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를 더 가까이에서 평가하기 시작한 그들은 한편으로 정확한 정보를 탐색하면서 서로에게 비슷한 점이 많다는 사실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둘 다 열심히 일했지만 가난했고, 아이들에게 더 좋은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다는 열렬한 소망이 있었으며, 둘 다 잔인할 정도로 직설적이고 원칙적인 성격이었다.
고전적 의미로서의 지식이란 진실과 믿음과 정당성을 통해 확인된다. 그러나 에드먼드 게티어가 ‘정당화된 참인 믿음은 지식인가?’라는 논문을 통해 증명한 바와 같이 어떤 진실의 정당성을 찾아내는 작업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불편한 진실에 대한 외면과 왜곡된 믿음, 그리고 거짓된 신념은 지식의 정당성을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학자 더글러스 호프스태터와 심리학자 에마뉘엘 상데가 ‘사고의 본질’이라는 역작을 통해 지성의 연료로서의 ‘유추’가 ‘사고’라고 결론 내리며, 이는 유사성을 인식하는 일, 방금 경험한 것과 이전에 경험한 것의 연결 고리를 포착하는 일이라 정의하였다. 이는 인공지능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사고도 잘못된 데이터는 잘못된 사고의 결과로 이어진다는 뜻이 된다.
인간에 대한 이러한 철학적, 과학적 성과물들이 역설적이게도 우리에게 불안감을 안겨준다. 결국, 인간의 사고는 과거에 경험했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며, 우리의 지식 역시도 왜곡과 편견과 거짓의 도전에 늘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말로 들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곡과 편견으로 둘러싸인 사회적 갈등 역시도 자연스럽고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아버지와 자식 세대 사이에서 극명하게 갈리는 세대 갈등은 더욱 극명해지고, 남성과 여성이 수시로 의도치 않은 전장에서 부딪히는가 하면, 제3의 성과 낙태 문제 등은 여전히 정치적, 종교적 입장과 동조 현상을 보인다. 결국, 이러한 사회적 갈등이 인간의 사고와 지식의 구축 과정에서 발생하는 당연하고, 피할 수 없는 현상이라면 우리는 좌절할 수밖에 없다.
4명의 심리학자가 공저한 책, ‘사회심리학’에는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이끌었던 흑인 인권운동을 둘러싼 복잡한 사정을 예로 들며 인간과 사회의 복잡성으로 인해 불타오르는 우리의 좌절감에 기름을 붓는다.
"행진 바로 직전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남동생이자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로버트 케네디는 킹 목사에게 백인 출신의 저명한 시민권 운동가였던 스탠리 리바이슨과 잭 오델과의 관계를 끊으라고 설득했다. 그렇게 킹 목사와의 우호적인 만남을 가진 로버트 케네디는 놀랍게도 FBI에 킹 목사의 도청을 비밀리에 허가했다. 이 전화선을 따라 혼외정사에 대해 자랑스럽게 말하는 킹 목사의 목소리가 잡혔다."
60년대 미국인으로 태어났다고 가정해 보자. 킹 목사의 혼외정사와 관련된 뉴스를 접했다면 어떤 의견과 태도를 보일 수 있을까? 혼외정사를 자랑스럽게 떠드는 목사가 무슨 인권이냐고 비판할 수도 있고, 인권운동이라는 거대 서사에 백래시가 우려되어 침묵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더욱 급진적인 정치 진영에 있는 사람이라면 적극적으로 킹 목사를 옹호하려 할 것이다.
굳이 60년대 미국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도 하나의 사건이 여러 갈래의 해석을 낳고, 해석에 따른 행동이 극단적으로 갈리는가 하면, 이것이 정치 사회적으로 충돌하는 현장을 심심찮게 목격하게 된다. 즈음에, 이미 역사적 사실 규명이 어느 정도 완료된 60년대 미국의 상황을 통해 오늘날 한국의 모습을 반추해 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다.
위에 언급한 킹 목사의 이야기에는 다섯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흑인 인권 운동가 마틴 루서 킹 목사를 주인공으로 하여,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로버트 케네디, FBI 국장 J. 에드거 후버, 그리고 시민 운동가인 스탠리 리바이슨과 잭 오델등이 그들이다.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킹 목사가 혼외정사를 했었고, 킹 목사와 적대 관계에 있던 후버가 이를 도청하여 증거를 확보했다. 그리고 이 도청을 허가한 사람은 바로 케네디다. 하편, 케네디는 킹에게 공산당과 연관되어 있다는 이유로 잭 오델, 리바이슨과 결별하라고 충고한 바가 있다.
이 사건 속에 연루된 다섯 명의 인물들은 인권, 공산당, 법, 공권력, 그리고 이데올로기와 정치까지 이르는 다양한 이해관계에 얽혀있다. 그래서 누구 하나 크게 잘못한 사람도 없을뿐더러 그다지 잘한 것도 없는, 매우 복잡한 관계 속에 구조화되어 있다. 이 책의 저자들은 여기에 몇 가지 질문을 던져 본다.
