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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인순 Dec 18. 2020

능력과 운

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공정은 능력주의가 아니라 겸손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공정은 또 다른 횡포가 될 수 있다.” 이것이 샌델이 이 책을 통해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닐까?

“이렇듯 세계화에서 비롯된 승패와 정치 분열 등의 문제는 더 이상 ‘좌냐 우냐’의 구분으로 따질 수가 없게 되었다. 그보다는 ‘열려 있느냐 닫혀 있느냐?’로 따져야 할 것이다.”    

 

마이클 샌델은 ‘공정’의 문제는 진보나 보수의 정치적 영역 싸움에서 벌어지는 논쟁이 아님을, 또는 아니어야 함을 강조한다. 트럼프 현상에 대한 충격이라고 여겨지는 저술의 배경을 감안할 때, 이는 아마도 미국 사회에 배치된 좌나 우의 시각으로 공정의 문제를 보지 말라는 강한 제안일 것이다.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의 원 제목은 ‘The tyranny of merit’ 즉, ‘공익(공정)의 횡포’ 정도로 해석될 수 있을 터인데, 풀어쓰자면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횡포’ 가 적절할 것이다. 다분히 트럼프 정부의 포퓰리즘 정치를 염두에 두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6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대학 입시의 문제로 시작해서 대학의 문제로 마감된다. 예컨대 트럼프 현상을 지탱하고 있는 미국 사회의 두 가지 세력, 즉, 기독교 복음주의와 러스트 벨트의 백인 빈곤층 문제를 교육의 틀에서 살피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가 짓게 배어 있다.     


샌델은 미국의 대학 입시를 3가지로 분류했는데, 첫째는 기부금의 형태로 진행되는 ‘뒷문’, 부정한 뇌물로 성사되는 ‘옆문’, 그리고 정당하게 시험을 보아 들어가는 ‘정문’이다. 대학의 문을 이렇게 세부적으로 분류한 목적은 공정하다고 여겨지는 ‘정문’ 조차도 실상 공정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SAT의 점수와 수험생 집안의 소득 수준 간의 비례관계를 포함하여 여러가지 ‘정문의 불공정’에 대한 증거를 제시한 샌델은 흔히 말하는 능력주의가 바로 공정이라는 막연한 믿음 뒤에 숨은 허상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샌델은 입시 제도 그 자체보다 오히려 입시를 둘러싼 치열한 경쟁이 더욱 심각한 사회 문제라는 점을 강조한다. 대학 입시에 온 사회가 목을 매는 현상, 이는 최근 수십 년 동안 미국 사회가 점점 더 불평등해져 왔다는 사실의 방증이라는 것이다.     


샌델은 이 책에서 트럼프 현상(?)을 집요하게 다루고 있는데, 이는 트럼프가 미국 사회의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추동해 온 각종 사회적 불안, 고민, 합당한 불만들을 직시하고, 그것이 어떻게 외국인 혐오와 극단적 민족주의를 부각하게 했으며, 또 그 속에 어떤 추악한 감정과 정당한 불만이 있는지 들여다보기 위함이다.     


저자는 전 세계적 현상으로 진행되고 있는 혐오와 편견의 원인이 일종의 다양성에 대한 반동이나 새로운 경제 환경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동안 유지해 온 정치적 실패에 기인한 것임을 자각해야 한다는 점도 놓치지 않고 있다.     


이 책의 내용 중 유독 눈길이 가는 부분은 미국 사회의 능력주의의 원인을 기독교 복음주의의 구원론에서 찾고자 한 시도이다. 이는 16세기 청교도들을 이끌고 미국에 정착했던 존 윈스럽과 1989년 미국 대통령에서 퇴임하던 레이건이 인용했던 소위 ‘The shinning city upon a hill’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요즘 우리는 성공을 청교도들이 구원을 바라보던 방식과 비슷하게 본다. 행운이나 은총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노력과 분투로 얻은 성과라고 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능력주의 윤리의 핵심이다. 자유와 당당한 자격을 한껏 강조한다. 내가 많은 세속적 재화를 손에 넣는 데 스스로 책임이 있다면, 그러한 ‘취득의 자격’이 있을 것이다. 성공은 미덕의 증표다. 나의 부유함은 나의 몫이다.”      


샌델은 기독교 근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세례를 받은 능력주의가 깔뱅 주의로 대변되는 은총의 작동과 막스 베버가 주장한 자본주의 출현의 기원으로서 기독교 정신간의 모순으로부터 성장했다고 주장한다. 저자에 따르면, 소위 청교도 정신이라 일컫는 미국 기독교의 정신에는 서로 모순된 정신 즉, 은총의 절대성과 청교도적 행동주의가 들어있었으며, 이는 오늘날 미국 사회에 편재한 ‘공정에 대한 착각’의 기원 중 하나가 되었다.     


