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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인순 Jan 07. 2021

정의라는 상투어, 공정이란 편견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 (뤼트하르 브레흐만)

“똑똑한 사람들은 정확한 대답을 얻기 위해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얻기 위해 지력을 사용한다.” (에즈라 케인즈)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인용했듯이 역사의 궤도는 결국 정의의 방향으로 구부러지고 있는 것일까? 오늘날 우리가 확인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정의와 공정은 꼭 한쪽 방향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닐뿐더러 좌파나 우파 할 것 없이 가져다 쓰는 상투어가 돼버렸다.      


정치적 리얼리스트란 어쩌면 정의와 공정이란 단어를 일종의 수사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아닐까? 역사를 발전하는 것이 아닌 그저 변화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사람들, 역사는 그 방향에 따라 발전할 수도 있고 퇴보할 수도 있는 것임을 받아들이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리얼리스트가 아닐까? 그런 리얼리스트들에게 있어서 유토피아란 어떤 모습일까?      


여기에 정의라는 상투어에 기댄 극좌들의 언더독과 공정이란 이름 뒤에 숨은 극우들의 편견을 함께 비판하는 특이한 이력의 학자가 있다. 바로 이 책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플랜)’를 저술한 뤼트하르 브레흐만이다.      


네덜란드 위트레흐트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브레흐만은 박사 학위를 얻기 위해 중요하지도 않은 주제에 대해 4년씩이나 되는 시간을 낭비하기 싫다며 일찌감치 언론계에 들어섰다. 이후, 1년간 미국의 한 언론사에서 일하다가 2013년 비영리 저널리즘 플랫폼을 시작한 지인의 도움으로 경제적 부담에서 벗어난 연구와 글쓰기 작업의 기회를 얻었다.     


그의 자유로운 글쓰기 결과로 나온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은 환원론적 역사 발전론의 허상을 지적하면서 시작한다. 인류의 궤도가 결코, 정의를 향한 유일한 경로 위에 놓여 있지 않으며, 그 위를 달리는 역사의 팻말을 단 기차도 단일 동력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브레흐만은 사회문제 지수와 불평등 간의 실증적 관계 그래프를 제시하며, 오늘날 가장 궁핍하게 사는 사람들조차도 수백 년 전 왕보다 잘살고 있다는 식의 구태의연한 주장을 비판한다. 즉, 사회문제와 국민총생산량, 즉 ’잘 사는 문제‘간에는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다는 것이다.      


수백 년 전의 왕보다 잘 사는 유토피아에서 살아가는 빈곤한 사람들은 실제로 디스토피아에서 사는 사람들이며, 그들이 사는 사회의 핵심 동력이 “일한 만큼 부유해지고 능력만큼 잘 사는 것이 공정하다”라는 식의 주장은 신자유주의적 신념에 불과하다. 이러한 믿음은 역사적으로 증명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좌-우파의 케케묵은 상투적 논쟁거리일 뿐이다.     


그렇다면, ‘좌-우파의 케케묵을 상투적 논쟁’, 을 넘어서는 미래 관점에서의 정치-사회적 담론을 개방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급진적 생각에 대한 두려움을 제거’하는 것이다. 저자는 그것을 향한 첫 번째 주제로 ‘무상 현금지원제도’를 꺼내 든다.     


물론 여기에는 2016년 네덜란드와 미국의 정치적 배경이 깔려있다. 트럼프로 대변되는 미국의 정치 상황은 차치하더라도, 2016년 네덜란드 상황은 어떠했을까? 당시의 네덜란드는 보수-진보 양당 체제 아래 균형을 이루던 정치 구도가 무너지고 제3의 진보 세력 약진과 함께 3당 정치를 막 시작하던 시점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변환점에서는 늘 새로운 방향에 대한 욕구와 진보적인 어젠다에 대한 요구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2016년을 전후하여, 한국에서는 새롭게 떠오르던 소수 진보정당이 창의적인 어젠다를 제시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데 모든 역량을 소모하는 바람에 정치적 추동력을 잃어버리고 말았고, 덕분에 급진적 아이디어는 그 진행 속도를 늦추어만 했다. 그러나 2020년 코로나 19 국면은 새로운 정치-사회적 어젠다를 창출하는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 냈다는데 그 역시도 무상 현금지원 제도다.     


