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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인순 Aug 02. 2023

생명의 음악

오래된 질문에는 정답이 없다.

생명의 음악 (데니스 노블)


두 천재의 만남     


백발노인이 어눌해 보이는 모습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다. 초점을 잃은 듯한 눈동자, 힘없이 벌어진 입, 핼쑥한 뺨, 맞은편에 앉아서 그를 향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그 유명한 리처드 도킨스다. 이 맹렬한 진화생물학자는 명성에 걸맞은 거침없는 언변과 도전적인 질문으로 한때는 자신의 스승이었던 이 노인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도킨스가 말을 마쳤다. 그리고 노인이 입을 열었다. 순간, 노인의 외모로부터 기인한 모든 선입견이 사라져 버렸다. 숫자와 명사 데이터, 날짜와 구체적인 상황까지 구체적인 사실을 열거하며, 노인은 도킨스의 논리를 조목조목 반박해 나갔고, 결국은 압도해 버렸다. 그의 이름은 데니스 노블, 당시 86세의 나이였다.     


2022년 iai (The institute of Art and Ideas)가 주체한 토론에서 시스템 생물학자 데니스 노블은 진화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와 생명의 주인은 누구인가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노블은 자신의 책 ‘생명의 음악’을 통해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비판한 바 있고, 도킨스 역시도 자신에 대한 비판을 방어할 필요가 있었다. 결국, 그들은 서로에게 할 말이 많았던 셈이었다.      


토론의 배경이 된 ‘생명의 음악’은 노블이 ‘이기적 유전자’를 비롯한 진화 생물학자들의 극단적 환원주의를 비판하는 동시에 자신이 주도하고 있는 시스템 생물학 이론을 설명하고 있는 대중 서다. 대중서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이 책은 주목받지 못했다. 출판사에서는 절판되었고, 도서관에서는 찾는 사람 없이 책장만 지키고 있는 책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이 책은 확실히 저평가된 책이다. 시스템 생물학이 아직 독자들에게 생소한 학문일 뿐 아니라, ‘이기적 유전자’로 대표되는 진화 생물학과 비교하면 그 대중 전파력이 부족한 까닭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내는 데는 실패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 책의 내용은 전문적이면서도 담고 있는 철학적 의미가 가볍지 않고, 우리 생각의 지평을 확장해 줄 만한 아이디어도 풍부하다.     


노블은 유전자가 ‘생명의 책’이라 주장하는 환원주의자들의 논리를 반박하는 데 이 책의 많은 분량을 할애했다. 그에 따르면 생명의 책은 생명 그 자체이지 유전자가 아니다. 유전체는 생명을 이루는 중요한 데이터베이스 중 하나일 뿐, 생물계의 기능은 유전체 하나로 특화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물질의 중요한 성질에 의존하고 있다고 노블은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유전체를 ‘생명의 책’이라는 휘황찬란한 은유로 표현하는 것을 반대하는 이유다. 일반적으로 책에는 묘사, 설명, 삽화, 등 밖에도 많은 것들이 포함된다. 만약 책을 펴서 그저 숫자들만 채워진 것을 보게 된다면, 진짜 책은 어디에 있는 것이야? 하고 묻게 될 것이다.”     


노블은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가 직접적 경험에 근거한 과학적 기술이 아니라, 설명을 위해 창작된 하나의 은유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이기적 유전자’에 나오는 은유적 표현 하나하나를 과학자의 경험적 표현으로 대체해 놓는다.     


도킨스에 대해 이러한 비판을 가하는 과학자가 노블만은 아니다. 꽤 많은 과학자가 ‘이기적 유전자’에 대한 비판의 중심에 도킨스의 은유적 표현을 두었다. 이 중에는 특히 저명한 사회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도 포함되어 있다. 그는 도킨스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도킨스는 저널리스트요. 과학자들이 발견한 것을 널리 알리는 일을 하는 사람이죠. 나는 직접 연구를 하는 과학자들과만 논쟁합니다.”     


