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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인순 Apr 03. 2020

종교가 정치가 될 때

추악한 동맹 (존 그레이)

자유주의 사회는 경쟁하는 신념들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문명화된 삶을 구현하기 때문에 방어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자유주의 사회가 선교사적 체제로 변모하면 자유주의 사회가 성취해 온 모든 것이 위험에 빠진다.

1989년, 미국의 정치경제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선언했던 ‘역사의 종언’, 즉 모든 이념 전쟁에서 민주주의와 자유경제가 영구적으로 승리하게 되고, 사회적 제도의 발전이 종결되며, 거시적인 평화와 자유와 안정이 지속 유지된다는 예언적 주장은 적어도 1990년대까지는 부분적으로 유효했다.


1991년 크리스마스를 기해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자 후쿠야마의 예언적 선포는 민주정체가 모든 국가 정체의 최종 형태임을 증명한 묵시론으로 대접받았고,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자유민주주의를 통해 도입된 안정된 정체는 세계적 전쟁이나 쿠데타 등의 ‘역사적 사건’을 제어할 수 있다고 의기양양해 있었다.      


심지어 후쿠야마는 니체의 ‘최후의 인간’을 거론하기까지 했다. 냉전의 종식과 더불어 도래하는 영원한 평화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 보편적인 인간의 본질적인 욕구를 다 충족했기에 정신적인 욕구마저 사라져 버린 인간, 물질적인 욕구에 만족하면서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투쟁을 하려 하지 않고 포기해버리게 되는 인간을 걱정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27년이 지난 2015년, 후쿠야마는 오슬로 대학을 방문했다. 당시 이 학교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박노자 교수는 자신의 강의 문제로 후쿠야마를 만나지 못한 것을 매우 아쉬워하며, 만약 그를 만났다면 몇 가지 질문을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노자 교수는 자신의 칼럼을 통해 당시 후쿠야마에게 하고 싶었던 질문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첫째, 천편일률적 “민주주의”라는 게 과연 존재하는가? 1980~90년대에 지구촌 곳곳에서 민주화 과정이 진행된 것이야 사실이지만, 구체적인 나라와 지역이 세계체제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서 거기에서 태어난 “민주주의”의 모습도 천차만별이고, 따라서 역사가 끝나기는커녕, 오히려 우리에게 세계체제 속의 상황의 위치들의 다양성을 더 재미있게 보여주고 있는데 말이다.     


둘째, 자본주의 체제의 욕구에 거슬리는 자유들의 운명은 어떡할 것인가? 예컨대 체제에 유리한 국가적 대민 감시는, 인터넷과 휴대전화, 신용카드의 도래로 엄청나게 쉬워졌으며, 국가가 내가 어제 뭘 했고 무슨 생각하고 누구와 교통 했는지를 신용카드, 전자우편, 휴대전화, SNS를 통해 다 알 수 있는 현실 속에서 “사생활 비공개의 자유”는 사실상 폐지된 것이 아닌가?     


요약하자면 국가 앞에서 완전한 발가벗은 모습이 된 ‘개인’. 완전한 민주도 완전한 자유도 없을 뿐 아니라, 완전한 비민주나 부자유도 없어진 ‘세상’에서 역사의 종언이 있을 수 있겠냐는 논지의 질문이었다. 박노자 교수에 따르면 사실상 일률적인 ‘자유민주주의’는 역사상 존재한 적이 없었으며, 나라마다 그 자유나 민주의 실질적 모습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후쿠야마를 향한 박노자 교수의 질문은 2013년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박근혜가 당선된 후, 퇴보해 버린 대한민국의 정체를 배경으로 한 것이라 더욱 의미심장했다. 당시 그는 대한민국을 바라보며, 민주주의 발전은 결국 전진과 후퇴의 양쪽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앞으로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퇴보 경향을 바꾸자면 큰 투쟁과 큰 희생이 필요할 것이라고 내다보기도 하였다.     


이에 화답이나 하듯이 2017년 2월 후쿠야마 교수는 워싱턴포스트지와의 인터뷰에서 "('역사의 종말'을 집필하던) 25년 전만 해도 나는 민주주의가 어떻게 후퇴할 수 있는지 생각하지도 못했고 이론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라고 고백했다.      