이 책이 쓰인 2016년은 전 세계적으로도 사회제도로서의 ‘기본소득’이 긍정적으로 논의되는 한편 여러 가지 실험들이 진행되던 시점이었다. 이후 한국에서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노동시간의 단축과 기본소득에 대한 새로운 논의가 일어났으나 대부분 정치적 저항에 부딪혀 그 추진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하루 3시간 일하고, 무상으로 현금이 지급되며, 기본소득이 보장되는 사회는 불가능한 것일까?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최초로 빈곤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법제화한 엘리자베스 여왕, 공산주의에 맞서 보험, 법정 근무시간, 탁아소 등의 제도를 도입한 비스마르크, 경제의 국가적 대응을 강조한 케인즈,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선구자 하이에크와 프리드먼 등, 오래된 생각과 결별하고 새로운 방법들을 고집스럽게 주장해 온 사람들을 모두 위대하다는 것이 브레흐만의 생각이다.      


물론 이러한 칭송은 좌-우파를 막론한다. 자신들이 주장하고 실행한 제도나 창안한 아이디어의 성패 여부를 떠나서 그들은 최소한 유토피아를 향한 새로운 아이디어와 열정을 가지고 주장하고 실천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유토피아를 위한 첫 번째 아이디어가 바로 ‘무상 현금지원제도’다. 저자는 무상 현금지원에 대한 여러 가지 실험 결과들을 소개하는데, 2009년 영국에서 9명에게 지급된 45만 파운드 중 5만 파운드만 생산적인 곳에 지출되었다는 결과, 142개국의 직장인 중, 오직 13%만이 직장에 만족한다는 사실 등이 바로 그러한 것들이다.      

실험의 결과는 직접적인 무상 지원이 경제 교육이나 행정력의 지원보다는 빈곤 해결에 훨씬 효과적이며, 경제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AI로 인해 일자리의 변화가 심화되고 나이별 노동의 분업 체계가 붕괴할 미래를 생각한다면 제도적 개선, 유지보다는 직접적인 무상 지원이 더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저자는 더욱 급진적인 아이디어를 제안하는데, 바로 국경의 둑을 낮추는 것이다. 1970년대 이후 근로자와 자본가 간의 부의 비중이 점차 커지고 있으며, 사회적 양적 완화는 이를 더욱 가속화할 뿐이기 때문에 돈, 시간, 그리고 수단을 재배치하는 것만이 부의 불평등을 해소할 방법이라는 것이다.     


재배치에 대한 예로서, 20세기 내내 빈곤국에 원조로 지불되었던 5조 달러의 85%가 국경을 이동하는 과정에서 사라져 버렸으며, 만약 선진국들이 3%만 더 이민자를 받아들이면 그보다 3배의 돈이 빈곤국에 실제로 지불되었을 것이라는 연구 결과를 제시한다. 국가를 개방하고 자유로운 이동을 권장하자는 것이다.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 즉 기존의 제도를 개선하여 효율성을 높이고, 소득을 재분배하며, 빈곤 자체를 인권의 문제로 바라보는 한편, AI와 분업, 즉 인간을 창의적인 일에 전념할 수 있게 유도하는 제도적 장치들이 바로 저자가 이야기하는 유토피아 플랜이다.     


뤼트허르 브레흐만은 여러 가지 실증 자료를 토대로 기존의 정치-사회적 통념들을 과감히 무너뜨린다. 가난한 사람들이 어리석게 행동한다는 세간의 평, 즉 가난한 사람일수록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커지고, 비만율이 높으며, 알코올과 마약을 더 많이 사용하며, 대체로 게으르다는 선입견등이 그런 통념들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편견이다.     