FBI는 왜 킹 목사에게 그토록 강한 개인적 공격을 가했으며, 케네디는 왜 우호적인 관계였던 킹 목사의 사생활 도청을 허가했는지? 킹 목사는 자신과 시민 운동가 사이를 갈라놓으려 했던 후버의 계획에 왜 순순히 굴복했는지? 등등의 질문이다.
이어서 이 책의 저자이자 심리학 전문가들은 저항 정신과 다인종 간의 평화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사람들, 몇 안 되는 위대한 지도자로부터 수천 명의 군중에 이르기까지 이 일에 관련된 모든 사람이 모두 각자 개인적 동기에서 움직이며, 이러한 운동이 어마어마한 사회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사회심리학적 결론을 내린다.
사회를 움직이는 복잡한 메커니즘과 그것을 추동하는 개개인의 심리적 다양성을 제시하며, 사람과 상황, 자신과 타인, 설득과 타협, 사랑과 우정, 지도력과 사회적 딜레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회 현상들을 설명하는 이 책은 한 가지 희망적인 사례를 꺼내 든다. 한때 서로를 죽일 듯이 싸웠던 흑인 인권 운동가 앤 애트워트와 KKK 지역 지도자 C.P. 엘리스간의 우정이다.
“서로를 더 가까이에서 평가하기 시작한 그들은 한편으로 정확한 정보를 탐색하면서 서로에게 비슷한 점이 많다는 사실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둘 다 열심히 일했지만 가난했고, 아이들에게 더 좋은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다는 열렬한 소망이 있었으며, 둘 다 잔인할 정도로 직설적이고 원칙적인 성격이었다.”
편견과 고정관념의 내재한 힘으로부터 증오가 발생했다면, 그 증오를 극복할 힘 또한 다른 편에서 존재한다는 것인데, 그 힘은 바로 서로에게서 공감할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어떤 방법으로 대립하는 집단, 즉 편견, 고정관념, 그리고 차별적 사고로 갈라진 집단 사이에 공감의 영역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이에 대해 대답하기 전에, 이 영역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조심해야 할 것을 살펴본다. 심리학자이자 이 책의 저자들은 편견, 고정관념, 그리고 차별이 ‘사람들이 잘 몰라서’ 발생한다는 일종의 ‘무지 가설’을 조심해야 된다고 조언한다. 집단 간의 갈등은 ‘사실’에 대한 지식의 차이가 아니라 ‘감정’과 관련된 반응이기 때문에, 적대적 집단을 모아놓고 ‘Fact check’을 하거나 가르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 다는 것이다.
또한, 사람들은 자신의 고정관념을 바꾸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기 때문에 왜곡된 사실관계는 강화되면 강화되지 완화되기는 쉽지 않으며, 때문에, 토론을 통해서 지식을 공유하고 이를 토대로 사회적 갈등이나 합의를 끌어낼 수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연구 결과이다.
“무지 가설은 편견과 갈등이 외집단의 특성을 논리적으로 평가하는 데서 발생하는 한편, 사람들이 고정관념을 없애고 싶어 한다고 가정함으로써, 편견, 고정관념, 차별이 중요한 요구 사항을 채워 준다는 사실을 간과한 셈이다.”
편견과 고정관념, 그리고 차별을 어떻게 해결하거나 긍정적으로 완화시킬 수 있을까? 이에 관해 이 책은 네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첫째, 사람의 특징을 바꾸는 것, 예를 들어 고정관념의 가장 주요한 기제가 ‘불안’이므로 이 불안의 수준을 낮추는 방법이다. 예를 들자면 정치 보복 같은 것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상황의 특징을 바꾸는 것, 이는 다소 강제적인 방법인데, 집단 간 갈등이 우려되는 공동체에서 편견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며, 이를 사회 규범으로 정착시키는 것이다. 즉, 커뮤니케이션과 제도, 그리고 규범에 사회적 역량을 집중시키는 것인데, 올림픽을 비롯한 여러 스포츠 예술 분야의 이벤트에서 정치적 발언을 금지하는 것이 이런 노력 중 하나일 것이다.
셋째, 목표를 충족할 수 있는 대안 제시,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자기를 높게 평가하기 위해 다른 집단 사람들을 깎아내리는 본성을 가지고 있음을 고려하여, 어떡하면 시민들의 자기 가치에 대한 의식을 높일 수 있을까를 함께 고민하는 것이다. 진보와 보수, 20대와 50대, 남성과 여성, 그리고 제삼의 성에도 고유의 가치가 있음을 상호 인정하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내야 하는 이유다.
