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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인순 Oct 11. 2019

합리적이되 독단적이지 않은

지적 사기 (앨런 소칼,장 브리크몽)

우리는 합리적이되 독단적이지 않고 과학적 정신을 추구하되 과학만능주의에 젖지 않고, 개방적이되 천박하지 않고, 정치적 진보를 지향하되 분파적이지 않은 지식인 문화의 등장을 고대한다.     

“뼈 때리다.”  최근에 많이 쓰는 이 표현은 존재 자체가 흔들릴 정도의 충격을 받거나 준 상황을 말한다. 중심 논제를 건드리기 때문에 그것에 살 붙어있는 모든 현학을 위태롭게 만드는 논박이나 주장을 일상적 언어로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앨런 소칼과 장 브리크몽은 '지적 사기'란 책을 통해 현대 철학자들의 뼈를 때렸다. 1996년, 뉴욕대학에서 물리학을 가르치고 있던 40세의 앨런 소칼은 당시 미국 사상계를 지배하고 있었던 프랑스 철학자들을 대상으로 모종의 사건을 감행했다.    


학문적 가치가 전혀 없는 가짜 논문, ‘경계를 넘어서: 양자 중력의 변형적 해석학을 향하여 (Transgressing the Boundaries: Toward a Transformative Hermeneutics of Quantum Gravity)’를 작성하여 포스트모던 계열의 저명한 학술지인 ‘Social Text’에 제출한 것이다.      


소칼은 이 학술지 편집자의 이데올로기를 분석하여 이에 동조하는 문법과 내용으로 가짜 논문을 저술했고, 이 논문을 제출하여 포스트모던 계열의 좌파 편집자들의 반응을 시험해 본 것이다. 결과는 놀라웠다. ‘Social Text’ 편집자들은 소칼의 이 가짜 논문을 자신의 학술지에 게재한 것이었다.      


소칼은 이러한 결과를 토대로 포스트모던 계열의 학술지가 자기네 이상에 동조해주기만 하면 내용이 엉터리인 논문도 출판해 준다고 맹 비난하며, 포스트모던 계열의 좌파 학자들의 현학과 지적 허세를 공격했다. 여기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공격'이란 말은 소위 좌파 지식인에 대한 비판이라는 말과 동의어다.      


이 발칙한 사건을 통해 소칼은 과학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도 하지 못하면서 자기 분야에 그대로 가져다 쓰는 것을 경계하는 한편, 자신의 학문 분야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논문의 전문성조차도 판단하지 못하는 학문은 학문으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주목할 것은 이 사건 이후 인문학자들이 보인 반응이다. 반응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었다. 첫 번째 반응은 인문학에서 과학의 객관성을 인정하고 그 기반 위에서 인문학을 연구해야 한다는 자성적 반응이었고, 두 번째 반응은 과학의 전문성을 이용하여 인문학을 비판한 소칼의 태도가 매우 예의 없고 불쾌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반응은 소칼이 스스로 인용하거나 공격한 학자의 논점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특히 저작 전체의 맥락을 무시하고 자신이 조롱하고 싶은 구절만 부분적으로 인용했다는, 즉 선택적 왜곡이 있었다는 비판이었다.    


세 번째 비판에 대해 앨런 소칼과 벨기에의 물리학자인 장 브라이크는 이를 재반박하고 자신의 견해를 좀 더 명료하게 정리하기 위해 ‘지적 사기(Fashionable Nonsense: Postmodern Intellectuals' Abuse of Science])’를 출판했다. 그들은 이 책의 영문판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찬가지로) 이 책을 프랑스의 일부 서평자들처럼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을 싸잡아 비난하는 책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의 입장은 우리의 의도를 오해하는 것일 뿐 아니라 자신들이 평소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에 대해 품고 있었던 경멸감을 암암리에 드러내면서 우리 책에 묘하게 편승하는 태도라고 밖에는 달리 해석할 길이 없다. 논리적으로 따졌을 때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은 이 책이 비판하는 요소를 공분모로써 안고 있거나 아니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만일 그런 공분모가 존재한다면 해당 영역을 싸잡아 공격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공격은 정당할 것이다.”     


저자들은 이 책에서 자크 라캉, 줄리아 크리스테바, 뤼스 이리가레이, 브루노 라투르, 장 보드리야르,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폴 비릴리오 등, 내로라하는 현대 철학자들을 싸잡아 비판했다. 소칼이 보기에 이들은 모두 영어권의 포스트 모더니스트 담론을 기본적인 논리의 준거로 활용하고 있는 철학자들이었다. 소칼은 이러한 철학자들의 논문을 분쇄하여 논문에 사용된 언어의 허세를 지적한다.      


'지적 사기'는 ‘전문성을 파괴하는 전문성’으로 이루어진 이 책이다. 예로서 11장 ‘괴델의 정리와 집합 이론 : 남용의 사례들’에서 저자들은 알랭 바디우를 공격한다.  저자들에 따르면, 알랭 바디우는 ‘주체의 이론(1982)’이란 책에서 정치학, 라캉 정신분석학, 수학의 집합 이론을 얼기설기 짜깁는데, 대표적인 것이 다음과 같은 ‘잉여의 논리’라는 제목이 달린 장이다.     


“여기서 관건이 되는 것은 다름 아닌 대수와 위상학의 융합이다. 연속체의 가설이 참이라면 복수의 잉여는 빈자리를 점유하거나 원래 복수의 부재한 고유성의 존재를 나타내는 것 이상의 역할은 하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법칙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내부적으로 전체를 초월하는 것은 이 전체의 한계점을 지칭하는 것 이외의 일은 하지 못한다는 정합성의 계통이 유지될 것이다. 그러나 연속체의 가설은 증명될 수 없다. 노조의 현실주의에 대한 정치의 수학적 승리인 것이다.”      