도킨스도 자신이 조어(措語)해낸 ‘이기적 유전자’라는 표현이 하나의 은유임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동물 개체, 다시 말해 유기체를 마치 자기 유전자를 보존하려 하는 ‘목적’을 가진 존재로, 즉 행동하는 생존 기계로 은유하고 있다고 스스로 밝힌 바 있기 때문이다.     


사실, 남의 연구나 사상에 적절하면서도 창의적인 은유를 섞어 편집한 베스트셀러가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만은 아니다. 예를 들어 유발 하라리의 ‘호모 사피엔스’나 ‘호모데우스’ 같은 책도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나 아자 가트의 문명과 전쟁, 그리고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와 같은 책을 자신의 풍부한 은유로 편집한 것이다.      


유전자 이론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가 윌리엄 해밀턴의 논문을 인문학적인 대중서로 편집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의심할 나위 없이 도킨스는 은유의 천재다. 현란한 은유를 통해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내용을 그럴듯하게 전달하고 대중의 공감을 끌어내는 데 있어서 천재적이다. 


은유라는 것이 독자의 이해를 돕고 복잡한 문제를 쉽게 이해시킬 수 있는 도구인 것은 사실이나, 역설적으로 독자가 내용을 쉽게 오해하거나 내용 자체가 왜곡된 채 해석될 수 있다는 점에서 경계해야 한다. 노블이 ‘생명의 음악’을 통해 지적하는 부분도 바로 이러한 점이다.     


이기적 유전자에서 탄생한 이기적 단백질, 그것으로 구성된 유기체는 때로는 이기적이고, 또 필요에 따라 이타적으로 되며, 결국 사회적 유전자 즉, ‘밈’으로까지 연결된다는 도킨스의 논리는 과학적 사실을 뛰어넘는 형이상학적 상상력이라는 접착제로 붙어있다. 도킨스의 은유에 취한 사람들은 그의 형이상학 속에 숨은 당연한 의문에도 쉽게 눈을 감게 된다. 노블은 이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자기가 묘사하고자 하는 상황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은유는 없다. 어떠한 국면을 강조하는 대신 다른 것을 소홀히 하게 된다. 은유를 너무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적용 범위 너머로 확대해석하여, 그 은유들이 과학적으로 딱 들어맞는다고 해석할 때 문제가 생긴다. 환원주의자들이 유전자에 적용하는 은유도 이런 경향이 있다.”     


생명을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     


3만 개의 유전자가 만들어내는 음악의 연주자는 누구일까? 극단적 진화론자 또는 극단적 진화생물학자라 불리는 환원론자들은 쉽게 답을 내놓는다. 바로 유전자다. 그들에게 유전자는 최후의 공식이며, 모든 것의 정답이다. 반면, 노블은 유전자들이 생명에 관련된 시스템을 일방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노블은 어떤 종류의 기관이나 시스템이 형성될지를 결정하는 것은 개별 유전자들이 아니라 발현의 패턴이라고 말하며, 표현형의 발현 패턴은 유전자가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정보와 프로세스에 의해 구현된다고 주장한다.     


“유전자가 작동하는 것은 수정된 세트 속에서만 가능하다. 여기에는 모체로부터 물려받은 모든 단백질, 지질, 세포 내 기구가 있어서 유전체에서 정보를 읽어 발생을 진행하는 모든 프로세스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논쟁을 조금 더 진전시키기 위해 2022년 iai 토론장으로 돌아가자. 노블의 주장에 도킨스는 “여러 세대를 거치며 생존한 유전자는 오랜 시간, 세대를 통해 이어지며 인과적 영향을 끼친 유전자다”란 말로 반박하고, 이에 대해 노블은 유전자가 심장 박동의 상당 부분을 제어하고 있지만, 이 유전자를 제거한다고 해도 심장 박동은 멈추지 않는다는 실험 결과로 유전자 지배론에 맞선다.     


