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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인순 May 17. 2019

집단적 규제냐, 개인적 양심이냐

정치적 올바름에 대하여 (피터슨,  프라이 vs. 다이슨, 골드버그)

진정 깨끗한 이들은 있지도 않은 ‘정치적 올바름(PC)'을 주장하기보다 ‘더러운’ 선(線) 직전까지 갔다가 목표물을 성취하고 조용히 복귀한다. 자기만 올바름을 추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正)을 두고 정치가 숨을 막는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은 최대의 선이 아니라 최소의 잘못이다.(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2019년 칸 영화제는 여느 해 못지않게 성 평등과 정치적 이슈들을 고려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었었다. 한국의 경쟁 부문에 초청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역시 한국 사회의 빈부의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또한, 심사위원장으로 위촉된 멕시코의 거장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는 개막 첫날부터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자국 중심주의를 염두에 둔 발언을 쏟아내기도 했었다.     


미국 영화계에서의 ‘정치적 올바름’의 문제는 이미 수년 전부터 시작됐었다. 어벤저스 4 이후, 마블 스튜디오 총책임자인 케빈 파이기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작품 속에서 여성과 소수자의 비중이 점점 높이는 ‘정치적 올바름’ 쪽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일관되게 발언하여 왔었고, 마블의 히어로는 앞으로 여성 캐릭터가 전체의 절반을 넘길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었다.      


‘정치적 올바름’은 영화계 이전, 게임 산업에서부터 먼저 나타나기 시작했다. 블리자드의 ‘오버워치’ FPS 시리즈인 ‘배틀필드’ 등에는 성 소수자나 유색인, 장애인을 비롯한 다양한 소수자들의 정체성을 반영하는 캐릭터들이 등장하면서 일찌감치 ‘정치적 올바름’의 논쟁을 일으켜 왔다. 문화계 속에서 일고 있는 이러한 ‘정치적 올바름’의 논쟁은 사실상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된 사회적, 정치적 논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책의 역자인 임영묵은 이 논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동안 억압받았거나 배제되었던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사회에 더 반영하고, 주류 문화가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소수자를 공격하고 희화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정치적 올바름은 분명 시대적 요구를 반영하는 흐름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인기 게임 ‘배틀필드’에서 제작자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이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유저들을 두고 ‘교육받지 못한’이라고 비난한 것만 봐도, 하나의 사회운동이자 신념으로서의 정치적 올바름도 분명 독선적인 교조주의로 흘러갈 가능성이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1980년대부터 강하게 대두되었던 '정치적 올바름'이란 모든 종류의 편견이 섞인 언어적 표현을 쓰지 말자는 개념 혹은 사회적 운동으로서, 어떠한 정치적, 사회적 사안을 접했을 때 그에 대처하는 사람들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고 공정하게 말하고 보도하는 태도를 보여야 함을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언어 정화(?) 운동은 지나친 교조주의에 빠지면서, 90년대 이후, 부정적인 시각이 늘어났고, 다양성을 배려한다는 의미에서 시작했던 운동이 되려 또 다른 전체주의가 되고 말았다는 비판을 받기에 이른다. 심지어 정치적으로 올바른 단어를 고르는 것에만 집착한 일부 좌파는 'PC 경찰'(PC police)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You're so politically correct.'라는 영어 문장은 '당신 꼰대죠'라는 어감으로 해석되기도 했었다.      


이 책은 네 명의 걸출한 토론가가 참석하여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두 가지 입장, 즉 ‘정치적 올바름이 사회적 진보인가? 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두 사람과 긍정적인 관점을 가진 두 사람 간의 공식적 토론을 정리한 책이다. 주의하여야 할 것은 그들의 입장이 결코 정치적 좌-우익의 신념만을 대변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부정적 견해에서 토론에 임한 사람은 먼저 심리학 교수이자 임상심리학자인 조던 피터슨이다. 그는 현재 미국 사회에서 떠오르는 보수 성향의 사상가이다. 그는 페미니즘 논쟁을 비롯하여 수많은 진보적 성향의 학자나 인사들과의 논쟁에 참전한 바 있다. 두 번째로 부정적 견해의 진영에 참여한 사람은 의외로 진보적 성향의 작가 스티븐 프라이다. 그는 2007년 ’ 인디펜던트‘가 선정한 ’가장 영향력 있는 게이‘ 2위로 꼽히기도 했었다.     