후쿠야마가 이런 고백을 했던 2017년은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던 해였고, 그는 "세계화가 민주주의 국가에 내부 긴장을 조성했다"라며, "여기에 이민자와 다문화주의에 대한 불만이 합쳐져서 선동적 대중영합주의가 들어설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다"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존 그레이가 2007년에 출간한 ‘추악한 동맹’ 역시도 이러한 관점에 서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후쿠야마 교수가 의기양양하게 선언한 ‘종언’과 ‘종말’의 개념을 비판하고 있다. 그레이의 관점은 박노자 교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후쿠야마가 선언한 ‘종언’이나 ‘종말’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잘못 선언된 예언을 넘어서, 그 자체가 세계적 갈등과 반목의 위험성을 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적 전쟁과 테러의 원인이 되는 일종의 유토피아적 사고라고 비판한다.     


천년왕국설과 목적론적 역사관

저자에 따르면, 서구에서 논의되는 ‘종말’의 개념은 모두 기독교적 종말론, 즉 ‘천년왕국설’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다. 여기서 ‘천년왕국설’이란 신약성서의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종말론적 묵시인데, 인류가 종말에 다다르게 되면 재림 예수가 통치하는 왕국이 천년 동안 이어진다는 일종의 ‘설’이다.     


‘천년왕국설’은 AD 3세가 교부 신학자 오리게네스가 베드로 계시록과 끝까지 경쟁하던 요한계시록을 정경에 편입시킨 이후, 매우 오랜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이어져 왔다. 기독교 성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 문서는 ‘천년왕국설’의 신학적 바탕이 되었다.      


431년 에페소스에서 열린 기독교 공의회가 성서를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을 옹호하면서 ‘천년왕국설’을 맹렬히 비판하기도 하였지만, 12세기 시토 수도회의 피오레 요아킴은 인간의 역사를 아버지의 시대, 아들의 시대, 그리고 성령의 시대로 나누는 ‘천년왕국설’을 다시 한번 부활시켰다.      


또한, 중세 후기, 즉 11세기부터 16세기까지, 서구 사회에서는 조로아스터교의 이원론적 세계관에 영향을 받은 기독교 공동체들이 북부 이탈리아와 남부 프랑스 지역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면 ‘천년왕국설’에 기초한 기독교 공동체의 생명을 유지해 왔다.      


근, 현대에 들어서는 19세기 말, 아일랜드계 영국인 존 넬슨 다비가 요한계시록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을 통해 역사를 6단계로 나누는 소위 세대주의 신학을 미국에 전수했다. 이후, 다비의 세대주의는 무디라는 출중한 평신도 설교자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다. 동시에 이러 저러한 사경회를 통해 부름을 받은(?) 20대의 젊은 선교사들이 1885년 처음으로 조선을 찾아왔다.     


한편 한국에서는 독립선언에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했던 길선주 목사가 감옥살이 중 나름대로 요한계시록을 해석하였으며, 이를 토대로 독창적인 종말론 신학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이와는 별개로 기독교 신비주의자 이명화로부터 계승되는 한국의 접신파들은 세대주의 종말론과 접신 사상을 결합하여 여러 가지 기독교 이단 종파를 만들어 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신천지이다.     


이 책 ‘추악한 동맹’에서 존 그레이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종말론적 기독교 신학이 정치적 권력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자신만의 구세주를 탄생시켰으며, 이를 통해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전쟁이 정당화됐을 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의 파국을 이끌 잠재적 요소로 여전히 살아 움직이고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존 그레이는 기독교 종말론에 영향을 받은 정치 체제의 구체적인 예로, 자코뱅당의 공포정치, 볼셰비키 혁명, 나치즘, 그리고 미국의 신자유주의(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신보수주의)를 들고 있다. 특히 저자는 2003년 봄에 이루어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기독교 종말론과 미국식 자유주의가 결합하여 만들어 낸 유토피아의 비극이라고 역사적 선고를 한다.     


“서양 사회에 영향을 미친 천년왕국 주의는 기독교의 유산이다. 대부분의 종교는 역사를 시작과 끝이 있는 이야기로 보지 않는다. 힌두교와 불교는 인간의 삶을 우주적 순환 속의 찰나로 여기며 구원을 끝나지 않는 순환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이해한다. 기독교가 전파되기 전 유럽에서는 플라톤과 그의 제자들이 유사한 방식으로 인간의 삶을 파악했고 고대 유대교에도 세계가 끝난다는 사고는 없었다. 유독 기독교만이 인간의 역사가 특정한 목적을 향해 가는 과정이라는 신념을 고취했다.”     