노블에 따르면 유기체는 자기 속의 유전자들로 문제를 해결하는 법을 잘 알고 있으며, 유기체가 자신 속의 유전자를 이용하는 것이지, 유전자가 유기체를 기계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나아가 생명의 시스템은 유전자가 아닌 유기체 내에 작동되는 네트워크를 통해 실행되며, 이러한 네트워크의 작용은 유전자의 복제나 생식 세포의 형성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이쯤에서 아마추어가 누릴 수 있는 호사가 있다. 우리는 노블과 도킨스, 두 사람의 논쟁을 보며, 누가 옳은지를 판단할 필요가 없다. 두 사람의 이론 사이에서 긍정적인 차이점을 확인하고, 우리 삶에 어떤 방식으로 설명하고 적용할지, 그리고 의미를 부여할지를 상상하면서 앞으로 과학이 어떤 지평을 열어갈지를 지켜보면 된다. 


아마추어의 호사를 제대로 누리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철학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도킨스의 은유 논리와 노블의 경험 논리, 도킨스의 환원주의와 노블의 구조주의. 나아가 칸트의 종합 명제에서 포스트모더니즘 논쟁까지 두 사람의 차이점을 확장하면서 우리는 생명에 대한 사고의 지평을 더 넓게 열어갈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이 나서야 할 시간     


데니스 노블이 주도하고 있는 시스템 생물학은 학제 간 협력과 계산 분석을 통한 수학적 모델을 수립하고, 이를 통합하여 생물학적 시스템의 각 요소 간 상호 작용 및 역학 관계를 연구하는 것이다. 노블은 유전자, 단백질, 세포 및 조직과 같은 다양한 조직 수준의 데이터를 통합하여 살아있는 시스템의 행동을 지배하는 기본 원칙을 밝히는 데 몰두해 왔다.     


노블의 연구는 많은 과학자와 연구자들로부터 생물학적 시스템과 그들의 창발적 특성에 대한 포괄적인 관점을 제공하기 있다고 평가를 받아 왔다. 반면, 생물학적 시스템의 복잡성으로 인해 정확하고 예측 가능한 수학적 모델을 개발하기가 어렵기에 노블의 시스템 생물학은 어느 정도의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비판도 있다.      


도킨스와 같은 환원주의자들은 생물학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별 구성 요소의 상세한 특성을 연구해야 한다는 점에서 환원주의를 옹호한다. 그러나 이러한 환원주의자들의 꿈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세상에는 반드시 정답, 즉 ‘최종 이론’이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최종 이론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1992년 스티븐 와인버그는 ‘최종 이론의 꿈’이란 책을 통해 자연의 최종 법칙을 찾으려 하는 인간의 의지를 비판적으로 지적한 바 있다. 와인버그는 분명히 우리는 아직 최종 이론이나 법칙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곧 그것을 발견할 것 같지도 않을 것이라 말하며, 최종 이론을 향한 인간의 욕망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지금 우리의 이론들은 오직 제한적으로만 유용하고, 여전히 잠정적이며 불완전하다. 그러나 가끔 우리는 그 이론들 뒤로 무제한으로 유용하고, 그 완전성과 일관성에 있어 전적으로 만족스러운 하나의 최종 이론을 흘깃 보게 된다. 우리는 자연에 대한 보편적인 진실들을 추구하고 있으며, 그것들을 찾게 되면 그 진실들이 더 심오한 진실들로부터 어떻게 유도될 수 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그 진실들을 설명하려고 한다. “     