’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긍정적 견해를 가진 참가자 중 한 사람은 유일한 여성이기도 한 미셸 골드버그이다. 그녀는 뉴욕 타임스지의 칼럼니스트로 활약하고 있으면서, 세계 각지 여성들의 임신, 출산권 투쟁 현장을 광범위하고 치밀하게 그려낸 것으로 호평받기도 했었다. 또 한 사람의 긍정적 견해를 가진 참가자는 흑인 목사이자 사회학 교수인 마이클 에릭 다이슨이다. 그는 미국의 흑인들이 여전히 사회에서 억압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흑인 인권 운동가다.     


치열한 토론은 여느 정치적 이슈에 대한 논쟁과 마찬가지로 논점을 벗어나서 매우 광범위하게 주제를 겉돌다가도 다시 주어진 논점 안으로 수렴되기를 반복했고, 가열된 순간에는 주제에 벗어나는 상대방의 과거 연설이나 글을 소환시켜 비판함으로써 주도권을 잡으려는 시도도 있었다. 물론 이들 걸출한 토론가 들은 그런 시도에 말려들지 않는 노련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참가자들이 모두 동의했다시피 ’ 정치적 올바름‘이란 주제는 현재의 다양한 정치, 사회적 현상들과 복잡하게 엮여 있다. 따라서 보편적 인권, 인종적 편견, 젠더 차별, 빈부의 격차에 대한 보수-진보의 견해와 역동적으로 연결된 주제로 논쟁이 확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현실사회로 확산하는 논쟁‘, 그것이 바로 정치라는 단어가 올바름 앞에 붙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치를 넘어서 ’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논쟁적 이슈를 탄생시킨 언어와 언어의 사회적 기능이라는 사회 과학적인 문제와도 연결된 이 주제에 관한 토론은 그 역동의 폭을 더욱 넓게 만들었다. 그 변화무쌍한 토론의 내용 중에서 두 가지 중심 주제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집단 정체성

’ 집단 정체성‘의 문제는 정치적 올바름이 결코 진보적이지 않다는 편에 선 조던 피터슨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는 서구 사회를 중심으로 지향되어 온 서사는 두 가지 과정을 담고 있다고 하면서, 그 첫째는 개인과 개인의 소통, 즉 그 저변에 개인의 책임과 권한이 균형 있게 깔린 서사 구조라고 말한다.     


조던 피터슨이 말한 두 번째 서사 구조가 바로 집단 정체성인데, 이는 일종의 부족 주의로서 이 세상을 다른 힘을 가진 집단들 사이에 벌어지는 전쟁터로 보는 관점이다. 그는 사회적 소수자들 옹호하는 급진 좌파 유형의 집단 주의자에게 표현의 자유는 정치적 올바름의 관점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당신이 하는 말, 실행하는 모든 행동은 당신이 속한 집단을 대표해 버리는 파워게임입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어요. 그게 전부이니까요. ‘현재 개인으로서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관점, ’ 사회가 어떤 식으로 비쳐야 하는가 ‘의 관점에서 전부일뿐만 아니라, 역사의 근본적인 서사에 있어서도 전부라는 겁니다. 예를 들면, 현재 대학에서 서구 문명의 개념을 잡을 때 사용하는 최고의 방법은 ’ 남성 주도의 억압적 가부장제‘이고 수 세기에 걸쳐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해석하는 최고의 방법도 ’ 남성이 여성을 억압해와 왔다 ‘라고 주장하는 겁니다.”(조던 피터슨)     


조던 피터슨의 말에 따르자면 모든 정치적 올바름의 기준은 결국 집단 정체성의 대변이고 따라서 이는 표현에 대한 일종의 억압적 구조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반대편에 선 마이클 에릭 다이슨 목사는 집단 정체성은 그 자체로서 존재하지 않으며, 이는 오로지 사회적 지배 세력이 만들어낸 수동적 정체라고 반박한다. 그는 정치적 올바름의 이슈를 집단 정체성의 문제로 다루는 것은 마치 기독교인과 마니교도를 구분하는 차별의 장과 같다고 주장한다.      


“저는 제가 흑인이라는 걸 항상 의식합니다, 길을 걸으면 집단 정체성을 느끼게 되는 일이 많지요. ’이야 저기 검둥이가 걸어가네. 똑똑하고, 자기 생각을 잘 표현하고, 수다스럽고, 망설임 없이 장황한 미사여구로 분노를 그럴듯하게 포장해내는 검둥이. 저 사람이 지닌 법적 지위의 진실성에 대해 따져서는 안 돼.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어떤 한 집단의 일부로 저를 대합니다. 친구들은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점 입니다만. 문제는 그런 주도권, 그 집단의 지배가 너무도 사악해서 지금까지 우리가 개인으로서 존재할 기회조차도 거부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이클 에릭 다이슨)     


마이클은 지식이 육체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다소 유물론적 주장을 통해 유색인종이나 여성이라는 물질적 정체성은 필연적으로 집단화나 구분화에 강제적으로 몰릴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이런 소수자들이 차별에 반대하면서 주장하는 정치적 올바름이 공격받아서는 안 된다고 강변한다.      


