창적인 것은 거의 없다. 집대성이 가진 보편성과 지루함에서 벗어나고자 저자는 ’ 종말’이라는 흥미로운 단어를 빌렸다.
이 책에서 저자 ’ 브라이언 그린‘은 양성자와 중성자의 단위에서 시작하여 물질이 만들어지고, 물질이 생명 현상으로 발전하며, 생명의 정수로서 정신으로 진행하는 과정, 그리고 그 정신의 실체로서 ’ 의미‘에 도달하는 경로에 숨어있는(그러면서 작동하는) 양자와 물리의 환원론적 동력을 설명하고 있다.
원소를 기반으로 자연 합성된 아미노산과 핵산이 DNA와 단백질을 만들어내고 이것이 결국, 체세포와 신경 세포로 발전하여 인간의 신체와 뇌를 구성하고, 그 뇌는 빅뱅과 이루의 일련의 과정을 돌아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종말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는 다소 지루한(?) 과학적 아이디어가 촘촘히 깔려있다.
그리 새로울 것이 없는 과학적 아이디어는 매우 풍부한 사례를 통해 재미를 더해준다. 이런 재미에 만족할 수 없었던 저자는 종말과 이에 따른 의미의 문제를 도입하며 과학에서 철학으로 나아가고자 했던 것 같다. 다시 말해 일종의 ‘포스트 휴머니즘 (Posthumanism)’ 담론이다. 이런 저자의 시도는 성공적이었을까?
이 책에는 16세기 물질과 분리된 정신의 존재를 주장했던 데카르트로부터, 정신과 물질을 일원론적으로 바라보았던 17세기의 스피노자, 식물의 생장을 통해 지각의 문제를 고찰했던 새뮤얼 버틀러와 물질의 진화와 정신의 진화를 하나의 선상에 놓았던 샤르댕, 그리고 지각과 의식으로 대표되는 정신과 감각과 경험으로 정의되는 물질 간의 관계를 규명하려 했던 메를로 퐁티에 이르기까지 물질과 정신을 둘러싼 모든 아이디어와 이에 기초한 현대 과학의 성과들이 직간접적으로 나열되어 있다. 서문에서 저자는 이를 일종의 여행이라고 표현했다.
“이 책의 목적은 ‘지금 여기’의 특별함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과학이라는 우주선을 타고 우주의 시작에서 끝에 이르는 기나긴 여행을 떠날 참이다. 이 여행길에서 초기의 혼돈으로부터 생명과 마음이 탄생하게 된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 우리는 여기에 기초하여 행성과 별, 은하, 블랙홀에서 생명과 마음에 이르는 모든 현실적 존재의 미래를 평가할 것이다.”
이 책을 보면 ’ 코스모스’와 ’ 총 균 쇠‘에서 다룬 ’ 빅 히스토리‘의 아이디어를 ’ 포스트 휴머니즘‘의 영역으로 확대한 유발 하라리의 ’ 호모 사피엔스’가 떠오른다. 대체로 이런 과학적 아이디어의 확대에는 두 가지 불편한 점이 숨어있는데, 첫째는 개별 아이디어의 재미를 모아 전체 맥락을 속이려는 어색한 목적이고, 둘째는 저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개별 아이디어와 저술의 목적이 일치시키지 못한 안타까운 결과이다.
책을 읽다 보면 길을 잃을 때가 있다. 이런 경우 다시 서문을 살피게 된다. 서문에서조차 길이 보이지 않는다면 제목을 보게 된다. 불행히도, 제목 속에서도, 서문을 통해서도 본문을 따라가기 위한 길을 찾지 못할 때가 가끔 있다. 이런 경우 십중팔구는 저자 역시도 길을 잃었거나 저술의 목적 달성에 실패한 것이다.
저자 브라이언은 서문에서 모호한 개념을 모호한 언어로 표현하는 것에 대한 한계를 ‘죽을 맛’이라는 말로 토로했다. 다행히 그를 죽을 맛에서 구해준 사람은 오스발트 슈펭글러였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브라이언의 동기는 슈펭글러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를 각성시킨 슈펭글러의 말은 다음과 같다.
”인간은 죽음을 아는 유일한 존재다. 그 외의 모든 생명체도 늙기는 마찬가지지만, 자신이 영원하다는 착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모든 종교와 과학, 그리고 철학은 죽음을 극복하려는 몸부림 속에서 탄생한 것이다. “
인생의 의미
오래전부터 극단적 과학 주의자들이 직면했던 질문이 있다. 모든 자연과 함께 인간 역시도 물질과 물리적 인과 관계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인간이 태어나고 살아가고, 마침내 죽어가는 것에 대해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냐는 질문이다. 희생과 열정과 가치와 의미, 그 모든 것은 불분명한 물리적 산출물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명확한 지향점도 존재하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견뎌낼 수 있을까?. 즉, 죽음을 극복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 과학 주의자들은 여러 가지 논리로 대답했으며, 또 반박을 받아왔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과학 주의자들이 찾아낸 대답은 “삶에 주어진 의미란 없으며,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각자가 찾아낸 의미”라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 브라이언 그린 역시도 이런 답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면서 자신을 자극하거나 위안을 주는 무언가를 찾고, 사람들의 주의를 끌고, 새로운 곳을 찾아 이동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독자들도 잘 알다시피 우주는 생명과 마음이 번창할 만한 장소를 제공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생명과 마음은 우주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생한 결과물일 뿐이다.”