‘과학, 철학을 만나다’라는 책을 저술한 장하석 교수는 한 강연에서 과학의 개념에 대한 두 가지 의견을 소개했다. 과학이란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의견과 과학이란 ‘우리가 모르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견해다. 그는 위에 언급한 책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과학의 초창기에는 많은 과학자가 패기만만한 야심을 보였다. 데카르트가 자신의 인식론적 판단으로 모든 지식의 토대를 세우겠다고 한 것이나, 뉴턴이 온 우주에 적용되는 중력 법칙을 세웠다고 한 것이나, 왓슨과 클릭이 DNA 구조를 통해 생명의 모든 비밀이 풀리리라 생각한 것과 같은 꿈은 과학의 청년기에 적당한 것이었다. 이제는 과학이 많은 경험을 쌓았고, 또 앞으로 더 많은 경험을 쌓을 것이다. 그러면서 과학의 행태는 자신만만한 젊은이의 오만함이 없어지는 방향으로 형성될 것이다. 현대로 나아갈수록 더 많은 과학자가 겸허하게 과학을 하고 있다. 어떤 특정한 주제 하나를 잡아서 연구하여 뭔가를 배워보겠다는 것이지, 영원한 진리를 들먹이면서 '내가 혁명을 일으켜서 모든 것을 밝히겠다!’ 하는 사람은 소수가 되었다.”     


장하석 교수가 지목한 소수, 즉 극단주의는 유독 진화 생물학 분야에서 강하게 활성화되어 있다. 모든 이론이 새로운 이론의 도전을 받는 동안 유전자 신봉자들은 자신들의 이론을 뒷받침해 줄 만한 과학적 사실들을 증명해 왔고, 이로 인해 그들의 신념은 더욱 강화되었다. 신념은 도그마가 되고, 도그마가 된 과학은 비판에 직면한다. 그리고 그 도그마의 중심에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가 있다.     


한편, ‘이기적 유전자’에 대한 세간의 비판에 대해 최재천 교수는 다소 편협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자신의 스승인 에드워드 윌슨과는 확연히 다른 입장이다. 그는 도킨스의 시대에 밝혀내지 못한 과학적 사실들로 인해 저술에 부분적 오해가 있었고, 도킨스의 창작이 자신의 연구 결과가 아닌 편집과 은유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으로 ‘이기적 유전자’의 위대함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우리는 최재천 교수로부터 전문적인 지식을 넘어 지식을 대하는 태도를 배울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어차피 과학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오히려 불완전 속에서 긍정적인 측면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화학물질을 사회적 이타성까지 연결하기 위해서는 논리의 단절이 있을 수밖에 없고, 이는 형이상학적 상상력으로부터 조어된 은유를 통해 설명되고 이해될 수밖에 없다.     


과학자가 웬 종교?     


최재천 교수는 편협한 시각으로부터 기인한 비판을 경계하면서 도킨스를 옹호했지만, 실상 도킨스 자신은 매우 편협한 행동을 해왔다. 오래전, 영국의 BBC는 도킨스와 함께 기독교 교회를 찾아다니는 프로그램을 제작, 방송한 적이 있다. 과학과 신학 간의 대화가 그들이 표방한 프로그램의 목적이었다.     


그러나 방송의 실상은 그들의 목적과는 전혀 다르게 전개됐다. 방송에서 도킨스는 과학적으로 무방비 상태의 기독교 사제들을 공격하였고, TV 화면에는 공개적으로 망신당하는 사제들의 모습이 그대로 비치어졌다. 이후, BBC 방송의 한 노련한 앵커는 도킨스에게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신앙으로 살아가도록 인정하면 될 것을, 왜 굳이 공격하고 다니냐는 질문을 던졌고 도킨스의 눈동자는 흔들렸다.      


그가 겨우 찾아낸 답은 종교가 세상을 망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당시 종교적 충돌로 인한 끊이지 않는 분쟁과 전쟁의 상황을 반영한 대답이었으나 인류 평화를 위해 기독교를 공격했다는 그 말의 진정성은 의심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처음부터 종교에 대해 극히 부정적이었고, 그런 만큼 다른 사람의 의견에 대해 닫혀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종교는 사람들을 언제든 살인 무기로 만들 수 있는 바이러스의 일종이다.”     