저자는 왜 가난한 사람은 돈이 생기면 소비하려고 하고, 성공한 기업가는 돈과 상관없이 자신의 사업을 키우기 위해 혼신을 불태우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프린스턴 대학의 심리학자 엘다 사퍼가 주장한 ‘결핍 사고방식’을 빌려온다.     


“일정이 텅 비었을 때와 빽빽할 때 느끼는 감정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다. 결핍은 정신을 침범하므로 무해하고 사소한 감정이 아니다. 사람들은 결핍되었다고 느낄 때 다르게 행동한다. 결핍된 대상이 무엇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지나치게 없는 것이 시간이든, 돈이든, 우정이든, 음식이든 모두 ‘결핍 사고방식’을 부추긴다.”      


잠을 자지 못하게 하면, 잠에 집착하고, 돈이 없으면 오히려 소비 욕구가 강화되며, 명예에 대한 결핍을 해소하기 위해 권력을 추구하는 현상, 결국 빈곤 그 자체는 빈곤한 행동을 유발하며, 결핍 그 자체가 정상적인 판단에 장애 요인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한편, 브레흐만은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지표, ‘국민총생산량’에 대해서도 비판의 날을 세운다. 젊고 우수한 러시아 출신의 학자 쿠즈네츠가 만들어 낸 ‘국민총생산량’의 산출방법은 일종의 환상에 불가하다는 것이다.     


“국내 총생산량은 단편적인 재선과 정치적 전멸을 판가름할 수 있는 확실한 과학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이렇듯 정밀해 보이는 모습은 환상에 불과하다. 국내총생산은 분명하게 정의된 측정 대상이 아닐뿐더러 이를 측정하는 것은 아이디어를 측정하려는 시도이다.”     


이러한 지표 정치는 비단 국내 총생산량 지표만의 문제는 아니다. 예를 들어, 지구 행복지수에서 부탄은 늘 선두를 달리지만, 왕의 독재 정치와 롯삼파 종족의 인종 청소를 지표에서 배제하는 등, 자의적이고 임의적인 요소가 많다는 점을 지적한다.     


뤼트허르 브레흐만은 한국을 방문한 바 있다. 그는 한겨레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유발 하라리가 국가 내 기본소득으로는 국가 간 불평등을 해결할 수 없다며 “핀란드 국민이 자국민의 기본소득을 위해서 세금을 더 걷는 데는 동의할지 모르지만, 방글라데시 국민까지 돕는 데는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 말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하라리는 기본소득 전문가가 아니다. 이미 여러 나라에서 이민자에게 투표권을 지급하거나, 복지 혜택을 주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사람들이 본성적으로 이렇게 저렇게 행동한다는 말에는 경계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라고 말하며, 조건 없는 기본소득은 빈곤을 퇴치하는 가장 비용이 적게 드는 효과적인 방법이고, 사람들이 사회에 이바지할 기회를 제공한다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앞으로 역사상 가장 불평등한 사회가 만들어질 가능성이 크다”라는 하라리의 비관적인 미래 전망에 대해서도 브레흐만은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역사가들이 미래에 관해 이야기할 때 독자들은 회의적인 자세를 취해야 한다. 가능하다고 믿지 않으면 불가능하나, 믿으면 현실이 된다는 점에서 인간은 놀라운 존재다. 1%가 로봇을 소유하고 나머지는 노예나 그보다 나쁜 것이 된다는 디스토피아 시나리오가 있지만, 반대로 유토피아 시나리오가 있다. 과거에 노예제 폐지나 성 평등은 유토피아적이라고 했지만 우리는 해냈다. 기본소득에 대해서도 최근 몇 년간 갑자기 논의가 쏟아져 나오고 실험도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급진적인 비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더 나은 사회로 갈 가능성조차 없어진다.”     


한편, ‘2020년 경향 포럼’ 대담에서는 디스토피아 속에 꽃피는 유토피아 플랜에 대해 폴 크루그먼 미국 뉴욕시립대 석좌교수와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각각 코로나 19로 인한 경제위기에 각기 다른 대처법을 내놓았다.     