결국, 저자 브라이언은 인간과 우주의 물질적 토대를 설명하며, 물질의 가장 발달한 결과물로서의 생명과 마음에 의미를 찾기 위해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곳은 바깥이 아니라 내면이기에 우리의 삶의 자세 역시도 이미 제시된 답에 의존하지 말고 개인적인 존재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과학은 바깥 세계를 이해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다. 그러나 과학을 제외한 모든 것은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이 할 일을 결정하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인간사로 이루어져 있다.”
추측하건대, 이 책은 종말과 낡음의 불가피성을 통찰한 과학적 탐구서이다. 역대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이 증명해 온 종말의 증거를 동원하여 우주가 자연사나 대격변을 통해 파괴될 당위성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우리 삶에 있어서 유일한 의미는 우리 자신이며 현재 순간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이러한 저술의 목적은 그리 성공적으로 달성되지는 않을 것 같다. 얼마 전, 유시민 작가가 진행하는 독서 유튜브에서 이 책을 다루었다. 토론에 참여한 사람들은 우주의 파괴될 당위성과 그 속에서의 유일한 의미를 탐구하기보다는 과학적 아이디어에 몰두했다. 풍부한 과학적 내용이 오히려 종말을 둘러싼 철학적 담론을 지워버린 결과이다.
2018년, 한 공개 토론에서 미국의 심리학자 조던 피터슨은 ‘밈’이란 개념을 정립한 수잔 블랙 모어에 ‘의미’에 관해 물었다. 수잔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당신은 우리가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의미를 위해 분투한다고 말해야 하는데, 저는 스스로 물었어요. ‘내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나?’, ‘내 인생엔 어떤 의미가 있나?’. 저의 분투 중 대다수는 책을 쓰는데 할애하고 있어요. 이건 의미 있는 건가요? 이건 그냥 내 몸이 시켜서 하는 일이에요.”
이에 대해 조던은 다음과 같이 날카로운 반론을 제기한다.
“그럼 몸이 시키는 말을 잘 듣고, 그 명령에 반대되는 소리에는 귀 기울이면 안 되겠네요? 무신론자들은 종교를 연기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비판하죠.”
어떤 형식과 내용의 종교이든, 종교가 없이 인생의 의미를 찾기는 불가능하다는 조던의 말에 수잔은 본래 인생에는 의미란 존재하지 않다고 맞선다. 수잔과 같은 극단적 과학 주의자로 추정되는 저자 브라이언 역시 인생에 의미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유일한 의미는 자기 자신이며, 현재라는 이율배반적인 주장을 이어간다. 저자 브라이언도 마찬가지다.
자유의지에 대하여
앞에서 이 책에는 저자의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굳이 한 가지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찾자면 바로 자유의지에 관한 내용이다. 철학에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 있다면, 과학에는 결정론적 세계관 지지하는 전통 물리학과 확률론적 세계관을 주장하는 양자역학이 있다. 이들은 ‘자유의지’라는 주제를 놓고 충돌해 왔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는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정통 물리학자들은 우리가 물리학적 인과 관계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하는 한편, 양자 물리학자들은 세계는 확률적 공간 속에 존재하기에 같은 원인이 서로 다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저자 브라이언은 양자역학적 세계관 속에서도 결국 자유의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고전 물리학에 근거한 결정론이나 양자물리학에 근거한 확률론에 따라 현실이 전개되는 방식과 예측 가능한 내용은 달라지지만 자유의지에 관한 한 둘 다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이곳에 존재할 확률이 50%이고 저곳에 존재할 확률이 50%인 전자를 생각해 보자. 당신은 자유의지를 발휘하여 전자가 이곳에서 발견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는가? 아니다. 당신은 할 수 없다. 실제로 이런 전자를 관측하면 결과가 무작위로 나타나며, 무작위라는 것은 자유의지가 개입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동일한 조건에서 관측을 여러 번 반복할수록 결과는 점점 50:50에 가까워진다. 자유의지가 개입된 선택이라면 통계적 관점에서 볼 때도 수학의 지배를 받지 않아야 하는데, 실제로 관측을 해 보면 수학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
그러나 이는 적절한 설명이 아니다. 전자가 이곳에 존재할 경우 저곳과 다른 또 다른 인과 관계나 확률이 발생하고, 이런 관계가 지속해서 중첩되면 결국, 아무도 예상치 못한 결과로 이어지며, 이렇게 싸인 복잡성은 수학적 방법으로 규명하기 불가능한 상황까지 진전되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이를 모든 인과 관계 및 확률 예측의 한계라고 말하며, 과학이 무한대로 발달하면 결국 인과 관계가 규명될 것이고, 자유의지의 공간은 사라질 것이라고 강변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때 가서 이야기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과학이 무한대로 발전할 수 없고, 먼 미래에도 여전히 규명되지 않을 인과 관계가 있다면, 그것을 지금은 ‘자유의지’라고 부른 들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여기에 자살하려고 다리 난간 위에 올락 있는 사람을 상상해 보자. 그가 택할 선택은 두 가지다. 죽음 아니면 삶. 50%의 확률로 존재하는 실험 상자 속 전자와는 달리 이 사람의 50% 확률은 전혀 다른 방향의 인과 관계를 산출한다.