‘이기적 유전자’라는 은유를 조어한 도킨스는 ‘종교’를 정의하기 위해 ‘바이러스’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이에서도 도킨스가 가진 기독교 신학과 반지성에 대해 혐오의 감정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그가 사제들을 찾아간 목적은 대화가 아니라 바이러스를 박멸하기 위함이었다. 반면, 도킨스는 기독교 변증가 다니엘 크레이그와의 토론을 거부하고, 밈에 대한 질문을 회피하는 등의 이중적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도킨스가 기독교 사제들을 찾아다니며 전쟁을 벌였다면, 노블은 정반대의 길을 걸어왔다. 그는 불교 철학 속에서 자신의 시스템 생물학과의 공통점을 찾으려 했다. 불교 철학을 공부하고, 한국의 고승들을 찾아 대화를 나누며, 종교와 과학을 관통하는 진리의 언저리에 다가가려고 했던 것이다.      


노블이 보기에 과학과 철학, 그리고 종교가 가지고 있는 공통의 관심사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아’다. 사실 ‘자아‘의 문제는 생물학뿐 아니라 뇌과학, 인지과학, 심리학, 철학과 종교에 이르기까지 전 분야에서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 뇌‘가 있다.     


노블은 자아의 문제를 ’ 움직임‘과 ’ 행동‘의 개념을 가지고 접근한다. 움직임은 신경생리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하지만, 행동에는 반드시 의도가 전제되어야 하기에 움직임과 행동은 구별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근육과 신경에 전기 자극을 주어 움직이게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행동이 되기 위해서는 목적과 거기에 따른 의도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도대체 의도와 목적을 지휘하여 행동하게 하는 ’나‘, 즉 ’ 자아‘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유전자일까? 뇌일까?. 노블에 따르면 유전자도 뇌도 아니다. 유전자를 제거해도 박동하는 심장은 뇌의 의도를 반영하지도 유전자의 명령에 따르지도 않는다. 자아란 마치 알 수 없는 생명의 시스템에 따라 박동하는 심장같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찾을 수 없는 것이라고 노블은 말한다.     


”뉴런은 하나의 개체이고, 뇌도 하나의 개체이며, 나머지 몸의 다른 부분도 개체라는 상황에서, ’나‘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 몸 전체가 어디 있는지는 분명하다. “     


생명을 지휘하고 통제하는 ’ 자아‘는 물리적으로 찾기 어렵지만 하나의 시스템으로 작동하는 것은 틀림없다고 판단한 노블은 이 지점에서 불교의 세계에 도달한다. 중심 도그마가 해체된 세계, 서로 연결된 존재, 노블은 그 세계를 바로 불교에서 찾았다. 그는 불교의 문화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데카르트는 ’ 자아‘ 또는 ’나‘를 언어와 문화 때문에 만들어진 하나의 대상으로 생각했으며, 현대 신경학자도 이 점을 새로운 관점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 자아‘나 ’ 내‘가 존재하지 않는 문화라든지, 적어도 뇌와 상호 작용하는 분리된 실체 또는 뇌 자체의 일부분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은 문화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     


오래된 질문에는 정답이 없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데니스 노블은 한국의 사찰을 방문했다. 그의 방문 상황은 TV로도 방송되었고, ’오래된 질문‘이라는 책으로 엮여 출판되기도 했다. 데니스 노블은 삶과 존재에 대한 네 가지 질문, 즉 삶은 왜 괴로운가? 나는 누구인가? 마음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에 대해 고승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노블과 대화를 나누는 고승들의 이야기는 매우 실망스러웠다. 종교 사제나 성직자들 사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 무아(無我)라는 이름의 고집 센 자아‘, 그것이 고승들의 이야기 속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오직 자신만이 진리를 알고 있다는 듯한 그들의 설법은 극단적 과학주의자들의 환원주의와 일맥상통한다. 그들이 말하는 ‘꼭 알아야 하는 진리‘는 과학자들이 찾는 ’ 최종 이론‘과 매우 닮아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화살을 맞는가 안 맞는가. 깨달은 사람과 깨닫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그런 겁니다. 알고 보면 그리 특별할 것도 아니죠. 하지만 꼭 알아야 하는 진리입니다. 결국은 잘 모를 때, 헤매느라고 너나없이 고생하는 거니까요. “(도법, ’오래된 질문‘ 중에서)     