크루그먼 교수는 미국의 실업급여 지급이 상당히 효과를 본 것으로 평가하며 전통적 복지의 효과에 주목했고, 장하준 교수는 정부 부채가 우리 경제를 살릴 수 있으며, 재난지원금을 모든 사람에게 나눠주고 고소득자로부터 더 많은 세금을 충당하는 정부 재정 역할을 강조했다.     


그러나 크루그먼 교수는 기본소득은 적어도 지금 위기의 해법은 아니라 말하며 코로나로 2,200만 명의 미국인이 실업자가 됐으나 1억 2천만 명은 고용이 유지됐고, 코로나로 인한 타격이 경우마다 다르므로 기본소득 지급액이 정말 필요한 사람에게는 부족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오히려 주당 600달러를 실업자들에게 지원했는데, 이게 효과가 더 컸다는 말도 덧붙였다.     


반면, 장하준 교수는 한국이 제대로 된 복지국가였다면 재난지원금을 지급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며, 재난기금을 모든 국민에게 지급한 미국과 한국은 복지체계가 취약한 나라들이기에 위기 시 사람들을 도와줄 체계가 없어 인위적인 조치로 일시적 도움을 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장하준 교수는 한국은 코로나 19로 인해 복지국가가 왜 필요한지 깨닫게 됐으며,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재난기금을 지급하기보다는 집단적인 보험 시스템을 갖추는 게 효과적이라고 주장했다. 누구에게 줄지 토론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기보다 모든 사람에게 나눠주고 고소득자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거둬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빈곤이 가장 사악한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미래를 파괴하기 때문이라며, 스스로 빈곤의 상태를 경험했던 조지 오웰의 말을 인용한다.      


“사람들이 타인의 소득에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기 무섭게 그들에게 설교하고 그들에 대해 기도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느끼는 현상에 놀란다.”      


파격적인 제안과 풍부한 실증 사례 등, 이 책은 볼 것이 많다. ‘무상 현금 지급’이라는 파격적 제도 역시도 코로나 19라는 위기를 맞아 매우 시의적절하다. 우리가 관습적으로 인용하던 각종 지표의 허상을 지적한 것이나 빈곤 해결에 대한 전복적 제안도 매우 흥미롭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이 책을 통해 가장 공감이 갔던 부분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맹목적 신념, 그것이 심리학적 범주, 즉 심리적 ‘인지 부조화’ 현상을 넘어 정치-사회학적 지평에서도 작동되고 있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인간은 오이 써는 방법이나 옷에 묻은 기름을 제거하는 방법 등에 대해서는 타인의 조언을 쉽게 받아들이지만, 정치적, 이념적, 종교적 견해에서는 너무나 완고해진다는 말은 오늘날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창의 넓이를 확장해 준다.      


저자는 이러한 사회적 인지 부조화의 대표적인 사례로 2008년에 있었던 리먼 브라더스 파산 사건을 들었다. 40년간 금융계에서 일하며 미국 최고의 금융전문가였던 미연방 준비은행의 앨런 그린스펀은 자신의 실패를 인정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자신의 정책에는 오류가 없었다고 번복한 사실이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으며, 그런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도 마찬가지다.


결국, 진보는 진보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보수는 보수의 범주를 맴돌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새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는 것이 아니라 옛 아이디어에서 벗어나는 것이다.”라는 케인스의 말을 인용하며 저자는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가 어떻게 달성될 수 있는지를 가늠한다.      


즉, 유토피아에 대한 새로운 계획을 수립하기 전, 먼저 오래된 아이디어 중에 디스토피아의 원흉들이 숨어 있음을 자각하며, 새것을 추구하기 전에 오래된 것을 버리고, 진보는 진보의 오래된 아이디어를, 보수 역시도 보수의 낡은 관점에 등을 돌리는 전복적 행동들이 나타나야 할 것이다.     


아이디어가 사회를 점진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하며, 이성에 의한 변화라는 계몽주의 정신이 단순히 현상을 유지하기 위한 지지대의 역할에 만족해야 한다면 유토피아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저자의 일갈은 매우 의미 있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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