이 사람은 이런 죽음을 택하고, 저 사람은 저런 종말을 선택한 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죽음에 대한 선택이 물리적 인과 관계에 따른 것인지, 내 생물학적 특성에 의한 결론인지를 증명해 낼 수 있겠는가?
“나는 죽을 때 병원이 아니고 집에 있기를 바란다. 어떤 진통제 마취제도 필요 없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존중받으며 가고 싶다”라고 말하며 곡기를 끊은 스콧 니어링이나, “앉아 있는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죽음이라도 자유롭게 선택하고 싶었다”라고 말하며 스스로 안락사를 선택한 데이비드 구달.
결국, 종말에 대한 그들의 선택을 설명 가능한 과학적 인과 관계, 또는 규명할 수 있는 확률 관계로 정의할 수 없다면 그냥 자유의지라고 말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이론을 가설로 제시하는 것을 과학적 방법이라 할 수 있지만, 증명될 수 없는 것에 대해 쉽사리 결론 내리는 것은 과학적 태도가 아니다. 과학적 방법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자유의지’라는 공간으로 남겨 놓는 것이 중요하다. 철학자 커티어가 제기한 문제처럼 ‘안다는 것’ 즉 ‘지식’이란 것의 토대는 쉽사리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무신론자 과학자가 신의 존재에 대해 확신할 수 없듯이 물리학자가 자유의지에 대해 결론 내리는 것에도 오류가 존재한다. 많은 과학 주의자가 자유의지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내놓았는데, 두 가지 예를 들어보자. 첫 번째는 스티븐 핑커의 말이다.
“저는 기계 속의 유령이라는 의미의 자유의지 같은 것은 믿지 않습니다. 영혼이 어떻게든 TV 화면을 읽고, 의미를 파악하고, 단추를 누르고, 행동 레버를 당긴다는 것을 믿지 않아요. 그런 식으로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행동은 뇌에서 일어나는 물리적 과정의 산물입니다.”
이 이야기가 성립하려면 매우 중요한 전제가 필요하다. 즉, 인간의 정신과 영혼은 물질로 이루어지지 않은 어떤 독립된 존재라는 전제이다. 그러나 이런 전제는 과학적이지 않다. 자유의지 자체가 물질적 산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야기를 들어보자 바로 케네스 밀러가 ‘인간의 본능’이란 책에서 한 말이다.
“의미는 물질이나 에너지에 내재된 속성이 아니다. 탄소 원자는 그저 존재할 뿐이다. 탄소 원자는 그 무엇을 위해 존재하지도 않고, 그 무엇도 의미하지 않고, 목적도 없다. 탄소 원자는 탄소 원자일 뿐 그 이상은 아니다. 의미는 우리가 부여하는 것, 개인의 의식적 성찰과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 말 역시도 설득력이 없다. 밀러는 ‘의미는 우리가 부여하는 것’이라 했는데, 그 우리는 무엇인가? 탄소와 질소가 아미노산과 핵산이 되고, 이는 체세포와 신경 세포, 그리고 DNA로 발달하였으며, 결국, 뇌를 만들어내고, 이것이 소위 ‘우리’라고 부르는 정신적 물질적 토대가 되었다는 것이 과학 주의자들의 주장이 아니었던가? 케임브리지 대학의 석좌 교수였던 장하석 교수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과학의 초창기에는 많은 과학자가 패기만만한 야심을 보였다. 데카르트가 자신의 인식론적 판단으로 모든 지식의 토대를 세우겠다고 한 것이나, 뉴턴이 온 우주에 적용되는 중력 법칙을 세웠다고 한 것이나, 왓슨과 크릭이 DNA 구조를 통해 생명의 모든 비밀이 풀리리라 생각한 것과 같은 꿈은 과학의 청년기에 적당한 것이었다. 이제는 과학이 많은 경험을 쌓았고, 또 앞으로 더 많은 경험을 쌓을 것이다. 그러면서 과학의 행태는 자신만만한 젊은이의 오만함이 없어지는 방향으로 형성될 것이다. 현대로 나아갈수록 더 많은 과학자가 겸허하게 과학을 하고 있다. 어떤 특정한 주제 하나를 잡아서 연구하여 뭔가를 배워보겠다는 것이지, 영원한 진리를 들먹이면서 '내가 혁명을 일으켜서 모든 것을 밝히겠다!’ 하는 사람은 소수가 되었다.”
자크 데리다는 “인류는 자신이 유리한 쪽으로 인류의 종말을 선언한다.”라고 말했다. 인간은 결국 목적과 분리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유의지가 되었든 인생의 의미가 되었든 인간은 스스로 목적에 맞게 정의 내릴 수 있는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