세상에 꼭 알아야 할 진리 같은 것이 있을까? 그 진리는 누가 정의할 수 있는 것일까? ‘깨달은 사람과 깨닫지 못한 사람‘, ’꼭 알아야 할 진리‘, ’잘 모를 때‘, 이런 표현 속에 숨어있는 고정된 진리에 대한 도그마가 불편할 뿐이다. 또한, 이런 설법은 세상에는 참된 깨달음이라는 정답이 있다는 가정이 전제되어 있다.      


”그게 깨달음이죠. 참된 깨달음을 알고 싶다면, 다시 말해 잘 알고 싶다면, 먼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지금 내가 모르는 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야 하는 것이지요. “ (성파, ’오래된 질문‘ 중에서)     


우리는 늘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길 위에 있기에 무엇이든 정확하게 안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깨달음 이란 단어 앞에 ’ 참된 ‘ 이란 형용사가 붙는 순간, 그것은 노블이 인지한 불교의 ’ 연기사상(緣起思想)‘이나 ’ 화엄사상(華嚴思想)’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원효 대사에 따르면 세상의 이치는 하나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서로 다르기만 한 것도 아니다. 곧 ‘비일비이(非一非異)’다. 세상에는 단 하나의 진리만이 있는 것은 아니며, 세상에 문은 많고, 그 문으로 향한 길도 많다. 그래서 원효 대사는 ‘기신론소’에서 다음과 같이 설파했다.      


“법문(法門)은 한량없어서 오직 한 길만이 아니다. 이 때문에 곳을 따라 시설해서 모두 도리가 있다”     

원효 대사의 유명한 화쟁 논리는 “하나가 아니기에 능히 모든 방면이 다 합당하고, 다르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방면이 한 맛으로 통한다 (由非一故 能當諸門 非異故 由諸門一味)라는 통섭의 정신과 일치한다.


오래전 최재천 교수는 자신의 스승이자 미국의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의 저서를 번역 출판하였을 때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윌슨이 숙고 끝에 조어해 낸 ‘consilience’라는 단어를 역시나 장고 끝에 ‘통섭(統攝)’이라는 단어로 번역했는데, 이것이 자신의 고유한 아이디어라고 말한 최재천 교수에게 어느 불교 학자가 화들짝 놀라며 다가왔다고 한다.      


그 불교 학자의 말에 따르면 ‘통섭’이란 단어는 7세기에 원효 대사 이미 사용했던 단어인데, 공식 석상에서 이것을 자신이 만들어 낸 단어라고 말하면 어떡하냐는 것이었다. 최재천 교수는 처음에는 매우 당황스러웠지만 생각해 보니 자신의 아이디어가 원효 대사의 화쟁 정신이나 불교의 연기 사상과 닿아있었다는 생각에 오히려 매우 기뻤다고 고백했다.     


최재천 교수가 말하는 통섭의 가치와 노블의 아이디어는 닮은 점이 많다. 평생을 바쳐 생명과 자아의 실체를 탐구해 온 노블은 자아란 하나로 정의될 수 없으며, 생명이란 지휘자가 없는 파이프 오르간과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이런 생각이 불교의 연기와 화엄 정신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밝혔다.     


”스님들의 말씀을 들으면서, 불교와 제가 연구해 온 과학을 전부 관통하는 전체론적 관점을 제 스스로 발견하게 된 것 같아요. 오랜 의문의 답을 찾은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제 내면의 아주 깊은 곳에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마치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말입니다. “     


과연 데니스 노블은 한국의 사찰을 방문하며 던졌던 오래된 질문에 대한 답을 얻었을까? 오래된 질문에는 정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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