기독교 복음주의와 함께 트럼프 현상의 또 다른 축, 즉 러스트 벨트에 속하는 백인 빈곤층 문제에 대해서도 샌델은 한마디 한다. 그들이 트럼프를 지지하는 이유는 바로 분노 때문이라는 것이다. 샌델에 따르면 트럼프 지지자들의 분노는 미국 사회의 엘리트주의로부터 야기되었으며, 분노는 한쪽으로는 유색인종에 대하여, 또 한쪽으로는 엘리트들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능력주의는 승자에게는 오만을 패자에게는 굴욕을 퍼뜨리는 정치적 실패의 주범이다. 오늘날 포퓰리즘의 반격을 일으킨 동력이자, 공적 의미가 사라진 공간에 종교 근본주의와 적대적 민족주의가 자리잡았다는 해석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도 빠짐없이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에는 과연 어떤 분노들이 작동되고 있을까? 마이클 샌델 교수가 직접 언급했다시피 대한민국은 정의에 대한 비판 의식이 가장 높은 사회 중 하나이다. 이런 관점에서 소위 정의에 대한 감수성이 높은 국가인 대한민국 시민들은 무엇에 분노하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살펴볼 첫번째 사례는 인천 국제공항의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면서 발생한 사건이다. 시민들의 분노가 집중된 곳은 바로 ‘시험을 치고 정규직으로 들어온 사람들과의 형평성’ 문제였다. 누구는 어렵게 시험을 치고 들어와서 정규직이 되었는데, 누구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갑자기(?) 정규직이 되는 것을 용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인력의 처우나 지위 등이 결코 기존의 정규직들과 같지 않다는 해명과 정규직 전환이 무작정 아무런 조건도 없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무수히 강조되었지만, 시민들은 그것에 많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것 역시 대한민국 시민들의 공정성에 대한 인지 감수성 밖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소위 ‘프로듀스 101 조작 사건’이다. 프로그램 PD와 CP가 주도한 이 불공정한 조작 사건으로 인해 어떤 인생은 세계를 돌며 공연을 하는 지위에 올랐지만, 또 어떤 꿈 많던 젊은이는 만만치 않은 삶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대중들의 분노는 상대적으로 크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피해를 본 연습생들의 명단이 공개되기도 하였지만, 그들을 구제해야 한다는 주장도, 조작 사건으로 인해 성공한 아이돌에 대해 어떤 조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견도 그리 많지 않았다. 이 역시도 대한민국 시민들 분노의 메뉴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듯하다.     


또 하나의 사례는 바로 서민 교수가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한 비난이다. “문통을 보면 과거 내가 겪었던 공부 못하는 이들이 떠 오른다.”. 말한 서민 교수는 이어서 문 대통령과 ‘공부 못하는 이들’의 6가지 공통점을 들었다. 그것은 ‘전 과목을 두루 못한다.’, ‘핑계가 많다.’, ‘정신승리를 한다.’, ‘나쁜 친구를 사귄다.’, ‘듣도 보도 못한 방법을 쓴다.’, ‘편드는 이가 있다’ 등이다.     


이에 대한 비판이 있자, 서민 교수는 자신은 문재인 대통령이 특정 대학을 나와서 공부를 못했다고 말한 적이 없다는 말로 자신의 주장이 결코 학벌주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변했다. 그러나 서민 교수는 변명의 방향을 잘못 잡았다. 그의 진짜 문제는 '전 대통령'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공부 못하는 이들’에 대한 편견이다. 그리고 이러한 편견 속에 바로 ‘공정의 횡포’가 자리하고 있다.     


박노자 교수는 한국 사회를 두고 ‘급의 사회’이며, 그 중심에는 일종의 학벌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고 했다. 위의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 확인된 대한민국 시민의 분노 포인트 역시 학벌주의에 자리하고 있다. 공부 못하는 아이들은 차별을 받아도 된다는 일종의 자기 책임의 담론, 이는 도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부인되기 힘든 담론이며, 넘어서기 불가능한 과제이다.     


샌델은 이 불가능한 도전을 위해 해야 할 일을 두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는 사회적 가치의 재평가이고 또 하나는 도덕적 연대의 강화이다. 사회적 가치의 재평가는 경제적 분야에서 일차적으로 일어나야 하는데, 이는 어떤 경제적 역할이 명예와 인정을 받을 가치가 있느냐에 대한 판단 기준, 즉 ‘기여적 정의론’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재조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물 경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투기 행위에 대한 재평가 등이 그 예가 될 것이다.      


샌델의 두 번째 제안은 지난 40년간 시장 주도적 세계화와 능력주의적 성공 관에 의해 무너져 내린 도덕적 유대 관계를 회복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런 유대 관계야말로 사회적 분노를 적절히 흡수하고 일의 존엄성을 회복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종류의 일이 인정과 존경을 받을 가치가 있느냐다. 또 다른 것은 우리는 시민으로서 서로에게 어떤 책임이 있느냐다. 이 질문들은 상호 연결되어 있다. 무엇이 긍정적인 기여인지 따져 보려면 우리 공동의 생활에서 목표와 수단이 무엇인지부터 가려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소속이라는 의식 없이 우리 스스로를 우리가 빚지고 있는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는 인식 없이 공동의 목표와 수단에 대해 숙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의 상징적 인물이자 능력주의의 상징이었던 칼리 피오리나 전 HP 회장도 ‘힘든 선택들’이라는 자서전을 통해 조직 내에서의 승진과 지위는 능력이 아닌 운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을 인정했다.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조직 내 모든 직급에서 유능한 자와 무능한 자가 모두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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