정치적 올바름의 유용성

조던과 같은 입장에 서 있는 스티븐 프라이의 경우는 반대의 이유가 조금 다르다. 언급한 바와 같이 그는 게이이고, 진보적 작가이다. 그런데도 스티븐은 정치적 올바름의 유용성에 대해서 매우 회의적이다. 그는 오히려 통합적 관점에서 편견과 혐오, 갈등과 분열을 일으키는 모든 것에 반대하기 때문에 정치적 올바름이 결코 진보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문화 전쟁의 포화 속에 군대와 선전 선동이 충돌하는 동안, 양측 사이에 놓인 거대한 공간 아래에서는 세상 사람들이 삶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지요. 끔찍한 소음과 폭발음이 사방팔방에 울려 퍼지는 중에 당황하고, 지루해하고, 배신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제는 이 유해하고 이분법적이며 양측 모두 아무것도 얻을 것 없는 광기를 멈춰야 할 시간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 모두 파멸할 것입니다.”     


스티븐의 관점은 책임을 따지고, 사안의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는 완전한 표현의 자유가 가지고 있는 내적 힘을 믿어보자는 데 있다. 이러한 판단 기준은 마치 축구 게임에서 최초의 반칙을 범한 선수보다, 보복 행동을 한 선수에게 더욱 가혹한 처벌을 내리는 규칙과 매우 흡사하다. 보복행위는 개인의 반칙 행위를 팀과 팀 간의 집단 난투극으로 상황을 몰고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집단적 규제보다 개인적 양심과 지성의 힘에 믿음의 눈길을 보내, 막말과 혐오의 표현들이 스스로 제자리를 태워버리게 하자는 의도이다.


이에 대해 미셸 골드버그는 개인의 권리와 집단의 권리를 양분하는 이분법적 시도 자체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측면이 있다고 반박한다. 여성 운동가인 미셸은 여성, 유색인종과 같은 문화의 중심에 있지 못한 개인이 집단 속에서 더 많은 권리와 영향력을 갖도록 하는 배려가 필요하다는 이유를 들어, 정치적 올바름 또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진심으로 자기들의 감정이 수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집단이 하나 있고, 그들이 계속해서 우리와 대립하는 거지요. 저도 어느 정도는 소속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이 집단은 특히 침묵해야 한다는 감정, 소외되고 검열당한다고 느끼는 감정이 최우선으로 존중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타‘집단들이 자신이 위협받고 소외된다고 느껴지는 감정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달라고 요구할 때, 우리는 그들을 조롱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그들의 요구를 바로 ’ 정치적 올바름‘이라고 부릅니다.”     


오늘날 정치적 올바름의 문제는 가짜 뉴스의 등장으로 복잡성이 더해졌다. 소위 팩트 체크가 정치적 올바름의 범주에 들어가는지 여부에 대한 것이다. 그것을 다루기 위해서는 가짜 뉴스가 사회에서 어떤 목적으로 어떤 방향에서 어떻게 기능하는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그것은 각각의 사회가 당면한 현실에 따라 달라지는데, 한국의 상황에서는 명백히 보수 진형의 논리 속에 더 많이 들어있다.      


더군다나 한국은 이 책 속 토론에 참여한 지식인들이 속한 영국이나 북미와는 현저하게 다르게 남북 분단이라는 문제가 놓여 있다. 한국인이 한국이라는 국가적 환경에서 정치적 올바름을 이야기할 때는 좀 더 신중하고 면밀하게 한국적 특수성을 고찰할 필요가 있는 이유이다. 


예를 들어 한국 사회는 미국과는 달리 인종에 따른 집단 정체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분단 상황이 존재한다. 다시 말하자면 종북 프레임을 둘러싼 집단 정체성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한국의 집단 정체성은 마이클이 이야기한바, 지배 권력에 의해 몰아세우기식 정체성이 아니라, 오히려 조던이 말한 집단 의지에 따라 진행되는 전쟁에 더 들어맞는다.       


한편 조던은 평등이란 구호가 집단 정체성을 무기로 남용될 때, 그것은 소위 ’ 결과의 평등‘이 되어 버린다고 비판했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기회의 평등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는 결과의 평등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쉽게 반박할 수 없다. 이른바 빈부의 대물림과 기회의 불평등에 대한 담론이다.     


따라서 ’ 한국식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새로운 정의와 창의적인 논쟁이 필요하다. 이에 대해서는 중국의 현대 사상가 '후스(胡適)'의 조언이 매우 유익할 것 같다.     