'지적 사기'의 저자들은 바디우의 인용문 중에서 마지막 두 문장에 주목한다. 여기서 앞 문장과 뒤 문장 간에 어떤 도대체 어떤 상관관계나 인과관계가 있냐고 따져 묻는다. 그들의 표현에 따르자면 “두 문장 사이에 몇 문단이 실수로 빠진 것은 아닐까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수학과 정치학 사이의 뜬금없는 비약이라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저자들은 파리에서 만난 한 대학생, 즉 물리학 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친 후 들뢰즈를 읽고 있는 학생의 예를 들었다. 그 학생은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과 씨름을 하고 있었는데, 여기서 인용한 수학 관련 대목 (211~214쪽)을 읽고 나서 들뢰즈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겠노라고 실토했다고 전언한다. 수학 전공자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을 철학에 가져다 쓴 것은 일종의 지적 허세라는 것이다.   


저자들은 찰시 퍼시 스노의 그 유명한 책 ‘두 문화’를 패러디한 듯한 제목 ‘두 문화의 진정한 대화를 위하여’를 통해 몇 가지 공격적 제안을 한다. 이 제안은 일차적으로 인문학자들, 특히 포스트 모더니스트 계열의 철학자들이 자신의 글에 과학적 용어를 인용할 때는,     


1. 자기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똑바로 알고나 하라.

2. 난해하다고 해서 반드시 심오한 것은 아니다.

3. 과학은 텍스트가 아니다.

4. 자연과학을 흉내 내지 말라.

5. 권위에 기대는 논증을 조심해라.

6. 구체적 회의주의와 과격한 회의주의는 구분해야 한다.

7. 모호하면 언제든 발뺌을 할 수 있다.     


이 기분 나쁘지만 반박하기 어려운 제안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이 바로 6번 항목이다. 이는 다분히 후기 구조주의를 겨냥하고 있다. 후기 구조주의 철학자들의 논문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후기 구조주의 자체를 통째로 비판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저자들은 에필로그에서 자신들이 프랑스 철학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포스트 모더니스트 계열의 인문학자, 또는 그것에 기초를 두고 있는 학자들의 논문을 비판하는 진짜 의도를 드러낸다.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즘, 그 자체에 대한 공격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병폐는 인문과학을 좀먹는 시간 낭비, 무지몽매함을 떠받드는 문화적 혼돈, 정치적 좌파의 약화를 가져온다고 주장하면서, 저자들은 자연을 대상으로 하건 사회를 대상으로 하건 연구라는 것은 개념적으로 흐리멍덩해서는 안 되며, 경험적 증거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리지 않을 때만 앞으로 전진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홉스봄의 말을 인용한다.      


“서구의 대학에서, 특히 문학과 인류학 분야에서 부상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지적 유행이다. 이것은 객관적 존재를 주장하는 모든 ‘사실들’이 지적 구성물에 불과하다고 가르친다. 요컨대, 사실과 허구를 가르는 명확한 구분 선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분 선은 존재한다. 그리고 역사가들에게는, 심지어는 우리 같은 강력한 반실증주의 역사가들에게도, 이 두 가지를 구별하는 능력은 필요하다.”     


저자들은 포스트-포스트모더니즘은 모종의 독단주의, 신비주의(뉴 에이지 같은 것), 혹은 종교적 근본주의로 연결되는 반동적 기류가 부상하는 세계일 것으로 전망한 반면, 자신들이 추구하는 세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합리적이되 독단적이지 않고 과학적 정신을 추구하되 과학만능주의에 젖지 않고, 개방적이되 천박하지 않고, 정치적 진보를 지향하되 분파적이지 않은 지식인 문화의 등장을 고대한다.”     


저자들도 고백한 바와 같이 이것은 어디까지나 희망 사항이고 달성 불가능한 꿈에 불과하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떠올랐던 그림이 있다. 지난 4월 토론토에서 열린 철학자 슬라예보 지젝과 심리학자 조던 피터슨의 토론이었다.     


‘Nothing is a greater waste of time’이란 제목이 붙은 이 토론 이전에 이미 지젝과 피터슨은 각자의 글을 통해 상대방을 공격해 왔다. 이 토론에서 피터슨은 지젝을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 모더니스트가 결합한 좌파적 집단 정체성에 빠져 있다고 공격했다.      


이에 대해 지젝은 “도대체 (당신이 말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어디에 있는가? 한 사람만 이름을 이야기해 달라!”라고 반격했다. 이에 피터슨은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다. 나아가 지젝은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 오히려 헤겔 주의에 더 가깝다.”라고 말하면서 피터슨의 공격을 허공에 날려 버렸다.      


이 논쟁에서 지젝이 압도적이었다는 평이 대체로 많다. 물론 일부는 지젝이 자신의 철학적 정체성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는 평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지젝의 철학적 입장을 특정한 ‘주의’에 맞추어 판단하려고 하는 데서 오는 오류다. 지젝은 그저 ‘지젝 주의자’ 일뿐이다.     


앨런 소칼과 장 브리크몽이 이 책에서 지적한 실례들은 포스트 모더니스트 계열의 학자들에게는 매우 아픈 상처를 건드리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한편으론 피터슨이 지젝의 사상을 오해했듯이 이 책의 저자들도 포스트모더니즘을 오해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합리적이되 독단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말은 바로 앨런 소칼과 장 브리크몽에게도 필요한 덕목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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