마지막으로 공정하고자 하는 목표를 제시하고, 평등주의적 가치를 부양하는 것이다. 모든 집단의 사람을 평등하게 대해야 한다는 평등주의 가치를 부양하고, 사회에서의 공정함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편견과 고정관념, 그리고 차별을 억제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 마지막 주장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오늘날 모두가 확인하고 있는 바와 같이 공정이나 평등이라는 개념은 진영 간에 다른 의미와 논리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소위 말하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란 단어만 보아도 이를 진보와 보수 양쪽에서 서로 다르게 인용하고 있지 않은가.
세상 모든 체계의 첫 순서는 언어의 정리다. 서로 다른 언어의 영역을 가지고서는 어떤 구조화도 불가능해지는데, 평등이라는 단어에 대한 정의마저도 서로 다르게 편집되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편견, 고정관념, 그리고 차별이 억제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심리의 상업화
2015년, 사회심리학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이 책에서조차 짐작할 수 없었던 일들이 오늘날에는 일어나고 있다. 바로 ‘심리의 상업화’다. 돈벌이의 목적으로 사회적 갈등을 조장하는 이 낮 선 단어는 유튜브와 같은 신흥 매체가 주도하고 있다. 구독자를 확대하고, 접속 횟수를 늘리며, 재미를 증가시키는 방법으로 사람들을 끌어모으기만 하면 돈이 되는 매체의 특성이 심리를 상업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오늘날 수많은 정치적 미디어들이 개인의 취미나 관심사, 또는 건강한 사회활동을 위해서라기보다는 구독자나 동조자들로부터 후원금을 받아내기 위해 편견과 차별을 부추기고 있다. 선동의 잔재주를 가진 이들이 대중의 편견이나 고정관념, 차별의식을 강화하는 방법으로 갈등을 증폭시키고, 진영 논리를 강화하면서 돈벌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상황이 두려운 것은, 이런 매체 환경이 신자유주의의 DNA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자유주의의 근간이 되는 심리적 기제는 욕망이며, 욕망이라는 이름의 괴물 앞에서는 어떤 사회심리학적 접근 방법들 역시 무력해진다.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모든 사회심리학적 접근 방법들이 현실적으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갈등의 정치화
언제부터인가, 선거에서 심리학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 이는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심리학 서적이 오늘날 네거티브 선동의 교과서처럼 활용되고 있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네거티브 선거 전략은 이미 선거 운동의 기본이 되었고, 대중심리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정치의 기본 전략이 되었다.
이러한 갈등의 정치화는 선거를 거듭하면서 사회를 더욱 양극화시키고, 세대와 젠더와 이념은 정치 세력과 동조하며 대립하는 집단 사이에 더욱 견고한 성벽을 구축해 나가고 있다. 갈등의 정치화는 대중의 마음이 자신의 고정관념을 강화하려는 방향으로 움직이며, 자기 동조화를 증강시키고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대중이 이러한 심리의 상업화, 갈등의 정치화의 희생물이 된다는 것이다. 일방적인 편견은 성찰되어야 하고, 잘못된 고정관념은 유연해져야 하며, 혐오를 유발하는 차별은 철폐되어야 하는 것이 마땅한데, 그런 기회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오늘날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는 정치적 보복은 대립하는 집단 사이의 ‘불안’을 증가시키고, 국가의 이벤트나 제도는 100% 국민이 아닌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에 맞추어져 있으며, 서로의 가치를 존중하기는커녕, 원색적이고 자극적인 언어로 폄훼하고 있는 상황에서 편견과 고정관념, 차별을 완화되거나 제거되기는 불가능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1995년,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의 한글판 서문을 쓰며 한일 간의 반목 상황을 피하지 않았다. 두 나라 사이가 나쁜 여러 가지 요인 중의 하나가 서로 자기에 이야기만 하는 것이며, 이를 두고 마치 서로의 결함을 들추려고 왈가왈부하는 이웃과 같다고도 말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제안을 했다.
“그렇다면 이웃끼리 자기가 읽은 소설이나 자기가 감상한 영화 따위를 화제로 삼아 대화를 시작하면, 관계는 달라질까요. 나는 달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제삼자라 해도 중국을 화제로 삼는다면 지장이 있을지 모르나, 이탈리아의 중세와 르네상스, 또는 고대 로마가 화제라면, 별문제 없이 이야기가 통하지 않을까요.”
처음 이 제안을 들었을 때, 동의할 수 없었다. 당시 시오노 나나미 자신이 소위 패권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었으며, 또 독서 토론의 현장이라 해서 인간의 편향성이 자리를 비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런 제삼자적 자세가 역사의 진정성을 오히려 훼손시킬 수 있을 거라는 우려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부정적인 견해에도 불구하고, 이후 이보다 더 괜찮은 제안을 찾아보지 못했다. 결국, 로마인 이야기가 해결하지 못할 문제라면 사회심리학도 해결하지 못할 것이기에 말이다. 책을 놓고 토론하는 것이 우리의 시각을 바꾸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정치화와 상업화의 굴레에서는 최소한 빗겨나갈 수는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