현실주의

저자는 파국적 ‘종말론’의 대안으로써 ‘현실주의’를 제시한다. 저자가 말하는 현실주의란 신념을 전제하지 않는 상태에서 독재와 자유, 전쟁과 평화를 사유할 수 있는 방식이다. 현실주의에 따르면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기준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태도가 된다.     


물론, 저자는 현실주의 사고도 오류를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역사를 돌아보아 현실주의적 판단 역시도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거나 막대한 고통만 초래한 채 실패로 끝난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존 그레이의 생각을 한국에 적용해 본다면, 대북정책을 두고 내린 보수 정권과 진보정권의 시도들이 모두 실패로 이어지고 있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는 그 어떤 정책도 오류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평화를 위해 그저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 저자의 조언이자 현실주의적 사유 방식이다. 저자는 헤들리 불의 이야기를 인용하며, 현실주의적인 판단과 태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직면할 수 있는 최악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임시방편이라도 꾸준히 시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어려움을 단번에 쓸어버리는 극적인 한 걸음을 내디뎌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위기를 극복하면 다시 새로운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는,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문제일 뿐이다.” (헤들리 불)     


다시 한번 한국적 상황으로 돌아와 본다면, 우리 눈에는 반공주의 전선의 최전선에 서 있는 기독교인들이 비추어진다. 바로 그들이 미국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의 추악한 동맹, 즉 자유주의 이념과 기독교 선교자 정신 간의 동맹이 주는 위험성 그 자체이다. 그 위험성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유주의 사회는 경쟁하는 신념들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문명화된 삶을 구현하기 때문에 방어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자유주의 사회가 선교사적 체제로 변모하면 자유주의 사회가 성취해 온 모든 것이 위험에 빠진다.”     


그레이는 이 책을 통해 목적론적 역사관을 거부하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국제 관계와 한 정부의 본질을 둘러싼 갈등이 언젠가는 사라질 수 있다는 믿음은 착각이며, 인류가 창조 이래, 신비롭고 아름다운 진화를 거쳐 약속의 땅에 도착할 것이라고 가정하고 그 가정에 근거한 정책을 펼친다면 인류는 결코 전쟁과 갈등에서 해방될 수 없다고 말이다.          


Black Mass로부터 신천지까지

이 책의 원제는 ‘Black Mass’이다. 이는 악마에 대한 일종의 숭배 의식을 뜻하는데, 악한 의도를 가지고 누군가를 해하려고 하는 주술적 예배 행위, 즉 ‘검은 미사’로 번역될 수 있다. 저자는 근대의 역사, 현대의 정치 사회에서 Black Mass가 바로 유토피아가 존재한다는 믿음과 종말론적 신념이라고 단언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 세상에 전쟁이 존재하는 이유는 평화에서 찾을 수 없는 목적을 전쟁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전쟁은 누군가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시행하고 있는 일종의 Black Mass인 셈이다.      


국가 간의 전쟁뿐만 아니라 한 국가의 사회적 갈등도 같은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어느 사회든, ‘갈등이 해소된 사회에서는 도무지 찾을 수 없는 욕망’ 그 욕망을 갈등 속에서 찾아내려는 목적으로 악령에게 엎어지는 Black Mass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혹자의 말처럼 사회가 발전하면 Black Mass는 사라질 수 있는 것일까? 아니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종교 자체가 없어질 수 있을까? 또는, 도킨스를 비롯한 극단적 진화론자의 주장처럼 종교가 사라지면 평화가 찾아오는 것일까?      


저자는 이에 대해 “종교가 환상이라는 사실만 입증하면 종교가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철학자들뿐이다.”라고 부정적으로 대답한다.     


그레이에 따르면, 종교는 어떤 측면에서 가장 기저에 자리 잡은 인간의 욕망이다. 때문에, 성적 욕구를 억압하면 그것이 기괴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종교적 신념 역시도 억압되는 순간 사람들의 삶에 어떠한 방식으로든 영향을 미치기 위해 기괴한 모습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것이 신천지와 같은 이단 종교의 출현이 끊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그레이는 진리에 대한 환원론적 태도를 경계하는데, 인간 정신에 대해 높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이해, 즉 인간의 정신이 진리에 주파수를 맞추는 기관이라는 생각은 다윈주의에 부합하지 않는 유사 플라톤주의적 개념이며 과학보다는 종교에 더 가깝다고 말한다.      


그레이는 종교가 없는 세상은 존재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종교를 배제한 세속주의는 그 자체가 자신이 배제하는 바로 그 종교에 의해서 규정되며, 따라서 세속주의가 종교가 없는 사회를 의미한다면 그것은 모순적 논리가 되기 때문이다. 즉 종교 자체가 하나의 세속적 욕구라고 보고 있다.     