후스는 21세기 중국 르네상스의 아버지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자유주의자다. 중국 5.4 운동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그는 언문일치를 표방했던 '백화문' 운동을 주도하기도 했었다. 1891년 상하이에서 태어나, 20세에 국비 유학생으로 미국 코넬 대학에 유학한 후스는 27세에 베이징 대 교수를 역임했고,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주미대사로 파견되었다.     


이력만을 기준으로 상상해 본다면, 후스는 전형적인 '꼰대'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는 꼰대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소위 '경계인'이었다. 알려진 바와 같이 그는 공산주의에 찬성하지도 않았지만, 쑨원의 삼민주의에도 반대했었다. 후스 사상의 중심에는 늘 '용인'이 자리 잡고 있었고, 따라서 그는 절대성에 천착하는 모든 '주의'에 대해 반대했었다. 궁극적으로 그가 꿈꾸는 세계는 '개인의 용인이 보장된 사회'였고, 이를 이루려는 방법으로 민주주의적 법치를 주장했었다. 후스의 정치사상은 다음과 같은 그의 말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첫째, 듣기 좋은 주위에 대해 공허한 이야기나 늘어놓는 것은 개나 고양이도 할 수 있고, 앵무새와 축음기도 할 수 있을 만큼 쉽습니다. 둘째, 외국에서 들어온 주위에 대해 공허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모든 주의는 언제 어디서 뜻을 가진 사람이 당시 그곳 사회에 필요한 구체적 방법에 대해 논한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사는 사회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직접 연구하지 않고 이런저런 주의만을 논하는 것은 의사가 '탕두가결(암송하기 편하도록 상용 약방을 노래 형식으로 엮은 책)'만 외울 뿐, 환자의 증상을 연구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어찌 유용하겠습니까?"     


그가 말한 바와 같이 주의 주장은 자신의 신념만을 만족시킬 뿐, 구체적인 해결법에는 눈을 돌린다. 설사 그 지경까지는 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한 정치적 집단의 신념과 가치가 그 외의 것들에 대한 부정적 태도를 만들어내는 것만은 틀림없다. 그뿐만 아니라 신념 체계가 강한 한 집단이 자신의 실천 체계를 포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소위 정치적 올바름(PC-Political Correctness)의 위험성을 감지하는 첫 신호가 되어야 한다.      


한편, 4년 전, 평화학 연구자인 정희진은 한겨레 신문에 '레닌을 만난 지젝'이란 책의 서평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진정 깨끗한 이들은 있지도 않은 ‘정치적 올바름(PC)'을 주장하기보다 ‘더러운’ 선(線) 직전까지 갔다가 목표물을 성취하고 조용히 복귀한다. 자기만 올바름을 추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正)을 두고 정치가 숨을 막는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은 최대의 선이 아니라 최소의 잘못이다."     


정희진은 어떤 올바름은, 필연적으로 다른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보편적, 일률적인 올바름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정치적 올바름’은 사실상 불가능한 개념이자 문제를 한 가지 원인으로 생각하는 환원주의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정치적 올바름'을 두고 벌어진 논쟁과 역사적 사실이 오늘날 한국 사회에 던져주는 의미는 매우 크다. 특히 장외에서 막말과 혐오의 발언으로 연일 언론의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한국당과 이를 두둔하는 극우 세력들의 언어는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정치적 주제에 대한 논란을 첨예하게 갈아놓는다. 문제는 이에 대응하는 문재인 정부와 여당의 태도이다. 그들의 언어 역시도 역사적 교훈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언젠가 지젝은 한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민주주의적 제도에 보통의 사람들은 대부분 수동적이고, 민주주의가 본디 갈등의 체제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역설적이게도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다중의 절대적인 자치와 자율이 아니라 분리를 명시할 수 있는 주인의 역할이 필요해지는 것이다. 마치 스티브 잡스가 ‘소비자들이 욕망하는 니즈(needs)를 충족시킨 것이 아니라 그 니즈를 새로이 창출하고 일깨웠던’ 것처럼, 민주주의에도 인민이 원하고 할 수 있는 것의 영역을 열어젖힐 수 있는 그런 계기가 필요한 것이다."     


지젝의 이 말은 후스의 사상과도 일맥상통한다. '막말을 하지 말자! 막말은 사회적 혐오를 조장한다.'라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언어에 불과하고, 후스가 말한 '탕두가결'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말로 국민과 야당을 설득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면 이것이야말로 '꼰대의 생각'이다.     


후스가 말한 바, 환자의 증상을 연구하고, 지젝이 주장한바, 국민의 새로운 니즈를 창출하는 그런 언어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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