“인간에게는 합리적인 수단으로는 충족될 수 없는 욕구가 있다. 에볼라 바이러스를 입수하려 한 옴진리교가 내세운 목표 중 달성 가능한 목표는 없었다. 그들의 활동을 규정한 것은 세상의 끝에 낙원이 찾아온다는 고전적인 천년왕국 주의의 환상이었다.”      


오늘날 신천지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합격선, 14만 4천 명 안에 들기 위해 세상 밖에서의 경쟁을 하며, 그들이 진정 꿈꾸는 세상이 어서 빨리 천국에 이르는 것이라고만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그것은 그들의 겉모습일 뿐이다.     


14만 4천 명이라는 구원의 합격선에는 그 자체에 숨겨져 있는 욕망이 존재한다. 그 욕망이 그들만의 세속주의라는 것을 이해할 때, 진정 신천지라는 문제의 본류에 다다를 수 있다. 누구나 특별해지고 싶은 욕구가 있고, 그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은 욕망이 있다. 신천지에 있어서 그 욕망과 욕구를 건드리는 것이 바로 ‘천년왕국설’이라는 신성한(?) 이야기다.     


여기서 신천지의 천년왕국설이 자기들 나름의 특별한 이야기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생에 있어서 욕구는 기승전결의 결과가 아니라 인생 그 자체다. 천년왕국설은 그만큼 완벽한 욕구의 기승전결을 가진 이야기 구조이다.      


인간은 이야기에 동기화되는 동물이기에 “인간을 이야기꾼으로 여기는 우리는 세계를 이야기로 파악할 때 비로소 행복할 수 있다”라는 저자의 말은 오늘날 신천지를 비롯한 많은 천년왕국 주의자들의 특수한 행동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단지 안타까운 것은 그들이 “미래를 바라보면서 인생을 소모한다는 것은 기억이 빚어낸 세계에 산다는 것이다”라는 저자의 말처럼 인생을 천년왕국이라는 미래를 위해 소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눈을 저 먼 미래의 행복에서 현실의 고통으로 누가 돌릴 수 있단 말인가?     


에덴에 거주할 때, 인간의 미래는 확실했다. 그러나 선악을 알았다는 이유로 에덴에서 쫓겨난 인간의 운명은 노동과 출생이라는 불확실한 문명의 굴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저자의 말처럼 에덴을 떠난 인간은 대본을 다 읽어 보기도 전에 감독의 지시에 따라 죽는 배우와 같은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아직 읽어 보지도 못한 미완의 문서에 나와 있는 임무를 수행하도록 강요당한 뒤 죽는다”      


화합그 자체가 폭력일 수 있다.

“근대 정치는 종교사의 한 장에 불과하다”라는 저자의 다소 극단적인 주장의 이면에는 결정론, 종말론, 천년왕국설 등으로 대표되는 목적론적 세계관이 근현대사에 미친 폐해를 지적하고자 하는 의도가 깔려있다. 지나치게 강한 신념이 이끄는 세계관이 국가나 세계나 개인 모두에게 불행을 가져다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 ‘Black Mass’를 읽으며, 같은 이름의 영화가 생각났다. 조니 뎁이 열연했던 영화 ‘Black Mass’에는 악당을 잡기 위해 악당과 동맹을 맺은 경찰의 이야기가 그려져 있다. 영화가 관객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는 목적과 상관없이 악당과 손을 잡은 자는 결국 악당이며, 결국 악당의 지배를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인용한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가 처할 수 있는 가장 큰 위험은 (...) 우리가 대처해야 할 상대를 닮는 것이다.”     


신념은 그 신념에 반대하는 또 다른 신념을 양산한다. 화합, 조화, 적폐 청산, 진리, 정의라는 이름 뒤에 감추어진 환원론적 신념 체계, 그것 역시도 일종의 ‘천년왕국설’ 일 수 있다. 그리고 천년왕국의 모습이 뚜렷해질수록 우리는 악마의 손을 잡으려는 유혹에 빠지게 된다.     


“관용의 목적이 진리라면 그 틀조차 조화를 추구하는 전략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보다는 차라리 조화를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편이 나을 것이고, 더 나은 것은 조화되기를 포기하고 인간의 다양한 경험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     


그레이는 모든 개인적, 사회적 화합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지적 장애물은 서로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자신에 대한 지식 부족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화합이라는 그 자체가 폭력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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